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나는!

               1. 거짓(인체인) 나(我)는?

  가. 도마 카리스마?

  나. 아비와 같은 생활은 싫다!

  다. 바보 같은, 내 인생!

    (1) 대인관계는?

    (2) 부조와 품앗이.

    (3) 그래도, 후회는 않는다.

  라. 남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은?

 

  다시 말해서 육신과 생명을 동시에 갖고, 현재 인간(3차원)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나(我)는 도대체 누구인가? 평범한 보통사람들은 우리인간사회에서 사람을 소개하거나 소개받을 때, 그 사람의 인적사항과 직업 및 주요경력을 소개하게 되면, 벌써 어떤 사람인지 대충 감을 잡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적사항과 직업 및 주요경력 등은 사실상, 그 사람의 바깥으로 드러난 겉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같은 평범한 인간이 인간의 내면을 제대로 알 수 있는 방법들이 없기 때문에, 이 겉모습에 가려져 있는 인간의 내면을 자세히 알고 소개할 수 없을 뿐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내면을 자세히 알 수 있는 방법들이 있었다면, 직원을 새로 채용하거나 친구를 사귀는데도 많은 참고가 될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사람을 직접 상대하여 사귀고 겪어보기 전에는, 그 인간의 세세한 속마음을 속속들이 알 수 있는 방법들은 없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 나!’를 찾고자 하는 필자의, 이런 겉모습에 불과한 것들은 생략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겉모습이 이 글 중에서 ‘나(我)는 누구인가?’하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필자에 관한 이야기로는, 앞의 ‘넷. 활동기’부분에서 제법 소상하게 소개하였지만, 그것은 겉모습에 불과하여 자신을 다 이야기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좀더, 자세하게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데 무척 어렵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년. 독일 칼브 生)도

“혼자서 밥벌이를 하고 있는 겸손한 직공이라 할지라도 지금 이 자리에 그의 옛 생활을 목격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그는 격지에서 품팔이하든 때의 이야기를 엄청나게 부풀려서 흥미롭게 아니 그보다 더 전설 같은 말투로 이야기하는 법이다”

라고 했듯이 군 복무를 마친 우리나라 남자들 모두는, 그 당시 가장 훌륭하고 가장 용감하고 가장 정의감으로 뭉쳐진 시대적 영웅이었음을, 자화자찬하는 모습들이 떠올려지지만 이런 감상에는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이런 때일수록, ‘나는 내 자신이 가장 잘 안다’는 평소의 소신을 상기하고 떠올리면서, 이런저런 변명으로 양심에 부끄럽지는 않아야 할 것이라고 다시 한번 다짐도 해 보았습니다. 아울러 모든 관련 당사자들이, 훗날 이 글을 읽게 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필자에 대한 신뢰성과 ‘나는 내 자신이 가장 잘 안다’는 평소의 소신에 대한 신뢰에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서 모든 당사자들이 얼마나 인정하고 수긍하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과 함께, 영웅담 같은 자화자찬은 커녕 웃음거리나 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필자라는 인간은, 양가 부모님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자식노릇 제대로 못한 것은 젖혀놓고, 한 여성을 반려자로 만났으면서도 아기자기한 남편노릇 제대로 못한 것 또한 물론이고,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 자상하고 친구 같은 아비노릇도 제대로 못했다는 자책감과 함께 벌써 정리기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한 바와 같습니다. 참으로 보잘것없고 평범함에도 못 미치는 불쌍한, 한 인간일 뿐입니다.

 

    가. 도마 카리스마?

  필자보다 조금은 나은 가정환경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아내는, 약 4~ 5㎞정도 떨어진 이웃 면의 국민학교 소재지인 빈촌에서 맏이로 태어났으면서도, 4남매 중에서, 유난히 부모님의 절대적인 사랑과 후원에 힘입어 소위 대장노릇(?) 하듯 하면서, 별 다른 구김살 없이 성장하였습니다. 거친 사내동생들 틈에서, 맏이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유지할 수 있도록 옆에서 기를 살려준 무조건적인, 부모님의 관심과 배려의 결과였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 동생들이, 누나를 대하는 모습에서 한결같이 공손하며 깍듯한 인상이 풍겨지고, 또한 누나 말이라면 함부로 거역하지 못할 정도이며 웬만한 가정사에도, 반드시 누나의 의견도 참고하여 결정되어지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73년 초, 중매로 만나게 된 우리 두 사람은 첫 맞선 자리에서부터, 서로가 호감(?)을 가졌었고, 양가의 필요와 사정에 의하여 맞선 10일 만인 2월 1일 전격적으로 결혼을 하게 되었으나, 그로부터 30여 년 동안 온갖 시집살이에 갈등도 많았을 것입니다. 당시의 시골 풍습은 지금과 같이 데이트도 마음 되로 할 수 없었든 것은 물론이고, 서로 만나자는 연락을 하기도 쉽지 않았기 때문에 연애라고 할 수 있는 기간도 없었습니다. 결혼 전에는, 대장노릇(?)에 ‘금이야! 옥이야!(금지옥엽)하며 성장한 아내의 신세가, 누구 나와도 마찬가지겠지만 결혼 후에는 시집에서 제일 졸병(卒兵) 신세로 급전직하한 것은 물론, 많지 않은 농사일에도 매달려야 했기에 시집살이 또한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아내는, 수줍음을 유난히 많이 타면서도 티 묻지 않은 순수함과 올곧은 성격의 바른 소리와, 매사에 사리가 밝으면서 쾌활하고 명랑한 성격에 깔끔함이 풍겨지는, 전형적인 시골처녀의 모습이었으나 지금은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답게, 변해도 너무 많이 변해버린 상태입니다. 지금도 가끔씩, 친구들이나 가족모임에서 불쑥불쑥 내뱉는 언동 속에는, 시집살이를 비롯하여 신혼시절에서의 설움이 한으로 배어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상가상이라 할까, 필자의 성격 또한 다소 봉건적이면서도 앞에서 밝힌바와 같이 밝고 개방적이지 못한 신경질적이고 내성적이며, 남에게 아쉬운 소리는 물론이고 이런저런 부탁도 적당히 못하는 것은 차지하고, 순리를 따르되 원칙을 추구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이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아내의 마음고생은 말할 수 없이 컷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업선과 악업악과’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정말 우리 부부는 전생의 업에 의해 업보를 주고받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는 전제아래, 선업선과 악업악과에 의한 업과 업보의 연속은 윤회에 의한 다음 생애에서도, 계속되는 연결고리인 만큼 두뇌 활동에 의한 지식축적이 가능한 인간(3차원)세계에서, 우리 스스로의 의지로 ‘업장 소멸을 위해 최선을 다해보자’고 다짐도 해 보았지만, 그런 약속만으로는 쉬운 일도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첫아이를 낳고는 고양이로 변하고, 그 다음 둘째 아이를 낳고는 호랑이로 변하더라’는, 어떤 유행가의 가사처럼 결혼 전과는 180도로 크게 변해버린 아내, 평범한 주부로서 보통사람들이 느끼고 만족하게 되는 행복마저도 가져보지 못했든 아내, 그것은 순전히 보통사람으로서는 커녕 가장답지 못한 필자의 성격과 무능력에서 기인한 것이며, 특별히 아기자기한 추억거리도 만들지 못한 무능함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도마 카리스마(charisma: 많은 사람을 휘어잡는 능력이나 자질)?”

