참 나는!

                2. 참(眞) 나(我)는?

가. 거울 상자 속의 나!

나. 우주 속에서의 나!

 

  불교인들이 말하는 ‘참 나를 찾아라!’는 말은, ‘나 혼자만의 나’가 아닌 것처럼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 자신에게도, ‘참다운 여러분의 모습을 찾아라’는 말과 같은 뜻 일거라고 생각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욕심을 버리면 만인이 다 부처라고도 했었고 또 석가모니는, 무욕무탐의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을 다스릴 수 있다면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였듯이, ‘참다운 나’라는 것은 어느 특정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60억 지구인 개개인 모두가 참다운 자신을 찾는 것과 같을 거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 개개인에게도 ‘참다운 자신들의 모습을 찾아라’는 말과 상통할 것이며, 따라서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자신이 참 나를 찾는 수단과 방법은 곧, 모든 사람 개개인이 참다운 자신들의 모습을 찾는 수단 방법과 같은 과정을 경유한다해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너무 자주 인용하다보니 사고의 빈곤이라는 한계를 느끼기도 하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 개개인이 창조주와 같이 무욕무탐의 청결한 마음과 가장 가까웠을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시기는 온갖 욕심이 생기기 이전인 유아기 때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유아기를 지나면서부터는, 보다 크고 많은 것과 보다 좋은 것들을 갖기 위한 투쟁의 연속이 곧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아기 때 뿐 아니라 성인이 되었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욕심을 버릴 수만 있었다면, 누구나 다 이미 부처님이 되어 있을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인생살이에 있어 욕심을 버리는 것이 제일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 욕심을 버리는 일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이었기에 종교인들은 일생을 걸고 욕심 버리기를 연습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따라서 필자 또한,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에게까지 욕심을 버리자는 주문 따위는 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정도의 무욕무탐의 설교나 설법은 종교지도자들이 신도에게나 주문할 사항이지 부득이 언급한 것은, 이 글의 주제인 ‘참나’와는 다소의 연관성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되어 언급한 것이었습니다.

 

    가. 거울 속의 나(我)

  그러면, ‘참나’를 찾기 위하여 지금부터 ‘하나. 차원세계’ 편에서 언급했든 거울세계를 비롯하여, 4차원세계의 모양 즉 ‘정육면체의 거울세계 속’으로 여행을 떠나 볼까 합니다. 정육면체의 거울세계 속으로 여행하기 전에 먼저,

  ․ 한 개(면)의 거울 세계로 가 봅시다.

누구나 거울 앞에 들어서기만 하면, 반드시 거울 속에서도 자신과 똑 같은 자신의 모습인 허상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거울 속에 존재하는 자신의 모습인 허상은 실체(實體)인 자신의 의지에 따르고 있을 것입니다. 또한 거울 앞에 서있으니 거울 속에는 없어야하는데도 거울 앞에도, 거울 속에도 동시에 존재하는 현상 즉, ‘없으면서도 있는’ 반대로 거울 속에 서있으니 거울 앞에는 없어야하는데도 거울 속에도, 거울 앞에도 동시에 존재하는 현상 즉, ‘있으면서도 없는’ 것이라고 정의해 놓은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지요?

  따라서 거울 앞에 서있는 것은 단 하나의 실체(實體)인 자신이며, 거울 속에 서있는 것은 자신의 모습인 허상(虛像)이라는 사실과, 거울 앞이든 거울 속이든 자신의 실상이든 허상이든 오직 하나의 실체만 실재(實在)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거울 앞에 서있는 단 하나의 실체인 나(我)와, 거울 속에 서있는 나의 모습인 허상은 똑 같은 나(我)이지만, 거울 앞에 서있는 단 하나의 실체인 나(我)와 거울 속에 서있는 나의 모습인 허상이 동일(同一)일 수는 없습니다.

 

  ․ 다음은 두개(양면)의 거울 세계로 들어가 봅시다.

