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0여 년 전, 공자님께서는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라고 하신 말씀은, “나라를 잘 다스리고 다음은, 천하를 평안(平安)하게 하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그 당시의 군주․제후와 지배계층에 속하는 벼슬아치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따라서 설마 아무런 권력도 없고 쥐꼬리 만한 권한도 없는 무지렁뱅이 같은 백성들에게까지, ‘나라를 잘 다스려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본의와는 다르게 전쟁터에 끌려나가 죽는 일 아니고는, 착취와 복종의 의무만 업보의 멍에처럼 씌워진 채, 한평생을 노예처럼 살다가 짐승처럼 죽어갔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누구나 하기 쉬운 말로 ‘애국!’ 이라는 단어주위에 항상 엄숙함이 깃 들어있는 것은, 조선시대 말 일본군국주의와 맞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숨진 순국선열을 비롯하여,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싸우다 장렬하게 산화한, 국군 경찰 학도병 기타 이름도 흔적도 기억에도 없는 상태에서, 목숨 바친 ‘애국투사들을 연상하기 때문이 아닌가?’도 생각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애국자!’라고 특정 지워진 몇몇 사람만 애국하는 것이 아닌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2500여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과 그때를 비교한다면 천지개벽을 했을 만큼, 교육의 평등화 다양화 보편화에 따라 각 구성원의 지적수준은 높아지고, 교육제도의 발달로 많은 여건과 환경 등 상황의 발전으로 인하여, 권력의 원천이 힘(力)에서 민의(民意)로의 이동에 힘입어, 현실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증가하는 등 사회제도의 변천에 따라, 일부 위정자와 관료조직의 구성원인 공무원에게만 치국하라는 것으로 해석해서도, 안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님의 치국과 필자의 애국은, 그 주체와 객체의 대상에서부터 자연스럽게 구분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즉 공자시대치국의 주체는,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관료들에게만 한정된다고 한다면 그 객체는 당연히 백성들일 것이나, 2500여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의 애국은 그 주체와 객체가 한 국가의 구성원 모두가 해당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위관직의 공직자만 애국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인 동시에, 말단 하위직 공직자라고 애국의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도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직업을 가진 사람이나 직업을 못 가진 사람이나 한 국가의 구성원이라면, 애국하는 길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음에도 쉽사리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애국자가 되기 위한 길은 멀리 있거나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사라도 깨끗한 마음으로,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일(事務, 業務)을 정성껏 완수하면 그것이 곧, 애국인 것입니다.
따라서 애국은, 한 국가의 구성원 모두에게 지워진 권리인 동시에 의무이며, 애국하는 형태와 방법도 수없이 많아서 하나하나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헤아리기 어려우며, 모든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생업과 임무를 성실하게 완수하는 것이 곧, 애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회 각 계층에 속하는 구성원 각자가, 스스로의 위치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크고 적은 임무를 성심 성의껏 완수하는 마음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애국이며 구성원 개개인으로서 기본적인 질서를 지키는 것도 아름다운 애국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직자는, 민주주의이념에 따라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과 의무를 다해 국민에게 절대적으로 봉사하는 것도 애국이며, 기업가는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라 자신의 의지와 이념으로 기업보국의 길로 경제발전을 지향하는 것도 애국이며,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현장에서 땀흘려 일하여 인간으로서 삶의 질(質)을 스스로 개선하는 것도 애국이며, 사회구성의 최소 단위인 가정과 가족을 보호하며 봉양하는 것도 애국일 것입니다. 이렇듯 한 국가의 구성원이면, 누구나 다 애국할 수 있고, 하나하나 적시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그 유형도 다양하기에, 비록 평범하게 느껴질지라도 애국하는 마음자세와 준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곧 자신에게 지워진 직무(의무)를 성실하게 완수하는 것이, 곧 ‘애국의 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가. 성실한 직무수행(職務遂行)
‘자신의 직무(의무) 완수에 최선을 다하라!’는 그 직무(임무)에는, 반드시 공직자의 업무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수행하는, 육체적 정신적 노동과 시․청각적 효과 등 개개인이 직업으로 선택한 모든 일(事)이 다, 직무인 것입니다. 따라서 직무에는 귀하고 천한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며 급여 생활자가 행하는 업무도, 자영업자의 독특한 업무도 농상어민의 농상어업 활동도, 노동자가 노동현장에서 행하는 각종 노무활동도 연예인의 연예활동도 모두 직무인 것은 물론이며, 또한 직무와 관련하여 생계의 수단인 보수의 유무와 과다에 상관없이, 자원봉사자의 봉사활동도 직무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직무의 범위와 형태도 인위적으로 한정할 수 없을 것이며, 통상적인 연속성이 있는 것이라면 모두 직무라고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통령의 통치행위도 일용직 근로자의 근로행위도, 기업체와 제조업체의 전 임직원이 동일한 목적달성을 위한 각 계층에서 행하는 각종 업무행위와 서비스 행위도, 사형집행관의 업무수행도 직무인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1) 최고의 가치 창출.
자신이 행하는 직무(업무)의 결과는, 그 어떤 누가 행하는 것보다 최고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능력과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직무, 누구나와 같은 통상적인 가치보다는 자신만이 최고의 가치를 창출하려는 의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중견기업체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강의하든 어떤 경영학자는 이런 이야기도 했답니다. 즉 어떤 회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많이 필요한 것이 사실인데, 그 모든 자금을 사원여러분들이 다 벌어들여야 한다면서 그렇다면, 사원여러분은 각자 얼마씩 벌여 들이면 될 것 같으냐(?)고 물었답니다. 모두들 나름 되로 계산해서 얼마씩이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강의하든 경영학자는 ‘여러분이 회사로부터 수령하는 년(年)봉의 열(拾)배쯤은 벌어들여 주어야 한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근거로 또는 어떤 이유로, 자신이 받는 급여의 열배를 벌여야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최 일선에서 뛰고 있는 사원으로서는 자신의 일과 같이 얼마나 열심히 일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필자 또한 자신의 직무범위에 속하는 사항은 확실하게 챙겨 빠짐없이 행하려는 마음자세와 최고의 정열을 바쳐 근무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따라서 매일 같이 또는 누구나 행하는 직무일지라도 건전한 정신과 건강한 육체 그리고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정상적인 마음가짐에서 우러나오는 순수한 정성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연속적이고 반복적인 직무라 할지라도 처음 시작할 때마다 완전무결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마음가짐도 필요한 것입니다.
아울러 휴무일에는 노는 날이 아니라 쉬는 날임을, 또한 당번일은 쉬는 날이 아니라 근무하는 날임을 인정하고 휴무일부터 당번 근무준비에, 차질 없도록 습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휴무일의 과음은 그 주기로 인하여 당번근무에 집중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혼미해진 정신 상태에서 행하는 모든 직무행위는 그야말로 술기운으로 행하는 직무로 될 것이며, 그 술기운에 의한 직무행위는 최고의 가치 창출은 커녕, 국가와 국민에 대한 공무집행을 방해받고 있음을 수긍해야 할 것입니다. 즉 사람의 정신과 마음에 티가 없이, 맑은 정신과 청정한 마음으로 행하는 직무수행, 이것이야 말로 국가와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감이며 자신으로서의 의무일 것입니다.
(2) 천직(天職) 의식이 필요하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천민신분인 망나니에 관한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할까 합니다. 그 당시 최고신분계층인 사대부 양반가에서 최하신분계층인 망나니에게 뇌물 아닌 뇌물을 바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또한 양반가의 학동(學童)들은 백정(白丁)에게 세배(歲拜)도 했다는 것입니다. 참형(斬刑)의 집행기관인 망나니에게 최고신분계층의 사대부 양반가에서 망나니를 찾아가 ‘잘 처리 해달라!’고 부탁하며 뒷돈을 줬다? 또는 양반가의 학동들이 백정에게 세배(歲拜)를 했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어느 양반가의 식솔 중에서 중한 죄를 범하여 문초한 결과 참형의 벌이 확정된 후, 그 형벌(斬刑) 집행 전날쯤에 사대부 양반가에서는 망나니 집으로 찾아가서, 내일 우리 가문의 아무개가 형(斬刑)을 당하게 되었으니, 부디
“단(單) 칼(刀)에 성사시켜주기 바라네!”
라며 돈 꾸러미를 줬다는 것입니다. 이쯤이면 이해가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게 즉, 잘 봐 달라며 뒷돈을 주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도 충분하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못된 망나니가 심술을 부려 내려치는 첫 칼이 빗나가거나, 또는 내려치는 팔의 힘이 약하여 죄수의 목이 반쯤 베어지게 되면 다시 한번, 칼을 내려쳐서 완벽하게 죄수의 목을 베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죄수는 잘못 내려친 칼로 인하여 두 번의 칼을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보통 인간으로서는 죽음의 순간을 한번만 맞이한다는 것도 여간 두렵고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그 고통도 말할 수 없이 크게 될 것입니다. 그런 죽음의 공포를 한번도 아니고 몇 번씩 맞는다고 상상해보세요.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습니까?
그렇게 하여 죽음의 두려움을 여러번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 그 첫째 이유이고, 또 형(刑)집행이 완료된 후에는 죄수의 시신을 가족에게 인계하여 장례를 치르게 하는데, 이승에서는 비록 죄를 지어 목을 베었어도 저승에 갈 때는, 온전한 인간으로 가게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외과적 수술을 하듯이, 망나니가 몸통과 머리를 똑바로 붙여 바느질을 잘해서 가족에게 인계하게되는데, 시신의 몸통과 머리가 정상상태로 붙여져야 할 것이기 때문에 사대부 양반들도, 그때는 망나니에게 굽실거린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참형의 집행으로 죽은 부모형제 또는 자식의 목(두상)이 거꾸로 붙어있다고 상상해보면, 천민중의 천민인 망나니가 아니라 그 누구에게라도 고개 숙여, 온전한 시신을 바라는 마음은 똑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반들도 망나니에게 하대(下待)도 쓰지 않고 뒷돈도 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노인들도, 장래희망은 고생 없이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죽어가면서도 고생스럽게 죽어 가는 경우도 많다고 듣긴 했지만, 과연 어떻게 해야 고생 없이 죽을 수 있는지를 우리인간들로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노인들은 겉으로는 표현을 잘 안 해도 나이가 들수록 죽을 걱정을 많이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필자도 죽음의 순간은 가장 평범하게 그리고 가장 편안한 가운데서 엄숙하고 장엄하게 맞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살아생전에는 거지같이 살았거나 또는 부자로 살았거나 아니면 어떻게 살았든 간에,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과정인 죽음의 순간은 추하게 보이지 않으면서도, 종신해야 할 가족이 다 모인 자신의 안방에서 편안하게 이승을 떠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를 100% 완수하는 데는 자신이 최고의 적임자인 동시에, 자신밖에 없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하기 좋은 말로 100%이지 실제로는 그 100% 완수란,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도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나 상하계층 간에는, 뚜렷한 시각차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즉, 피 감독자는 최선을 다해 임무를 완수한다고 자신하고 실행하지만, 감독자의 눈에는 어딘가 부족하게 느끼게 되고 이것저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개구리와 올챙이이야기 즉, 지휘감독자(개구리)가 올챙이(피 감독시절)적 생각 못 한다는 말들도 필연적으로 따라 붙게 되겠지만, 개구리도 개구리 나름이며 올챙이도 올챙이 나름이라는 사실도, 반드시 상기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 감독자는 자신의 지휘감독 하에 있는 부하직원의 직무수행행위가 잘못되었다고, 이것저것 지적하고 시정하게 하면서도 정작 자신도 상급감독자에게 지적을 받게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각 계층의 감독자들마다 똑 같이 반복 재 반복되는 것이며, 상위계층의 감독자일수록 그만큼 시야가 넓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또한 바라보는 각도(時角)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는 사실도 인정해야합니다.
따라서 감독자의 눈에는 어떻게 비치든 자신의 직무에 대해서는,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솔선수범하고 미쳐 못 느끼고 있었거나, 또는 알고 있었으면서도 행하지 않았거나 혹은 귀찮아서 생략한 부분의 지적에 대하여는, 겸허하게 수용하고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비단 관료조직 내에서만 일어나는 일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며, 가정과 사회에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또한 반복되고 있는 일일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직무수행과 관계되는 기본적인 사항은, 그 직무를 접하게 되면서 기본교육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다 배우게 되고 아울러, 수시 반복교육도 받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지휘감독자와의 큰 시각차는 없어야 당연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직무수행인 것이 아닐는지요.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도 상당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얼마 전, 어느 감찰담당자가 어떤 직원의 비위가 노출되어 조사를 해본 결과 인간적인 면에서나 도덕적으로나, 직업 윤리상으로 보더라도 그런 자는 징계위원회에 회부하여 파면을 시켰어야 마땅한 자라고 하면서도, 차마 인생이 불상해서 파면절차는 추진하지 않고 징계권자의 결재를, 얻어 타서로 전출상신 했다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듣고, 참으로 씁쓸한 뒷맛을 남겼습니다. 요즘 들어 생각해보면 그 담당자는 ‘자신의 직무를 성실하게 완수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보통의 감찰담당자들은 비위조사 결과 파면을 당할 마땅한 비위가 있어도, 차마 내 손으로는 파면절차를 추진하지 못하겠고 다른 감찰담당자 또는, 그 누군가의 손에 의해 파면되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라면, 조선시대 참형의 집행기관인 망나니만도 못한 직업 윤리관을 가졌다고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인간이 인간의 목숨을 빼앗는 형벌을 가(加)한다는 것은 기독교에서의 ‘원수를 사랑하라!’그리고 불교에서의 ‘살생을 금하라!’는 교리와는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형벌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극형에 해당하는 참형의 집행은, 누구나 거리킴 없이 행할 수 있는 업무가 아니기 때문에, 시키는 되로 할 수밖에 없는 천민중의 천민인 망나니에게 주어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제정하여 시행하고 있는 이 법에 의한 참형의 형벌을 집행한 망나니는 사후, 곧바로 종교의 교리 되로 지옥으로 가게 될 것인가? 아니면, 천당이나 극락세계에도 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뿐만 아니라 현(現) 시대에도 사형은 교수형으로 집행하게 되는데, 교수형의 집행관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행위는 각 종교의 교리에 의하면, 인간이 인간을 죽였으니 지옥으로 가게 될 것이 명약관화한 사실이 아닙니까?
그러나, 참형이나 교수형의 집행이 자신의 직무범위에 속한다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하찮은 미물에 불과한 짐승세계에서도 그들 나름 되로 질서가 유지되고 있듯이, 인간세계에서도 어떤 형태로든 질서유지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며 살기 위해서는, 타인으로부터 간섭이나 방해를 받지 않아야 자신의 임무완수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고, 따라서 그 질서를 위반한 사람에게 형벌을 가해서라도, 질서는 반드시 유지되어야한다는 구성원 공통의 공감대가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고, 또한 그 형벌을 누군가는 다른 사람이 반드시 집행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형벌의 집행자에게 각 종교의 교리에서와 같은 벌칙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예수님이나 부처님께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결론입니다.
(3) 기본근무의 2중성.
필자의 현재직무는, 대민 접점 부서인 경찰조직의 최하단위이고 기본단위인 ○○파출소장으로, 관할구역 내 주민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라는 목표아래 범죄의 예방과 이미 발생한 범죄에 대한, 수사 및 직원들을 지휘 감독하는 것입니다. 파출소직원의 근무라는 것은, 예방업무가 위주이어서 아무리 열심히 또는 나태한 근무에도, 개량화 할 방법이 없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소장을 비롯한 직원들의 근무는 제반 규정 및 일일업무지시 등에 의해 모두가 ‘기본근무’라는 형식으로 매일매일 소장에 의해 지정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기본근무 즉, 범죄의 예방이라는 업무는 어떤 형식으로든 실적을 평가할 수 없기 때문에, 직원 개개인의 직업윤리관 도덕심을 기초로 자율과 창의적인 순찰에 의존하고 있으나, 개중에는 감독자의 시각에서 시정 보완할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범죄취약여부를 판단하여, 구성원인 직원각자가 자율과 창의에 의한 순찰을 실시하므로 서, 범죄를 예방하자는 실정인 것입니다. 이러한 ‘기본근무’라는 것은 범죄예방의 수단으로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필자로서는,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직원 각자에게 부여된 업무는 최선의 방법으로 완수토록 하자는 것인데, 직원들 중에는 특별한 사람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근무시간을 초과해서까지 지휘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규정되어있는 근무시간의 범위 내에서만큼은 아무리 가볍게 여겨지는 업무라도 빠짐없이 챙겨, 훗날의 근무태만 등의 시비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각종의 징계책임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신상관리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사회, 어느 조직에서든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규율을 정하고 그 규율을 위반하면 벌칙이라는 규제가 따르듯이, 일반 사회에서도 법이 있어 그 법을 위반하면 벌을 받게 되고 이어, 전과자가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일 것입니다. 따라서 경찰조직내부에서도, 엄한 규율이 있을 뿐 아니라 행정법상 특별권력관계로 인한 상명하복의 관계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행위책임에 대한 지휘(감독)책임이 따르기 때문에 직원들이 각종 책임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업무감독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지휘감독이라는 것 자체가, 일반사회에서도 규율을 위반하면 형벌을 받고 전과자가 되듯, 공직사회에서도 각종규율을 위반하면 그 규율위반의 정도에 따라, 민․형사책임은 물론 행정책임인 징계책임도 감수해야하고, 따라서 조직 내에서의 전과자가 되기 때문에 직원의 신상관리는, 소신껏 또는 마음 놓고 근무할 수 있는 여건조성을 위해 신상보호차원에서라도 신경을 써 줘야하는 것입니다.
직원 중에는 미쳐 깨닫지 못해 챙기지 못하거나, 실수하여 규정된 업무가 생략 또는 결략 되는 경우 등, 복무규율을 위반하는 사례들이 종종 있어 많이 챙겨보는 편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직원들의 근무 년 한의 장단에 관계없이 게으르거나 또는 태만한 경우 등도, 많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끝임 없이 챙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諸)들 하는 되로 두고 보면 지휘감독책임도 반드시 따르기 때문에, 보통사람보다는 많이 챙기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경우에는 고맙게 생각하고 적극적인 시정노력을 하며 잘 따르고 있지만, ‘먼저 난 털보다 나중 난 뿔이 더 우뚝하다’고 돼먹지 못한 경우 위계질서의 엄격함도 망각하고 ‘설마 지가 날 어떻게 할거야?’하면서 ‘날 잡아 잡슈!’하는 식으로 버르장머리 없이 구는 경우도 있긴 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냥 두고볼 수도 없을 때는 자연히 좋지 않은 소리가 따라다니고, 때로는 나쁜 소문도 퍼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직무를 수행하는 동료들 간에는 지식수준과 시각차를 초월하여 양심과 이성에 비추어 감독자와 피 감독자 서로간의 공방에 대하여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감독자나 지적을 밥 먹듯 받는 피 감독자와의 관계에서, 누구의 언행이나 주장이 옳은지 또는 그른지는 동일조직의 동료(직원) 모두가, 올바른 이성과 상황판단으로 서로간의 언쟁과 주장을 판단하고 있을 것이며, 먼 훗날 또 다른 동료들과의 이야기 끝에 현재의 언행과 주장 등의, 줄거리가 회자될 수 있다는 사실도 명심해 두기 바랄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 5대 악당’이라는 등 험담과 헛소문을 내기도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노력(?)으로 말미암아 필자와 같이 근무한 기간 동안의 업무와 관련하여, 같이 근무한 직원 중에서는 단(單) 한 명도 징계를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별것도 아니지만 그 무엇보다도 긍지를 가지며, 또한 자부심도 느끼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러한 전통이 퇴직할 때까지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나, 하도 험한 것들이 많아 어찌될지는 모를 일입니다. 근래에 들어서는 명시적인 지시나 문서의 하달은 없이, 문제성 있는 직원들을 보내오면서 아무래도 ○○○한테가 아니고는 보낼 곳이 없으니, 버르장머리를 고쳐주든지 아니면 근무에 태만하거나, 위계질서를 어지럽게 할 경우에는 ‘보고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총대까지 짊어지면서 머리통 다 큰 자들과 싸울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자들도 모두 신상보호를 하려니 힘들고 고달플 뿐입니다. 그러기에 마부가 말에게 물을 먹이려고 말을 강으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말에게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다고 옛 선인은 말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데도 어느 날 후배직원이
“○○ 선배! 직원들 좀 가만히 놔두세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대뜸
“그게 무슨 말이냐?”