이렇듯, 필자는 아내에게 남편노릇을 제대로 못했다고 늘 빚을 지고 있는 기분인데, 2002년 12월 초순 아이들이 핸드폰 2개를 사 갖고 와서 제 어미와 아비에게 주게 되었는데, 그 핸드폰의 주인 이름을 어떻게 표시하느냐(?)하는 과정에서, 아내의 제안으로 새겨놓은 필자의 핸드폰임을 표시하는 이름입니다. 우유부단한 필자의 성격으로 아름다운 추억이나 특별히 아기자기했든 기억도 없는 상태에서, 가정생활에서는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이었든 필자를,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었든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내 또한 결혼 이후부터 줄곧, 필자의 성격상의 변신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레저생활이나 문화생활 등 여가활동 면에 대하여는, 지금은 완전히 포기한 상태이며 남들에게는 기대 가득한 하계휴가기간도 우리에겐, 통상적인 평범한 일상중의 하루하루일 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한가족이 함께 가져보지 못한 바캉스는 기대도 않는 다는 듯이, ‘그저 집에서 가만히 쉬는 것이 제일 좋은 피서 방법이더라’라는 비아냥거림과 함께 최근 들어 가끔씩,

  “퇴직하고 나서 수월스럽게 관광여행을 다니자!”

는 제의에,

  “그러자!”

고 대답은 하고 있으나, 그때는 또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을 뿐입니다.

 

  나. 아비와 같은 생활은 싫다?

    필자는, 1980년 후반기부터 파출소장으로 근무하는 기회가 많아짐에 따라 덩달아 본의 아니게, 시간적 공간적 가정생활과도 많이 동떨어지게 되었습니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6․25때 걸린 비상사태가 지금까지 해제되지 않았다’는 야유 섞인 비아냥거림이 회자되고 있는바와 같이, 필자의 근무처인 경찰조직도 명절 및 연말연시나 ‘○○ 소탕 ○○일 작전’등, 자체비상상태에 접어들게 되면 그놈의 정착근무가 짧으면 3~ 4주 보통은 그 이상이었으니, 퇴근이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습니다. 직원이나 이웃사람들은 하기 좋은 말로, ‘잠깐 집에 가서 옷이나 갈아입어라’고 권하기는 하지만 정착근무 그 자체가, 파출소의 기본근무라는 생각 때문에 일요일마다 옷을 가져오게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고, 손수 세탁을 해서 해결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훗날, 장기간의 정착근무로 집에 가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으면서도, 비상상태가 해제되기만을 기다렸으니 참으로 ‘바보 같은 생각’이라고 자책하면서도, 지금까지 후회는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상급기관 지휘관들도, 자신들의 출세와 감독자에 의한 눈 도장을 위해 스스로 집에 안 들어가면서, 파출소장도 단위 지휘관이라며 정착근무를 강요한 것이었습니다. 경찰서장 이상의 지휘관들의 임기는, 1년 남짓했으니 그 1년 동안만 눈 딱 감고 각자의 사무실에서 정착근무를 하게되면, 승진이나 영전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으니 그런 정도라면 가벼운 마음으로 누구나 할 수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공무원법에 규정된 연가 또한, 연가보상비가 지급된 1990년 이후부터 다소 완화되긴 하였지만, 그래도 1990년대 후반까지는 직원들의 근무감독 공백을 우려하는 감독자들의 관심도에 따라, 결재권자의 눈치를 살펴야 했기에 겨우 2~ 3일 동안 벌초나 하고 오는 수준이었습니다. 결국 감독자의 입장에서, 파출소장은 연가를 안가는 것이 제일 좋고, 가더라도 2∼ 3일만 다녀오라는 식의 권고(?) 같은 무언의 압력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휴가 가서 쉬고 즐기는 것보다는, 아예 휴가 안가고 제자리를 지키는 것이 마음을 편하게 하니, 자의반 타의반으로 포기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남들과 같이 휴가비로 펑펑 쓸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으며, 비교적 1990년대 후반부터는 파출소장의 연가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 듯이 하였으나, 그 때도 언제 나처럼 경제적 사정 등에 의해 하계휴가도 계속해서 포기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렇듯 퇴근도 제대로 못하고 직장에만 매달려 있는 힘없는 아비, 보통사람들은 해마다 가족들과 함께 즐기는 바캉스도 떠나지 못하는 불쌍한 아비, 경제적으로도 항상 쪼들려 먹고 싶고 갖고 싶은 것 제대로 해결해 주지 못하는 무능한 아비, 또래의 친구들에게 자랑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별 볼일 없는 한심한 아비, 신접살림을 차린 직후 한두 차례를 제외하고 15~ 16번의 이삿짐을 옳길 때를 비롯하여 16번의 입학과 졸업식에 한번도 함께 하지 못한 무정한 아비의 모습이, 아이들의 눈에는 어떻게 투영되고 각인되었든지(?) ‘아버지 같은 공무원생활은 하지 않겠다’고 하더라는 말을, 훗날 아내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 유구무언 그 자체였습니다.

  다시 한번, 스스로의 무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래! 아무려면 아비보다는 나은 일을 해야지’라며 혼자말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은 바보 같은 아비의 공무원생활 뿐이었지만, 모든 공무원사회가 다 아비의 경우와 같이 ‘그렇지 만은 않다’는 이야기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 바보 같은 내 인생!

  필자는, 성장기를 거쳐 활동기를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 비록 ‘관포지교(管鮑之交: 관중(管仲)과 포숙아(鮑淑牙) 사이와 같은 사귐이란 뜻으로, 시세(時勢)를 떠나 친구를 위하는 두터운 우정을 일컫는 말)의 예’에까지는 아니더라도, 흉금을 털어놓고 속마음이나 정담을 나눌 수 있는 동료나 친구도 새겨 놓지 못했습니다.

  춘추 시대 초엽, 제(濟)나라에 관중(?~BC 645)과 포숙아라는 두 관리가 있었다. 이들은 죽마고우(竹馬故友)로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관중이 공자(公子) 규(糾)의 측근(보좌관)으로, 포숙아가 규의 이복 동생인 소백(小白)의 측근으로 있을 때 공자의 아버지 양공(襄公)이 사촌 동생 공손무지(公孫無知)에게 시해되자(BC 686) 관중과 포숙아는 각각 공자와 함께 이웃 노(魯)나라와 거( )나라로 망명했다.