  두 개(양면)의 거울이란, 자신을 중심으로 전․후 또는 좌․우에 거울 두 개를 마주보게 세워놓은 것으로, 그 두 개(양면)의 거울 사이에 들어가 보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지 살펴봅시다. 즉, 한 개의 거울 앞에 서보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인 허상이 하나였는데, 두개(좌․우)의 거울사이로 들어가 보면 좌측거울 속에도 우측거울 속에도 많은 자신의 모습인 허상이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곧, 한 개의 거울 앞에 단 하나의 실체인 자신이 서있었을 때, 거울 속에도 한 개의 모습인 허상이 존재하였는데 거울이 한 개가 추가되어 두개일 때는 훨씬 많은 모습의 허상이 실체(자신)의 의지와 같이 따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두개의 거울사이에 서있는 자신과 거울 속에 서있는 자신의 모습인 허상에 대하여, 거울 사이에 서있으니 거울 속에는 없어야하는데도 거울 사이에도, 거울 속에도 동시에 존재하는 현상 즉, ‘없으면서도 있는’ 반대로 거울 속에 서있으니 거울 사이에는 없어야하는데도 거울 속에도, 거울 사이에도 동시에 존재하는 현상 즉, ‘있으면서도 없는’ 것이라고 정의해 놓은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2개의 거울 사이에 서있는 것은, 단 하나의 실체(實體)인 자신이며 2개의 거울 속에 서있는 것은 자신의 모습인 허상(虛像)이라는 사실과, 2개의 거울 사이든 2개의 거울 속이든 자신의 실상이든 허상이든 오직 하나의 실체만 실재(實在)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2개의 거울 사이에 서있는 단 하나의 실체인 나(我)와, 2개의 거울 속에 서있는 나의 모습인 허상은 똑 같은 나(我)이기는 하지만, 2개의 거울 사이에 서있는 실체인 나(我)와 2개의 거울 속에 서있는 나의 모습인 허상이 동일(同一)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 그럼 이제 여섯 개(육면)의 거울세계에도 들어가 봅시다.

  여섯 개의 거울세계란 자신을 중심으로 전후(前後) 좌우(左右) 상하(上下)에 각각의 거울 여섯 개를 세우는 것으로, 하나의 상자(箱子)가 만들어져 정육면체의 거울상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육면체 거울 상자 속에 들어가 보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살펴봅시다. 두 개(좌우)의 거울 사이로 들어가 보면 좌측거울 속에도, 우측거울 속에도 수많은 자신의 모습인 허상이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섯 개(정육면체)의 거울상자 속에 들어가 보면, 앞 거울 속에도 뒷거울 속에도, 좌측 거울 속에도 우측 거울 속에도, 윗(上) 거울 속에도 아랫(下) 거울 속에도 즉 여섯 개의 거울 속 각각마다에, 부지기수의 모습인 허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며, 여섯 개(정육면체) 각각의 거울 속에 존재하는 자신의 모습인 허상은 실체(實體)인 자신의 의지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여섯 개(정육면체)의 거울상자 속에 서있는 자신과 여섯 개(정육면체)의 거울 속에 서있는 자신의 모습인 허상에 대하여, 여섯 개(정육면체)의 거울상자 속에 서있으니 각각의 거울 속에는 없어야하는데도, 여섯 개(정육면체)의 거울상자 속에도 각각의 거울 속에도 동시에 존재하는 현상 즉, ‘없으면서도 있는’ 반대로 여섯 개 각각의 거울 속에 서있으니 여섯 개(정육면체)의 거울상자 속에는 없어야하는데도 여섯 개 각각의 거울 속에도, 여섯 개(정육면체)의 거울상자 속에도 동시에 존재하는 현상 즉, ‘있으면서도 없는’ 것이라고 정의해 놓은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여섯 면의 거울을 각각 제 1거울, 제 2거울, 제 3거울, 제 4거울, 제 5거울, 제 6거울이라고 명칭을 부여하겠습니다. 제 1거울 속의 5번째 모습(허상)과, 제 2거울 속의 50번째 모습(허상)과, 제 3거울 속의 500번째 모습(허상)과, 제 4거울 속의 5000번째 모습(허상)과, 제 5거울 속의 5만 번째 모습(허상) 및, 제 6거울 속의 50만 번째 모습(허상)들 모두가, 정육면체의 중앙에 존재하는 나 자신(실상: 주인)의 의지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현상들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6개의 거울 사이에 서있는 것은 단 하나의 실체(實體)인 자신이며, 6개의 거울 속에 서있는 것은 자신의 모습인 허상(虛像)이라는 사실과, 6개의 거울 앞이든 6개의 거울 속이든 자신의 실상이든 허상이든 오직 하나의 실체만 실재(實在)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6개의 거울 앞에 서있는 단 하나의 실체인 나(我)와, 6개의 거울 속에 서있는 나의 모습인 허상은 똑 같은 나(我)이기는 하지만, 6개의 거울 앞에 서있는 단 하나의 실체인 나(我)와 6개의 거울 속에 서있는 나의 모습인 허상은 동일(同一)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개의 거울 또는 두 개의 거울 아니 여섯 개의 거울 속 각각에 존재하는 허상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주인이자 유일한 ‘나(我)’의 의지에 따라 말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모습(허상)들에 대하여, 단순히 거울현상에 불과하다고 외면하거나 단정하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나. 우주 속의 나(我)