고 했더니 어느 직원이 선배를 좋지 않게 이야기들을 하고 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곧바로 ‘어떤 미친놈이 그래?’ 대꾸하며 ‘내가 제 놈들에게 무엇을 바라기에 좋지 않은 말들을 하고 다녀!’ 그러면서 인간이란 3~ 4사람만 모여도 그 중에는 반드시 모(성질․행동 등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점) 난 사람이 끼이게된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제몫은 해야 되지 않겠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그런 얼마 후 또 다른 후배직원이 위 이야기와 비슷한말을 하며,
“많은 직원이 부정적으로 이야기하고 다니면 좋을 게 없지 않겠습니까?”
하며,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보다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많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소위 과반수이상에게는 긍정적이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숫자와는 완전히 초월하고 살아 온지 오래되었다면서, 과연 몇 %에 해당하는 사람이 긍정적인 평가를 하느냐?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아니라고 하면서
“그래? 나도 그런 이야기는 듣고 있다!”
따라서 누가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는지 묻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사람과 혹시라도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즉,
“두 사람의 근무형태를 자세히 살펴보기 바란다”
고 하며, 직원들 간에는 그 두 사람의 ‘근무형태를 비교 분석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자,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지 한참을 의아해하여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자
“아하 그렇다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동료들 간에서도 근무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는 사람과, 기본근무조차도 나태하고 태만하다고 알려진 사람과의 차이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례는 보잘것없는 미물사회에서도 관찰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구성원의 개체 하나 하나가, 모두 밤낮 없이 자신에게 부여된 업무를 열심히 완수하는 것처럼 보이는 꿀벌사회에서도, 약 80%정도는 하나같이 각자 부여된 업무를 열심히 완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나머지 약 20%정도는 게으르고 태만해서 미처 제몫도 하지 않고 놀고먹는 놈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재미있는 것이 열심히 일하는 약 80%에 해당하는 놈들만 따로 분리시켜놓고 살펴봐도, 또는 게으르고 나태한 약 20%에 해당하는 놈들만 따로 분리시켜놓고 살펴봐도, 어느 쪽을 막론하고 한결 같이 약 20%정도는 역시 놀고먹는 놈이 반드시 있더라는 것입니다. 사회공동생활의 표본으로 여겨지는 꿀벌사회에서도 이러할 진데 우리인간사회는 말해 뭐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사회의 어느 조직을 불문하고, 자신의 직무를 열심히 찾아 행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는 반드시 있게 마련일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몫은 물론이고, 남의 몫까지 하는 사람도 있는가하면 남에게 빌붙어 자신의 몫도 못하는, 즉 무임승차하는 사람도 더러는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어느 사회 어느 조직에서든, 자신의 몫은 물론이고 남의 몫까지 하는 사람에 의하여, 그 조직이 유지되고 있다 할 것입니다.
필자의 근무 부서는 조직의 기본단위인 소(小)그룹으로 약 20여명이 근무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20%정도에 해당하는 약4~ 5명은 자신의 몫은 물론이고 남의 몫까지 하는 사람으로, 능동적으로 또는 감독자의 지시에 적극적으로 당면업무를 수행하고 있으나, 그 외 나머지 인원은 그저 그렇고 그런 편이며 따라서, 그 4~ 5명으로 인하여 그 소규모 조직의 많은 업무를 처리하는 실정이며, 소위 문제성 운운하는 자들은 상위단위인 중(中)그룹에서 약 1%내외에 해당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이런 문제성 운운하는 자들은 어느 조직에서나 어느 시대에나 있게 마련인 것 같습니다.
또한 현재의 조직에 들어온 이후, 상당한 갈등이 있긴 했었지만 천직으로 알고 모두 15명의 소장을 모셨는데, 각 소장들마다 장단점이 있었든 것은 물론입니다. 그 장단점 중에는 윤리도덕심을 기초로 한 공․사적 언행들 중에서, 본받을만한 것과 버릴 것들을 취사선택하여 내가 만약 파출소장의 위치에 있다면, 이럴 때는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하는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판단을 하였으므로, 항상 사심을 버리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직원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다면, 오로지 정년퇴임 시까지 신상에 흠(瑕疵)이 없이 깨끗하고 명예롭게, 퇴직하게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 자들도 이런 필자의 마음을 모르지는 않으면서도 다만 하기 싫고 또 연령이 약 50대(代)만 되어도 귀찮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누구의 간섭도 아니 받고 하기 싫으면 아니 해도 될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닌데, 그런 결단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필자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오랜 기간 동안을 파출소장직무를 수행하면서 수많은 사건과 사고를 처리하였고, 또한 수많은 계층의 사람들과 대화는 물론 어떨 때는 논쟁도 가졌으며, 매 사건 하나하나를 입건 또는 훈방으로 처리할 때마다, 사회정의와 법 감정 그리고 직업윤리관을 기초로 가해자와 피해자 또는 사건관계자에게, 그 이유를 명확하게 제시하여 이해나 설득시키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사건사고를 접할 때마다, 먼저 그 사건의 정황과 가해자 및 피해자의 심리상태 또 사건개요를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안타깝게 여겨지는 경우도 많았든 것은 사실입니다.
즉 권한범위 내에서 훈방할 수 있는 사안도 당사자의 반성이 없으면 훈방하고 싶지 않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당사자의 눈물어린 후회와 뼈저린 반성이 있어도 권한 밖의 사안으로 입건해야할 경우에는, 역지사지의 심정이 되어 눈시울이 젖어오는 것을 경험하기도 하였습니다. 형벌의 여러 가지 목적 중에는, 아무리 흉악한 범죄인이라도 할지라도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만들기 위한, 교화의 목적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형벌이라는 사회의 벌보다 자신의 양심적인 가책이 더 큰 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쯤에서 훈계 방면한 사례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1990년 초겨울 어느 날 오후, 직원들 간에 수군거림을 느끼고 한 직원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 직원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엊그제(이틀 전) 야간 근무할 당시 112신고를 접하고 현장에 도착해보니 20대 초반의 여자가, 만취상태에서 길(道路)가에 미쳐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을 토(吐)한 채, 널부러져 있는 것을 파출소로 데려 오게 되었는데, 길가에서는 자신의 안방 침대에서보다 더 편한 상태로 정신을 잃은 채 잠자고 있었는데, 경찰관이 ‘아가씨! 일어나서 집으로 가서 잠자라’며 깨우자, 정신이 조금 드는 듯하다가 다시 쓰러지기를 반복하여 결국 파출소로 데려 왔다는 것입니다. 파출소에 도착해서 또다시 ‘여기는 ○○파출소인데 아가씨 집(宅)이 어디인지 말해주면 우리가 집에까지 태워다 주거나, 가족에게 연락해서 데려가게 하겠다’며 ‘어디 사는 누구인지’를 묻자, 보통사람 누구나 와 같이 파출소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파출소로 왔느냐(?)”
며 소위, 선량한 시민을 경찰이 집에도 못 가게 한다면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등 흔히들 가끔씩, ‘경찰 25시’ 또는 ‘파출소 24시’등 프로에서 소개되는 그대로였습니다.
술을 어느 의사는 ‘향정신성 식품’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향정신성 식품을 섭취하게 되면 우선 정상인의 정신 상태에서와 같은 사물의 판단능력이 저하되고, 성격이 대담무쌍해지며 두려울 것이 없어지고 따라서 부끄럼이나 수치심이 없어지면서 소위, 이성(理性)의 통제범위를 벗어나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적당한 주량의 선을 넘어서면 그때는 기억조차 없어지는, 다시 말해서 테잎이 끊어지는 상태로까지 가게 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기억도 할 수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억에도 없어지는 상태에서의 언행에 대하여는 필설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필설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들을 남녀노소가 다같이 연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상태가 바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세상에서 자기만이 잘났다고 뽐내는 일)으로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술 때문이기는 하지만 …
술을 마시는 사람이라면 한번 씩은 기억상실상태의 경험이 있을 줄 알지만, 무서울 것이 없어지면 눈에 보이는 것도 없어지는 사람들의 언행은 그야말로 기고만장 바로 그것이지요. 이런 경우를 주로 주사라고들 하는데 물론 기억상실상태라고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기억상실상태의 주취자라고 모두가 주사를 부리는 것도 물론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의 처녀가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과 행패를 부리는 과정에서 옆에서 진정시키든 경찰관의 뺨을 때렸다는 것입니다. 필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경찰관이라면, 자신의 업무처리과정에서 발생하는 약간의 피해에 대하여는 수인(受忍)의 의무도 주어져 있다고, 강조해 왔든 터라 뺨을 맞은 직원도 반격이나 보복은 하지 아니하였고, 옥신각신하든 중에도 겨우 주소지를 알아내어 가족에게 인계하였는데, 그 아가씨는 가족으로부터 자신의 언행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설마 내가 파출소에서 그렇게까지 했을까?”
고개를 가웃 거리면서도,
“저녁때에 파출소 해당직원에게 사과를 하겠다”
고 전해 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아가씨가 찾아오면 ‘소장 앞으로 데려 오라’ 일러놓고, 사건의 내용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그 전말을 짐작하고, 그 아가씨를 어떻게 처리해야하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소장이 퇴근한 이후에는 부소장이 사건의 내용을 판단하고 가족에게 인계한 이후이니, 다시 의법 처리 할 수는 있었지만 법에 의한 처벌만이 능사는 아니며, 이미 그 아가씨도 경찰관들이 자신을 처벌할 의사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처벌보다는 자신의 과오를 진심으로 뉘우치게 하고 참회하게 하므로 서, 또한 주사의 습관화를 하루라도 일찍 차단할 수 있는 가능한 방법으로,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설프게 훈계랍시고 하다보면 역효과가 날것이 뻔하고, 또 본의와 다르게 초점이 흐려지면 젊은 여자에게 뜻밖의 오해를 가지게 되면 소위 ‘소드래’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칫 잘 못하다가는 성적 농담으로 비쳐지게 되면 아니한 만 못할 것이어서, 참으로 사서 고생하는 심정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대부분의 주취자 들은 경찰관에게 행패를 부리거나 싸워도 경미한 사안이라고 훈계방면을 하게 되면, ‘아하! 이 정도는 처벌의 대상도 아니 되는구나’하는 오해를 가지게 되며, 자신의 친구들과 모인 어느 좌석에서든지 경찰관과 싸워서 이긴 것으로 착각하고, 무용담이라도 되는 양 자랑삼아 떠벌리고 공권력의 권위를 무시해도 괜찮은 것으로 오인하게 될 것이고, 그 무용담(?)을 들은 친구들 역시 다음 기회에 경찰관의 각종 공무집행에, 정당한 항의의 수준을 벗어난 방해로 경찰관에게 달려들고, 억지를 부릴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필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어느 좌석에서 수차례 들은바가 있었기에, 설사 사안이 경미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친구 앞에서 적어도 무용담으로는, 자랑 같은 이야기를 못하게끔 따끔한 훈계로 반성하게 하든지, 아니면 국가권력의 대명사인 공권력에 도전해서는 아무 이득도 볼 것이 없다는 방향으로, 반성하게 하여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게 해야 하고 결국은 반성의 시발점이 되도록 하는, 방법이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친구들 앞에서 무용담(?)이라도 되는 양 자랑하는 사례는 흔히 있을 수 있는 것이기에, 그 아가씨도 자기친구들 앞에서 자랑삼아 ‘야! 엊그저께 내가 술 한잔 마시고 파출소에 들어가서, 짭새들 혼도 내주고 한바탕 스트레스도 풀었지!’하는 식으로 하지는 못하게 해야하고, 반면에 그 사건만 생각하면 스스로 수치심이나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방향으로 훈계나 야단을 쳐야할 것이며, 그러면서도 그 아가씨의 행동은 분명한 주사인데, 그런 주사는 못 고친다는 것이 정설이나 어릴 때부터 고치려고 노력하게되면, 가능성도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그 아가씨의 주사도 고쳐주는 방향으로, 목표를 정하고 다시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사서하는 고생이었으며, 바쁜 오후였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아가씨가 도착하면 필자가 지금까지 생각하고 목표로 삼았든 사항들을 이야기하고 끝으로, 자신이 파출소에 들어와서부터 CCTV에 녹화된 한편의 다큐물(物)을 감상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윽고 약속시간이 되었는지 그 아가씨는 도착하였고 필자에게 이르렀습니다. 그 아가씨에게
“엊그제 파출소에 왔든 일이 기억나느냐?”
고 물었더니, 참인지 거짓인지 모를 일이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필자가 준비했든 되로 지금까지 생각하고 우려했든 모든 사항을 이야기해 주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당시의 진실을 직접 확인하라며 CCTV에 녹화된, 한편의 다큐물(物)을 상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야! 이○○들아”
하는 장면이 방영되면서부터 표정이 달라지며 울음보가 터지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점점 더 거세지기에 상영을 끝내고 몇 마디 덧붙여 돌려보내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 아가씨는 그 이후부터는 술자리가 있을 때마다 어떻게 처신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필자의 희망사항으로는 부디 술좌석에 임하는 대상이 누구이든 술좌석에 임할 때마다, 지난 어느 날 과음으로 자신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정신을 잃은 채 길거리에 널브러져 자다가, 파출소로 데려간 경찰관에게 욕설과 뺨을 때리며 행패를 부렸든 그 악몽 같은 사연들이 동영상처럼 연상되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만약 필자의 희망 되로 술좌석에 임할 때마다, 그 동영상이 주마등처럼 연상된다면 그 아가씨의 음주문화가 확 달라게 될 것이고, 아울러 동료들의 과음도 자제시켜 줄 것입니다. 그러나 지각없거나 철딱서니 없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현상이 없이 ‘언제 무슨 일이 있었더냐(?)’는 식으로 잃어버리고 나면, 자신의 음주습관도 주사도 계속될 것이며, 따라서 필자는 헛고생만 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나. 당신께 고(告)합니다.
여기까지 와서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망설여지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비록 얼마 길지 않는 일생을 통틀어 지금 같이 희망도 비전도 없어 보이는 조국의 모습은 그야말로 없었든 것 같습니다. 필자의 애국심이라는 것이 누구보다 특출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누가 인정해주지 않아도 또한 어느 누가 기억해 주지 않고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 하더라도, 대한민국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수많은 애국자 중에서도 미력을 바쳐 언제 어디서나 나라의 장래를 위해 열의와 성의를 다한 조그마한, 애국이었음을 자부합니다. 그것은 학창시절 때부터, 마을공동사업과 간척사업은 물론이고 산림녹화사업 등 새마을사업에도 참여하였으며, 이후로도 정부시책에 호응하여 적극적으로 실천하였고 직장에서의 업무수행과정에서도, 비품이나 용지 한 장 아껴 쓰라고 직원들을 닥달하다 싶히 하였습니다. 비품절약은 물자절약인 동시에 외화절약이기에 일생동안 사랑하며 가꾼 이 조국을, 보다 영광되고 자랑스러우며 살기 좋은 환경으로 후손에게 물러줘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5․6공화국정부에서는, 수 천 억 원의 비자금을 관리하다 전직대통령들이 구속되는 상황을 지켜봐야 했는가 하면, 문민정부에 들어와서는 대통령의 아들이 구속되는 사태를 지켜보며 할 말을 잊었는데, 한술 더 뜬 국민의정부에서는 그것도 두 아들이 구속되는 등, 한심한 작태가 끊이지 않았든 나라모습은 모든 국민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하였고, 정치수준이 경제수준을 따라잡는 날은 가히, 백년하청이라 생각한 것은 필자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청탁하는 전화를 받은 사람은 분명히 나서는데 전화를 건 사람은 없는 세상, 소위 언론사대책이라는 문건이 분명히 여기 있다고 하는데도 그 문건을 기안 한 사람은 없는 세상, 모 언론사 기자가 비서실 모 부서 모모 비서관으로부터 언론사 죽이기 프로그램 이야기를 들었다고 폭로하는데도, 모두가 ‘나는 안 그랬다!’며 꼬리를 감추며 숨어버리는 세상, 또한 사상초유로 최장기간 최대인원을 동원하여 초정밀 잣대로 언론사 길들이기라고 회자되고 있는, 보복성 짙은 언론사세무조사(23개 언론사에서 총 1조 3594억 원의 소득 탈루 사실을 적발하여 총 5056억 원을 세금으로 추징)로 인하여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면서도, ‘정기적인 업무수행이다’ ‘그게 아니고 보복이다’라는 양쪽주장에 어리둥절한 백성들은 각자가 알아서 판단해야하는 세상, 미국의 시민권을 얻기 위해 원정 출산도 마다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며, 같은 시대 같은 하늘아래에 살았다는 명예스럽지 못한 억울한 심정을 후손들은 어떻게 판단하고, 무슨 말로 위로해 줄 것인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음주운전으로 단속되는 경우에도, 죄의식을 느끼며 후회하고 반성하기보다는 ‘재수가 없어 나만 걸렸다’며, 단속 경찰관에게 반항하거나 오히려 공무집행을 방해하여 더욱 더 큰 벌칙을, 자초하는 경우도 허다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음주운전의 결과는, 자신의 가정을 망칠 수도 있는 것은 물론 남의 가정까지 망치는 원인이 될 수 있으므로 인해, 용서받을 수도 또한 용서할 수도 없는 범죄행위인 것임을 인식하고, 누구든지 삼가하고 만류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거세개탁(擧世皆濁: 온 세상이 다 흐리다는 말로, 곧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다 올바르지 않다는 뜻)을 탓하지 않을 수 없을 지경이었지 않습니까?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아질 것이라고 하는데, 사회규범인 법률을 제정하는 정치인들도, 집단이기주의에 편승하여 법다운(속칭, 돈 세탁 방지)법, 하나 제정하지 못하는 이런 세상, 기업인도 지식인도 전문직종사자도 자영업종사자는 물론, 아무런 권한과 권력도 없는 민초들은 사회규범인 실정법의 준법정신도 질서의식도 팽겨 치듯 외면하고, 관료사회에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지연 학연 혈연으로 얽히고 설켜, 형님 아우가 한통속으로 놀아나는 세상, 무법천지(?)와 같은 혼란 속에 법이 있으되 법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 사회를 지켜보며, 국가의 장래가 참담한 이런 지경이고 보면, 아마 당신께서도 부끄럽고 어두웠든 지난날들과, 어깨에 힘주고 뽐내며 찬란했든 추억들이 주마등같이 스쳐 가는 한편, 국민의 뜻을 한곳으로 결집시킬 수 있는 탁월한 지도자가 없음을 한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OECD회원 29개국 중, 우리 정부의 민주제도 시행 수준은 과연 몇 위(位)쯤 이며 관료사회(월 급여 또는 년 봉 수령자를 통 털어)의 청렴도와 직무에 대한 성실도는 과연 몇 위쯤이며, 또한 우리 국민의 민주주의 준법의식 수준은 과연 몇 위쯤인지? 알고 싶을 뿐입니다.
그런데, 언론사 세무조사 후 비위 언론사가 검찰에 고발되고 한참동안 ‘정기적인 업무수행이다’ 한쪽에서는 ‘보복이다’ 시끄러웠든 2001년 7월 어느 날 동료직원 한 사람이
“아직도 ○○일보를 보십니까? ○○는 ○○출신이니까 ○○○편이겠네요!”
“신문이나 방송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지 내편이 아니면 자신의 취향에 맞아도 아니 보고, 내편이면 취향에 맞지 않아도 보느냐?”
하면서,
“왜? 이렇게 편을 가르는지 모르겠다, 그럼 당신은 그 쪽 편이겠구먼! 무슨 이익을 얼마나 많이 보았느냐?”
고 대꾸하고,
“○○와는 동성동본이기는 하지만 득 본 것 없고 ○○시대에서도, 특별히 손해 본 것은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고 했지만, 무슨 말이든지 좀 더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언론사세무조사와 관련된 필자의 소견을 이야기했었는데,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그 직원은 한참동안 멋쩍어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같은 편 가름은 마치 사색당파가 한창이든 조선시대를 연상케 하는데, 그래도 그때는 지식인(士大夫)층에서 학문적인 파당이었지만 작금의 편 가름은 지역간도 부족하여, 같은 직업 군(群)에서도 같은 계층에서도 심지어는 한 가정 내에서도 나타난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뚜렷한 경계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사색당파라기보다는, 사분오열이라는 말이 더 적당할 작금의 편 가름이 국가장래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걱정될 뿐입니다. 과연 국가위기상황이 닥쳐왔을 때, 어떻게 국론을 결집시켜 대처할 것이며 또한 충분한 능력과 지휘력을 갖춘 훌륭한 지도자가, 출현할 것인지 걱정됩니다. 그렇다고 지식인층에서,
“이래서는 아니 됩니다!”