  이듬해 공손무지가 살해되자 두 공자는 군위(君位)를 다투어 귀국을 서둘렀고 관중과 포숙아는 본의 아니게 정적이 되었다. 관중은 한때 소백을 암살하려 했으나 그가 먼저 귀국하여 환공(桓公: BC 685~643)이라 일컫고 노나라에 공자 규의 처형과 아울러 관중의 압송(押送)을 요구했다. 환공이 압송된 관중을 죽이려 하자 포숙아는 이렇게 진언했다.

  “전하, 제(濟) 한 나라만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신(臣)으로도 충분할 것이옵니다. 하오나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시려면 관중을 기용하시오소서”

도량이 넓고 식견이 높은 환공은 신뢰하는 포숙아의 진언을 받아들여 관중을 대부(大夫)로 중용하고 정사를 맡겼다. 이윽고 재상이 된 관중은 과연 대 정치가다운 수완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안다(倉廩實則 知禮節: 창름실즉 지예절)’

  ‘의식이 풍족해야 영욕을 안다(衣食足則 知榮辱: 의식족즉 지영욕)’

고 한 관중의 유명한 정치철학이 말해 주듯, 그는 국민 경제의 안정에 입각한 덕본주의(德本主義)의 선정을 베풀어 마침내 환공으로 하여금 춘추(春秋)의 첫 패자로 군림케 하였다. 이 같은 정치적인 성공은 환공의 관용과 관중의 재능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이긴 하지만 그 출발점은 역시 관중에 대한 포숙아의 변함없는 우정에 있었다.

그래서 관중은 훗날 포숙아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나는 젊어서 포숙아와 장사를 할 때 늘 이익금을 내가 더 많이 차지했었으나 그는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를 위해 한 사업이 실패하여 그를 궁지에 빠뜨린 일이 있었지만 나를 용렬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일에는 성패(成敗)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벼슬길에 나갔다가는 물러나곤 했었지만 나를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운이 따르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나는 싸움터에서도 도망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나를 겁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노모가 계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를 낳아 준 분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이다 [生我者父母 知我者鮑淑牙]”

 

    (1) 대인 관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자들 세계에서 회자되는 말로는, 일 면식이 없었든 사람이라도 술자리를 같이하고 기생집에 함께 가서 오입하고, 목욕탕에라도 같이 가는 등의 생활을 한 두 번만 반복하게되면, 가장 짧은 시간 내에 흉허물이 없어지면서 절친한 우정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도 풀어보면, 술을 같이 마셨으니 이미 술친구는 다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으며, 기생집에 가서 함께 오입하고 즐겼으니 다같이 도덕군자는 아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목욕탕에서 발가벗고 마주서 바라보면 더도 덜도 없이 똑같이 다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너나 나나 똑같은 보통사람이라는 동질성이 확인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술이라는 기호식품은 사람과 사람사이를 연결시켜주는 가교 역할은 물론이고, 사람과 사람과의 정리(情理)를 생기게 하거나 더욱 돈독히 하는 역할도, 아울러 가졌다 할 것입니다. 따라서 고금을 통하여,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통상적이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만남의 수단으로는, 술자리밖에 더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술자리의 경우, 대접한 경우보다 대접받은 경우가 훨씬 더 많았으니 두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며, 기생집이나 목욕탕 등 심지어는 협력단체 위원들과의 회식이나 야유회 등의 경우에도, 관외로의 이탈 등은 적어도 근무시간동안은 엄두도 낼 위인이 못 되었으니, 절친한 친구는커녕 인간관계에서도 별 볼일 없는 존재였을 것입니다.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기도 하지만, 파출소장이라는 직책과 관련하여 관내의 공식 비공식 회의나 모임등도 많았으며, 참석자 대부분의 화제는 몇 일 동안 보도되었든 뉴스를 재탕하는 수준이어서 별로 흥미도 없었고, 또한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라는 생각에 끼어들기도 싫었습니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모임에서, 평범한 보통이야기가 화제의 주가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 한데도 소위, 씨잘데없는 이야기로는 어울려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상대방 쪽에서는 ‘저 사람의 속내를 모르겠다’할 것이고 속내를 모르니 우정을 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필자의 성격 탓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관내의 많은 사람들 아무하고나 술자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 상대편이 무엇을 하며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하고나 술자리를 가질 수도 없었고 또한 직업상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술기운이 거나해지면 그야말로 잡담과 인생사설을 늘여놓으며 좌중을 지배하려 하였으니, 그 때부터 상대방들도 ‘인간성과 속내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술기운이 돌기전의 술좌석이나 평상시의 좌석에서, 꼭 필요하지 않은 이야기나 쓸데없는 잡담이라도 늘여놓았어야 할 것인데, 그것도 못하는 바보였다는 것입니다.

  요즘도 흔히들 하는 말로 ‘아무개!’ 하면, ‘아 그 사람! 대인관계가 좋아서 누구하고나 형님! 아우!’하는 식으로 ‘인간관계가 넓어 친구가 많다’고 통칭되는 사람을, 소위 ‘마당발이야!’라고 표현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마당발이라는 별칭을 갖게 된 사람의 경우, 대인관계가 좋으려면 많은 사람들의 이런저런 부탁도 많았을 것이며, 술자리 또한 빈번했을 것입니다. 아울러 이런저런 많은 부탁을 들어 줄 수 있으려면, 자신의 관련업무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관련업무도 포함되었을 것이고, 그러려면 누구에게나 ‘형님! 아우!’라고 부를 수 있는 친근한 넉살과, 형제 같은 끈끈한 유대관계도 필요했을 것입니다. 결코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필자로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이럴 때의 변명 중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합당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성격 탓!’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990년대 중반 어느 날, 작은아이로부터 뜻밖에 사무실로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었는데 내용인 즉, 친구 한 명이 폭행사건에 연루되어 ○○파출소로 갔는데, 좀 도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대강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크게 문제될 성싶지 않아, ‘너희들 일은 너희들 스스로 해결하라!’며 다만, 처리과정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거든 ‘그때는 꼭 다시 연락하라’고 거절하고 나서 생각해보니, 아이와 그 친구들이 어떻게 받아 들였고 또 얼마나 황당하고 실망하였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입니다. 소위, 부조리한 상태가 유지되던 우리조직의 경우 어떤 사건과 관련하여, 같은 직원이 부탁하게되면 실로 황당하고 참담한 경우를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말도 안 되는 무 경우를 개탄하면서 우리사무실에서 만이라도 경미한 사건이고, 직원가족이 연루된 경우라면 합리적으로 판단해서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처리하되, 적극적으로 훈방하도록 하고 그 대가는 절대로 바라거나 받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 결과,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 합의가 되어 훈방한 사례들도 많았습니다.

