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의 정리

                2. 육신(肉身)의 정리.

  가. 가치 있는 삶.

  나. 자력(自力)에 의한 삶.

  다. 마지막 보시(布施)

 

  우리들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사람들 중에는 지나치게 제 몸을 아껴, 힘들거나 귀찮은 일들을 피하려 하거나 웬만한 일들도 하지 않으려는 경우들을 볼 때마다, 죽고 나면 화장장(火葬場) 불구덩이(爐)속에서 태워지거나 땅속에 묻어 썩혀버릴 것을, 무엇 하려 저렇게 아끼려고 애를 쓰는가? 이용 가능할 때, 적당히 이용하고 활용해야 ‘육신의 건강에도 좋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가끔씩 있었습니다. 특히 젊은 층에서도 많더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늙고 병들어 근력(筋力)이 없어지거나 체력이 떨어지고 나면, 아무리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도 마음 되로 할 수 없는, 살아있는 송장(屍體)과 같은 신세가 되기 때문에 임종 직전까지는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것이라면 그 무엇이던 간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추구하고 실행하므로 써, 삶에 대한 보답과 함께 소위 밥값(?)은 하면서 살아야, 진정 보람 있는 삶의 과정일 것입니다. 그래서 불가(佛家)에서는 ‘무노무식(無勞無食)’이라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와 같이 늙거나 병들어 살아있는 송장(屍體)이 되기 전에, 자신의 육신(肉身)을 최대한 이용하고 관리하여 대다수가 수긍하는 방향으로, 어떻게 정리되어져야 하는지 그리고 그 내용들이 자식(子息)들에게도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우에 따라 여러 가지 방도가 있을 수 있겠지만, 최소한의 방향은 제시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소 이기적 생각이라 할지 모르지만, ‘내 인생의 주인은 바로 나(我)’이듯이 ‘내(我) 육신의 주인 또한 나’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서는 약간의 혼동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이론(異論)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살아생전의 내 육신이 오직 나만의 것’인가에는 찬성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의 가정(家庭)이라는 테두리 내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동안에는, 보잘것없는 내 육신이라도 오직 나만의 것이라기보다는 가족 구성원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정이라는 범위 내에서 부부는 물론, 부모와 자식 그리고 형제자매간에는 서로가 건강과 행복이라는 공동의 목표로 지향(志向: 생각이나 마음이 어떤 목적을 향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족 구성원 모두는, 스스로 자신의 육신을 잘 관리함으로서 불의의 사고를 당하지 말아야할 것이고, 또한 질병에 걸리더라도 적극적인 치료와 정성어린 가족들의 염원(念願)으로 쾌유(快癒)해야 할 것이며, 그리고 어떤 사건과 사고의 주체는 물론이고 객체도 되지 않도록 각자가 힘써 공동의 목표를 달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내(我) 육신의 주인 또한 나’라는 것은, ‘사후(死後)의 내 육신’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의 대다수 유족들의 경우, 망인(亡人)의 육신(屍身)을 편안히 모시고 엄숙하고 장엄한 장례식을 준비하는 것이, 유족으로서 또는 자식으로서 망인에 대한 마지막 효도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형 참사 현장이나 해난(海難) 사고 때 시체라도 찾기를 갈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이유들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이론이 있을 수 있겠으나, ‘사후(死後)의 내 육신’의 주인은 ‘나’라는 이론에 대하여 여기서는 그냥 접어 둘 것을 당부합니다. 최대한 양보하여 유족들의 생각 되로 장례식을 치르더라도 기껏, 불구덩이에 넣어 태워 한주먹의 재로 만들거나 아니면, 땅속에 묻어 썩혀버릴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인간이 욕심을 부리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는 것은 물론이고, 타당하지 않은 이유 또한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 개인의 육신이긴 하지만, 살아생전에는 가족 구성원 모두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사후의 내 육신은 내 것’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가. 가치 있는 삶.

  가치 있는 삶이란, 자신이 살아있는 값어치(?)를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값어치라는 것도 경제적이든 비경제적이든 유형이든 무형이든 불문하며, 어느 누구에게든지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줄 수 있는 삶이라면, 그것이 바로 가치 있는 삶이라 할 것입니다. 지구상에 생존하는 수 많은 식물과 동물의 암컷과 수컷이 만나 짝짓기를 통해 후손을 남기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기도 할 것이며, 또한 그들의 본능적인 현상일 것입니다.