하며 나서는 사람 하나 없고, 사회의 선도자 역할에 충실해야할 언론도 탈세와 과당경쟁에 정신이 팔려 돈벌이에만 눈이 뒤집힌 시대를 살아가며, 국민들은 민주라는 권리만 있는 줄 아는지 부수되는 의무는 철저하게 외면하는 사회, 이런 상태의 조국을 고스란히 후손에게 물려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든 사람들도 필자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무릇 우리인간도, 병들어 아프거나 괴로울 때 특히 임종의 문턱에서는 반드시 지난날들을 되돌아보며 영욕의 순간들을 반성하며 후회하기도 하는데, 하물며 당신께서야 우리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수많은 년륜과 영욕(榮辱)속에서, 이만큼이라도 지켜오느라고 오죽하였겠습니까? 그래서 역사라는 영역에는 너무도 문외한이지만, 당신의 과거사에 해당하는 한 줄기만이라도 살펴보기로 하였습니다.
“․․․, ․․․”
역시 평소에 알고 있었든 5000년 역사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당신께서는 더 큰 천하를 호령하며 웅지를 펼쳤다는 사실과 또한, 당신의 존함(尊銜)도 본의와는 상관없이 위정자들의 필요에 의해 수없이 개명되었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더 오래 전에는 미처 존함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후손으로서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될 현실에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민족의 역사는 언제부터였을까?
흔히들 우리는 반만(5000)년 역사를 자랑(?)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반만년 역사)은 고조선 때부터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전에도 ‘배달조선’과 더 이전에는 ‘환국’이라는 역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남의 나라 역사는 잘 알면서도 우리역사는 잘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며, 이러한 사실들은 선조들에 대한 후손의 도리는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거의 잃어버린 고조선 이전의 역사를 찾아 나설 때입니다.
‘환단고기’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동이족의 비사(秘史)인
∴ 삼성기: 신라 승려 안함로가 쓴, 환인(환국) 환웅(배달조선)의 역사 책.
∴ 단군세기: 고려시대 문정공이 쓴, 단군조선 역사 책.
∴ 북부여기: 고려 말 학자 범장이 전한, 동명성왕의 아버지이자 부여의 시조인 해모수로부터 부여 멸망까지의 역사 책.
∴ 태백일사: 조선 연산군 때 학자 이맥이 전한, 환국 배달조선 단군조선 마한 변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드문드문 전한 책,
등 4권의 책을 묶은 것이다. 이 환단고기에 의한 우리 역사는,
★ 9202년 전인 BC 7199(+ 2003)년에 시베리아 바이칼호수 근처에 세워진 환국(桓國)이 7세, 3301년 동안 지속되었고,
★ 5901년 전인 BC 3898(+ 2003)년 산동반도 근처에 세워진 배달(倍達)국은 18세, 1565년 동안 이어진다. 그리고,
★ 4336년 전인 BC 2333(+ 2003)년 단군왕검이 조선을 세워 47세 단군 고열가까지 2095년 동안 이어진다. 그러나 이 책에는 BC 131년이 끝이다.
그 다음 부여와 고구려로 이어지는 것으로 전개된다. 굳이 언급하자면, BC 108년까지의 빈 공간인 위만조선≡(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무렵, 연나라 망명객인 위만이 조선 서쪽 지방에 살다 쿠데타를 일으켜 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중국 역사서인 전한서(前漢書)에 쓰여져 있음. 우리 역사는 중국 역사서인 전한서를 따르고 있다)≡이 빠져 있다.
태초에 가까운 환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역사는 오늘날까지 무려 9202년이 되는 것이고, 배달국부터 따지면 5901년이며, 단군부터 따지면 올해가 단기 4336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사(正史)로 인정받는 삼국사기는 신라(BC 58년) 고구려(BC 37년) 백제(BC 18년) 이전의 이야기가 없어 우리 역사는 2천년을 겨우 넘으며, 삼국사기가 스치듯 언급한 기자조선(BC 1122년)을 더해도 우리 역사는 고작 3127년에 그친다.
그렇다면 왜? 신라(BC 58년) 고구려(BC 37년) 백제(BC 18년) 이전의 역사서는 없는 것일까? 한 마디로 말해서 그 이전은, 한민족의 역사가 아니었을까? 아니면 문맹시대라 글자를 남기지 못했을까? 이런 저런 생각도 해 보겠지만 분명히 말해, 둘 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일이 있었기에 2천여 년 이전의 역사서가 발견되지 않는 것인가? 이것 또한 간단히 말할 수는 없겠지만, 먼저 우리 한민족의 경우 유난히도, 이민족의 침략이 많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을 것입니다. 침략을 받은 전쟁 중에서도, 우리가 패한 전쟁 때에는 많은 고대사(古代史)가 수난을 당하였고, 또한 자신의 권력욕에 눈먼 몇몇 위정자들에 위해서도 많은 사서들이 수난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한민족 고대사(古代史)의 수난사를 살펴보면.
1. 고구려 제 11대 동천왕 20(246)년, 위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 공략하여 많은 사서를 소각함. 이때 고구려『유기』100권이 사라짐.
2. 백제 제 31대 의자왕 20(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사자성이 함락되면서 사고가 소전 됨.
3. 고구려 제 28대 보장왕 27(608)년, 당 장수 이적이 평양성을 공격하여 전적을 모두 탈취함.
4. 신라 제 56대 경순왕 원(927)년, 후백제의 견훤이 경해왕을 치고 신라 책을 전주(완주)로 옮겼다가 왕건에게 토벌 당할 때 방화로 소각됨.
5. 고려 제 17대 인종 4(1126)년, 금나라에 서표를 바친 후 주체 서적은 몰수해 감.
6. 고려 제 23대 고종 20(1233)년, 몽고 흘필렬에 의해 소각됨.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가 이때 없어짐.
7. 조선 제 3대 태종 11(1411)년, 5부학당을 송제(宋制)에 의하여 설치하면서 유교를 장려하고 비유고적서적 일체를 소각함.
8. 조선 제 14대 선조 25(1592)년, 임진왜란으로 무수한 전적이 방화에 의해 소실됨.
9. 조선 제 16대 인조 14(1636)년, 병자호란 때 귀중한 사서들이 수없이 잿더미가 되어 버림.
10. 일본강점(1910년)이후 식민지 교육정책에 따라, 조선사편수회를 주축으로 군경을 동원하여 탈취, 개조, 혹은 소각해 버림.
특히 조선시대의 4대 사고 중, 전주 사고만 남고 모두 소각되었는데 나중에 마니산 사고로 옮겼으나, 고종 3(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의 강화공격으로 방화 또는 약탈되는 등, 이와 같은 과정에서 수많은 국사와 수련서, 병법서 등이 태워지거나 도적질 당하게 되었다.
다음으로는, 위정자를 포함한 내부의 사대사상에 물든 사가(史家)들에 의해, 많은 부분이 왜곡되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삼국시대 이전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에 대해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해동에 나라가 있은 지는 오래다. 기자가 주실(주나라)에서 수봉(受峰)함으로부터(BC 1122년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뒤, 주나라의 신하 기자(箕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는 중국 역사서를 이야기한다)한때, 위만이 한초에 참호할 때(연나라 망명객 위만이 조선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왕이 된 뒤, 한나라와 맞섰을 때)까지는 연대가 막연하고 문자가 소략하여 상전할 수가 없다”
는 한 마디로 끝맺었다.
신라 법흥왕 때부터 중국과 다른 별도의 연호를 써왔다. 그러나 진덕여왕 때에 이르러 신라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 연호를 사용하기로 했다. 이를 두고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또 이렇게 말했다.
“천자의 나라에 소속된 편방 소국은 사사로 연호를 이름지어 쓸 수 없는 것이다. 신라의 경우는 일심으로 중국을 섬기어 사행과 조공이 길에 끊이지 아니하면서도 법흥왕이 연호를 자칭하였으나 의심스러운 일이다. 태종의 꾸지람을 듣고서도 오히려 머뭇거리다가 이제 와서야(진덕여왕) 비로소 당의 연호를 시행하였으니 비록 마지못해 한 일이기는 하나 돌이켜 생각하면 허물을 지었지만 능히 고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부식의 이런 정신세계에서, 그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 땅 곳곳에 흩어져 있었을 고대 역사서였을 고조선 등, 옛 이야기들은 안중에도 없어 외면하고 싶었을 것이며 뒤도 안 돌아보고 부정하며 눈감아버렸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대사(古代史)가 온전하게 실존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다행히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나선 많은 사가들에 의해 상당부분 밝혀진 것(桓紀 9202= BC 7199년+ 西紀 2003년, 檀紀 4336= BC 2333년+ 西紀 2003년)은 후손으로서 우리들의 임무일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노력은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에도 계속되어야 할 것이며, 선조들에 대한 후손들의 당연한 책무로 여겨 세계 방방곡곡 특히, 우리민족과 전쟁이 잦았든 중국 그리고 일본 등의 비밀장소에 감춰 두었을지도 모르는, 선조들의 실재 역사를 찾아 낼 것을 간절히 기원하는 바입니다. 아울러 중국과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 3국이, 각자의 고대사 문화재 등을 원상회복시키는 기회도 왔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는 상대국 지도자와 관계자의, 혁명적인 사고의 전환 없이는 불가능하겠지만 말입니다.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면, 우리 한반도에는 약 70만 년 전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그 유적으로는, 충남 공주의 석장리, 평남 상원의 검은 모루등 여러 곳으로, 이들은 어로와 수렵을 주로 하고 산과 들에서 채집생활을 하며 살았다. 우리 한민족에 있어, 민족사의 실제적 첫출발은 환국(桓國)의 안파견(安巴堅) 환인(桓仁: 왕의 칭호)시대부터이다.
(1) 환국(桓國: 桓紀 1~ 3301, BC 7199~ 3898) 7代 3301年間 維持.
삼성기에, ‘환국은 고대 천해(바이칼호)의 동쪽에 있었다’고 전한다. 인류가 생긴 지 오랜 후에 환인께서 내려와 사람들로부터 추대되어 안파견(하느님을 이어받아 아버지를 세운다는 뜻) 또는 거발환(천, 지, 인을 하나로 정한다는 뜻의 호칭)이라 불렸다. 환인은 9202(BC 7199)년 전, 지금의 시베리아 지역에 환국(桓國)을 세우고, 하늘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순리와 도리에 따라 인간사회(성실하고 거짓말을 하지 말라. 경건하고 근면 하라. 효도하고 순종하라. 의로우며 음란하지 말라. 겸허하여 싸우지 말라)를 다스렸다.
환국은 12개의 나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역대 환인은 7세를 전했는데 그 전체 역년이 3,301년에 이른다. 환국의 가역은 남북이 5만리, 동서가 2만리, 서쪽은 알타이 산맥까지, 남은 몽고 동남쪽으로는 만주까지 뻗치는 큰 나라였다.
BC 6천년 경부터 마제석기와 토기를 사용하는 신석기시대로 발전하여, 덧무늬(융기문)와 빗살무늬(즐문)가 새겨진 토기를 사용하며 생활하였다. 이 신석기인들은, 중국인과는 달리 고아시아족(고시베리아족)의 한 갈래가 시베리아에서 북만주를 거쳐, 한반도로 이주해 왔다.
(2) 배달(倍達朝鮮: 桓紀 3301~ 4866, BC 3898~ 2333) 18代 1565年間 維持.
6000(BC 4000)년전 경부터 시베리아의 기후가 급강하하게 된다. 이때 하느님은 아들 환웅에게 천부인 삼종을 주고 지상에 내려가 세상을 다스리도록 했다. 이것은 환웅이 환국에서 분가하여 백두산과 흑룡강 사이에 나라를 세우고 정착한 것을 말한다. 그 도읍은 신시(神市)라 했으며 국호는 배달이라 했다. 환웅은 흔히 곰으로 알고 있는 웅족의 여인을 거두어 왕후로 삼고 혼인의 예법을 정했다. 또한 무지한 백성들을 문명화시키며 홍익인간의 도(道)를 펼치었다.
우리민족을 배달민족이라 부르는 것도, 이 환웅천황의 배달국 건국으로 수 천 년 동안 기려왔기 때문이다. 국내외의 학계에 보고된 자료와 고고학적 유물 발굴의 성과로, 고조선 이전 환웅의 배달국 건국의 역사적 실체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중국의 요녕성 지역에서 대규모로 발굴된 홍산문화 유적들이 만들어진 연대인 BC 4000~3000년경은, 요녕성 지역과 황하유역은 전혀 다른 별개의 문화권, 정치권이었다. 지금까지 황하유역에서는 나타나지 않던 대형 제단, 여신묘, 적석총군, 석관묘, 빗살무늬토기등의 홍산유적을 중국학자들은 삼황오제(三皇五帝)와 연결시켜 보려 하고 있다. 그러나 만주 요녕성 일대는 중국 정사(正史)에서 동이(東夷)라고 하는 지역으로, 고대에는 한민족의 활동 영역이었다.
갑골(甲骨)문화(BC 3500년경)는 본래 동방 동이족이 창조하고 계승 발전시킨 동이문화인 것입니다. 동이족의 활동지역인 발해연안 북부에서 최초의 갑골(BC 3500년경)이 출토되는 등, 초기갑골은 주로 이 지역에서 발견되었고 최근에는 BC 2000년경의 최고(最古)의 악기가 발견(동방에서 가장먼저 예악(禮樂)이 발생해 민족음악으로 성장)된 곳도, 동북아에서 최초의 청동기가 발견되는 곳도 역시 발해연안 북부이다. 이런 사실들에 비추어, 요녕성 홍산문화 즉, ‘동방문화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 한민족’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3) 단군조선(辰韓: 桓紀 4866~ 6961, BC 2333~ 194) 47代 2139年間 維持.
단군왕검(檀君王儉 BC 2371~ BC 2333~ ? )은, 4336(BC 2333)년전. 상월(10월) 초사흘, 배달국 말기의 혼란(요녕지방과 한반도서북지방을 중심으로 여러 부족들을 통합)을 바로잡고 천명을 받들어 계승하였다. 그의 뜻이 높고 크며 또 강렬하니 구환의 백성들은 그를 추대하여 천제의 화신이라 하고 임금으로 받들었으니 이 분이 곧, 단군왕검이다. 신시의 옛 규범을 회복하고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여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하였다.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이고 어머니는 웅씨의 왕녀이며, 신묘년 5월 2일 인시에 밝달나무 밑에서 태어났다. 단군 성조는 고조선의 전 영토를 삼한(三韓: 진한 변한 마한)으로 나누어 진한(만주)은 단군 천제(天帝)가 직접 통치하고, 마한(한반도)과 변한(요서 북경일대)은 부(副)단군격인 왕을 두어 다스렸다.
중국학자 서량지(徐亮之)는
“중국의 책력법은 동이족이 창시한 것이다(中國曆法創始於東夷: 中國史前史話 246쪽)”
라고 하여 동이 조선족이 책력법을 창시하였음을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천자(天子)사상과 천자제도 또한 동방조선족이 창시한 것이다. 이것은 고대에 동방 조선이 천자의 나라(天子國)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거짓 없이 전해주는 기록인 것이다. 최근에는 단군세기의 천문기록 특히, 제13세(世) 단군인 흘달천제(屹達天帝)50 (BC 1733)년에 다섯 개의 별이 서로 한군데 모인 ‘오행성(五行星)결집 현상’에 대한 기록이 사실임이 과학적으로 밝혀져 이 사료가 허구가 아님이 입증되었다.
구 소련학자 ‘유 엠 푸진’의 고조선 연구는, 광범위한 문헌자료의 고증과 고고학 발굴성과를 종합한 것으로, 고대사 무대를 한반도에서 만주까지 확대 조명했다. 고조선은 고도의 독자적인 선진문화를 창조 발전시킨 문명국가이며, ‘비파형 단검문화’라고 단정하고 요동을 중심으로 한반도 서부지역을 1천 년 간 중국의 지배를 받지 않은 독자적 문화를 발전시켰다고 기술했다. 미궁 투성이의 고조선(古朝鮮)은 ⟦유 엠 푸진⟧이 쓰고 고고학자「아 페 아클라드니코프」가 감수하였으며, 기원전 4세기에 국가형태를 갖춘 고대국가가 성립됐다고 기술하고 있다.
BC 1000여 년 경 만주와 몽고지역으로부터 퉁구스라는 새로운 종족이 한반도로 들어 왔다. 예맥으로 나타나 있는 이들은 선주민들을 흡수하여 세력을 확장해 나아가 오늘날 한국인의 직접적인 조상이 되었다. 이들은 청동제 무기로 주변을 정복하여 세력을 확산하였고, 반달돌칼(반월형석도)와 같은 농기구로 농업생산력을 높혀 농경사회로 발전하면서 인구가 증가되자 정치적 군장이 등장하여 정복과 피정복의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4) 기자(기후)조선(桓紀 6875~ 7004, BC 323~ 194) ?代 129年間 維持.
단군세기에는 단군조선의 변한 지역에 거주하던 수유족 우두머리 기후가 BC 323년에 변한 지역을 장악하여 칭왕하였다고 적혀 있고, 북부여기에는 이 나라의 마지막 왕 기준이 BC 194년에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겼다고 적혀 있으며, 후한서 등에는 이 나라의 이름이 조선으로 적혀 있고, 기후의 후손들이 만든 세계에는 그 명칭이 기자조선세계로 적혀 있다. 기자조선세계와 환단고기의 내용을 믿는 사학자들은 기후의 후손들이 만든 세계를 근거로 BC 323년에 기후가 칭왕한 나라를 기자조선이라 부르고, 이 나라는 BC 194년에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겼다고 주장한다.
(5) 북부여(北夫餘: 桓紀 6959~ ?, BC 239~ ?) 7代 ?年間 維持.
북부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BC 239년에 해모수에 의하여 건국되었다. 해모수는 임술년(BC 239년)에 웅심산에서 일어나 난빈에 궁실을 쌓고 고구려를 건국하고, 다음해 계해년(BC 238년)에 단군조선의 수도 장당경을 고립시키기 위하여 기자조선왕 기비와 약속하고, 해모수는 장당경을 북쪽을 기비는 장당경의 남쪽에서 고립시켰다. 해모수와 기비가 수도를 고립시키자 47세 고열가 단군은 더 견딜 수 없어 오가에게 나라를 맡기고 산으로 들어감으로써 단군조선은 멸망하였다.
(6) 위만조선(衛滿朝鮮: 桓紀 7004~ 7090, BC 194~ 108) ?代 86年間 維持.
위만이 기자조선을 빼앗아 세운 나라이다. 위만은 전한 때 연왕(註 전한의 후왕)의 관리로 있다가, BC 195년에 난하를 건너 조선으로 망명하여 조선왕 기준의 부하가 되어 서쪽 변경을 지켰다. 다음해 BC 194년에 위만은 기준에게 한나라가 쳐들어오니 수도를 지키겠다고 거짓말하고 군대를 끌고 수도로 쳐들어가서 기준을 쫓아내고 위만조선을 세웠다. 위만은 중국 한나라와 동맹을 맺고 그 원조를 받아 수 천리의 땅을 차지하여 큰 왕국을 이루었으나, 점차 세력이 커지자 한나라가 멸망시켰다.
(7) 삼한(桓紀 7005~ 7404, BC 194~ 西紀 205) ?代 399年間 維持.
북부여기에 의하면 삼한(三韓)이 생긴 시기는 BC 194년이다. 기준은 오랫동안 수유에 있으면서 백성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백성들이 모두 풍요하였다. 뒤에 떠돌이 도적떼들에게 패하여 망한 뒤 바다로 들어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변한 진한도 역시 각 자기들이 받은 땅 1백 리를 가지고 수도를 정하고 나름대로 나라 이름을 정했는데, 모두 마한의 다스림을 따르며 세세토록 배반하는 일이 없었다. 위 나라가 건국되기 전인 서기 205년에 구태백제에 정복되어 멸망하였다
(8) 가야(伽倻: 桓紀 7005~ 7761, BC 194~ 西紀 562) ?代 756年間 維持.