이렇듯, 술과 관련하여서나 성격적으로도 대인관계에서는 별 볼일 없는 상태에서, 아이들의 사소한 부탁까지 외면한 결과 긍정적인 기억은 누구에게서나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2) 부조와 품앗이.

  예로부터 우리조상들은 집안에 경사가 있을 때 부조하는 축의금과, 갑작스런 애사가 발생했을 때 부조하게 되는 조의금도, 다양했든 품앗이의 한 형태로 지금까지 유지되어온 우리민족고유의 미풍양속입니다. 이러한 미풍양속이, 품앗이의 한 형태로 인식되어서인지 직장 내에서는 친소관계를 떠나 남발되는 경향이 많았으며, 적어도 1990년대 초반까지는 직원들의 직계존속과 비속에 대한 경조사에는 적극적으로, 공(파출소장으로서의 역할)․사(품앗이 당사자로서의 역할)적 입장을 불문하여 지원하고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경부터 이러한 품앗이라는 말이 무색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로는, 소위 신세대의 출현과 다른 직(職)에 비해 인사이동이 잦은 것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의 사유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조사비용도 만만치가 않은 것이, 파출소장이 그렇게 대단한 직책이라고 웬만한 경조사는 거의 다 알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997년 주택을 신축하면서부터,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판공비의 범위 내에서만 사용하다보니, 남들처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충분하게 사용할 여유는 없었으며, 너무 많이 외면하다보니 이런 사정을 눈치 챈 경리업무를 담당한 직원 중에는, 자제의 혼사도 있을 텐데 조금씩이라도 품앗이를 주는 것이 어떠냐(?)는 식의 권고에, 일언지하로 ‘만약 아이들의 혼사가 있더라도 직장 내에서는 단 한사람도 알지 못할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선언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2000년 7월쯤에 가족들에게도 말해 둔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못난 아비의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인지 아니면, 집안의 경제사정상 혼수비용이 없다고 판단해서인지, 두 녀석이 한결같이 결혼의사가 전혀 없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무작정 ‘알아서 할 것이니 기다려 달라’는 말밖에는 전혀 진전이 없어 보이니 답답하나, 자신들의 인생은 ‘자신들이 알아서 살아가겠지’하는 자위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품앗이의 성격이 강했든 경조사의 부조금을 주고받는 형태가, 급기야는 관내 대상업소에까지 확대되면서부터는 부조리의 유형인 유착비리로 발전하는 등, 치부나 뇌물전달의 수단으로 변천함에 따라 최근 들어서는 공무원행동강령 등에서 규제하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따라서 이미 말한 되로 퇴직 전후를 불문하고, 아이들 혼사가 있더라도 직장생활과 관련된 직원들에게 알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며, 또 아이들에게 한날 한시 한 장소에서 ‘형제가 합동결혼식을 할 수 있게 준비하라’고 일러두기는 했었지만, 그저 희망사항만이 아니기를 바랄 뿐입니다.

 

    (3) 그래도, 후회(後悔)는 않는다.

   일생을 통 털어 이분의 일(½)에 해당하는 활동기(공직생활)중의 기간에 대하여, 아쉬움은 있을지라도 결코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1980년대 초반부터 각종비상근무 등 장기간의 정착근무에도 근무위치를 지키며, 잠깐 동안이라도 집에도 안 들어가면서 속옷을 가져다 입거나, 손수 세탁해서 해결하는 등의 생활도 지금 와서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외근경찰관의 기본근무라는 개념은, 평온한 상태가 지속되는 때에는 계획되고 예정되어있는 기본근무를 하다가도, 범죄가 발생하면 즉각적인 초동조치를 취해야 하기 때문에, 근무위치에 대기하는 것이 곧 주(主) 근무이며 따라서 이러한 근무가 곧, 기본근무이기 때문입니다.

  옛날(春秋戰國시대), 중국의 어느 나라 군주가 한 지방관(地方官)을 불러들였습니다. 그 지방관은 군주의 부름을 받고, 조정 관료들과 사이에 있었든 지난날의 여러 가지 논쟁과 설전들을 떠올리며, 얼어붙은 눈길을 허우적거리면서 궁궐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군주는 서둘러 입궐한 지방관에게, 몇 마디 덕담을 나누다가 얼굴색이 굳어지며,

  “경을 파직하겠노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지방관은,

  “전하(殿下)! 신이 불민하여 백성을 잘못 다스렸음을 인정하옵니다, 그러나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그러자 군주도,

  “짐(朕)은 경의 그 경륜을 들었을 때만해도 누구보다 훌륭한 지방관이 될 것이라 믿었는데, 지금은 조정의 모든 관료가 하나 같이 경(卿)을 탄핵하니 짐도 어쩔 수 없노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지방관은 더욱 머리를 조아리며,

  “전하! 신(臣)도 그 동안의 경험을 거울삼아 앞으로는 훌륭한 관리가 될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니 다시한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군주는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정 그렇다면, 일 년의 말미를 줄 터이니, 그 동안은 훌륭한 관리가 되도록 충성을 다 하라!”

며 한차례의 기회를 더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방관은 머리를 조아리며,

  “신(臣) ○ ○! 견마지로(犬馬之勞: 임금이나 나라에 대하여, 자기의 애쓰고 진력(盡力)함을 낮추어 이르는 말)를 다하여 성은에 보답하겠나이다”

하며 물러가서 다시 일년동안 열심히 지방민들을 다스렸습니다. 약속한 일년이 가까워오자 그 지방관은 군주가 부르기도 전에 대궐로 들어가 다시 군주 앞에 부복하였습니다. 부르지도 않은 지방관이 입궐하여 부복하는 것을 본 군주는 파안대소하며,

  “그 동안 노고가 많았도다! 이번에는 조정관료들이 경의 칭찬에 침이 다 마르는구려”

하며,

 “이제는 좀 더 큰일을 하도록 하라!”

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방관은,

  “전하! 신의 사직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하며 일년 전과는 달리, 오히려 사직을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군주는 지난 일년 동안의 노고 치하와 함께 승차도 고려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사직을 청하는 관리에게,

  “지난 일년동안 지방백성을 잘 다스려 모두들 칭송이 자자하거늘, 왜 사직을 청하는가?”

라며 의아스럽게 생각하든 군주가 물었습니다.

  “전하! 먼저 번의 지방관생활은 전하를 위하여, 그 후 일년동안의 지방관생활은 조정관료들을 위하여 일 했사옵니다”

군주는 두 눈을 휘둥그래 뜨며,

“그게 무슨 말이냐?”