  우리 60여 억 명의 인류가 3차원세계인 인간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오직 부모님들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든 무계획이었든, 단순한 사랑의 결실이라고만 생각하기엔 너무 무의미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식물과 동물의 본능에 의한 생존경쟁은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는 반면, 사랑과 봉사로 인류애(人類愛)라는 가르침을 실천하신 많은 선각자(先覺者)들에 의해, 인간세계와 동물세계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본능에 의해 암컷(雌)과 수컷(雄)이 만나 사랑을 나누고, 후손을 남기는 동물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류애(人類愛)라는 정신에 많은 사람들은 빠져드는 것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삶이 유지되는 기간 동안 무엇인가를 행하거나 배워야한다는 암시(暗示)이거나 삶에 대한 가치의 추구(追求)일 것입니다.

  창조주께서도 우리 인류 개개의 생명체에게 삶이라는 과정을 부여할 때부터, 삶에 대한 값어치를 요구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이 세상을 공짜로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시점부터라도, 그 가치(價値)를 얻기 위해 남은 여생동안 무엇이든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이 없는 삶, 즉 도움을 주기는커녕 남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남에게 해를 끼쳐서는, 가치 있는 삶이라 할 수 없을 것이며, 무병장수와 같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임종을 맞이하기 직전까지 무엇인가에라도 열심히 사는 모습으로 소일해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주변에서는, 안타깝게도 남에게 도움을 주기보다는 자신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해 가족이나 이웃의 도움을 받아가며, 근근히 생을 유지해 가는 많은 노약자(老弱者)와 병약자들도 삶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노약자와 병약자(病弱者)들에게까지 삶의 가치를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 말이 조금도 사리에 맞지 않음)이겠으나, 노․병(老․病)과 관계없는 남녀노소를 불문한 실업군(失業群)에 포함된 사람들도, ‘가치 있는 삶’이라는 명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앞의 어느 부분에서도 언급한바와 같이 우리인간 대부분이,

  ․할 일이 없어졌거나,

  ․철이 다 들었거나 또는,

  ․알고 싶은 것을 다 알았으면,

‘죽게 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할 일없이 빈둥거리기만 하면 죽게 되는 것은 아닐까? 혹은 무엇인가를 깨달았거나 알았으면, 곧 바로 ‘죽게 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즉 인간으로서 할 일이 없어졌거나 또는 철이 다 들었거나 아니면 무엇인가를 깨달았으면, 더 이상 인간으로 살아갈 이유가 없어졌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한번 상기하는 차원에서

  ․할 일이라 함은 우선 선량한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어야 할 것이며, 누구나 평범하게 할 수 있는 것을 포함하여, 꼭 필요한 것(일)이어야 한다면 예(例)컨데 봉사(奉仕)활동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또 봉사활동이라는 것도 그 범위가 크고 넓어, 어떤 특정활동이 봉사활동에 해당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쉽지 않겠지만, 각자의 양심과 이성에 따라 나보다 어려운 이웃이나 거동이 불편한 이웃을 성심 성의껏 돕는 일 또한, 봉사활동이 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직장에서 퇴직했다고 또는 할 일이나 소일거리가 없이 물러앉아, ‘아! 이젠 할 일이 없구나!’하는 생각은 ‘무병장수와도 적대관계’라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문제는 봉사라는 허울을 쓰고 행하는 봉사 아닌 봉사활동은 무의미 할 뿐 아니라, 그런 활동은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짓’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행하는 활동이, 어려운 이웃과 몸이 불편한 이웃 등 진정 남을 돕기 위한 활동인지(?) 아니면 남을 의식하기 위한 행사에 불과한 것인지(?)는 자신의 양심이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철(知覺: 사리를 가릴 줄 아는 힘)이라 하는 것도 마치 허상에 가까운 말과 같아 무척이나 조심스럽습니다. 앞의 어느 부분에서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것 같아 얼마나 공감하고 이해 할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또는 우리 자식들의 유아기 혹은 유년기 때로 다 함께 거슬러 가 봅시다. 그때는 어린아이이기도 하지만, 아무거나 가지려고 떼를 쓰고 갖지 못하면 울며 응석을 부리다가도, 철이 들기 시작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지게 될 때부터, 비로소 ‘철이 들었다고’들 합니다. 비단 유아기나 유년기 때뿐만 아니라 어른이 다된 우리네 보통 인간도 철이 덜 든 경우는 많이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필자의 경우는 언제부터인가 겨우 조금씩 철이 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바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이전이라고 철부지 어린애 같이 막무가내(莫無可奈)로 놀아난 것도 결코 아니었으며, 더구나 망나니 같은 생활도 아니긴 했지만 그때부터 무언가 조금씩은 달라지는 듯한 자신을 느끼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아직 철이 다든 것은 아니며, 아마도 ‘철이 다 들게 되면 그때는 죽게 되는 것은 아닐까?’생각한다고도 한바 있었습니다.