가야 또는 가라는 가(邊) 쪽에 있는 땅(耶.羅)이라는 뜻이다. 북부여기에 의하면 BC 194년에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은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무리들과 같이 한지(韓地)로 이동하였다. 이때 일부는 경상도 지방으로 이주하여 토착민을 누르고 20여 개의 소국을 세웠는데, 이 소국들은 진한(辰韓)이나 변한(弁韓)에 소속되었다. 이 무리는. 자신들이 사는 곳을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무리가 사는 땅(耶羅)이라는 뜻인 九邪(구야) 또는 九州라 부르거나 이주경로로 볼 때 가(邊) 쪽에 있는 땅(耶羅)이라는 뜻으로 加耶(加羅)라 부르거나 변한(邊韓 弁韓) 등으로 적었다.
신라는, 서기 514년 아라가야, 서기 532년 금관가야, 서기 562년 고령가야를 각각 병합하였다.
(9) 중국의 한군현(桓紀 7091~ 7512, BC 108~ 西紀 313) ?代 421年間 維持.
한나라는 BC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난하 서쪽에 이미 설치되어 있던 군사기구(요동군) 외에 행정기구(낙랑군)를 추가로 설치하였고, 난하에서 요하(전의 위만조선 지역)에는 행정기구(진번군)와 군사기구(임둔군)를 설치하였다.
다음 해 BC 107년에 요하 동쪽 지방을 점령하여 그 곳에도 군사기구(현도군)와 행정기구(낙랑군)를 설치하였고, 이어서 단대령 동쪽 지방을 점령하여 낙랑군의 속현을 설치하였다가 서기 313년 고구려의 세력 확장으로 패퇴하였다.
(10) 신라(新羅: 桓紀 7142~ 8134, BC 57~ 西紀 935) 56代 992年間 維持.
태백일사에 의하면 경상도 지방에 살던 무리들은 마한의 다스림을 받다가 단군조선이 멸망한 후 여러 개의 독립된 소국 형태로 존재하였다. 그 후 BC 194년에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무리를 거느리고 평안도 지방으로 이동하여 그곳에 살고 있던 한 무리를 깨뜨리고 나라를 세워 마한이라 하였다. 그러나 기준이 죽자 남은 무리는 상장군 탁의 인솔하에 한수 이남으로 남하하였는데, 이때 이 무리 중 일부가 경상도 지방으로 이주하여 그곳에 살고 있던 한 무리를 평정하고 진한, 변한이 되었다.
BC 70년경에 만주 눈수에 살던 박혁거세 무리가 동옥저(함경도 지방)를 거쳐 배를 타고 남하하여 나을촌(일명 나정, 감포읍 나정리 방면)에 도착하여 고허촌에서 13년간 살다가 BC 57년에 선주하여 살고 있던 조선 유민 6무리(진한 6부)의 추대를 받아 나라를 세우고 진한 또는 사로라 하였다. 그 후 신라 제4대 탈해이사금 8년(서기 64년)에 계림으로, 제15대 기림(基臨)이사금 10년에 더디어 신라(新羅)라 하였다.
신라는 급속한 성장을 거듭하여 제30대 문무왕(文武王) 8(668)년 삼국을 통일하므로 써, 당신께서는 하나의 존함(尊銜)으로 건재(健在)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에 가정(假定)은 없다고 누군가가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심정으로 만약 고구려(高句麗)가 3국을 통일하였다면 만주대륙은 물론이고,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제(廣開土大帝)께서 평정했든 광활한 영토를 당신께서 지배할 수 있었을 것인데(․․․)하는 것은, 필자만의 아쉬움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고구려가 3국을 통일하였더라면 당신의 영지(領地) 또한 이 조그마한 반도에 머물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반도 남쪽에 자리했든 신라가 통일하므로 서, 우리 민족의 영지도 한반도로 한정된 아쉬움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이런 신라도 제54대 경명(景明)왕 2(918)년 왕건의 고려 건국으로 제56대 경순(敬順)왕 9(935)년 고려 태조에게 귀부(歸附)하니 신라는 망(亡)하고 아울러 BC 57~935(992)년간 56(朴 10王, 昔 8王, 金 38王)세(世)동안 유지되었다.
(11) 고구려(高句麗: 桓紀 7162~ 7867, BC 37~ 668) 28代 705年間 維持.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고주몽이 세운 나라의 명칭이 고구려로 적혀 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고주몽이 세운 (고주몽)고구려만 고구려로 알고 있다. 북부여기에 의하면 고구려라는 명칭은 BC 239년에 해모수가 고구려(高九黎: 일명 북부여)를 세웠을 때부터 사용되었다. 그 후 고구려(高九黎)는 6세 동안 계속되다가 6세 고무서 단군이 죽을 때 고주몽(高朱蒙)이 대통(大統)을 이었으나, 부여인들이 죽이려 하므로 무리를 이끌고 졸본에서 도망한 고주몽은 졸본천(일명 비류수) 상류에다 고주몽이 BC 37년 고구려(高句麗) 세웠다.
(12) 백제(百濟: 桓紀 7181~ 7859, BC 18~ 西紀 660) 32代 678年間 維持.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백제가 하나의 나라로 적혀 있지만 백제는 비류, 온조, 구태가 각각(各各) 건국한 나라의 이름이다. 본서는 편의상 비류백제, 온조백제, 구태백제로 각각 구분한다.
비류백제: 소서노는 아버지 연타발과 아들 비류, 온조와 같이 홀본(忽本)에서 살다가 BC 42년에 심양 옆을 흐르는 비류수(혼하)를 따라 하류로 내려와 패수(태자하)와 대수(혼하)가 서로 만나는(패대) 지역에 정착하여 고기잡이와 소금장사 등으로 많은 재물을 모으고 BC 31년부터 고주몽의 왕비가 되어 고주몽을 섬겼다. 그 후 비류는 고주몽이 6세 고무서 단군의 딸 예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유리를 태자로 삼자, 불만을 품고 있었든 차, BC 19년에 고주몽이 죽자 패대 지역에서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이때 비류는 고구려의 정통성이 맏이(伯)인 자기에게 있다는 뜻으로 자신을 백제(伯帝)라 칭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비류를 따르지 않아 비류는 근거지인 패대 지역만 장악하였다.
온조백제: 온조는 비류가 BC 19년에 패대 지역에서 스스로 임금(帝)의 위(位)에 올랐을 때, 아무도 비류를 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 후환을 걱정하여 BC 18년에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한반도로 이동하여 한수 북쪽에 나라를 세우고 온 세상을 다스리는 임금이라는 뜻인 온조라 칭하였다. 수도인 위례성은 천제의 아들이 있는 성이라는 뜻이다. 그 후 BC 6년에 강원도 지방 낙랑이 보낸 오호(五虎)에 의하여 위례성이 점령당하자 한강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그 뒤 힘을 길러 마한의 세력권에서 벗어나고, 서기 9년에 홍성 금마 마한을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며, 서기 19년 온 세상을 다스리는 임금이라는 뜻인 백제로 바꾸었다. 온조 백제는 서기 205년에 구태백제에 점령당하여 구이신왕 대에 이르러 대가 끊어졌다.
구태백제: 서기 204년 10월에 부여왕 위구태가 처남 공손강이 지금의 황해도 지방에 설치한 대방군으로 이동하여 부여 무리가 건너와 세운 나라라는 뜻인 이국(伊國) 또는 부여 무리가 남쪽으로 이동하여 세운 나라라는 뜻인 남부여 또는 많은 사람들이 건너와 세운 나라라는 뜻인 백제(百濟)였다. 구태백제는 AD 660년에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13) 발해(渤海: 桓紀 7897~ 8125, 西紀 698 ~926) 15代 228年間 維持.
대조영은 당나라 동북정책의 혼란과 이진충의 반란을 기회로 말갈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그 지역에 억류되어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각각 이끌고 당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으로 이동했다. 이에 당황한 당의 측천무후는 이전의 행동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대조영에게는 진국공(震國公)을,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許國公)을 봉하여 다시 복속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를 거부당하자 당은 추격군을 파견했다. 대조영은 지금의 훈허강[渾河]과 휘발하(輝發河) 분수령인 장령자(長嶺子) 부근에 있는 천문령(天門嶺)의 밀림에 둘러싸인 산악지대로 유인하여 크게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대조영으로 하여금 발해 건국의 지도자가 되게 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천문령 전투 후, 대조영은 동부 만주 쪽으로 이동하여 서기 699년 지금의 지린성(吉林省) 둔화현(敦化縣)인 동모산(東牟山)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진(震)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했다. 이곳을 터전으로 정한 것은 고구려의 고토(故土)라는 점도 있지만, 요서의 영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밀림지대여서 방어상 유리한 점도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경제적으로도 현주(顯州)의 포(布), 옥주(沃州)의 면(綿), 용주(龍州)의 명주, 노성(盧城)의 벼와 고대 전쟁에서 최대 기동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솔빈(率賓)의 말, 위성(位城)의 철(鐵) 등의 특산물 생산지였다. 한편 발해는 11대 대이진(大彛震)의 후기부터 마지막 왕인 15대 대인선(大 )에 이르기까지(840~ 926) 날로 쇠락 해져갔다.
(14) 후백제(後百濟: 桓紀 8091~ 8135, 西紀 892~ 936) 2代 44年間 維持.)
후삼국시대의 왕조국가. 892년(견훤 1) 견훤(甄萱)에 의해 건국되어 936년(신검 1) 9월 고려 태조 왕건(王建)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2대 44년 간 존속하면서 신라․태봉․고려 등과 정립하였다. 신라는 하대에 이르러 귀족들의 사치와 부패 그리고 왕위계승전 등으로 혼란에 빠졌다. 더욱이 진성여왕의 실정과 계속되는 흉년 등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중앙정부에서 조세를 독촉하자, 이에 대항해 전국적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견훤은 무리를 이끌고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전주)를 점령하고, 백성들에게 백제 의자왕의 원한을 풀겠다고 선언해 민심을 모은 뒤, 892년에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이후 궁예(弓裔)가 세운 후고구려, 그리고 신라와 더불어 후삼국을 형성해 서로 패권을 다투었다.
한편 후백제 왕실 내부에서 불화가 생겨 935년에 아들 신검(神劍) 등이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유폐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 때 견훤은 탈출해 고려의 왕건에게 귀순하였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936년에 고려 태조가 견훤과 함께 10만 대군으로 총공격해 오자 신검은 일리천(一利川: 구미의 낙동강 상류)전투에서 대패하고 마침내 항복해 후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15) 태봉(泰封: 桓紀 8100~ 8117, 西紀 901~ 918) 당代 18年間 維持.)
후삼국시대의 왕조국가. 901년 궁예(弓裔)에 의해 건국되어 918년 왕건(王建)에게 멸망할 때까지 18년간 존속한 나라이다. 신라․후백제와 더불어 후삼국을 정립(鼎立)했으며, 후고(구)려 또는 마진(摩震)이라고도 하였다. 신라는 진성여왕
때에 이르러 국력이 급속히 쇠약해지고, 국가의 통치력이 약화되었다. 재정이 결핍하게 되자 백성에게 조세를 독촉했는데, 그것은 백성들의 유리현상을 더욱 촉진 했다. 이 때 궁예가 고구려의 부흥을 내세우고 후고구려(後高句麗)를 세웠으며 뒤에 국호를 태봉으로 바꾸었다.
태봉은 후백제(後百濟)와 대립하면서 신라를 포함한 후삼국시대를 열게 하였다. 태봉은 뒤에 왕건에 의해 몰락하게 되고 뒤이어 고려가 성립된다.
(16) 고려(高麗: 桓紀 8117~ 8591, 西紀 918~ 1392) 34代 474年間 維持.
왕건은 궁예의 부하로 있다가 호족세력을 배경으로 918년 포악한 궁예를 추방하고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라 하였다. 왕건은 철원에서 즉위하고 도읍을 송악으로 옮긴 다음 호족세력 통합정책, 북진 정책, 숭불정책(불교를 숭상)을 펴서 세력을 구축하였으며, 935년에 신라를 병합하고 936년에는 후백제를 격파하여 민족의 재통일을 성취했다.
※ 건국설화
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몽녀 한씨와 결혼하여 송악산 남쪽 기슭에 살림을 차렸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선(신라 말 도참사상으로 유명했던 승려)이 그들을 찾아왔다. 도선은 왕륭의 집 앞을 지나며,
“어허, 기장을 심을 터에, 어찌 삼을 심었는가?”
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왕륭의 아내는 급히 남편에게 달려가 이 말을 전했고 왕륭은 급히 도선을 쫓아갔다. 도선은 왕륭이 쫓아오자 그에게
“내가 일러주는 대로 집을 지으면 천지의 대수에 부합하여 내년에는 반드시 슬기로운 아이를 얻을 것입니다. 아이를 낳으면 이름을 왕건이라고 하십시오”
라고 말하며 봉투를 만들어 겉에 ‘삼가 글을 받들어 백 번 절하면서 미래에 삼한을 통합할 주인 대원군자를 당신에게 드리노라’라고 써 주었다.
왕륭은 도선이 주는 봉투를 받아 백번 절하고 그가 시킨 대로 집을 짓고 살았더니 그들부터 아내에게 태기가 있었고 열 달 뒤에 아이를 낳으니 그때가 877년 1월이었고 그 아이가 바로 고려 태조 왕건이었다.
(17) 조선(朝鮮: 桓紀 8591~ 9109, 西紀 1392~ 1910) 27代 518年間 維持.
조선 건국자 이성계는 화령부(和寧府: 함경도 영흥)출생이며, 자춘(子春)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최씨(崔氏)이다. 비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이고, 계비는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담대하였으며, 특히 궁술(弓術)에 뛰어났다.
그의 선조 이안사(李安社)는 남경(南京: 간도지방)에서 원나라의 지방관으로, 그 아들 행리(行里)는 두만강 또는 덕원지방의 천호(千戶)로, 그 손자 자춘도 원나라의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의 천호로 있었다. 이자춘은 1356년(공민왕 5)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때에 내응, 원나라의 세력을 축출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비로소 고려의 벼슬을 받았다 이성계는 이러한 가문의 배경과 타고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하여 크게 활약함으로써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명나라의 철령위(鐵嶺衛)설치문제로 두 나라의 외교관계가 극도로 악화, 요동정벌이 결정되자, 이에 반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우군도통사가 되어 좌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정벌군을 거느리고 위화도까지 나아갔으나, 끝내 회군을 단행하였다. 개경에 돌아와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 수시중(守侍中)과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가 됨으로써 정치적 군사적 실권자의 자리를 굳혔다.
마침내 1392년 7월 공양왕을 원주로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즉위 초에는 국호를 그대로 고려(高麗)라 칭하고 의장(儀章)과 법제도 모두 고려의 고사(故事)를 따를 것임을 선언하였으나, 차차 새 왕조의 기틀이 잡히자 고려의 체제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우선, 명나라에 대해서 사대정책을 쓰면서, 명나라의 양해 아래 새 왕조의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확정, 1393년(태조 2)3월 15일부터 새 국호를 쓰기로 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왕사(王師) 무학(無學:自超)의 의견에 따라 한양(漢陽)을 새 서울로 삼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393년 9월에 착공, 1396년 9월에 이르기까지 태묘, 사직, 궁전 등과 숙정문(肅靖門: 北門), 흥인문(興仁門: 東大門), 숭례문(崇禮門: 南大門), 돈의문(敦義門: 西大門)의 4대문, 광희문(光熙門), 소덕문(昭德門), 창의문(彰義門) 홍화문(弘化門)의 4소문(小門)을 건설하여, 왕성의 규모를 갖추었다.
조선(朝鮮) 제4대(代) 세종(世宗) 16(1434)년부터 10여 년 동안 김종서(金宗瑞) 등에게 두 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정벌케 하여 육진(六鎭)을 설치하게 하고, 최윤덕(崔潤德)등으로 하여금 사군(四郡)을 두므로 서, 오늘날 우리민족의 영지로서의 기본 골격이 마련되었다.
조선(朝鮮) 제26대(代) 고종(高宗 1852~1863~1907~1919)대에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고종에게 군사적 압력을 가하여 1904년 4월 14일 제1차 한일협약에 이어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이 국가로서의 권위를 완전히 잃는 제2차 한일협약 이른바 ‘을사조약’을 체결하였고,
고종은 1907년 7월 20일 일본의 강요에 위해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하긴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고종(高宗)이 조선의 마지막 왕(王)이었다. 조선 제27대(代) 순종(純宗 1874~ 1907~ 1910~ 1925) 4(1910년 8월 27일)년 ‘한일합방’으로 조선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 대한제국(大韓帝國: 桓紀 9096~ 9109, 西紀 1897. 10. 12~ 1910. 08. 29)
12年 10개월 18일間 維持.
조선왕조의 국가이다. 조선은 근대 이전에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의례상의 위계적 아시아 국제질서 때문에 국왕의 지위를 중국의 천자와 대등한 지위에 올려놓지 못하였다. 그런데 근대에 이르러 이러한 세계관에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때 급진개화파들은 혁신정강 제1조에서,
“중국이 납치해간 대원군을 하루속히 돌려보낼 것, 조공하는 허례의 의행은 폐지할 것”
등을 공포하였다. 또한 조선국왕을 중국의 황제와 동등한 의례적 지위에 놓으려고 국왕을 ‘대군주’ 또는 ‘폐하(陛下)’라고 황제와 마찬가지로 높여 부르도록 하였다. 이것은 완전자주독립을 강화하려는 개화파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었으나, 갑신정변이 실패로 중단되었다. 이로부터 10년 후 갑오경장에 이르러 온건개화파가 집권하자, 다시 국왕의 지위를 황제의 지위로 높이려는 운동이 추진되었다. 갑오경장 정부는 1894년 7월 29일부터 우선 첫 단계로 대군주로 호칭하였다. 그리고 중국 연호를 폐지하고 조선왕조의 개국기년(開國紀年)을 사용하여 1894년은 개국 503년이 되었다.
또한 1895년 1월 7일 국왕이 종묘에 나아가 조상에게 서고문(誓告文)을 바치는 형식으로 ‘홍범 14조’를 공포하였다. 그런데 제1조에,
“청국에 의부(依附)하는 생각을 끊어버리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는 것을 선언하여 중국과의 관계에서 조선국왕을 중국황제와 대등한 지위로 둠을 공포하였다. 1895년 8월 27일 국호를 ‘대조선국(大朝鮮國)’으로 개칭하고 대군주를 ‘황제(皇帝)’로 격상시키려고 하였으나 일본의 반대로 집행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황제와 정부는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고쳐 내외에 선포하였다. 대한제국의 성립은 대한이 자주독립국가임을 내외에 거듭 재 천명한 것이며, 자주독립의 강화를 국내와 세계에 알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18) 일제시대(日帝時代: 桓紀 9109~ 9144, 西紀 1910. 08. 29~ 1945. 08. 15): 34年 11개월 17일日間 維持.
한일합방조약이 조인된 것은 8월 22일로, 총리 대신 이완용(李完用)이 통감 테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와 한국 통치권을 일본 왕에게 양도하는 문서에 서명하였다. 이완용․박제순 등에 의해 8월 29일 마침내 순종이 한일합방의 양위 조서를 내림으로써 한일합방이 공포되었는데, 이날은 우리 민족이 나라를 잃어버린 부끄러운 날이므로 국치일(國恥日)이라고 부르고 있다.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는 국호가 없어지고 조선(朝鮮)으로 바꼈으며,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었다.