며,

“더 자세히 아뢰라”

고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지방관은,

“전하! 마치 어버이가 자식들을 돌보듯 전하를 위하여 지방백성을 다스렸을 때는, 신을 파직하려하였습니다”

군주의 얼굴빛이 변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이어,

“하오나 최근 일년 간은 조정 관료들을 위하여 열심히 일들을 한 결과 이제는 승차시키려고까지 하니, 신으로서는 이런 녹봉(祿俸)생활은 싫사옵니다”

하며 사직의 윤허를 재촉하는 것이었습니다. 흙빛이 다 된 얼굴로,

“짐의 잘못이로다! 짐의 허물이로다!”

탄식하며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듯 한숨짓든 군주는, 하직인사를 여쭈는 지방관에게,

“경은 부디 짐을 용서하여 주시오!”

비통한 심정으로, 신하들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잘못을 뉘우치며 후회하고 있었지만, 지방관의 사직을 만류할 수는 없었습니다.

 

  모르긴 해도 그 지방관은 도연명(晉 陶淵明 365~ 427)의 귀거래사(歸去來辭)라도 읊고 싶었을 것입니다. 도연명이 진(晉)나라 팽택(彭澤)의 현령(縣令)으로 있을 때 일이다. 어느 때인가 군(郡)에서 보낸 독우(督郵)에게 예복을 입고 가서 뵈라 하므로, 도연명이 이에 탄식하며

  “내, 닷 말 곡식 때문에 소인 앞에 허리를 꺾을 수 없다”

하고 그 날로 사표를 내고 곧바로 이 귀거래사를 읊으며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귀거래’는 곧 ‘벼슬살이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리라’는 말이다. 도연명은 남달리 고귀한 성품을 지닌 사람으로서, 사람의 마음이 도(道)를 위하여 쓰이지 못하고 한갓 몸의 노예(奴隸), 곧 입의 구종(口從)노릇에 허덕이는 것을 슬퍼하여 전원으로 돌아가 농부들과 함께 밭 갈고 산수(山水)와 더불어 노닐며 자연을 노래한 전원시인이다.

歸去來兮(귀거래혜): 돌아가자꾸나! 벼슬살이 그만두고 내 고향 전원으로 돌아가자꾸나!

田園將蕪胡不歸(전원장무어늘호불귀리오): 손 볼 사람 없어 전원이 온통 거칠어지려 하는데 아니 돌아가고 어쩌리오

旣自以心爲形役(기자이심위형역하니): 고귀한 이 마음 값있는 일에 쓰이지 못하고, 제 입의 구종노릇에 허득이게 버려 두었든 지난날의 잘못된 생각들!

奚惆悵而獨悲(해추창이독비): 하지만 그렇다고 어찌 지나간 한때의 잘못에 얽매여 넋 놓고 슬퍼만 하고 있으리오!

悟已往之不諫(오이왕지불간이고): 이왕에 잘못된 일은 뉘우쳐도 소용없는 일.

知來者之可追(지래자지가추): 앞으로 다가오는 일만은 지난날을 미루어 얼마든지 고쳐나갈 수 있겠지

實迷塗其未遠(실미도기미원하니): 사실 벼슬길 험한 길에 잘못 들어, 한동안 내 갈 길을 잃고 헤매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그리 깊이 들지는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覺今是而昨非(각금시이작비로다): 이제는 깨달아 바른 길을 찾았으니 벼슬살이 그만 둔 지금은 참으로 장한 일이요, 제 입에 구종노릇 하든 어제는 진정 잘못된 일임을 뉘우치노라

舟遙遙以輕颺(주요요이경양하고): 배는 가벼히 흔들흔들 고향을 바라보며 떠나가는데

風飄飄而吹衣(풍표표이취의): 바람은 한들한들 옷자락에 나부끼고

問征夫以前路(문정부이전로하니): 예서 고향까지 얼마나 남았을 까고, 나그네 붙잡고 남은 길을 물어 가는데

恨晨光之熹微(한신광지희미로다): 해 떨어지기 전에 집에 닿긴 글렀는가? 어느새 희미한 저녁 빛이 어둑어둑 지니 서운한 마음 한이 서리네

乃瞻衡宇(내첨형우하고): 이윽고 낯익은 저기 저 허술한 대문과 오두막집!

載欣載奔(재흔재분하니): 어찌나 기뻤든지 단숨에 뛰어가니

僮僕歡迎(동복환영하고): 심부름꾼 사내아이는 반가워 어쩔 줄 모르고

稚子候門(치자 후문이라): 어린것들은 날 기다려 대문 밖에서 손 흔들어 나를 기다린다

三徑就荒(삼경취황이나): 정원의 세 갈래 작은 길에는 잡초가 무성하여 황폐해가고 있으나

松菊猶存(송국 유존이네): 하지만 소나무와 국화는 날 보란 듯 푸름을 자랑하며 꿋꿋이 서 있네

携幼入室(휴유입실하니): 어린것들 손잡고 방으로 들어서니

有酒盈樽(유주영준일세): 언제 빚었는가 항기로운 술이 항아리에 가득일세

引壺觴以自酌(인호상이자작하며): 술항아리 끌어 옆에 끼고 혼자서 잔질하며

眄庭柯以怡顔(면정가이이안이라): 정원에 우거진 나뭇가지 둘러보니 얼굴에 가득 기쁨이 넘실거리네

倚南窓以寄傲(의남창이기오하니): 세상에 거리낄게 무엇인고 햇빛 밝은 남녁창에 기대어 버젓이 앉았으니

審容膝之易安(심용슬지이안이라): 이제야 참으로 알겠구나! 무릎하나 들일 요

자그마한 집이지만 벼슬살이보다 그 얼마나 마음 편안한가를!

園日涉以成趣(원일섭이성취하고): 날마다 정원을 거니니, 거닐수록 멋이야 더욱 세로워라

門雖設而常關(문수설이상관이랴): 문이야 달아놓음 무얼하랴, 찾는 이 없어 언제나 굳게 닫혀있는 것을

策扶老以流憩(책부노이류게): 지팡이에 늙음을 의지하여 멋대로 쉬다가

時矯首而遐觀(시교수이하관하니): 가끔은 머리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본다

雲無心以出岫(운무심이출수하고): 구름은 무심히 산허리를 돌아 나오고

鳥倦飛而知還(조권비이지환이라): 새도 날기에 지쳤는가 제집으로 돌아올 줄 아는구나

影翳翳以將入(영예예이장입하니): 저녁 해는 어둑어둑 서산에 떨어지려는데

撫孤松而盤桓(무고송이반환이로다): 한 그루 소나무의 푸르른 그 절개, 내 마음인양 어루만지고 어루만지며 차마 발길 못 떼네

歸去來兮(귀거래혜): 돌아가리라! 돌아가고파 돌아왔는데, 다시 미련을 두어 무엇하겠는가.

請息交以絶遊(청식교이절유): 이제부터는 세상사람들과 교제를 끊고, 놀지도 않으리라.