  작금의 관련 학자들 연구결과에 의하면 우주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하며 그 나이는 약 120억 년 내외이고, 또한 우리 모두가 살아가고 있는 우주라는 공간에는, 수천 억 개의 별(위성)이 각각의 공전과 자전으로 하나의 단위가 된 은하계를 형성하여 존재하며 또, 수천 억 개의 별(위성)이 모여 형성된 이러한 은하계도 수천 억 개가 광활한 우주 속에서 각각 공전과 자전으로, 자신들의 일생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약 120억 년(내외) 전에 누군가(창조주)에 의하여, 우주가 창조되어졌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이렇게 광활하다고 하는, 수천 억 개(의 별)×수천 억 개(의 은하계)= 수억 만개(부지기수)의 별(위성)이 각자 자신의 궤도를 따라, 공전 또는 자전을 하면서도 별과 별(위성)간에 충돌(또는 이합 집산)등이 생각보다 적다는 사실과 또, 각 위성(별)의 생성과 소멸에도 어떤 질서나 법칙이 존재하므로 서, 그 질서나 법칙에 의한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도 지극히 당연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질서나 법칙의 존재를 굳이 인정하려한다면, 약 120억 년 전에 누군가에 의하여, 우주가 창조되어졌을 때부터 존재되어 왔을 것이며 또, 수천 억 개(의 별)×수천 억 개(의 은하계)= 수억 만개(부지기수)의 별(위성) 중에 오직 지구라는 위성에만, 우리 인간과 같이 지능을 가진 생명체가 존재하겠는가? 하는데도 많은 의문은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지구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구는 약 60억 명쯤으로 알려져 있지만, 지구가 생성된 이래로부터 지금까지 탄생이라는 순간을 경유한 인간들이 살다가, 죽어간 숫자도 과연 얼마나 많을지는 어느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이렇게 많은 인간들 중에서, 어떤 인간은 탄생과 동시에 죽어가기도 하였을 것이며 또 다른, 어떤 인간은 당시의 시대에 걸맞게 자신의 천수를 누리다가 죽어가기도 하였을 그들의 의지와 탐욕 또는 망상에 의하여, 진보(進步)와 폐허가 반복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며, 이같이 반복되는 과정을 거치므로 서,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나마 인간세계가 발전하면서 유지하게 되었을 것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 창조주(우주의 주인)와 우리인간과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혹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그것은, 우주의 역사를 약 120억 년이라는 사실을 전제하에서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우주의 주인(창조주)께서, 지금으로부터 약 120억 년 전에 우주를 창조하였을 것이라고 수긍되어진다면, 우주의 부속물인 수천억 개의 은하계를 비롯하여 각 은하계마다 수천억 개의 위성(별)과 함께, 각 위성(별)의 부속물들도 순차적으로 창조되었을 것이라고 가정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천억 개의 은하계×수천억 개의 위성(별)= 수 억만 개의 위성 중에 하나인 지구, 그 지구의 부속물인 약 60억 명의 인류를 포함하여 수 만 종의 동물과 식물들도 결국, 창조주(우주의 주인, 하느님, 부처님)께서 만들어 놓은 위대한 걸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창조주(우주의 주인, 하느님, 부처님)께서는 우리인류에게 무엇을 또는, 어떤 가르침을 주고 싶었을까? 이 부분도, 남(종교인)들은 일생동안을 그분들의 수많은 가르침들을 찾아 고행을 거듭하는데, 기껏 필자 따위가 감히 그분(창조주)의 한마디 가르침만 인용한다는 것은, 주제 넘는 짓일 수도 있을 것이나 그렇다고, 그분들의 모든 가르침을 다 열거한다는 것도 전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