1919. 02. 16, 미국의 대한국민회중앙총회 임시위원회를 대표하는 이승만등 세 사람은, 한국의 신탁통치청구서를 미국대통령 윌슨에게 전달하고 UP통신을 통하여 공표했다. 1919년 3월 1일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며,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의사를 세계만방에 알리는 등 국내외에서의 대(對)일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일제말기 10년 간, 우리는 일본의 혹독한 학정을 받아왔다. 일본은 만주를 침략하면서부터 많은 군수품을 필요로 하여, 농업국이던 한국의 산업을 바꾸어서 군수공업과 광업에 치중하여 한국을 병참기지로 삼아 더욱 식량과 원료를 약탈하였다. 한편 일본은 우리의 민족의식과 문화를 완전히 없애버리고 민족혼을 말살하려고 한글과 우리의 성명을 일본말과 일본식으로 고치게 하였다. 그 후 전쟁이 일본에 불리해지자 일본은 사람들까지도 마구 징벌하였다. 일제가 최후 발악을 하고 우리가 사선에서 허덕일 때도 비밀히 지하운동을 통하여 민족의 해방을 꾀하는 여러 지사가 있었다. 해외에서도 임시정부 등의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고 광복군 등의 군대를 조직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1943년 11월에 미국 영국 중국의 3국 원수는 카이로에서 회의를 열어 일본의 영토 문제를 토의하고 카이로 선언을 하였다. 이 선언은 특히 한국을 독립시킬 것을 밝혔다. 1945년 7월의 포츠담 선언은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의 결의안을 재확인하고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와 떨어진 원자탄의 위력에 놀란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였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소련의 스탈린 수상은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크림반도의 얄타회담에서는 조선문제가 공식적으로 제기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미 영 소 3개국에 의한 20년 내지 30년의 신탁통치를 제안하였고, 이에 대하여 스탈린은 신탁통치 실시에 동의하나 기간은 짧을수록 좋으며 외국 군대의 주둔에는 반대(스탈린의 입장에서는 이때부터 부동항이 필요하여 한반도 공산화에 구미가 당겼을 것임)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로써 한국에 대한 연합국의 방침은 비공식적이나마 신탁통치의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제 식민 통치가 끝나는 날, 우리민족은 자유와 평화를 되찾은 환희에 감격했다.
(19) 미군정시대(美軍政: 桓紀 9144~ 9147, 西紀 1945. 08. 15~ 1948. 08. 14): 3年間 維持.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은 민족해방운동을 국내외에서 간단없이 전개해온 운동가들의 노력과 민족의 의지에 기인하는 것이면서, 또한 직접적으로는 연합국이 승리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독립운동세력들을 포괄하는 통일된 조직체 없이 활동하던 국내외의 항일 세력들이 해방된 조국에 나타났다. 또한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가져다준 직접적 원인이었던 연합군 가운데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함으로써 민족 세력의 의지가 외세의 개입 앞에서 굴절되지 않을 수 없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해방된 한반도는 일제의 직접적 지배로부터 해방이 있었을 뿐 친일파를 처리함으로써 일제치하의 유산을 청산하는 문제, 식민지 시대의 수탈 구조로부터 탈피함으로써 노동자 농민들에게 진정한 해방을 안겨주는 문제, 새로이 대두되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로부터 민족 자주성을 확립하는 문제 등의 어려운 과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이러한 문제들이 민족 구성원 내의 계급적 파벌적 이익이나 외세의 의도와 결부되어 해방 3년을 혼돈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도 잠시, 1945년 12월 16~ 25일 제2차 세계대전 전후(戰後)문제 처리를 위하여, 미국 영국 소련의 3국이 모스크바에서 개최한 외무장관회의에서, 5년 동안의 신탁통치가 결정되면서부터 민족 분단의 아픔은 시작되었다. 남한의 우익정당과 사회단체는 신탁통치를 반대하였으나 북한에서는 신탁통치를 찬성하였다. 1945년 해방 이후부터 좌우익(左右翼)의 극한적인 대립과 투쟁 끝에 남한에는 이승만대통령이 대한민국(大韓民國)을, 북한에는 김일성 수령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이라는 단독정부를 각각 구성하였다.
(20) 대한민국(大韓民國: 桓紀 9147~ , 西紀 1948. 08. 15~ ) 代 年間 維持.
1945년 8월 15일은 일본제국주의가 패망한 날인 동시에 우리가 해방된 날이었다. 8, 15 해방은 우리에게 곧 완전독립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이북에는 소련군대가 진주하여 각각 군정을 펴려고 하였다. 남북은 두 세력의 대립으로 인하여 화해하지 못하고 뜻하지 않게 국토와 민족과 사상이 둘로 갈라져 대립하게 되었다.
남한의 민주진영은 유엔의 협조를 얻어 전 국민의 자유의사대로 남북을 통한 총선거를 실시하여 국토를 통일하고 주권을 회복하려 하였으나 소련과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반대하였다. 이에 유엔은 1948년 2월 가능한 지역부터 선거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1948년 5월 10일 유엔 한국위원단의 감시 밑에 남한에서 역사적인 총선거가 단행되었다. 그 결과 국회가 소집되고 헌법이 제정되어 초대 대통령으로서 이승만 박사가 취임하여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발족한 대한민국은, 1948년 12월 파리에서 열린 유엔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 받았다. 이로서 당신께서는 한반도의 허리 격인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쪽에서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는 존함(尊銜)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또 한번의 비극이 찾아오고 있었으니 바로 남북(南北)전쟁이 그것입니다. 소련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북한의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일요일) 새벽 4시에 기습적인 남침으로 소위 한국전쟁이 시작되었고, 연합군의 참여와 반격으로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유지하게 되었으나, 그 폐해와 상처는 우리한민족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피해일 뿐 아니라, 천만명의 이산가족에게는 생이별의 한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다시한번 역사의 가정(假定)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만약! 만약에 말입니다. 1945년 12월 16~25(10)일간, 미국 영국 소련 등 3국의 외무장관회의에서 5년 동안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었을 때, 남북(좌․우익)이 다 같이 신탁통치(信託統治: 국제연합의 감독아래 그 신탁을 받는 나라. 즉 시정권자(施政權者)가 일정한 영토를 통치하는 것)를 찬성하고 받아 들였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떤 모습을 우리는 맞이하고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다음의 2가지 사항만큼은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첫째. 소위 한국전쟁은 예방(방지 또는 억제)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역사적 자료에 의하면, 8․15해방 전부터 북한의 김일성 수령과 소련의 스탈린 수상은 한반도의 공산화에 뜻을 같이하고, 미국의 군정이 계속되는 중에도 대한민국(남한)의 공산화를 위한 준비를 계획적으로 진행하여 왔습니다. 만약, 남북(좌․우익)이 다같이 신탁통치를 찬성했더라면 북한에서는 소련이, 남한에서는 미국이 각각 국제연합의 감독아래 신탁통치는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과연, 대한민국(남한)에서 미국의 신탁통치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었더라도 북한의 김일성이나 소련의 스탈린이, 대한민국(남한)의 공산화를 위한 남침을 감행하는 것이 가능했을까요? 그것(1950년 6월 25일 남침)은 생각할 수도 없고 또한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반론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신탁통치의 기간이 지난 후에라도, ‘그것(남침)을 감행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미국의 신탁통치가 계속되고 있는 기간동안이었어도 북한이나 소련의 움직임은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고, 또한 그들의 움직임의 결과를 예측하고 충분한 대비도 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대한민국(남한)의 영토 내에서, 미국의 신탁통치가 실행되었더라면 미국의 방위선이 후퇴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또한 6․25남침도 억제되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김일성과 스탈린에 의한 한국전쟁의 폐해는, 남․북한 쌍방에 치유하기 어려운 깊은 상처를 남김으로 서 이념적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지고, 불신으로 인한 작금의 남북대화 역시 햇볕(조건 없는 퍼 주기: 원래 해는 태양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대가없이 무조건 햇볕을 내려 쪼여 주고 있음)정책이란,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상당(합당)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분단 상태였더라도 한국전쟁만 없었더라면, 남북대화가 지금과 같이 이렇게 어렵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둘째. 정치수준이 지금보다는 훨씬 발전된 모습일 것입니다.
전제군주(專制君主)제 하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후, 서양의 민주주의와 문물을 배우고 익혔다고 자신하든 이승만 대통령도 종신집권의 탐욕에 눈이 멀어, 자신을 망치고 말았지 않습니까? 역시 한두 사람 또는 몇 사람만 민주(民主)제를 배워서는 민주주의를 펼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1만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 한민족이 이(異)민족의 신탁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선조들의 얼굴에 ×칠을 하는 것과 같이 불충이라 생각했을 것이며, 우리도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몇 년 동안이라도 미․영(양국)의 신탁통치를 받았더라면 우리나라의 정치 수준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 수도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선진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이나 영국의 신탁통치를 받으면서, 당시로서는 생소한 민주주의 제도를 배웠더라면, 적어도 우리나라 정치․경제․사회의 수준은 지금보다는 몇 단계 이상의 고차원 수준에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역시 윗물이 맑으면 자연히 관료들의 직업윤리와 도덕심은 어떠해야 하는지? 기업인은 기업이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노동자는 노동쟁의행위를 어떻게 전개해 나가야 하는지? 일반 국민은 민주주의 사회의 유지를 위해서는 어떤 의무가 부수되는지? 를 정확하게 배우고 익힐 기회가 되었을 텐데,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OECD(경제개발협력기구)회원 29개국 중,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사회(노사간의 관계)의 민주정책 추진수준은, 과연 몇 위(位)쯤 인지 말해 줄 수 있는 사람 누구입니까?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정부의 민주제도 시행 수준을 기준으로 한,
※ 국민의 민주주의 준법의식 수준의 차이,
※ 관료사회의 청렴도와 직무에 대한 성실성의 차이,
※ 정치․경제․사회(노사간의 관계) 수준의 차이,
※ 국내 재벌기업주의 기업운영방식의 차이 등,
즉 그 격차의 간격을 어떻게(?) 좁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물론 우리국민 아무에게나 묻는다는 것은 바로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이 나라 안에서 권력과 권한을 가진 적이 있었거나 현재 갖고 있으면서, 위 4가지 물음에 대하여 고뇌하면서 답변해야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사람에게 묻는 것입니다. 물론 정확한 산술적인 수치(數値)로는 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국민 각자가 법을 지키는 수준이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수준에 훨씬 못 미친다는 현실에, 비관적으로 생각할 것이며 또한 장래의 희망에도 비관적일 것입니다. 따라서 지역간 계층간 세대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국론을 결집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탁월한 지도자의 출현이 없는 상태에서는 가히 백년하청(百年河淸)이라 할 것입니다.
역시 당신께서도 비관적으로 생각되실 것입니다. 당신의 첫 함자(銜字)시절인 환국(桓國: 桓紀 1~ 3301, BC 7199~ 3898) 건국 이래 지금까지 춘추 1만여 세(歲) 동안, 훌륭한 지도자와 그 수하들에 의한 영광스런 시절도 있었을 것이며, 반대로 못난 지도자와 그 추종자들에 의한 치욕적인 순간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특히, 못난 지도자와 그 추종자들에 의한 치욕스런 순간 뒤에는 거의가 이(異) 민족 또는 불한당 같은 지도자와 그 추종자들에게, 당신의 육신은 물론 정신과 존함마저 빼앗긴 뼈아픈(망국의) 시절도 많았었지요? 그럴 때마다 많은 백성들의 살육이 뒤따른 것도 어쩌면 필연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빠른 시간 내에 그 격차의 간격을 좁히고 자랑스러운 조국을 후손에게 물려 줄 수 있겠는가?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 대안과 대책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 모두가 짧으면 한 세대 이상, 아니면 몇 세대에 걸쳐서나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께서도 탁월한 지도자다운 지도자가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대한민국! 당신께 고(告) 합니다”
이렇게 참담한 우리의 현실을 가장 최단 시일 내에 그 격차의 간격을 줄일 수 있는 방도를 고(告)합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오랫동안 우정으로 다져온 당신의 절친한 친구인,
“영국 등 소위, 선진 민주주의 국가로부터 국회의원을 수입해 오는 것”
뿐입니다. ‘왜? 하필이면 국회의원인가?’라고 반문하는 여러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해답)은, 경제적 가치의 극대화 효과를 거두어야 하고 산술적으로는 가장 적은 집단이어야 하며, 이왕 수입해 오려면 세계 초일류의 수준이어야 하고 전 국민의 의식구조를 개선할 선진민주주의의 수범을 보여야 하며, 이에 걸맞은 특별한 지위와 권한도 주어져야 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집단의 수입보다는 가장 경제적일 거라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민족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신탁통치를 받는 것과 같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신탁통치를 받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며 외국의 일류 정치인을, 국회의원으로 수입 할 수밖에 없다는 뼈아픈 현실을 국민 개개인도 스스로 자성하게 될 것이고, 개혁의지의 확고함을 필부들의 모든 감각이 느낄 수 있게 함으로서, 자정(自淨)의지를 돋구게 될 것입니다.
“․․․”
그런데,
“왜! 그렇게 깜짝 놀랍니까?”
말도 되지 않는다고 비난만 하지 말고, 어디 여러분의 대안도 들어봅시다. 그것도 아마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겠다고 신탁통치를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민주주의 정의와 실현수단 등 민주제도 자체도 모르는 상태에서 출발한지 반세기가 흐른 지금, 우리의 정치와 국민의 수준은 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영국 등 소위,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자신들의 훌륭한 정치자산인 1등 국민을 ‘사람 버릴까봐’ 우리나라에 수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차선책이라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모든 계층에서 기득권을 버릴 각오만 가질 수 있다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말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은 바로 백년하청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다. 서생 지몽(書生 之夢)
동대문밖에 사는 백면서생(白面書生: 글만 읽고 세상일에 경험이 없는 사람) 양민달은 오늘도 여느 일요일과 만찬가지로 수유역에서 전철에 몸을 실었다. 오늘따라 군데군데 빈자리도 눈에 띄는지라 그중 한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배낭을 품에 안고 졸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눈(雪) 내리는 북한산 백운대를 등반하고 하산 길에, 출출하기도 하고 시장기도 면할 생각으로 도토리묵에 막걸리도 서너사발 마셔서인지, 훈훈한 전철 안에서 피곤이 엄습하며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두운 밤에 한줄기의 밝은 빛이 인도하듯 나타나는데, 그 빛을 따라 가보니 광활하게 펼쳐진 광장에 뜻밖에도 깔끔하게 정돈된 하나의 연단이 보이고, 그 앞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오민주!” “오민주!”
를 연호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민주(悟民主)는 자신도 모르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연스럽게 그 연단위로 올라갔다. 21세기 초 어느 때부턴가, 혜성처럼 나타난 오민주(悟民主)는 나라와 국민에게 좀 더 큰 봉사를 하겠다는 각오로, 모두(冒頭) 연설에서 ‘확고한 민주제도’와 ‘철저한 시장경제 원리’라는 제목으로 이어지고 있는 연설회장에는, 혹시나 하는 수백 명의 민초들이 대부분이었으나 몇몇 정치인의 보좌관들도 눈에 띄었고, 내․외신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그런 대로 질서도 유지되고 있었다. 얼굴도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오민주(悟民主)의 자신만만한 연설 중간 중간에는, 전혀 새로운 공약에 대한 민초들의 환호와 박수소리가 장내를 진동하는 가운데, 더디어 연설이 마무리되자 다시한번 장내가 떠나갈 듯한 환호와 연호로, 또한 내․외신기자들의 취재경쟁으로 열기가 식을 줄을 몰랐다. 이어 순서에 따라, 내․외신기자들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조선일보 박관제기자: 정치개혁의 핵심은 어떤 것입니까?
≪답변 요지≫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아직까지도 제일 부패하면서도 깨끗해지기 싫어하는 집단으로 지탄받고 있습니다. 스스로가 자정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정치 또는 정치인관련 모든 법(각종 선거법, 국회와 국회의원 관련규정 및 규칙 등)을, 시민단체와 변호사회 및 관련전문가들이 관계되는 법률과 규정․규칙을 제정하고, 국민투표로 개정하여 시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들의 의지와 행동을 스스로 규제하는 것이 제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두고 보면서 속만 끓일 사안도 아니며, 이런 상태를 고스란히 후손에게 물려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중앙일보 조미라기자: 행정부 쇄신과 공직사회의 개혁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답변 요지≫ 우선 행정부 쇄신이란, 각 부(部) 처(處) 청(廳) 및 공기업 그리고 정부투자기관의 장(長)등은, 소속 공무(직)원들의 선거에 의하여 임명하는 것으로 소위 낙하산 인사는 없어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각 부(部) 처(處) 청(廳) 공기업 및 정부투자기관의 장(長)이 누가 되어야 가장 잘살 수 있고 설립목적에 부합하여, 국가에 보탬이 되겠는가(?)하는 것은 그 소속 공무(직)원이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특수한 몇 개 부서(외교, 국방 분야)는 예외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공직사회 개혁에 대하여는, 뇌물 수수 자와 증여자 쌍방을 처벌하는 지금과는 달리, 그 수수 또는 증여사실을 신고하는 신고자에게는 뇌물 액의 10배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보상하고, 그 상대방에게는 뇌물 액의 100배에 해당하는 벌금을 부과하여 재산상의 큰 손해를 부담하게 하는 동시에, 배심원제 도입으로 유죄확정판결과 동시 벌금 완납 시까지 종신 징역형으로 다스리며, 피고인의 5대 손(孫)까지 공무원 또는 당해 관련기관의 임직원으로의 취임을 금지시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연좌제 문제가 거론될 수도 있겠으나 연좌제가 무섭다면, 부정한 금품을 주지도 받지도 않으면 될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관민을 총 망라한 전 국민을 대상으로 불법 또는 부당하게 취득한 금품(법에 위반된 부정한 금품, 각종 리베이트라는 명목의 부당한 금품, 촌지 전별금등 명목의 부당한 금품, 그리고 사회 상규에 정당하지 못한 각종 관행이란 명목의 금품, 탈세 등)으로, 취득 또는 수익된 가액의 100배에 해당하는 벌금을 부과하고 완납시까지 종신 징역형으로 처벌한다면, 국민의 청렴의식도 경제에 걸맞게 선진국 진입을 앞당기게 될 것입니다.
다음은 SBS 이의해기자: 기업활동의 자유보장에 대한 책임제도란 어떤 것입니까?
≪답변 요지≫ 예컨대, IMF이후 각급 금융권을 비롯하여 카드사의 부실로 공적자금 투입 및 정부가 개입하므로 서, 더 큰 국가적 손실을 가져왔습니다. 사실 각종 카드사에서는,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 누구나 붙잡고 억지로 카드를 떠 안겼습니다. 이때 카드사에서는, 수백~ 수천%의 성과금으로 돈 잔치를 벌인 그들로 인하여, 목숨을 끊거나 노숙자로 전락하는 등 수많은 가정이 파괴되는 현실을 우리는 똑똑히 보았습니다.
이것은 기업 활동에 대한 자유만 있었지, 국가나 국민에 대한 책임감이나 어떤 의무감도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남이야 죽든지 말든지 나만, 돈 많이 벌어 잘 먹고 잘살면 된다’는 놀부보다 더한 파렴치한 심보로, 경제적 능력도 없는 미성년자 또는 소비 욕구를 자제할 능력도 없는 지려천박(智慮淺薄:슬기로운 생각 또는 깊이 생각하는 능력 따위가 얕음)을 이용한 행위이며, 법률적 연구와 해석에 따라서는 공범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무책임한 기업 활동이나 기업의 경우에는 공적자금 등을 지원하지 말고, 해당 카드사 전 임직원이 잔치를 벌인 모든 금액을 환수하여 공적자금 등을 대신해 투입하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카드사 문제 하나를 예로 제시하였을 뿐입니다만, 모든 기업인은 이에 상응하는 법적 도덕적 책임을 감수해야 할 것이고, 따라서 바람직한 기업윤리의 제정도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영국 BBC 윌리엄 기자: 세계평화라는 말은 언제나 누구에게서나,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들은 말이었기에, 그 의미는 대충 공감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의미라도 있는 것입니까?
≪답변 요지≫ 우리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세계평화란 전쟁과 테러가 없는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에게 라고 별다른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만은, 공간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시간적으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지구촌 60여 억 명의 인류 모두가, ‘형제이자 동료’라는 의미를 이해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류가, 내 형제와 동료라는 의식을 가진다면 지금과 같은 전쟁과 테러는 자제되어져야하고, 또 자제 될 것입니다.
KBS 김중연기자: 경제정책은 어떤 것입니까?
≪답변 요지≫ 시장경제원리를 철저하게 적용하고 경제와 관련된 모든 부처와 기관의 장(長)도, 그 소속 공무(직)원과 경제전문가들의 선거에 의해 선출 된, 이 시대 최고의 경제 엘리트들에게 경제 전반을 전담하게 하는 것입니다.
문어발 형태로 구성된 재벌기업의 흥망(興亡)도, 공적자금 투입과 정권의 개입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철저한 시장경제원리에 의하는 것만이 기업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모든 기업의 최고 관리자(CEO)도 투명하고 공개적인 회계 관리로 노사문제를 접근해, 투쟁대립의 관계에서 상호 보완적인 동반자 관계로 발전의 계기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프랑스 르몽드 지스카르 기자: 대북 정책은 어떤 방향으로 해 나갈 것입니까?