世與我而相違(세여아이상위하니): 세상은 나를, 나는 세상을 이렇게 잊었는데

復駕言兮焉求(복가언혜언구리오): 여기서 다시 수레에 멍에 메어 무얼 찾으려 달리겠는가

悅親戚之情話(열친척지정화하고): 참 마음을 주고받는 친척들과의 정다운 이야기 이것만이 내 기쁨이고

樂琴書以消憂(낙금서이소우): 거문고와 책, 이것만이 내 즐거움이라. 온갖 시름 다 실어 보내리라

農人告余以春及(농인고여이춘급하니): 농사꾼이 찾아와 봄이 왔다 알려주니

將有事於西疇(장유사어서주로다): 나도야 서쪽으로 밭갈이 가야겠네

或命巾車(혹명건차하고): 때로는 헝겊 씌운 수레를 타고 험한 산길을 따라 언덕 넘어 달리고

或棹孤舟(혹도고주하여): 어느 때는 외로운 배 한 척 띄워

旣窈窕以尋壑(기요조이심학이요): 깊은 골짜기 시냇물 찾아들고

亦崎嶇而經丘(역기구이경구하니): 험한 산을 넘어 언덕을 지나가리라

木欣欣以向榮(목흔흔이향영하고): 산에는 나무마다 봄이 즐거워 마음껏 부풀어오르려 하고

泉涓涓而始流(천연연이시류): 얼어붙었던 샘물도 봄 소리에 녹아 졸졸졸 흐르기 시작하네

善萬物之得時(선만물지득시하며): 때를 얻어 흥겨운 만물을 부러워하며

感吾生之行休(감오생지행휴로다): 갈수록 다가오는 인생의 끝, 무덤을 느낀다

已矣乎(이의호): 다 그만 두어라!

寓形宇內復幾時(우형우내복기시간데): 이 몸이 세상에 몸 붙여 둘 날이 앞으로 몇 때나 되겠기에

曷不委心任去留(갈불위심임거류하고): 남은 인생을 내 어찌 마음대로 자연의 죽고 삶에 맡기지 않겠는가?

胡爲乎遑遑欲何之(호위호황황욕하지): 이제 새삼 무엇 때문에 서둘며 이제 다시 무엇을 찾으려고 어디를 가고자 하겠는가?

富貴非吾願(부귀비오원이요): 원래부터 부귀는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요

帝鄕不可期(제향불가기): 그렇다고 임금계신 서울에야 바라지도 않았다

懷良辰以孤往(회양진이고왕하고): 따뜻한 봄이 오면 동산을 거닐기도 하고

或植杖而耘耔(혹식장이운자): 어느 때는 지팡이 밭에 꽂고 김매고 북을 돋우어 주리라

登東皐以舒嘯(등동고이서소하고): 또 어느 때는 동쪽 언덕에 올라 조용히 시를 읊어도 보고

臨淸流而賦詩(임청류이부시): 맑은 시냇가를 거닐며 시를 지어 세월을 보내리라

聊乘化以歸盡(요승화이귀진하니): 자연의 변화에 맡겨 이 생명 다하는 그대로 돌아가니

樂夫天命復奚疑(낙부천명복해의하랴): 주어진 천명을 마음껏 즐길 뿐, 여기서 다시 무엇을 의심하고 주저하랴.

 

  또한 스스로, 선호(좋다고 소문난) 부서를 바라거나 희망하지 않은 것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이에 대해, 아내는 남들처럼 수단방법을 가릴 것 없이 좋다고 소문난 부서로 갈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남의 일인 양,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발령 나는 되로 기다린 결과로, 가족들 고생만 시켰다며 일침을 놓은 적은 있었지만, 그것도 능력 밖의 일이었기 때문에 후회 할 일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가끔씩 동료들과의 이야기도중에, ○도 ○도 없는 주제에 멋모르고 이런 직(職)에 들어와서 ‘이렇게 밖에 될 수 없는 것 아니냐?’는 푸념들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전국시대의 유학자(儒學者)로서, 성악설(性惡說)을 창시한 순자(荀子)의 글에 나오는 한 구절 중에,

  “학문은 그쳐서는 안 된다(學不可以己)

푸른색은 쪽에서 취했지만(靑取之於) 쪽빛보다 더 푸르고(而靑於藍)

얼음은 물로 이루었지만(氷水爲之) 물보다 더 차다(而寒於水)”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은 끊임없이 발전과 향상을 목표로 하여 노력해야 하고 중도에서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학문은 더욱 깊어지고 순화되어 한 걸음씩 완성에 가까워질 수 있다. 여기서 ‘푸름과 얼음’의 비유는 모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학문과 마찬가지로 그 과정을 거듭 쌓음으로써 그 성질이 더욱 깊어지고 순화되어 가는 것이다.

  스승에게 배우기는 하지만 그것을 열심히 익히고 행함으로써 스승보다 더 깊고 높은 학문과 덕을 갖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스승이 너무 훌륭하면 훌륭할수록 그를 능가하기는 어렵다. 이(靑出於藍: 쪽에서 나온 물감이 쪽보다 푸르다는 뜻으로, 제자가 스승보다 나음을 일컫는 말)와 비슷한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옛날 어느 고을에 이름이 제법 알려진 선비가 젊은 생도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 스승에게 글을 배우려고 많은 생도들이 찾아 들었습니다. 그 생도들은 어느 정도 글을 배우고 익혀 과거를 보면 영락없이 등과를 하게 되었고, 스승의 명성도 더욱 높아갔습니다. 그러자 스승의 주변에서는,

  “후진양성도 좋지만 입신출세하여 가문의 명예도 지켜라”

는 성화가 이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생도들을 가르치는 스승도 과거에 뜻을 두고 응시하게 되었는데, 그 스승은 그때마다 계속해서 낙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안타까운 일이 계속되자 스승의 친구는 위로인지 책망인지,

  “자네가 가르치는 생도들은 한결같이 등과를 하는데, 어떻게 자네는 그때마다 낙방인가?”

하며 술잔을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말없이 듣고만 있든 친구인 선비는 고사 한 토막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무더운 한여름 숲 속에서 꾀꼬리가 신나게 노래하다 잠시 쉬게 되었다 네. 그 때 뜸부기가 화답이라도 하듯 곱지 않은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 것이었어. 뜸부기의 노래가 끝나자 옆에 있든 뻑국이가 손 빽을 치며 ‘앙코르!’를 외치는 거야. 뜸부기는 뻑국이가 자신의 노래 소리에 손 빽을 치며 ‘앙코르!’를 외치는 바람에 신이 나서 우쭐거리며, 또 다시 노래 한 곡을 더 불렀지.

바로 그때 먼발치에서 지켜보든 까치가

   “야! 뜸북아 너는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우리 모두를 도와주는 거야!”