고 하였다고 합니다. 앞에서는 단순한 원수이야기로 간단히 언급한 바 있었지만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원수라 함은 우리인간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원수가 아닌,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地讐: 하늘을 함께 할 수 없는 철천지원수) 또는,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地讐: 한 하늘에서 더불어 살 수 없는 원수)등, 원한의 정도가 너무나 커 쉽게 용서하고 사랑하기 어려운 대천지수(戴天地讐: 함께 하늘을 이고 살수 없는 원수)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중국의 예기(禮記) 곡례편(曲禮篇)에는,

  “父之讐는 不與共戴天하고 兄弟之讐는 不反兵하며 交遊之讐는 不同國이라”

즉,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으므로 반드시 죽여야 하고, 형제의 원수를 만났을 때 집으로 무기를 가지러 갔다가 놓쳐서는 안 되므로 항상 무기를 휴대하고 다니다가 그 자리에서 죽여야 하며, 친구의 원수와는 한 나라에서 같이 살 수 없으므로 나라 밖으로 쫓아내던가 아니면 역시 죽여야 한다”

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이런 대천지수(戴天地讐)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이므로, 이 대천지수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으려면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용서하지 못할 사람 없으며, 또한 사랑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 누구나 쉽게 말로서만 대천지수도 사랑한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원수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인데, 대천지수를 사랑하려면 제일 먼저 자신을 그리고 다음으로는 가족을 그 다음으로는, 이웃을 제 몸 같이 사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이나 가족 그리고 이웃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면서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사랑이며, 하느님을 속이는 사랑이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인간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는 수단과 방법은, 친인척을 불문하고 개별적인 친소관계를 떠나며, 인종과 피부색 언어 및 종교 그리고 태어난 곳을 불문하고 모든 인류를, 제 몸같이 사랑하는 것만이 참되고 진실 된 사랑이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이 본성을 깨닫고 그 본성인 진리 되로 세계를 이루어가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은 이 진리를 깨달아 진리 본연의 참 자기를 회복하여 참된 지혜와 덕성과 권위를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일체 중생의 진면목이며 일체 존재의 근원입니다. 따라서 모든 중생은 자신의 본성인 진리를 깨달으므로 서 ‘참나!’를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나!’를 찾는 길은 자비심(大慈大悲: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크게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며, 번뇌(百八煩惱: 불교에서 나온 말로 인간의 過去, 現在, 未來에 걸친 108가지 번뇌로서, 六官: 耳(소리), 目(색깔), 口(맛), 鼻(냄새), 心(뜻), 體(감각)이 서로 작용해 일어나는 갖가지 번뇌가 좋고(好), 나쁘고(惡), 좋지도 싫지도 않은(不好不惡) 즉, 평등(平等)의 3가지 인식 작용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곧 6×3=18가지의 번뇌가 된다. 거기에 탐(貪), 불탐(不貪)이 있어 18×2=36가지가 되고, 이것을 過去, 現在, 未來 즉 前生, 今生, 來生의 3世에 36×3=108가지)로부터 해탈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인간이 한결같이 탐욕을 버릴 수만 있다면 ‘만물이 다 부처’라고 했으며 또한, 모든 인간이 스스로 욕심을 버릴 수만 있다면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다’고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누군가에 의해서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증진에 의해서만이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부처님께서는 ‘참나!’를 찾는 가장 가까운 지름길은 번뇌를 벗어 던지는 일이며, 번뇌를 벗어 던지는 가장 가까운 지름길은 탐욕(욕심)을 버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자비심은 모든 중생이 한결같이 가져야 하는 마음의 기본 바탕이며, 자비심을 가지므로 서 번뇌(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도생활(?)을 하다보면 스스로 부처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주의 주인께서는 우리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하기를 바랐을까요?