≪답변 요지≫ 여러 가지 질문 중에서도 대북 정책만큼은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습니다 만, 그 기조는 민족공존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지도자들의 대북 정책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목표의 설정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너도나도 중구난방으로 덤비다 보니 그 쪽의 대남(남조선 적화통일)정책이 제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고, 이용만 당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목표와 순서를 정하고 하나하나 차근히 풀어가기 위해서 먼저, 1950년 침략전쟁에 대한 해명과 사과 그리고 재발방지보장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물론 싶게 사과와 보장을 얻지 못할 것이겠지만 이러한 해명과 사과 그리고 재발방지보장만이 대남정책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인 동시에, 1950년 침략전쟁에 대한 해명과 사과 그리고 재발방지 보장만이 대남 정책 포기의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며, 아울러 대남(남조선 적화통일)정책의 변화 없는 남북대화(민족공존)는 사상누각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1945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들의 경제사정 등을 감안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이지는, 그들 스스로도 알고 있을 것이며 또한 심사숙고하여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북한 핵 문제는, 주변국의 핵무장과도 연관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핵 보유국들이 수익자 부담 원칙에 준용한 대화와 보상으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국가안보와 관련하여서는 물론 자주국방이며, 세계 그 어느 나라도 경제에 걸 맞는 자주국방은 당연한 국가 목표일 것입니다.
동아일보 최인도기자: 도덕 재무장으로 사회기강을 확립하겠다고 하였는데, 그 방안은 어떤 것입니까?
≪답변 요지≫ 우리 인간은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학생 때까지 가장 깨끗하고 청결한 양심을 가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깨끗하고 청결했든 양심이 그 동안의 세파에 찌들어 온갖 탐욕이 쌓여지면서 욕심이 발동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기심으로 포장되어있는 우리들의 깨끗하지 못한 마음을 정화하는 운동도 필요할 것입니다. 지난날의 우리 사회는, 부정과 비리 그리고 사기범죄가 마치 무법천지에서와 같은 양상으로 들끓고 있는 가운데, 심지어는 사이버 공간에서도 같은 실정이었습니다.
따라서, 검찰총장과 경찰청장 그리고 국세청장도 소속 공무원의 선거에 의하여 선출하므로 서,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이 독자적인 권한과 책임으로 친인척 및 측근과 고위 공직자의 비리는 물론이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국법의 준엄함을 인식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검찰직원의 비리관련수사는 경찰에서, 경찰관의 비리관련수사는 검찰에서 각각주도하고 종결하므로 서, 투명성과 공정성도 확보해야 할 것입니다.
문화일보 양각화기자: 외교정책의 대강도 밝혀 주십시오.
≪답변 요지≫ 외교통상장관과 국방장관은 대통령이 임명하므로 서, 외교와 국방업무만 주로 챙기는 대통령이 될 것이며, 외교의 기조는 평등과 우호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외교와 국방과 관련한 모든 산하기관의 장(長)은, 해당 장관의 추천으로 임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겨레 유재두기자: 건강보험에도 많은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구체적인 대안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답변 요지≫ 건강보험재정이 적자라는 사실도 다 알려져 있는바와 같습니다. 따라서 건강보험공단의 장(長)도 개방직으로 소속 직원 및 관련 사회단체의 선거에 의해 선출되어야 할 것입니다. 보험료의 부정청구에도, 개인이나 기관(병의원 또는 약국 등)이 있을 것이나 우선 부정 청구하는 개인은, 청구금액의 100배를 벌금으로 부과하고 벌금 완납 시까지 보험 적용을 정지 혹은 영원히 배제하는 동시에, 부정 청구하는 기관의 경우에도 그 기관의 장(長)과 행위자 각각을 청구금액의 100배를 벌금으로 부과하고 그 기관은 영원히 보험적용대상에서 배제 시켜야하며, 그 기관의 장(長)과 행위자가 재취업하는 경우에도 당해 관련기관 역시, 보험적용대상에서 배제 시켜야 합니다.
일본 마이니찌 하야꼬 기자: 한일관계는 어떻게 풀어 갈 것입니까?
≪답변 요지≫ 한일관계 즉, 대한민국과 일본의 관계를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라거나 또는 일의대수(一衣帶水: 한 가닥의 띠와 같은 좁은 냇물이나 바닷물 또는 그것을 사이에 둔 관계라는 뜻으로, 한일 양국은 ‘일의대수의 이웃이다’라고 표현되기도 함)의 관계라고도 하고 있습니다.
1904년 8월 22일 제1차 한일협약에 이어,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이 국가로서의 권위를 완전히 잃는 제2차 한일협약 이른바 ‘을사조약’을 체결하였고, 1910년 8월 29(경술국치일)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1905년 2월 22일 도금현 고시 제40호로 독도의 편입(결의) 발표가 있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으로, 우리 대한민국은 독립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항복(1945년 8월 15일) 이전의 모든 침략(侵略) 또는 강점(强占)으로 점령되었든 지역들이 확실하게 원상회복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들이 독도 영유권을 계속해서 주장한다는 것은,
우리 대한민국으로서는 1945년 8월 15일의 독립과 해방이 완전한 것이 아니라 반쪽짜리 독립과 해방인 동시에,
일본으로서는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스스로 신격화시켜놓은 소위, 히로히또 천황의 분부(항복 선언)를 거역하고 반항하는 것인 동시에, 자신들의 천황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위, 현재의 일본 황실에서라도 선대(先代)의 분부를 거역하고 반항하는 이들에 대한 아무런 제재가 없다는 것은, 소위 일본 황실에 대한 일반국민의 권위라는 것이 면종복배(面從腹背: 겉으로는 복종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배반함)는 아니었는지 의아스러울 뿐입니다. 이것도 아니라면 소위 현재의 천황 자신부터, 선대의 ‘무조건 항복’ 그 자체를 거역하며 반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소위 일본 아끼히도 천황도 자신의 견해를 밝혀야 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극우파에 의한 침략적 팽창주의와, 경제동물이라 일컫는 일본적 도덕주의로 무장한 일본 권부(權府)가, 입으로는 세계평화를 말하면서도 머릿속에는 호시탐탐 온통 세계정복을 노린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입니다. 이들은 국제무대에서 돈 많은 신사(紳士: a gentleman: 점잖고 예의 바르며 교양 있는 남자)로 형세하면서도, 지극히 가까운 이웃나라들 간에는 긴장을 부추기고 과거사에 관한 자극적인 언동도 서슴치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과거사에 관한 확실하고 투명하며 양심에 입각한 사과와 반성이 없이는, 위 주장들에 대한 반론이나 변명의 자격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했듯이 일반사회인의 평균적인 양심을 가진 어느 세대에 이르러 또는 언젠가에는 진정한 세계평화의 의미를 깨닫고, 건전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첫발을 내딛는 그 순간 최소한,
․1894. 02. 17일 동학란 발생 이후부터,
․1894. 08. 01일 양국의 선전포고로 시작된 청일전쟁과정에서 동학란 진압 및 소탕을 빙자한, 비무장인 선량한 농민들을 대량 학살한 사건.
․1895. 10. 08. 새벽, 경복궁을 습격해 국모인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시신을 손괴한 사건.
․1909. 09월 일제가 불법적으로 간도지방의 영유권을 중국에 할양한 간도밀약사건.
․1910년 이후 군경을 동원, 전국 명문대가들의 소장서적 모두를 탈취 압수하여 51종에 달하는 20여만 권을 소각해 버린 사건.
․1923년 09월 01일 11: 58: 44, 관동 대 지진(7.9) 발생시, 일본 정부가 ‘조선인 폭동’ 설을 유포시켜 무고한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 방조 또는 선동한 사건.
․1925년 조선사편수회가, 전국각지의 문화․유적지를 마구 파헤쳐 파괴한 사건.
․1932. 01월(상해사변)이후부터 군 위안소를 두고, 일본군에 의한 성노예(性奴隸: sexualslavery)생활을 강요한 종군위안부사건,
등에 대한 각 사건의 진상조사와 그 결과를 공개하고 가해자의 입장에서 반성과 사죄, 그리고 재발방지보장약속 등, 각 사안별로 정부 문서로 교부하여야 할 것입니다.
종군위안부문제는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범죄행위이므로 국제사법(또는 전범)재판소의 판결에 의해 진실을 밝히고 사과와 배상으로 책임을 감수해야 할 것이며, 따라서 과거사에 대한 확고한 사과와 반성 없이는, 이념적인 지도국이 될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편으로는 1964년 한일회담으로 과거사에 대한 모든 문제가 일단락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나, 그렇다면 왜(?) 독도문제와 과거사문제를 스스로 끄집어내어 관련국들을 자극하느냐? 하는 것인데, 이것은 자신들의 계산법에 의한 정치 경제적인 배상은 될지언정 이성에 의한,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양심에 입각한 사과는 없었다는 것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세계인들은 이러한 일본의 이중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보고 있으며, 또 과거사에 대한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사과가 없었다는 것은, 군국주의로의 부활을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전 세계인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또 한편 우리로서는, 한일관계에서 더욱 성숙된 의연한 자세와 함께 각각의 사안마다 확고한 주권행사로, 과거의 일희일비에서 탈피하고 국민의 의사결집에 의한 국력배양으로 나가야 하며, 일본 정부당국자들은 이웃국가 간에도 신뢰와 신의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 되도록 환골탈태(換骨奪胎)하기 바랍니다.
한국일보 문마린기자: 중국의 대 고구려 정책에 대한 입장과 대처방안은 어떤 것입니까?
≪답변 요지≫ 한 나라의 역사는, 선사시대를 거쳐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한 시대부터 현재(누구든지 이 글을 읽는 시점)까지, 하나의 흐름에 일관성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현시점에 자신들의 영토 내에 산재해 있는 다른 나라의 문화 유적지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뜯어고치고 기록한다고 자신들의 역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하루속히 깨닫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56개 소수민족으로 지탱해 가고 있는 그들로서는 영토분쟁을 하지 않으려는 고육지책일 수도 있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한민족으로부터의 지배를 인정하기 싫은 오만(傲慢)일 수도 있을법하지만, 그렇다고 이웃나라의 역사까지 훔치려는 것은 자신들의 선조와 정사를 부정하는 것인 동시에, 양식 있는 세계의 많은 관련 학자들의 규탄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무모한 억지를 주장하는 것은, 자신들의 선조 들이 사실대로 정성 들여 기록해 둔 정사(正史)를 부정하는 패륜적 발상인 동시에, 남의 것을 훔치려는 비윤리 비도덕적 행위로 지탄받아 마땅할 것이며, 국제사회를 비롯하여 유네스코에서도 중국의 정사를 주시하고 있음을 주지해야 할 것입니다.
소위 역사분쟁이 될 수도 있을 이러한 억지를 중단시키기 위하여, 양 당사국과 제 3국의 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논전(論戰)을 벌여서라도 이성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하고, 고구려와 발해의 문화유산을 파괴 또는 변조사실이 확인되는 되로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등록업무를 담당하는 국제기구)와 국제사회에 알려야하며, 간도(1909년 9월 일제가 불법적으로 간도지방의 영유권을 중국에 할양한 협약)문제는 한반도 통일정부에서 반드시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 케네디 기자: 중동평화에 대한 견해는 무엇입니까?
≪답변 요지≫ 세계의 많은 지도자들이 그 동안 중동평화를 위해 많은 애를 써 왔지만, 현실은 너무나 비관적이어서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테러는 더 큰 또 다른 테러로 되돌아오고, 보복 또한 더 큰 또 다른 보복으로 되돌아온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지 조차 의아스럽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정확한 분쟁요인을 간파하지 못한 상태에서 지극히 조심스러우나, 이스라엘의 점령지를 공동관리 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미국과 이라크전쟁을 포함하여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양쪽 지도자들의 평화의지가 확고하고, 여러 가지 수단을 총 동원한다면 중동평화가 요원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데, 양쪽 지도자들의 평화안 서명시간 이후부터 발생하는 테러에 대하여는, 국가적으로 어떤 손해를 배상하게 하는 방안 등을 포함하는 제재방법들을 강구할 수 있다면,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MBC 고가도기자: 식료품의 절대 안전이란 어떤 방안입니까?
≪답변 요지≫ 인간은 누구나 매일 같이 음식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음식물을 제조 유통 보관 판매하는 관계자들이, 목전의 이익에 눈이 멀어 인체에 유해한 첨가물을 혼합하거나 또는 유통과정에서 변질 된 것을 판매하는 행위를, 일벌백계(一罰百戒: 여러 사람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게 하기 위하여 무거운 벌로 다스리는 일)의 수단으로, 종신 징역형이란 벌로 응징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그로 인한 이윤의 100배에 해당하는 벌금도 부과해야 합니다. 또한 당사자의 5대 손까지 관련 사업에 대하여 인허가를 배척함은 물론이고, 취업도 거부해야 합니다.
연합통신 장고보기자: 공기업과 투자기관 및 각종 연금정책에 대한 방안은 어떤 것입니까?
≪답변 요지≫ 공기업과 투자기관 및 각종 연금공단의 장(長) 또한 개방직으로 소속 직원 및 관계있는 사회단체에서 선거에 의해 선출해야 할 것입니다. 공기업과 투자기관의 경우 예컨데, 대한주택공사에서 헐값으로 토지를 매입하고, 아파트를 시공하여 분양할 때, 원가의 몇 배(倍)를 이윤으로 남길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이윤을 소속 직원들의 성과금으로 간주해서 돈 잔치를 벌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윤은 국고로 환수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각종 연금공단의 경우에도 국채 공채 지방채 등 이윤이 확실한 투자에만 한정토록 하므로 서, 가입자들이 안심할 수 있게 운용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공기업과 투자기관 및 각종 연금공단 직원들의 보수와 성과금은 공무원 수준이면 타당하지 않을까요?
러시아 이즈베스타 코즈네프 기자: 북한 인권과 전쟁포로문제도 만만치는 않을 것 같지 않습니까?
≪답변 요지≫ 아마 그럴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지도자들께서, 그들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지 않고도 남북관계는 답보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참으로 백년하청이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어렵고 복잡한 문제일수록, 원칙에 따라 첫 단추부터 제대로 끼워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길이 아무리 더디고 험난하더라도 말입니다.
좀 전 지스카르 기자의 질문시에 잠깐 언급한바 있었지만, 1950년 침략전쟁에 대한 해명과 사과 그리고 재발방지 보장만이, 남북공존에 대한 그들의 확고한 의지의 표현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의 과오와 현실을 직시하고 용기를 발휘할 수만 있다면, 고기를 잡아주는 것은 물론 고기 잡는 방법 등을 총 동원하여, 가장 짧은 시간 안에 남북공존의 효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이렇게 순조로운 가운데 진행될 수만 있다면 인권문제와 전쟁포로 그리고 이산가족문제까지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중국 CCTV 주혜련 기자: 사회일각에서는 ‘성장과 분배!’라는 논쟁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며, 또 사회보장문제에 대하여도 듣고 싶습니다.
≪답변 요지≫ 성장과 분배는, 어느 한쪽을 중시하는 일방추진 보다 양쪽의 밸런스가 맞는 동반추진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보장문제는 이 나라 경제규모에 걸맞지 않게 아직도 소외된 계층이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저(低) 체중조숙아의 양육비와 희귀질환(稀貴疾患)자의 치료비등도 국가에서 부담해야할 것입니다.
또한 심히 우려되는 사항중의 하나는 세계최저 인구증가율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성들의 출산기피 이유 중에는, 아이들의 양육비문제와 양육수단인 점을 고려할 때, 지금부터라도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이 문제는, 공무원조직부터 솔선수범하여 사회일반의 선도적 역할에 인색치 말아야 하며, 일정규모별로 또는 일정규모이상의 직장에서 영아(嬰兒)반 유아(乳兒)반 유치(幼稚)반등을 운영하게 하고, 그 운영비를 국가에서 부담 또는 일정부분이상 지원토록 하여 확고한 미래의 자산이 될 인구증가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또 유아에게 있어, 최고의 영양식이며 최고의 자연식인 모유의 수유(授乳)를 확대하기 위한, 지혜(건강상태를 유지한 ‘모유수유 자원봉사자’ 활용방안 등)도 모아야 할 것입니다.
미국 CNN 루즈벨트 기자: 몇 가지의 답변 중에 이익의 100배에 해당하는 벌금, 그리고 5대 후손까지 공직 또는 관련기관 임직원으로의 취임을 금지하는 등은 많은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
≪답변 요지≫ 물론 그렇습니다. 민주주의의 근간은 책임과 의무 그리고 배려일 것입니다. 누구나 법만 지킨다면, 문제의 소지가 전혀 없을 터이지만 관련 글을 잠깐 인용하겠습니다. ‘형벌이 가볍다고 하여 인자한 것이 아니며, 처형이 엄중하다고 해서 잔인한 것이 아니라 시대에 걸맞게 행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일은 시대에 따라서 변하게 마련이니 대비하는 것도 그 변화에 맞게 법을 무겁게 하고 그 형벌을 엄중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법이 바르게 제정되고, 법의 적용이 평등하며 정당하게 실행된다면 나라나 사회의 질서가 확립될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최웅빈의 소설 ‘한비자’에서)
경향신문 현정현 기자: 지난 세기말 소위 IMF사태 이후 많은 중산층이 몰락하여 서민층으로 전략했다고 합니다. 이 서민층에 대한 정책은 어떤 것입니까?
≪답변 요지≫ 역대 정권마다 많은 위정자들은 마치 특허라도 받은 양, ‘서민’을 들먹이면서 ‘소득세율 인하’ 또는 ‘유류대금 환급’등으로 그야말로 겉모습만 화려한 과대 포장으로 선심성 정책에 지나지 않았으며, 정작 그 서민들의 피부에는 와 닿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서민들을 배려하는 정책은, 지금까지 추진해 온 정책들을 질적 양적으로 보다 확대하는 외, 몆 가지를 더 혁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건강보험료 징수체계 혁신입니다. 지금의 건강보험료 징수체계로는, 직장 가입자에게는 년 봉을 기준으로, 지역 가입자에게는 재산 총 가액을 기준으로 각각 징수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것을 지역 또는 직장 가입자 공히 전년도 소득에 재산 총 가액을 더한 총 재산 가액을 기준으로 건강보험료가 징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몇 백 억 원대의 재산가도, 직장에서의 년 봉 2000만원에 대한 건강보험료만 징수하는가 하면, 어찌어찌하여 겨우 집 한 칸 장만한 지역가입자는 년 봉 2000만원보다 더 많은 보험료가 징수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주유소에서 자동차 연료를 주입 할 때도, 그 대금은 자동차 배기량에 비례하여 단위요율을 책정하게 하면 에너지 소비를 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밖에도 전기요금, 수도요금, 도시깨스 사용료 등은 지역과 세대원수 그리고 주택면적에 따라 비례하여 징수해야 합니다. 요즘 들어 생활수준이 향상되어 에어컨을 비롯하여 냉장고와 김치냉장고 등 가전제품이 많은 것을 감안하여 실질적인 기본요율을 책정하고 강력한 누진율을 적용한다면 에너지 소비를 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윽고 사회자의 안내로 모든 순서가 차질 없이 끝나자 환호와 연호가 또 한바탕 이어지더니, 누군가의 제창으로 자원봉사대가 조직되고 즉석에서 모금도 이루어졌습니다. 오민주(悟民主)는 무소속으로 출마한 가운데서도, 82.9%의 압도적인 표차로 여유 있게 당선되자 내․외신기자들의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로서 인류역사상 최초로 탈 정당, 탈계파의 국가지도자로 기록되었고, 모든 공약사항은 국민투표에 의하여 확정되었으며, 재임기간동안 세계최고로 깨끗하고 살맛나는 나라라는 외신들의 극찬과 함께, 국민의 의식수준 또한 단연 금메달감이었습니다.
세계의 분쟁지역에서도 ‘형제와 동료’라는 의식의 확산과 함께, 테러행위도 줄었다고 외신은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어렵다는 그 어떤 일도 누군가가, 단 한 번의 실천으로 그 후임자들은 스스로 따라가게 되어있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듯이, 퇴임 후에도 오민주(悟民主) 정부시절의 전통은 계승되었고 온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세계각지에서 강연요청이 쇄도하는 가운데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 되었다고 외신은 전하고 있습니다.
다음 내리실 곳은, ‘동대문’이라는 전철의 안내방송에 정신이 뻔쩍 들어 깨어보니, 꿈(一場春夢: 한바탕의 봄꿈이라는 뜻으로, ‘헛된 영화(榮華)나 덧없는 일’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었습니다.