  그럼 여러분 스스로는 어떤 면에서 철이 들고 있다고 느껴 본적은 없었는지요? 철이 들기 이전에는,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또 아무생각 없이 행동했든 사안들이 철이 들면서부터는, 그 사안에 대하여 ‘욕심으로 인한 과욕 이었다’고 반성하거나, 이제부터는 그런 ‘욕심을 자제해야 되겠다’라는 자성의 기회가 있었다면, 그때 비로소 철이 들기 시작했다고 단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철이란 것도, 누구나 떨치지 못하는 욕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여 지며 또한 우리인간이 ‘알게 모르게 드는 것이 아닌가?’라고 한 적이 있었으나 결국은, 유아기 또는 유년기를 제외하고는 그 사람의 도덕성과 인생관 및 직업윤리 등, 가치관에 따라 일찍 들기도 하고 늦게 들기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알고 싶은 것, 즉 학문적 진실이건 비 학문적 진실이건 또는 과학적 진실이건 비과학적 진실을 포함하여, 모든 인류의 관심분야와 함께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등, 진실을 알고 싶은 것이 없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과 사후세계를 비롯해 알고 싶은 것은 얼마든지 많을 것이며, 종교인이 아니면서도 ‘인생의 도리며 우주의 진리를 알아 무엇에 쓰랴?’하는 식으로, 단념하지 말고 여러분은 ‘왜? 하필이면 우리(여러분의) 부모님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지금의 형제자매를 만나게 되었을까?’ 또한, 이렇게 인간세계에 와서는 무엇을 이루고 성취했는가? 또는 어떤 흔적을 남기게 되었는가? 그리고 참다운 나는 누구인가? 하는 것들을 직접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같이 무지렁뱅이 들이라고 비 학문적 또는 비과학적인 분야에 관심을 갖지 말라는 법은 없으며, 아무리 평범한 인간이라도 종교인이 탐구하고 열망하는 진리를 알고싶어하는 것은 당연한데도, 마치 종교인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양 외면하고 있는 것만 같아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 자력(自力)에 의한 삶.

  자력에 의한 삶이란 생존해 있는 동안 자신의 능력과 의지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서 일정기간동안은, 부모님을 비롯하여 이웃들의 도움과 보호를 받으며 성장하게 되는데, 그 이후부터는 순전히 자신의 능력과 체력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삶을 유지하게 됩니다. 태어나는 영아(嬰兒)의 탯줄은 부모나 의사 혹은 이웃의 도움으로 끊어지지만, 그 이후부터는 자신의 의지에 의해 먹거리로 영양(營養)을 섭취하며 성장해 가는 것이, 이세상의 모든 동물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삶은, 태어나서 탯줄을 끊고 독립적인 호흡(呼吸)을 시작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타인의 도움을 배제하고 오로지 자신의 능력에 의하여 유지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노약자와 병약자 또는 각종 사건사고로 인하여 생명이 위독하다는 이유로, 각종 생명연장 장치 등에 의하여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자신의 육신관리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운명에 의해 갈(死去)때가 되었을 때, 엉뚱하게 붙잡지 말고 아쉽지만 고이 보내줘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억지로라도 생명을 연장하겠다고 부착시킨 생명연장(보조)장치들은, 의학적 판단과 기준에 따라 적절한 시점 즉 자신의 능력이나 의지로 삶을 연장할 수 없을 경우에는 제거하므로 서, 갈 때가 된 사람들은 보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의학적으로 완치나 회복의 가능성이 전혀 없음에도 종교교리와 사회윤리의 틀에 얽매여, 소위 안락사를 부정하고 있는 현실도 재고(再考)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가족의 고통이나 이웃의 고생스러운 희생이 안타까워서가 아니라, 노약자(老弱者)와 병약자(病弱者) 자신들의 추(醜)해지는 모습을 가족이나 이웃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도, 환자들의 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장기간 거동조차 하지 못하면 피골(皮骨)이 상접한 몰골은 앙상해질 것이고, 대소변(大小便)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추(醜)한 모습의 당사자는, 정말 조용히 그리고 하루빨리 가고 싶은 심정일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당사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갈 때가 된 사람을 가지 못하게 붙잡는 것)은 창조주의 뜻도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족들의 입장에서는 애통하고 가엽은 마음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만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혹시나 하는 기대와 지금까지 못한 효도를 다하겠다는 듯, 생명연장기기를 제거하지 못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경제적 사회적 비용과 의료서비스의 효율적 운용 등을 감안한다면, 남아있게 되는 가족과 사회 그리고 국가에도 손실을 끼치는 것인 동시에 창조주의 계획에 의하여, 떠날 때가 된 사람들을 계속 붙들고 늘어지는 결과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가끔씩 치매환자를 다루는 가정(家庭)드라마에서, 치매환자의 자식들은 우러나오는 효심(孝心)에서 또는 이웃이나 사회의 이목 때문에, 요양원에 입원시키는 것이 꺼려져 ‘내 부모니까 당연히 내가 돌봐드려야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치매에 걸렸을 경우 자식들에게는 고생시키지 않겠다고 하는 발상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동의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유사한 사례들에 대입하는 발상의 전환과 함께 의식의 대혁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각 병원의 중환자(重患者)실이나 또는 병실에서, 산소 호흡기를 포함한 각종보조기기들에 의해 생명을 연장하고 있을, 불치환자들의 의학적 판단에 따라 갈 때가 된 사람들은, 온전하게 보내주도록 다 같이 노력해야 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능력과 체력 그리고 의지에 의하지 않은 체 각종보조기기들에 의하여 수명을 연장하는 그런 삶이란, 자력(自力)에 의한 삶이라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필자 역시 노․병(老․病) 또는 각종 사건사고로 인하여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그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산소호흡기 등 각종기기들을 부착하는 것을 거부한다고 아내에게는 이미 말한바 있었는데, 다행히 적극적으로 동참 의사와 함께 긍정적이었으며, 기회가 되면 아이들에게도 미리 유언으로 남길 예정입니다.