라며 말참견을 하였다 네. 그러는 동안 인근에 있든 온갖 새들이 모여들며 꾀꼬리에게는 칭찬을, 뜸부기에게는 격려의 박수를 보내게 되었지. 이때 심술궂은 까마귀가,

“뜸부기 노래 소리도 장난이 아닌데! 조금만 더 갈고 닦으면 머지않아 ‘짱!’도 되겠어”

라며 공치사를 하자, 다른 새들도 까마귀를 거들며 뜸부기에게 엄지손가락을 올려 보였다 네. 뜸부기는 좀 더 열심히 갈고 닦으면 꾀꼬리가 대수냐(?)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지.

이때 좌중의 눈치를 느낀 까마귀는,

  "애들아! 우리끼리 이러면 뭐하냐? 아무래도, 웃 동내에 계시는 황새 영감님께 누구목소리가, 더 아름다운지 심판을 한번 받아보는 것이 어때?”

라고 하자 꾀꼬리는 벌래 씹은 얼굴을 하였고, 뜸부기는 환영하는 빛이었다 네. 더디어 꾀꼬리와 뜸부기는 이웃들의 희망을 저버리지 못하고 웃 동내에 계시는 황새 영감님을 찾아갔었어.

둘은 영감님께 공손히 절하고 영감님을 찾아 오게된 사연을 아뢰자, 황새 영감은 그것 재미있겠다며

  “모월 모일 모시에 마을광장에서 너희들의 노래를 들을 것이니, 그때까지 각자가 열심히 연습하라”

고 하더라 네. 사실 꾀꼬리는, 황새영감님이 들어보고 자시고 할 것이 자신의 손을 들어 줄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모월 모일 모시에 양쪽의 노래를 다 듣고 판단해 주겠다는 말에 자존심도 상하고 심사가 뒤틀렸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어.

   하지만 뜸부기는 일생에 한번 찾아올까 말까한 기회라 여기고, 그때부터 새벽마다 열심히 노래연습을 하였지. 더디어 약속한 시각에 마을광장에는 인근의 온갖 새들이 구름같이 모인 가운데, 꾀꼬리와 뜸부기의 노래시합을 시작하게 되었다 네.

  먼저 꾀꼬리가 구성지게 한 곡을 뽑자, 황새영감은 노래 소리에 취해 넋이 나간 듯이 앉아 있다가,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수없이 고개를 끄득이고 나서 다음은 뜸부기 차례라는 듯 고개를 돌리자, 뜸부기가 노래를 시작했었다 네. 이윽고 뜸부기의 노래도 끝나자 황새영감 편찮은 기색이 역력했었다 네. 객석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지만, 꾀꼬리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그러나 뜸부기는 느긋한 표정으로, 황새영감의 판정을 기다리고 있었어.

  뜸부기는 한참동안 망설이든 ‘새벽의 일’을 참 잘했다고 자위하며 느긋한 표정으로 역시 ‘꿩 잡는 게 매!’라며, 적극적으로 모험 삼아 실천한 자신의 행동을 자화자찬하고 있었지. 사실 뜸부기는 황새영감이 심판해 주겠다고 했지만, 양심에 비추어 가당치도 않다는 것도 느끼고 있었기에, 이참에 모험이라도 한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동이 뜨기 전에, 나락 논에서 살이 통통 오른 개구리 몇 마리를 잡아들고 황새 영감을 찾아갔었다 네.

이른 시각에 나타난 뜸부기를 보고 황새 영감은 대뜸,

  “아직 약속시각이 아닌데 뭐 하러, 이렇게 ‘일찍부터 기다릴 필요가 있느냐?’며 가서 노래연습이나 제대로 하라”

고 타이르자, 황새영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보자기를 꺼내 놓으며,

  “영감님 그 동안 자주 찾아뵙지도 못 하였거니와, 오랜만에 뵈니 기력도 쇠하신 것 같고 얼굴도 많이 수척했습니다. 이놈들로 영감님 몸보신이라도 좀 하십시오 그리고 앞으로는 자주 문안 여쭙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오늘 있을 노래시합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라고 인사하고는 누구에게라도 들킬까봐 주위를 힐끔거리며 사라지고 말았지.

이윽고, 정적을 깨뜨리며 황새영감이 입을 열기 시작하는데,

  “꾀꼬라, 너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은(銀) 쟁반에 옥 구르는 소리로, 질리지 않는 구나”

그리고는 뜸을 드리고 나서 뜸부기의 노래 소리도 평가하게 되었다 네. 황새영감은, 그렇지 않아도 근래 들어 입맛이 없어지면서 때 아닌 여름에 코뿔 기운도 있었든 터라, 개구리 몇 마리로 이른 아침식사를 하고 나니 힘이 불끈 솟는 기분을 느끼면서. 새벽일도 그렇거니와 또 ‘앞으로도 자주 찾아뵙겠다’는 말이 자꾸 귓전을 때리는 것은 무슨 영문인지, 몽롱한 정신을 바짝 차린 상태에서

  “오늘의 뜸부기 노래 소리가 내 귀에는 더 아름답게 들리는구나”

라고 평가함으로서 뜸부기의 판정승으로 끝나게 되었다 네. 새벽의 일을 우연찮게 알게된 꾀꼬리가,

  “하하! 비와부중(非蛙不中: 개구리를 준비 안 해 적중시키지 못했다)이야”

혹은,

  “아독무와부득지(我獨無蛙不得志: 나만 개구리를 구하지 않아 뜻을 얻지 못했다)로구나”

외치며 뒤도 안 돌아보고 어디론가 쓸쓸히 날아 가버리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뜸부기는, 새벽의 일을 귀신도 모를 것이라고 자신했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중국 후한 때 양진은 상서학자로 그는 학문을 좋아하고 훌륭한 인품에 일 처리가 분명하였다. 그 해박한 지식은 당대의 유가에 견주어서 ‘관서의 공자라고 했다’ 한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그를 관서의 공자라 칭송해 마지않았다. 그는 민가에서 학문을 강의하여 쉽게 벼슬에 오르지 못했지만, 나이 50세가 되어 간신히 지방의 관리가 되었다(서당의 선생님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느라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했으나, 50세가 되어 지방의 관리가 되었다). 왕밀은 양진이 형주의 자사였을 때 자사보다 아래 벼슬인 무재로 천거된 사람이었다.

  그(양진)가 창읍이라는 곳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 그곳의 현령은 왕밀이었는데, 양진의 천거에 의해 벼슬을 한 인물이었다. 말하자면 왕밀에게는 은인이나 다를 바 없었다. 왕밀은 밤이 깊어지자 무슨 일을 도모하려는지, 가지고 온 금 10량을 은근히 양진에게 주었다. 그러나 양진은 거절하며,

  “당신의 옛 친구는 당신의 사람됨을 이해하고 있는데, 당신이 그 옛 친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닌가?”