라. 근세(近世) 지도자들의 공과(功過)
한 지도자의 업적인 공과(功過)는 ‘훗날 역사가 심판한다’고들 합니다. 물론 그 지도자가 생존해 있을 때는 어쩌면 타당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이미 고인이 된 지도자의 경우에는 의아심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역사’라고 하는 역사의 심판 주체를, 수 십 년 또는 수 백년의 시간이 흐른 뒤의 (역사)학자를 두고 하는 말인지? 또는 그 지도자와의 사이에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는 (관련)학자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제의 일도 오늘에 있어서는 하나의 역사이며 백년 전의 일도 오늘에 있어서는 역사임을 감안해야하고, 또한 어떤 (관심 있는)많은 사람들 사이에도 똑 같은 사물을 관찰하는 데는 개인의 이성과 양심(시각)에 따라, 각각 상이하게 판단하게 되고 심판한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한 지도자의 업적인 공과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훗날의 평가’라는 주체도 시간도 애매모호하고 개인의 이성과 양심(시각)에 따라 제각기 판단하더라도, 그 판단 자체가 잘 된 판단인지 또는 잘못된 편견인지 조차 시비(是非)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필자도 ‘훗날의 역사’중의 일원으로서, 위 제목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앞의 ‘한민족의 자존심’이라는 제목 속에는 ‘근세 지도자들의 업적’이라는 소제목의 강의(다소의 업적 나열)도 있었으나,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구체화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울 것 같아 고심하였었는데, 근래에 와서는 한번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때, 나열되었든 업적들도 참고하였음을 밝혀둡니다.
또 한가지 상기해 두어야 할 것은, 한 인간의 일생을 놓고 그 생의 과정을 더듬으며 심판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기준으로 또는 어떤 형식의 기준과 과정에 의한 판단이 필요한지 다시 한번 심사숙고하였으나, 공자님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심신을 닦고 집안을 정제한 다음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한다)만큼 합당한 기준과 과정을 찾지 못하였기에, 또 인용하게 되었음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지도자인 대통령의 독선과 아집에는 국익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며, 국민의 의사도 존중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를 위한 반대의 경우에는 지도자의 독선과 아집이 필요할 때도 있을 것이나, 당시로서는 분명한 청사진의 제시도 없이 당대의 업적에 집착하면, 역사의 심판과 함께 실패를 보게 되는 것은 불문가지이며, 따라서 실패한 지도자의 반열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같은 평범한 범부들은, 당시에 논쟁대상이었든 찬반의 소용돌이 속에서, 미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옳은 것도 같고 틀린 것도 같은 감언이설에, 각자가 알아서 판단할 수밖에 없었는데 세월이 흐른 얼마 후에는, 누구의 주장이 옳았고 따라서 누구의 말이 틀렸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실마리라도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찬성과 반대의 논쟁이 심했든 경우에도, 관련 학자들이나 전문가 또는 관련시민단체 등이 열띤 토론을 통해서라도, 그 정책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라는 것입니다.
(1) 이승만(1875. 04. 18~ 1965. 07. 19) 제 1~3대 대통령(1948. 07. 24~ 1960. 04. 26): 독립운동가요, 철저한 반공, 반일주의자.
1. 지도자로서 갖춰야 할 그 첫 번째 덕목인 수신(修身: 심신을 닦고)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2. 미국 등 외국에서만 독립운동을 한 탓도 있었겠지만, 국내의 조직 기반이 전혀 없었든 탓에 일제 식민지시절의 친일 관료들을 조직기반으로 하므로 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민족반역자를 처단하지 못하는 우(愚)를 범하여, 역사와 선열 앞에 씻을 수 없는 크나큰 죄를 지었고 가치관의 혼란과 기회주의자가 득세하는, 계기를 제공하였습니다.
3. 종신 집권에 눈이 어두워, 인의 장막에 갇혀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3․15 부정선거와 4․19 의거에 의하여 독재자로 전략되고 대통령직에서 하야와 동시 하와이로 망명하므로 서, 쫓겨나는 신세의 첫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4. 그러나 집권초기 강력한 지도자로서의 면모도 보였는데 공산주의사회에서나 가능하며, 사유재산제도가 근간인 민주주의사회에서 토지개혁을 단행하므로 서,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제도를 강행 실천하기도 하였습니다.
(2) 윤보선(1897. 08. 26~ 1990. 07. 18) 제 4대 대통령(1960. 04. 27~ 1961. 05. 15)
명문가라는 자존심과 더불어 양반의 권위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어 대단히 자기중심적이었다. 그의 정치관은 흑백 양자택일이었기 때문에 일단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도무지 타협을 모르고 한 길로만 내달렸다. 그러나 한국 현대정치사에 미친 영향은 민간정부의 민주주의적 정치를 위한 노력에 집중하였다고 할 수 있다.
군사정변 당시 국군통수권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38선 전방부대를 서울로 보내 군사정변을 저지하지 않았고, 박정희의 국군통수권 이양 요구 당시 ‘올 것이 왔다’라는 말과 함께 순순히 국군통수권을 이양한 것 때문에 그가 군사정변을 묵인하는 대신 박정희와 대통령중심제 개헌을 매개체로 타협을 보려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학자들이 있다. 왜냐하면 ‘내각책임제 치하에서 대통령은 별 볼 일없는 자리였기에 이에 분개한 윤보선이 박정희와 타협하였다’고 한다.
(3) 박정희(1917. 11. 14~ 1979. 10. 26) 제 5~9대 대통령(1963. 12. 17~ 1979. 10. 26): 선택적 시각(장기적 안목)의 전형적 인물로 1961년 5월 16일,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재직 중 군부 쿠데타를 주도하여 정권 장악.
1. 훗날 역사의 평가에 자신감을 갖고 ‘내 무덤에 침을 뺏어라!’며 자신을 채찍하고 경계하며 지도자로서 갖춰야 할 덕목인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중에서 ‘수신제가치국(修身齊家治國: 심신을 닦고 집안을 정제한 다음 나라를 다스리고)’까지는 확실하게 성공한 유일한 지도자였습니다.
2. 1만여 년 동안 조상 대대로 유산처럼 물려오든 기아(飢餓)로부터 국민을 해방시켰고,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지금 이나마도 잘살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므로 서, 선택적 시각(장기적 안목)의 전형적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3. 대통령 임기가 다가 올 때마다, ‘경제개발 ○개년 계획만 완수하면 또는 ○○만 완성되면 다음번에는 출마하지 않겠다’는 지켜지지 않을 약속을 자주 사용한 것을 보면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졌든 것 같습니다. 이 또한 선택적 시각(장기적 안목)을 가진 선각자다운 면모를 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청년시절에 교사생활을 하다가, 만주소재 일본군 군관학교를 거쳐 일본군 장교로 활동하게 된 것을 두고, ‘옥에 티’라며 가볍게 여기는 관련자들도 있으나 필자의 시각에서는 최대의 오점인 동시에 씻을 수 없는 허물이라 하겠습니다.
5. 또 어떤 관련(학)자들은 1972년 10월 유신으로 인하여 많은 민주인사가 박해를 받았다며, 민주화운동의 탄압을 최대의 실정(失政)이라고들 하고 있으나 여기에는, 다른 의견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 두기 바랍니다.
당시의 구체적인 사건의 경우 관련당사자가 아닌 입장에서 왈가왈부 할 사항이 아니나, 피해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천인공노할 억울한 누명도 있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진실은 밝혀져야 하고 명예회복 또한 뒤따라야 할 것임은 당연지사라 할 것입니다.
(4) 최규하(1919. 07. 16~ 2006. 10. 22) 제 10대 대통령(1979. 10. 26~ 1980. 08. 16): 전임 대통령의 유고로 인하여 대통령권한대행으로 정권장악.
1. 우리나라 속담에 ≤평양감사도 제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이 있었듯이 스스로 대통령직을 포기한 첫 사례를 남겼습니다(당사자로서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은 되지만 …)
2. 한국 헌정사상 정당에 관여하지 않은 직업공무원으로서 과장․국장․차관․장관․국무총리를 차례로 거쳐 대통령이 된 첫 번째 사람이었다.
(5) 전두환(1931. 01. 18~ ) 제 11~12대 대통령(1980. 09. 01~ 1988. 02. 24): 10․26후의 혼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정권장악.
1. 지도자로서 갖춰야 할 첫째 덕목인 수신(修身: 심신을 닦고)도, 제대로 못한 지도자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2. 1만여 년의 역사 동안 최초로 국제수지에서 흑자를 기록하였고, 제 24회 올림픽을 유치했습니다.
3. 전두환 씨는 1997. 04월 추징금 2천205억 원을 선고 받았습니다.
(6) 노태우(1932. 12. 04~ ) 제 13대 대통령(1988. 02. 25~ 1993. 02. 24): 전임 대통령의 후계자로 양성되어 정권장악.
1. 지도자로서 갖춰야 할 첫째 덕목인 수신(修身: 심신을 닦고)도, 제대로 못한 지도자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2. 제 24회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므로 서, 우리 한민족의 저력을 온 세계에 떨쳤습니다. 특히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서울 올림픽의 파급효과로는, 공산권 붕괴의 서막을 가져왔고 한반도를 제외한 지구촌 전역에서 이념경쟁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3. 소위 군사 쿠데타 세력이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한 것은,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라는 기록도 남겼습니다.
4. 노태우씨는 1997. 04월 추징금 2천623억 원을 선고 받았습니다.
(7) 김영삼(1927. 12. 20~ ) 제 14대 대통령(1993. 02. 25~ 1998. 02. 24): 1961년 5월 16일 이후 31년 9개월 만에 정치 9단이며, 민주화 운동가로 문민정부 출범.
1. 지도자로서 갖춰야 할 둘째 덕목인 제가(齊家: 집안을 정제)도, 제대로 못한 지도자로 전락하여 결국 차남은 감옥살이를 하고 말았습니다.
2. 지역간 계층간의 갈등을 수습하지 못하고, 임기 말(末)인 1997년 11월 IMF사태를 맞았습니다.
3. 제 17회 월드컵대회를 유치하였습니다.
(8) 김대중(1926. 01. 06~ 2009. 08. 18) 제 15대 대통령(1998. 02. 25~ 2003. 02. 24): 정치 9단이며, 민주화 운동가로 IMF와 함께 국민의 정부 출범.
1. 지도자로서 갖춰야 할 둘째 덕목인 제가(齊家: 집안을 정제)도, 제대로 못한 지도자로 전락하여 차남과 3남이 감옥살이를 하고 말았습니다.
2. 제 17회 월드컵대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므로 서, 세계 4위의 성적을 달성했습니다. 특히 대회 기간 중 새로운 응원문화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으며 월드컵에 관한 한, 전 국민의 단결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3. 국론은 사분오열되었고, 햇볕정책과 남북정상회담 등 주요정책은 모두 실패했습니다. 특히 햇볕정책(소위 퍼주기)의 결과는, 북경 3자 회담에 참석한 북한대표가 ‘핵무기를 소유하고 있다’고 공언하므로 서, 한반도에 핵전쟁의 위기와 함께 국민의 불안이 고조되고 평화와 화해분위기는 더욱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남북정상회담도, 화해와 협력 분위기를 의한 회담으로 포장되긴 했으나 뒷거래에 의한 의혹(약 5억 달러제공)으로 특별검사에 의해 수사중이며, 아무리 남북간은 특수한 사정이 있다하더라도 그 시작부터 실패한 회담이었습니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해명과 반성 없는 어떤 회담도 성공할 수 없다는 교훈을 남기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4. 결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략전술(남한 적화통일)이 지속되고 동북아의 긴장이 고조되는 한, 통치행위의 중요부분(햇볕정책과 남북정상회담)은 명백한 이적행위로 실정법에 의한 수사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9) 노무현(1946. 08. 06~ 2009. 05. 23) 제 16대 대통령(2003. 02. 25~ 2008. 02. 24): 3김(YS DJ JP)시대의 종말과 함께 개혁과 국민통합을 기치로, 노동운동 등 운동권(386)세대들이 주도하는 참여정부로 출범.
1. 역대 전임자들과는 달리 검찰권을 해방시켰습니다. 국가 검찰권의 해방은 장차 많은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기에 지켜 볼 일이며, 따라서 검찰의 용기와 의지를 국민은 주시하게 될 것입니다.
2. 대통령의 고유권한에도 분명한 한계는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 국가정보원장 인준에 대한 국회 상임위원회 청문회에서, 여야의원 모두가 부적합하다는 건의를 묵살하면서 ‘대통령의 고유권한을 침해하지 말라’며 결국 임명 하였습니다. 그러나 국회의원도, 국민의 대표기관이며 그 대표 즉 국민이 반대하는 인사를 임명하는 것은, 대통령의 고유권한이기 이전에 명백한 독선이라는 것입니다. 명백한 비전과 목표를 제시하고,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라도 국익과 민의(民意)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며, 그 자리에는 그 사람밖에 없다는 식으로 밀어붙이면 신뢰를 잃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3. 그러나 ‘개혁과 국민통합’이라는 선거운동당시의 공약 중에서 ‘국민 통합’은커녕, 국론 분열은 더욱 세분화 고착화 될 가능성이 점점 높아져 갈 것으로 보이나, ‘개혁’은 어느 정도 성공시킬 징후들이 보인다 할 것입니다.
라. 7천만 동포에게 고함.
8․15해방 이후,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내외 7천만 동포에게 고합니다. 7천만 동포여러분! 여러분 중에는, 이념경쟁에서 이미 백기를 들었고 또한 용도 폐기된 마르크스․레닌의 이념을 추구하는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이념으로 하는 민주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을 비롯하여, 좌도 우도 아닌 소속 불명의 회색주의(혹은 무관심) 사상을 가진 사람은 물론, 지나치게 기울러져 버린 극좌 또는 극우사상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사상이 혼재한 가운데서도, 민주주의나 공산주의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단연 주류를 이룰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사상을 대표하는 남․북한의 실상을 살펴보겠습니다.
(1) 북한의 불변 전략.
소련의 남진 정책과 마르크스․레닌의 이념을 추구하는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을 비롯한 추종자들의 탐욕이 맞물려, 1950년 6월 25일(일요일) 새벽 기습적 남침으로 감행되었든 한국전쟁은, 신라 제54대 경명(景明)왕 2(918)년 왕건의 고려 건국에 이어, 서기 936년 후백제를 멸망시킨 이후 1014년만의 동족상잔으로, 막대한 인명과 재산피해는 물론 전 국토의 폐허와 전 국민의 기아를 비롯하여, 1천만 이산가족에게 생이별의 고통을 떠넘기므로 서, 동족에게 씻을 수 없는 범죄행위를 저질러는 결과를 가져왔고, 통일이라는 동족 내부문제에 소련과 중공 등 외세의 개입을 초래하였음에도, UN군의 참전을 비롯한 예상치 못한 여러 상황과 우여곡절 끝에 결국, 1953년 7월 27일 임시휴전으로 종전이 아닌 정전상태에서, 조국의 분단과 전쟁준비는 계속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편,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키고도 뜻을 이루지 못한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남조선 적화통일’이라는 절대절명의 목표를 설정해놓고 이른바, 대남 공작 및 4대 군사노선 등 여러 가지 준비를 계속하거나 마치고, 호시탐탐 재침의 기회만 노리든 중, 1993년과 1994년 2월 25일 김영삼 대통령의 제의에 의하여 1994년 6월 17일 김일성 주석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의 평양회담에서 남북정상회담에 동의하였고, 다음 날인 18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김일성 주석의 뜻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달함으로서, 이후 6차례의 예비 및 실무접촉이 계속되든 1994년 7월 9일 북한은, 중앙방송을 통해 김일성 국가주석 사망(7월 8일)을 공식 발표함으로서,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만약 이때, 공개적이고 모두가 수긍하는 상식적인 선에서만 정상회담이 성사되고 계속 발전되었더라면, 아마도 1950년 6․25 남침에 대한 면죄부는 물론 그의 사후(死後) 및 후사(後嗣)문제까지 일거에 해결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나, 이런 문제도 어찌 보면 동족문제에 관한 치유할 수 없는 큰 죄 값으로 돌연사 함으로서,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1950년 6․25 남침에 대한 면책의 기회마저, 박탈당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그의 후계자인 아들 김정일 위원장도 대를 이어 부친의 유산인, ‘남조선 적화통일’을 앞당기기 위하여 핵 개발을 서둘다가, 급기야는 핵 보유를 선언(?)하는 지경에 이르렀는가하면, 또다시 부친의 대를 이어 동족에게 핵전쟁의 위협(서울 불바다 및 한방이면 끝내준다는 등)을, 거리낌 없이 각급 남북회담석상에서까지 공공연하게 떠들어대고 있는 실정이기도 합니다.
또 한편으로 보면, 핵 전쟁위협이 공갈 협박성 엄포용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북한이 비록 핵무장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50여 년 전과 같이 함부로 남침이나 전쟁을 일으키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이유는, 만약 경거망동만 있으면 자신들의 영원한 종말을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않는 것이 현명한 국민의 의식일 것입니다. 그것은, 1945년 8․15 해방 전부터 대남 적화통일(한반도 공산화) 정책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는, 현실을 간과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저쪽의 핵 전쟁위협에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또 한반도 주변상황을 고려하여 볼 때, 생존을 위한 자주국방을 목표로 발상의 대 전환과 정책적인 후속조치들이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만약! 만약에 또다시, 북한집단의 의지에 의한 남․북한간의 전쟁이 재발된다면, 1950년 한국전쟁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재앙 즉, 인명의 50%이상은 몰살당할 수 있을 것이고 국토는 초토화된 폐허로 인하여, 우리 한민족은 열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영원히 재기의 발판을 잃고 말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김정일 위원장은, 부친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라도 남조선 적화통일 정책과 핵 포기를 선언하고, 남․북한간의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화해와 협력’의 장으로 환골탈태함으로서, 동족을 기아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김정일 위원장의 인간성을 살펴보면, 자신의 목적달성(남조선 적화통일)을 위해서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인간다운 면도 없이 오직 비정함만 있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비판과 견제를 받으면서도 일관되게 악전고투하면서, 독선에 가까운 햇볕정책을 추진해온 상대방에게 이렇다 할 신세(화해와 협력의 모습으로 화답)도 갚지 못한 것은 차지하고, 받으면서도 큰소리치는 무례와 각급 회담이나 이산가족의 재회 계획도 일방적으로 취소하는 등, 허탈감만 안겨주었기 때문입니다. 혹자들은, 남북간의 철도와 도로연결을 햇볕정책과 정상회담의 성과라고 선전 또는 대변하고 있으나, 그것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근거로는, 재임기간(지난 5년)동안 양쪽이 합의한 각급 회담과 이산가족 상봉일정도, 일방적으로 취소된 사례들을 무수히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실로 햇볕정책과 정상회담의 성과라고 선전 또는 대변 할 수 있으려면, 대남 정책의 취소와 핵 개발 포기를 선언하지는 못할지언정 현 상황에 묶어두고서라도, 임기 내에 각급 회담도 쉽게 풀어갔어야 하며 철도와 도로연결은 물론, 그들로서 크게 비용이 들어가지 않는 이산가족상봉행사도 그 규모나 횟수를, 획기적으로 늘렸어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북간의 철도와 도로연결행사는 분명히 있기는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이산가족의 상봉과 인권개선 등 요구할 것은 당당하게 요구하고 식량과 백성의 기초생필품 등 줄 것은 제공하되 투명성도 함께 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북한의 지도자들은 8․15해방이후부터 ‘남조선 적화통일’이라는 전략이, 수정 또는 변경 없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2) 남한의 혼란상.