  지금까지, 하느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과, 부처님의 ‘모든 중생은 자신들의 본성인 진리를 깨달어라’는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과, 부처님의 ‘모든 중생은 자신들의 본성인 진리를 깨달으라’는 가르침을 동시에 실천하는 것이, 참 나!를 찾는 것인가(?)하는 의문이 있을 것이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곧 욕심을 버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므로 이(원수를 사랑하는)것만으로도 ‘탐욕(욕심)을 버리는 것’인 동시에, ‘탐욕(욕심)을 버리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 또한, 곧 원수를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므로 이(탐욕을 버리는)것만으로도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우리인류가 행하고 따르기 쉬운 것은 ‘하느님의 가르침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일까?’ 두말 할 여지도 없이 육신을 가진 우리 인간이 감당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역시, 하느님이나 부처님 정도나 되니까 가능하고 또한 가르침까지 주었지, 육신을 가지고 인간(3차원)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인류들로서는 감히 흉내도 못 낼 일들일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도, 금세기 최고의 종교지도자라고 추앙(推仰: 높이 받들어 우러름)받는 분들 중에서 하느님 또는 부처님이 주신 가르침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인정 할 수 있는 지도자가 과연 몇 사람이나 있었는지(?) 찾아보기바랍니다. 보통의 인간으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기에, 일생(天壽)를 사는 동안에 하느님이나 부처님 같은 반열에 오르라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며 인간의 본성을 간과한 것으로 인간을 기만한 것인 동시에 아울러, 인간들의 허약한 심성을 뒤흔들어 놓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우주의 주인께서는 태초부터 하느님이나 부처님과 같이 무리하게 원수를 사랑하라 혹은 욕심을 버리라는 요구는 하지 않았습니다. 즉,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라 혹은 욕심을 버리는 것을 하루아침에 이루기를 바라지 않고, 쉬운 단계(일)부터 차근차근 배우고 익혀서 인내심(지식)이 축적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망치질도 제대로 못하는 신출내기 목수(?)에게, 한 달 이내에 ‘궁궐을 지어 준공검사를 받아라’는 불가능하고 터무니없이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고, 나무를 고르는 법, 못을 제대로 치는 법, 기초와 주춧돌을 놓는 법, 궁궐의 각 요소에 쓰일 나무를 다듬는 법 등을 차근차근 배우고, 기술이 축적되어 궁궐을 지을 실력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만, 못을 제대로 못 치면서도 나무를 다듬으려고 하면 못을 제대로 칠 때까지, 못 치는 시기로 다시 돌려보내(輪回시키)면서 까지 기초부터 숙달하기를 원한다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몇 개의 단계가 있을지라도, 그 첫 단계부터 각 단계마다 차근차근 확실하게 배우고 익힐 수 있게 다시 되돌려 보내는 것을, 일러 윤회(輪回)라고 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럼 왜 각 단계에 해당하는 기술(事)을 정확히 익힐 수 있게 다시 되돌려 보내는 것일까? 그것은 각 단계에 해당하는 기술을 익히는 것만이 참나(眞我)를 찾는 과정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참 모습 즉, ‘참나!’는 이렇게 찾아보면 어떨는지요?

  결국 여섯 개(정육면체)거울상자 속을 ‘소우주’라고 한다면, 그 정육면체거울상자 속에 존재하는 실체(實體)인 ‘나(我)’는 곧 ‘소우주의 주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아울러 각각의 여섯 개 거울 속에는 부지기수인 나의 모습인 허상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광대한 우주의 최고위 차원세계에는 우주주인(창조주)이 실재하고 계시며, 3차원세계에 존재하는 우리인간은 우주주인(창조주)의 허상 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약간 바꿔 말한다면, 정육면체 거울상자 속에는 우주주인(창조주)이 실재하고 계시며, 여섯 개(정육면체)의 거울 각각의 속에 우주주인(창조주)의 허상은 즉, 3차원세계에 존재하는 우리인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참나!’는 바로, 태초의 창조주(우주의 주인)의 의지에 의하여 최초로 창조되었을 때, 그 모습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또한, 태초의 창조주의 의지에 따라 최초로 창조되었을 때의 그 모습이라면, 필자와 여러분은 둘이 아닌 하나이며 남이 아닌 형제이어야 할 것입니다. 마치 한 부모의 슬하에서 태어난 형제자매와 같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60여 억 명에 달하는 인류 모두는 필자와 여러분과 둘이 아닌 하나이며 남이 아닌 형제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by 다사치 | 2009/09/14 06:42 | 참 나는?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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