  ※1. 어떤 사건이나 사고 또는 질병으로 인하여 위급한 상황이 닥쳤을 때, 생명연장보조기기를 절대로 부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 임종이 가까워지면 병원으로 옮겨 재활용이 가능한 모든 장기(臟器)의 적출(摘出)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야합니다.

  병원으로 옮겨진 이후 장기(臟器) 적출(摘出)에 관한 모든 조치는 의료진에게 위임할 것이며, 병원에서는 적출(摘出)한 장기(臟器)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시신(屍身)은 의료실습자재로 이용하도록 할 것이며 나머지 시신의 부분이나 조각은, 국내의 산하(山河) 또는 동물원에서, 금수장(禽獸葬)으로 처리해 주면 흡족해 할 것입니다. 다만, 법률상에 문제가 되는 부분은 필자의 이런 심정을 이해 해주시고, 이번 기회에 사회적으로 공론화 시켜서라도, 법률정비와 함께 정책적인 뒷받침을 준비해 주신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다. 마지막 보시(布施)

  약 15억 년 전부터 우리의 형제들인 인류가 이 땅을 거쳐(태어나서 죽어)간 숫자는 가히 부지기수(不知其數)라고 했든 되로 일 것입니다. 그들의 발자취를 남기지 못한 구석기시대이전에는 알 수 없다하더라도, 적어도 구석기시대부터 지금까지 인간들의 믿음이 변하지 않은 것 중하나를 꼽는다면, 사후(死後)세계에 대한 믿음일 것입니다. 즉 자신들이 죽으면, 그 순간부터 그들의 혼(魂)은 무덤 속에서 영생(永生)한다거나, 또는 남들보다 특별하게 보이도록 자신의 무덤내외(內外)를 최대한 호화롭게 조성함으로서, 인간세상을 살았든 자신의 지위를 증명이라도 하듯 후세(後世)에까지 영원히 알리(자랑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 구석기시대의 지석묘(支石墓)를 비롯하여 왕능(王稜)의 부장품(副葬品) 그리고 현대에 와서 호화롭게 사치한 조상들의 무덤도 이런 범주에서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쯤부터는 이런 의식의 변화도 필요할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바 있는, ‘새로운 장례 문화…’에서 주장하고 밝힌 의미를, 기억하고 있겠지만 ‘가장 자연스러운 자연으로의 회귀(回歸)’라는 의미는, 인간으로서의 혼(魂)이 빠져나간 육신(屍體)도, 누군가에게는 쓸모(필요)가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그 대상을 찾아 헤맸다고 한바와 같습니다. 다행히도 그 대상을 찾았다고 한바 또한 같습니다. 만약 그 누군가에게라도 쓸모가 있는 물질(屍體)이라면 그들에게 되돌려져야 당연한 이치인데도 불구하고, 필요로 하는 대상은 따돌리고 화장장(火葬場) 불구덩이 속에 넣어 한줌의 잿더미로, 혹은 땅속에 묻어 썩혀버림으로서 한줌의 흙으로 만들어 놓고 자연으로 되돌아갔다고들 한답니다. 이러한 시신(屍身)처리 방식의 장례문화는, 전 우주적인 자원관리 측면에서나 우주의 섭리차원에서도, 합당(合當)한 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먹거리라면 무엇이나 필요로 할 그들은, 같은 시대를 살아왔든 동물과 식물들이라고 밝혔듯이 사람으로 살다가, 운명(殞命)에 의해 자신의 남루한 의복(屍身)을 벗어 던진 혼(魂)으로서는, 쓸모없게 된 시신(屍身)들이 어디서 어떻게 처리되는지 관심이나 가질까 의문입니다. 마치 우리인간들이 쓸모없게 찢겨지거나 남루(襤褸)한 의복을 아무런 미련이나 거리낌 없이 벗어 던지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인간들이 어떤 미련이나 거리낌 없이 헌 옷을 벗어 던진다고, 반드시 우리들의 혼(魂)도 그럴 것이라는 단정은 성급하다 하겠으나, 인간(人間)과 혼(魂)의 성질상으로 볼 때 우리인간과 똑같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오히려 4차원세계로 돌아간 혼(魂)의 입장에서, 자신의 의복(시신)이 처리(화장이나 매장)되는 과정(過程)을 정확히 알게 된다면, 어떤 마음이었을지 3차원세계에 머물고 있는 우리들 스스로도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짐작이라도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4차원세계로 