민주주의국가인 대한민국은 굶주려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말없이 앞만 보고, 열심히 일했든 민초들의 새마을운동과 조국근대화사업에 앞장섰든, 대다수 국민들의 협동 단결에 힘입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는 과정에서도, 민주화를 요구하는 정부비판세력과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하는 반국가 단체(좌경화세력 및 주사파세력 또는 한총련 등)의 공동체적 정권타도(일시동거)운동(?)으로, 이전투구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다시 말해서 대한민국의 실상은, 혼란수습기(1945년 08월 15일~ 1961년 05월 15일) 성장발전기(1961년 05월 16일~ 1988년 02월 24일) 침체기(1988년 02월 25일~ 1998년 02월 24일) 등을 거쳐, 이제는 혼돈기(1998년 02월 25일~ )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침체기의 한 지도자는, 들끓는 민중들의 욕구에 손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아무리 시대의 대세라고는 하지만) 두 손 바짝 들었고, 외교적으로는 북방외교의 성공(이 경우는 시대의 순리라 할 수 있음)을 업적으로 제시하겠지만, 한반도 비핵화 정책과 관련하여서는 자신만, 벌거숭이 알몸을 들어내는 순진함과 핵 주권을 포기하는 ‘태(泰)’ 우를 범하고 말았으며, 또 다른, 한 지도자는 민주화 운동의 한 주체로서 9단의 실력을 무색케 하고, 제가 및 인사의 실패와 야당의 ‘반대를 위한 반대’가 맞물려, 국민소득 1만$시대에 진입하는 시점에서 IMF 사태를 초래하는 수모를 당해야 했습니다.
혼돈기의 한 지도자 역시, 민주화 운동의 한 주체로서 9단의 실력을 바탕으로 준비완료를 선언했으면서도 제가와 인사의 실패는 물론, 중요통치부분(햇볕정책과 정상회담)은 완벽한 이적행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햇볕정책은 이론상으로는 대안 없는 정책이라 할 수 있었으나, 때로는 꾸짖어(채찍) 가며 때로는 다독거려(당근) 가며 할 말은 다 하는, 어른다운 권위를 가졌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채찍을 포기함으로서, 실질적으로는 이적행위라는 비판과 실패한 지도자의 반열에, 머무르고 말았습니다.
정상회담 또한, 일단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민족의 장래문제에 관한 쌍방의 의사를 확인하자는 발상까지는 옳은 정책(통치행위)이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만남’ 그 자체에 의미를 두겠다고 했겠습니까? 그러나 정상회담 대가성 대북 비밀송금(5억$) 문제가 특별검사의 수사를 받고있는 현 시점에서는 그 시작(정상회담 준비)부터 잘못된 통치행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대한민국의 (김대중)대통령이 10만$를 가져오면 (김정일 위원장)내가 만나주겠다’는 발상자체가, ‘햇볕정책 및 인도적 지원’운운하며 달라는 것 모두 합의한 대로 조건 없이 퍼주었던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며, 또한 그 연장선 위에서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북한의 ‘남조선 적화통일’ 전략이 완벽하게 검증 가능한 취소가 없거나, 핵 보유 선언으로 인한 동북아의 긴장과 국민의 전쟁불안이 해소되지 않는 한, 실정법에 의한 수사를 받아야 지극히 당연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 국정원장은 2003년 7월 9일 국회 정보위 보고에서 ‘북한은 1998년부터 영덕에서 고폭 실험을 70여 차례나 계속하였고 더구나 이 사실을 당시 정부에서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는, 민족의 장래와 직결되는 문제인 동시에 엉터리 같은 독선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라도, 법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대북 송금이 핵무기 개발에 직접적인 지원과 동시, 핵무기 보유 선언에 기여한 이적행위가 확실하고 명백한 만큼 실정법 위반에 대한 수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특별검사의 수사 자체에 대한 찬반도 뜨거웠는데, 찬성 쪽은 ‘진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반대쪽은, ‘북한을 자극해서 악영향을 가져 올 수 있다’는 해괴망측한 괴변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먼저 찬성 쪽의 진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위법이기 때문에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것일 테고, 반대쪽의 북한을 자극해서 악영향을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며, 따라서 남쪽과 북쪽이 서로 다른 체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진실은 밝혀져야 하며, 이런 사실들로 인하여 앞으로라도 터무니없는 주장이나 요구를 하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아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이와 같은 정상회담을 통치행위라고 하는데, 이 문제는 관련 학자들의 연구와 유권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정상회담 대가성 대북 송금한 금전이 국가예산이 아닌 사인(법인)의 돈(재산)이라는 것을 볼 때, 완벽한 ‘통치행위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사인은 자신이 지불했어야 할 금강산관광대금을 정부가 대납한데 대한 보답(대가?)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며, 또한 ‘후사(잘 보이기 위해서 능동적으로 알아서 송금했다)를 위해 그랬다’하더라도 정부가 뇌물을 받은 것과 다름없지 않겠습니까?
남북정상회담이 실패한 또 하나의 원인은, 1950년 6월 25일 기습남침으로 발발된 동족상잔(한국전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든 데에서도, 찾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더디고 어려운 특수성을 인정했었어도, 반드시 1950년 사건(기습남침)에 대한 해명과 반성 그리고, 재발방지 보장을 받아 내거나(물론 쉽게 보장해 줄 상대도 아니지만)최소한 요구는 했어야 당연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과거사에 대한 해명 반성 및 재발방지 보장 없이는 더 이상의 진전은, 어렵다는 언질도 주었어야 당연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남북간의 특수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즉, 특수하고 어려운 문제일수록 기초부터 투명하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시작했어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기초공사부터 잘못된 정상회담이었기에 결국 사상누각의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또한, 임기 중 첫 정상회담이라는 업적에 눈이 멀어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준비는 고사하고, 앞뒤좌우를 살필 겨를 없이 달려들다 보니 그 성과 면에서는 완벽한 실패이며, 따라서 햇볕정책과 정상회담 등의 모든 통치행위 전반이 결국은 노벨 평화상 수상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비판을 받게 된 것이 아닐까요? 결국 준비완료라고 선언했든 것도, 노벨 평화상 수상준비 완료라는 의미는 아니었는지 의아해 하고들 있다는 것입니다. 또 역사가 평가한다는 겁니까? 누가 뭐라 해도, 현재 상황으로는 햇볕정책과 정상회담을 철저하게 이용하여 결국은, 핵 보유를 선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부정 할 수는 없을 것이며, 따라서 이적행위의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후에도, 이(햇볕정책과 정상회담)문제가 남․북한간에 화해와 협력 및 통일에,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것인지(?) 이적행위라고 할 것인지(?)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있을 것입니다. 귀가 있고 입이 있는 사람은 제각기 한마디씩은 거들고 나올 것이니까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쪽에서 (조건 없이 퍼주었기 때문에)왈가왈부 할 사항은 아니며 다만, 저쪽 스스로의 의지에 의하여 정책의 변화가 있을 경우에 한하여 긍정적으로 판단 할 수 있을 것이나, 국제정세 또는 주변 환경의 불리 등 타의에 의한 변화의 경우에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할 것입니다.
또 다른 한 지도자는, 토론의 달인이라는 공인(公認)과 함께 노동운동의 주체로서 국민통합과 개혁이라는 슬로건에, 노동자를 비롯한 젊은(386) 세대들의 지지에 힘입어 당선이 확정되었을 때만 해도, 법과 원칙을 바탕으로 투명하고 공정하며 합리적인 개혁을 기대했으나, 채 4개월도 넘기지 못한 현실은 ‘혹시나 에서 역시 나’(그럼 그렇지!)로 실망 그 자체입니다. 미래의 동북아 파트너로 제일 중요한 나라가 일본 그 다음으로 중국 러시아를 꼽았다고 합니다. 1950년 이른바, 한국전쟁 때 피를 흘려가며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지켜준 혈맹의 우방국에 대하여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이 일본과 중국 및 러시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들 즉, 미래의 동북아 파트너로 중요하다고 선언한 3국은 우리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들 중 일본의 소위 히로히또 천왕은, 1910년 8월 10일 소위 한․일 합방조약을 강제로 체결하므로 서, 완전무결하게 35년 여간 국권을 빼앗았으며, 러시아(소련)의 스탈린 수상은 김일성 주석과 부화뇌동하여 1950년 남한의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전복을 꾀해 기습남침을 감행하였고, 중공의 모택동 주석은 김일성과 스탈린의 요청으로 전쟁 후반에 끼어 들어 영구분단의 단초를 제공하는 등, 3국으로부터 받은 피해를 하나하나 열거조차 하기 어렵지 않을 지경인 것을, 방일기간 중(잠깐 동안이라도) 망각하고자 했었는지? 또는 골치 아픈 과거사 문제를 꺼내기도 싫었었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 일왕의 ‘통석의 념’ 또는 총리의 ‘과거의 피해에 대한 … (어쩌구 저쩌구)’ 하는 ‘반성이 있었지 않았느냐?’고 말입니다. 이러한 단어(문장)들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진심(양심)에 의한 사죄의 의사였다면 왜? 자꾸 딴 소리(각료들의 망언, 독도 영유권주장, 종군위안부문제, 역사왜곡 등)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들은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진심으로 하는 사죄가 아닌,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 과거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사과 없는 우정은 허울 좋은 개살구요 그림에 떡과 같은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1세기 전부터 반세기 전까지의 가해사실에 대하여 상당한 해명과 반성도 받지 못한, 아니 ‘하지 않는’ 저들과 우리는 ‘가장 중요한 친구’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합니다.
결과적으로는 티 없이 맑고 깨끗하며 순진한 우정을 주고서도, 그(우정)에 상응하는 만족할 만한 화답도 듣지 못하고 만 것밖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3) 혼돈의 현실.
한편 2003년 6월의 현상은 혼돈기의 정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도나도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투쟁시위를 예고 또는 계획하는 수많은 이익집단들의 시위 상황과 대응이, 어떤 쪽으로 전개되어가게 될지 참으로 암담할 뿐입니다. 이런 현상도, 1970~ 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한편으로는 이해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1970~ 80년대 지식층으로 자부하든 이른바 좌경사상과 주체사상을 신봉하고 추구하든 수많은 당사자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거위) 없을 것입니다. 이들이 자신의 의지와 양심에 의한 전향이 없는 상태에서도 불구하고, 지금쯤 사회 각계각층(구석구석)에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중요한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대 총장이었든 ○○씨가 어디어디에 ‘주사파가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가 크게 망신을 당한 일이 떠오릅니다. 정말 그 ‘어디어디’에 주사파는 실제로 전혀 없었는지(?) 아니면, 색출을 못했는지(?)를 확인해 줄 사람 또한 안타깝게도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1970~ 80년대 지식인들 중에서는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며 좌경사상과 주체사상에 흠뻑 젖어 들었든, 그 수많은 이념가들의 흔적이 지금은 묘연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자신들의 양심과 의지에 따라 인권이 존중되는 자유민주주의체제의 발전에 공헌하고 있을지(?) 아니면, 동족의 생명을 담보로 핵 개발에 열중하는 북한공산주의체제에 동조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도 없고 또한 알고 싶어하는 사람조차 없다는 현실인 것입니다. 이들은 아마 북한의 남침이나 극심한 사회혼란이 있으면, 그때는 그들 본래의 모습이 드러나겠지요? 마치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과 함께 남한에서 암약하든 남로당원들의 활동과 같은 모습으로 말입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모습을 감춘 채, 자신들에게 부여되는 임무완수 또는 목표달성에 수단방법을 총동원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니까요? 그렇게 심각하다면 색출해서 잡아내자고요? 그건 천만에 말씀입니다. 간첩도 못 잡고 주사파도 없다는데 …
이렇게 1970년대 이후부터, 좌경화 세력과 주사파 심지어는 한총련에 이르기까지 이적행위 또는, 북한체제를 선전 고무 찬양한 이력자들이 공개적이고 검증 가능한 전향 없이 음지에서 또는, 합법적인 공간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 할 수 있으며 또한, 누가 보장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쉽게 색출 할 수도 없으니 더욱 안타까울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침체기 이후부터 지금과 같은 내부분열이나 내부갈등 등 극심한 혼란사회에서, 이들의 역할이 어떤 것이었는지 관심을 갖거나 주목하는 사람도 없는 것은 물론, 심지어는 공안기관에서조차 관심 밖의 일인 양 치부하고 있지는 않는지 답답하다 못해 울화통이 터질 일입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이적단체인 한총련 수배자를 수배 해제하라고? … 이런 이념적 전력자들은 소위 결정적 시기만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만에 하나, 불행하게도 1950년 한국전쟁과 또는 유사한 사태에 직면하게 되는 시기가 되면, 자연스럽게 그들의 정체는 드러날 것이고 또 그 때쯤이면 놀라 나자빠지는 일은, 흔하게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일 것이라는 겁니다. 그때는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자신의 발등을 찧고 싶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며, 따라서 속았다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후회해도 소용없는 과거사에 지나지 않는, 옛날의 일에 불과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또 우려되는 것은, 요즘의 젊은 세대들 중에는 북한 핵과 관련하여 김정일 위원장이 핵무기를 개발하더라도, 그것은 자신들의 방어용이지 ‘설마 동족에게 사용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문제도 얼마나 순박하고 순수한 우리 젊은 세대의 철없는 안이한 생각입니까? 하지만 이런 생각과 주장은 환상 바로 그것일 것입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 목적은 반드시 방어용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근거로는, 지금의 북한 경제사정을 눈여겨보면 금방 이해 할 수 있듯이 수출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굶주리는 백성들을 제대로 먹이려면 돈이 있어야하고, 그 돈을 쉽게 벌어들이기 위해서는 마약과 위조지폐발행 또는 불법무기거래 밖에 없을 것이며, 중동이나 아랍지역이 상당한 수요처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어찌 수출용뿐이겠습니까? 그들은 심심하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 또 ‘한방으로 끝내준다!’는 등 이런 공갈협박의 이면에는 핵무기사용의지가 깔려있다고 판단해야하고 이에 대한 충분한 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1950년 소위 한국전쟁을 감행한 사람은 바로, 김정일 위원장의 부친 김일성 주석인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자신의 부친, 김일성 주석은 1950년 6월 25일(일요일) 새벽에 기습적인 남침으로도 뜻을 이루지 못하자, 대남 적화통일을 위하여 온갖 심혈을 기우려 왔고 또한, 자신이 그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족에게는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되며, 아울러 적절한 대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래도 우리의 젊은 세대들은 쉰 세대들 푸념이나 왜곡으로 오해하며, 긍정이나 수긍치 않으려고 하는 것이 더욱 큰 문제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어쩔 도리 없는 일이지요. 과연 북한이 동족에게, 핵무기를 사용할지 안 할지는 지금으로서는 아무도 장담할 일이 아니기는 하나, 그들의 언동은 동족에게라도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의지를 호언장담 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확실한 것은 최악의 경우에까지 닥쳐봐야 비로소 판단 할 수 있는 사안이고, 결국 그 때 불행하게 최악의 사태를 직면하더라도 후회해서는 아무 소용없을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북한의 핵이 과연 동족에게 사용되어질지는 끝까지 지켜봐야 할 일이라고 하였듯이, 분명히 말해서 동족을 이롭게는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들의 핵 계획이 완성되었다 싶을 때, 재래식 무기로 남침하면서 ‘우리의 적은 남조선이다. 적을 돕는 자도 적으로 간주하여 핵으로 보답 하겠다’고 선언이라도 하게 된다면, 과연 우방국들이 핵 보복을 감내하면서라도 우리 남쪽을 도울 수가 있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만약 이렇게까지 만 되더라도, 핵 개발이 동족에게 아무런 영향이 없다 할 것인가요? 그들의 목적(적화통일)을 달성하고 나서 핵을 없애거나, 미국과 우호관계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는, 국제정치 현실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 될 것입니다. 혹자들은 어쨌거나 ‘통일은 되지 않았느냐?’고 반문 할 것입니다. 필자 또한 통일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어떤 형태의 국가로 통일되어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7천만 동포여러분! 어찌 이런 것뿐이겠습니까? 이렇게 다양한 이념의 틈바구니 속에서 소용돌이치며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동포 여러분은, 통일조국이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즉, 선진 자유민주주의체제이어야 하는지 또는 공산주의체제이어야 하는지, 혹은 지금의 남한이나 북한과 같은 체제이어야 하는지는, 동포 여러분의 의지에 달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동포 여러분은, 개인의 인권과 개성이 존중되고 ‘인간의 존엄’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체제 즉, 자유민주주의체제이어야 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것입니다. 결국 자유민주주의체제도 50여 년 전의 역사에서 보듯, 그저 누군가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닌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불순한 자들의 경거망동을 분쇄 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다만 그 방법으로는 여러 가지 주문이 있을 수 있겠으나, 우선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피해를 가장 적게 끼치고 아울러 가장 어려웠을 때, 적극적으로 우리를 도와준 우방국과의 유대를 더욱 굳건히 하는 것이, 그 첫 번째 순서일 것입니다.
(4) 대북 정책의 전환 필요성.
필자의 경우는 비교적 불신(또는 의혹)에 많이 익숙해져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집권층에서는, 나라와 민족(경제)의 미래를 위하여 어떠한 정책이나 시책을 시행하려 할 때마다, 그럴듯한 청사진으로 정신을 쏙 빼놓고 공사를 시작하면서 수 천 억 원의 예산을 물 쓰듯 쓰다가 어느 날 갑자기, 슬그머니 공사를 중단하고 팽개쳐버린 각급 사업장들이 전국적으로 얼마나 산재해 있는지 우리 같은 민초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런 경우 대부분은 집권자의 치적으로 남기려는 욕심으로, 행정부의 온갖 권력을 동원하여 밀어붙인 결과일 것입니다.
한편 야당에서는, 명확한 이유와 대안의 제시도 없이 무조건 반대만 하는데 이런 걱정도 우리 같은 민초들이야 그렇다 치고,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고 정치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라도 할 수 있어야하고, 또 많은 전문가들의 의견을 참고해서라도, 명확한 이유와 대안의 제시가 있어야 한다고 늘, 생각해 왔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정책이나 시책에 대한 반대 이유와 대안의 제시 없는 반대는 ‘반대를 위한 반대’로 치부하는 습관에 젖어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야당에서는 햇볕정책을 반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맥락에서 지금까지의 대북 정책은 주로 쌀과 비료를 지원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쌀을 지원하자는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북쪽에서는 굶어죽는 동포가 많다는데 우리 남쪽에서는, 해마다 쌀의 재고량이 증가하여 그 유지관리에도 많은 예산이 필요하고, 또 한편으로는 끼니마다 쌀밥을 먹는 우리의 경우와 달리, 제대로 못 먹는 것은 고사하고 심지어 굶어죽어 가는 북쪽의 동포들을 볼 때 안타까운 심정에서, ‘인도적 지원’이라는 포장아래 손쉬운 쌀을 주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무조건 퍼주는 대북 정책의 중심이었든 햇볕정책을 반대하며, 누군가의 말처럼 고기를 잡아주지 말고 ‘고기 잡는 방법을 가려쳐 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현금과 쌀을 지원하는 대북 정책은 고기 잡는 방법을 가려 쳐주는 방향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금지원의 경우는 현대의 금강산 관광 대가가 대부분이겠으나, 이 외에도 현금이 남북간의 정상적인 상거래의 경우를 제외하고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액수가 지원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백성들이 굶어죽어 가고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현금으로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사치와 유흥을 즐겼는지 또는, 아방궁을 지었는지 아니면 핵무기 개발에 사용했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부터는 어떠한 협상의 결과로 인한 현금지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그들은 핵무기를 보유했음을 공공연히 떠들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의 현금지원은, 핵무기 숫자를 늘리는데 사용할 것이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소위 ‘사랑의 쌀 보내기’운운하며 지원된 쌀 문제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쌀의 지원으로 인하여 군량미로 저장되거나 고위층의 식량으로 사용하는 양이, 백성들에게 분배되는 양보다 훨씬 많았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현재와 같은 현금과 쌀 지원으로는 굶주리는 북쪽동포들의 허기진 배를 다 채울 수도 없다는 것이 자명하며, 또 백성들보다 하층계급인 소위 각급 정치범 수용소의 국군포로를 비롯하여 재소자들에게 돌아갈 양은, 전혀 없었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지금까지 ‘인도적 지원’ 운운하며 보내진 쌀은 굶주린 백성들에게보다, 고위층을 위 한 지원이 아니었나 자문자답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 굶주리는 북녘 동포들을 위한 ‘인도적 지원’은 어떤 형식이어야 할까요? 그것은 누군가의 말처럼 고기를 잡아주지 말고 ‘고기 잡는 방법’을 가려쳐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현금과 쌀을 지원하는 대신 밀이나 옥수수 등을 지원하므로 서, 우선 굶주리고 허기진 배를 채우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고가의 조그마한 쌀보다는 저가의 많은 밀이나 옥수수를 지원하므로 서, 하층계급의 백성들이 기아로 죽어 가는 현실은 피해보자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전문가들과 중지를 모아 농기구와 비료 또는 농지개량 등으로, 단위 면적 당 수확량의 증대를 위한 방향으로 대북 정책의 전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결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