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의 정리

                4. 이웃(社會)의 정리.

  우리들은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이기주의(利己主義)’ 또는 ‘이기심(利己心)’이라는 말들을, 많이 듣기도하고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기주의(利己主義: 윤리학에서, 자기의 쾌락을 증진시킴을 도덕적 행위의 유일한 목적으로 하는 이기적 쾌락주의)란, 다른 사람이야 어떻든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방식이나 태도를 말하는 것으로, 자기 욕심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을 빗대어(바로 지적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넌지시 지적해 말하다) 이타주의(利他主義: 이기주의 의 반대)를 강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들의 춥고 배고픔은 철저히 외면하면서, 자신들만은 등 따시고 배부름을 삶의 유일한 목적으로 추구하는 부류들에게, 경종의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고대 그리스: BC 384~BC 322)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 개개인이 유일적으로 살아가는(즉 한사람 또는 한 가족만이 하나의 사회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어울리고, 또 여러 사람들과 부대끼며 서로를 이해하고 돕는 과정에서 쌓인 신뢰(信賴)에 의하여 이웃을 느끼며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을 하거나 연상할 때마다, 이런 이야기가 뇌리를 스치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건강한 남녀가 정상적인 임신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활동성이 강한 약 2000만개 이상의 정자(精子)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실제로는 건강한 남성의 경우 한번에 3억~ 5억 개의 정자를 사정한다 고함) 그러나 실제로 난자(卵子)의 막을 뚫고 임신에 골인하는 영광스러운 금메달은(예외가 있긴 하지만) 단 한 개에게만 주어지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난자의 막을 뚫고 골인한 단 하나의 정자 역시, 자신 혼자 힘 만으로서는 절대로 난자에게까지 도달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약 3억 개 이상의 정자가 하나 같이 난자를 향해 질주하는 과정에서, 꼬리를 힘차게 움직이는 것은 물론 질 분비물인 강한 산성을 중화시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억 개의 정자가 망망대해를 헤엄치듯 꼬리를 강하게 움직여 파동을 일으키게 되는데, 수억 개가 일으키는 파동의 영향은 시너지(synergy: 분산 상태에 있는 집단이나 개인이 서로 적응하여 통합되어 가는 과정)효과를 발생하게되고, 그 효과에 의해 더욱 힘차고 수월하게 전진하는 동시에 강한 산성에 맞서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오직 공동의 목표인 임신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씨(種子: 동물이나 식물이 생겨나는 근본이 되는 것)라고도 할 수 있는 정자 시절부터 금메달을 차지할, 자신 또는 누군지 는 모르지만 3억 분의 1에 해당하는 단 하나를 위해, 적어도 이기적(利己的)인 일생은 아니었든 것 같습니다. 만약 3억 개의 정자(精子) 각각이 이기적인 욕심에서 개별 행동으로 이눈치저눈치 살피며 일생을 살아 왔다면, 인류의 종족은 대(代)를 잇지 못하고 말았을지도 모르는 일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동물이나 식물도 자신 혼자서는 결코 세상을 살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동물은 말할 것도 없이, 각종 식물도 생태적으로 좋은 환경과 비옥한 토질에서는 대부분이 생장(生長)성장만 추구하는 반면, 환경이나 토질이 열악하거나 또는 어떤 방해로 말미암아 생존에 대한 위기의식이 있어야 번식(繁殖) 성장을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만물이 다 이렇게 자신 혼자의 힘만으로는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네 인간도 ‘나 혼자’ 또는 ‘우리 한 가족’만으로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와 지금의 이 사회에도 어떤 연관이 있을 것이며, 또한 어떤 ‘정리도 필요하지 않겠느냐?’하는 것입니다. 굳이 직설(直說)하자면,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음으로 양으로 또는 알게 모르게 표현할 수 없는 영향을, 내가 받은 데 대하여 조금이라도 보답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재산이라도 많았으면 그중 일부를, 뚝 떼어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면 간단하고 쉽겠지만, 그렇지도 못하기에 마음만 무거워질 뿐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고 낙심만 하고 있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느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겨 보게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자비심을 베풀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무조건적인 ‘봉사 즉 사랑’을 강조한 것이라면 이웃의 사랑 없는 봉사활동도 없을 것이며, 기독교에서의 헌금과 불교에서의 보시는 ‘나눔 즉 분배’를 강조한 것이라면 내 것의 분배 없는 나눔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종교의 교리와 그 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느님과 부처님 또는 우주의 주인과 같은 차원(천당과 극락 또는 영계)세계 또는 아주 가까운 차원세계에서, 안식을 얻거나 또는 보다 발전된 미래를 위한 수단으로 ‘봉사활동 즉 사랑’과, ‘나눔 즉 분배’를 가르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봉사활동 즉 사랑’의 표현에 대하여도 쉽게 결론 내리고 단정할 일은 아니겠으나, 일상사에서 신체활동이 자유스러운 사람들은 물론 신체활동이 부자유스러운 사람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행하여지고 있는 것 모두가, 다 같은 이웃 사랑의 봉사활동이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양자에 대한 ‘봉사활동 즉 사랑’의 표현에 대한 우선순위와 가치를 논할 수는 없겠지만, 신체활동이 자유스러운 사람에게보다는 신체활동이 부자유스러운 사람들에게 행하는 봉사로, 그들의 수족이 되어주는 봉사야말로 ‘하느님과 부처님 또는 우주의 주인’이 베풀고자하는 사랑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눔 즉 분배’의 형태도 많은 경험을 하였을 것입니다. 성실한 납세를 포함하여 가끔씩 보도되는 바와 같이,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헌납하는 것도 교회에서의 헌금과 불전의 보시도 나눔의 한 형태라는 데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특히, 헌금과 보시자의 의사와는 달리 수탁자의 치부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나 천당에서 안식을 얻거나 또는 보다 발전된 미래나 내세를 위한 수단으로, 반드시 십일조와 헌금을 내야하고, 극락세계에 가기 위해 반드시 연등을 사고 보시를 해야하는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하느님의 사랑과 부처님의 자비는, 신체활동이 부자유스러운 사람에 대한 봉사와 기아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배고픔을 들어주는 나눔이야말로 헌금과 보시의 참 뜻일 것이며, 이것이 바로 ‘하느님과 부처님 또는 우주의 주인’이 인식하고 있는 진실한 사랑의 표현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의 가정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생활하는 인간과, 하느님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인 사랑과 자비의 적극적인 실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충분하고 흡족한 대안은 아닐지라도, 퇴직 이후부터 어떤 계획과 실천으로 얻어지는 수입의 몇 분의 일(1/가족 수+ 1)이라도 필요로 하는 곳에 보시(布施)할 수 있다면, 이것으로서 만족하고자 할 뿐입니다.

 

  

by 다사치 | 2009/09/12 07:42 | 이웃의 정리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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