그러자 왕밀이 말했다.

  “한밤중의 일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자 양진이,

  “천지지지 아지자지(天知地知我知子知: 하늘이 알고 땅이 알며 내가 알고 그대가 안다는 뜻으로 온 세상의 모든 일이란 비밀이 없다는 말)라 하거늘, 어찌 아는 사람이 없다고 이르는가?”

이 말에 왕밀은 슬그머니 황금꾸러미를 가지고 사라졌다.

 

  아울러 필자는, 약 30여 년 간을 근무하는 과정에서 징계 한번 안 받은 것은 물론이고 또한, 20여 년 간 후배직원들을 지휘감독하면서도 그렇게 많은 직원 중에서 단 한 명도, 징계 한번 안 받게 지휘해 왔습니다. 결국 30여 년 간의 공무원생활을 마감하는 현 시점에서, 가장 보람을 느끼며 스스로의 큰 위안으로 삼고 싶기는 하지만 이 또한, 가장 보편적이고 평범한 사안이라 자랑이라고 할만한 사항은 아니며 대체로, 직원들의 심성이 고왔든 탓이기도 할 것입니다. 어울리지 않게 자화자찬 한 것 같아 다소 쑥스럽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결코 쉬운 일도 아니었으며 앞의 어느 부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모든 업무의 적극적인 처리 의지와 확실한 끝맺음이 아니고는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일상적인 반복교양과 각각의 업무마다 처리과정을 확인하는 꼼꼼함과 그리고 간섭 아닌 간섭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면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적당히 못 넘어가는 소심한 성격과, 별나지도 모나지도 못한 순진함의 결과라 할 수도 있을 것이며, 어쩌면 도전정신과 모험정신의 결여라고까지 비약하다보면, 급기야는 어떤 말이 대두하여 수렁으로 전락하는 급전직하도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라. 남의 눈에 비친 모습은?

  이렇게 바보 같은 모습들이, 제 3자인 타인의 눈에는 과연 어떻게 비쳐졌을까? 혹은 어떻게 판단하고 평가하며 또, 필자를 연상하는 많은 사람들의 뇌리를 제일 먼저 스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각인각색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마치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장 정확하고 확실한 종합적인 판단은 누구보다 오랜 시간 동안, 가장 지척에서 보고 듣고 느낀 아내와 아이들의 판단일 것이며, 많은 사람들은 필자의 능력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시적이며 단편적인 모습만 접할 수 있었던 것이기에, 또 다른 하나의 편견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남의 눈에 비친 모습이 중요하다 할 수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설사 타인의 눈에는 어떤 모습이었든 능력 있는 다정한 남편, 권위 있고 소양을 두루 갖춘 친구 같은 자상한 아비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대 인간관계에서조차 만족할만한 신뢰는 고사하고 인간성 자체도 재고할 수밖에 없는 여지를 남겼으며, 동료나 직장과 관련된 경조사마저 많이 외면했으니 그들(제 3자)의 눈에 비친 모습은, 말하나마나 뻔 한 모습 그대로일 것이며 여기에 아내나 아이들의 눈에 비친 모습을 더한다면, 그야말로 황당하고 난감하여 무어라 변명의 여지도 없을 것이나, 이 부분은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여러분의 경험과 판단에 의한 몫으로 남기고자 합니다.

  또한, 1990년대 상반기 무렵부터 2000년 위 절제수술 전까지는 약 6∼ 8㎞의 거리를 도보로 출퇴근하였으나, 위 절제수술 이후부터는 조금씩 자제하고 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건강을 위해서 걷기 시작했고 또, 그렇게 이야기도 하였지만… 이에 대하여 이웃사람들은, 지금까지 자가용승용차도 사지 않고 도보로 출퇴근하는 모습에 대하여, 절제와 검소함이 생활화된 의지의 표현이라느니,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본받아야 할 애국자라는 등, 칭찬 아닌 칭찬(?)들을 하고 있으나, 별로 액면 그대로 받아 들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흔하디흔한 자가용승용차를 못사는 이유가 다름 아닌, 사실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 승용차를 못사는 것인데, 과연 이웃사람들 개개인의 눈에는 어떻게 비쳐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한 빌딩 아닌 빌딩(?)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승용차 하나 안사며 버티고 있는 것은, 그 동안 축적해 놓은 재산을 감추기 위해서라고 하지 않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하기야 이런 이야기는 이미 2000년 초에도 들은바가 있었기 때문에, 유비(流蜚) 통신을 타고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되며, 또 가끔씩 방문하는 친인척 중에서는, 겨울철에 ‘이 집에 올 때는 반드시 겨울옷을 껴입고 오게 된다’는 이야기 등을 비롯하여 지지리도 궁상맞은 모습에, 개개인이 갖게 되는 감정이나 느낌은 어떤 것이었는지 알 길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자괴감으로 인한 탓인지, 가끔씩 ‘성공적인 삶이란 어떤 것일까?’ 다시 말해서 3차원세계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일생을 살다가 4차원세계로 되돌아간 사람들 중에, 인간으로 태어난 목적을 가장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이며, 또 그의 삶은 어떠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지구라는 땅을 밟고 살다간 부지기수의 사람들 중에 석가모니와 예수님의 삶이 ‘가장 성공적인 삶이었다’고 하는데, 어찌 보면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성공적인 삶이란?’ 우리 같은 무지렁뱅이들의 수준에서, ‘오르지 못할 나무 쳐다보지도 말라’는 말같이 ‘가장’ 성공적인 삶은 제켜두고, 보통사람들의 성공적인 삶이라도 본받을 수 있었으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그래서 표사유피(豹死留皮: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뜻. 사람은 사후(死後)에 이름을 남겨야 함의 비유)라는 말같이 자신의 이름자를, 남녀노소 불문하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이 바로 성공적인 삶이라 생각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널리 그리고 후세에까지 남기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통성명을 하며 사귀었고 또 이름을 알리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하였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가의 비례에 따라 성공적인 삶이었는지 여부가 판단된다 하더라도, 필자의 입장에서 그 결과는 알고 자시고 할 가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60여 억 명의 인류는, 한 시대를 장식했든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겠지만, 이들 중에도 자신의 의지에 의하여 이름을 남기게 된 사람들을 포함하여,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름을 남기게 된 사람 등, 그들의 언행에 대한 선악과 삶에 대한 공과가 뒤엉켜 분간이 쉽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언행의 선행(善行)과 삶에서의 공적이 많은 사람이야말로 성공적인 삶으로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요건들도, 인간세상에서의 기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by 다사치 | 2009/09/08 07:16 | 거짓 나는? | 트랙백 | 덧글(0)

트랙백 주소 : http://kjhyun0500.egloos.com/tb/10133831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