되돌아간 인간의 혼은, 설사 생각은 있다 하여도 자신들의 의복을 ‘이렇게(또는 저렇게) 처리해 달라’고 당부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3차원세계에 왔든 흔적을 깨끗이 정리하는 차원에서라도 우리들의 육신(시신)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지 스스로 상상해보고 정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앞에서 언급한바 있는, ‘새로운 장례 문화…’에서 주장하고 밝힌 ‘가장 자연스러운 자연으로의 회귀(回歸)’라는 의미를 떠나, ‘이웃사랑’의 의미(意味)라는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접근 하고자 합니다. 물론 결론은 금수장(禽獸葬)이지만…

  이웃사랑은 (부모가 자식에게 조건 없이 주는)내리사랑과 (자식이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내리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반드시 해야하는 효도, 즉)치 사랑을 제외한 동료 이웃 간의 모든 사랑을 일컫는다고 한바 있었습니다. 또한 이웃사랑에서 나누는 사랑의 대상을 60여 억 명의 전 인류라고 하였듯이, 여기(마지막 보시)에서의 사랑의 대상은 60여 억 명의 전 인류를 포함하여 이 지구상에 존재하며 살아있는 수많은 동물과 식물도 똑같은 동등한 당사자로서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인간들의 육신(시신)의 처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따라서 우리 인류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획득하고 취득하고 구입해서 내가 먹을 수 있게 소위 먹거리를 제공했든 수많은 동물들과 식물들은, 자신들의 의사(意思)유무를 떠나 또는 타의에 의해 자신들의 몸을 던져, 전 우주적인 차원에서 이웃사랑을 실천했든 것입니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우리들은, 한(限)도 끝도 없이 그들로부터 충분하고 흡족한 먹거리로서의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마지막 남은 한 조각(당시로서는 죽은 자신에게 남은 전 재산이요 유일한 물질)에 해당하는 사랑(시신)이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망설여진다는 것입니까?

  어찌 보면 이런 일이 육신을 가진 인간 즉 살아있는 인간으로서는, 생각만 해도 섬뜩하고 꺼림칙해서 놀랄 일일 테지요. 하지만 화장(火葬)문화가 처음으로 도입되었을 때도, ‘어떻게 부모님을 그렇게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 하면서, 섬뜩하고 꺼림칙해서 놀랐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쯤은 부모 형제를 화장(火葬)하면서 이와 같이 섬뜩해하고 꺼림칙해서 놀라는 상주(喪主)는 볼 수 없지 않습니까? 모두가 인식의 차이요 생각의 차이며 습관의 차이 또는 문화의 차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4차원세계로 되돌아간 혼(魂)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한(限)도 끝도 없이 받은 사랑에, 조금이라도 베풀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라고 자위(自慰)하지는 않을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마지막 남은 한 조각에 불과한 사랑이라도 헛되게 하지말고 필요한 대상에게 아낌없이 돌려주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3차원(인간)세계 왔다가 최후로 남기는 ‘마지막 보시(布施)가 아니겠느냐?’하는 것입니다.

 

  

by 다사치 | 2009/09/04 07:25 | 육신의 정리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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