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이다

               나(我)는, 신(神: 우주의 주인)이다.

  소우주라 할 수 있는 정육면체 거울상자 속의 주인인 나(我)와, 그리고 여섯 개 각각의 거울 속에 모습을 들어낸 나아닌 나(我)는, 어떤 관련성(關聯性: 어떤 사물과 다른 사물이 내용적으로 이어져 있음)이 있을까? 이 물음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그들(거울 속에 모습을 들어낸 나아닌 나)은 하나같이 주인(거울상자 속의 주인인 나)을 닮지 않았느냐?”

고 답할 것입니다. 즉 외관(外觀: 겉모양. 겉보기)이 닮았다는군요.

  그러면 우리가 착각(錯覺: 실제와는 다른데도 실제처럼 깨닫거나 생각함)하거나 간과(看過: 깊이 관심을 두지 않고 예사로이 보아 내버려 둠)하기 쉬운 겉모습부터 살펴봅시다. 거울상자 속의 주인인 나와 각각의 거울 속에 들어낸 나의 모습이 같거나 닮았다는 주장이지만, 여섯 개 각각의 거울 속에 들어낸 모습들을 어떤 식으로 조합하거나, 촬영하더라도, 거울상자 속의 주인인 나와는 약간씩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그것은 각각의 거울 속에 나타난 모습은 1차원영상이며 마치 평면도(平面圖)와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와 똑 같은 나를 재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의료장비인 3차원영상촬영이라는 기술에 의해서는 가능하겠으나, 각각의 거울 속에 나타난 모습만으로 나와 같거나 닮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각의 거울 속에 비친 (나! 의)모습이 거울상자 속에 있는 ‘나!’이기는 하지만, 각각의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곧 거울상자 속에 있는 ‘나!’와 같은 동일(同一)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거울상자 속의 주인인 나와 각각의 거울 속에 들어낸 나의 모습(形態: 사물의 생긴 모양)이 약간씩 닮기는 했으나, 상당히 다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 무엇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혹시 마음(良心)을 닮은 것은 아닐까?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소우주의 주인인 사람과 그의(거울 속에 나타난) 모습(형태)의 마음은, 확실하게 단언하건대 같거나 닮았을 것입니다. 이 마음이라는 것을 밖으로 들어내어 확인할 방법이 없어, 같은 것(良心)인지 또는 닮은 것(良心)인지 쉽게 판단 할 수 없겠지만, 거울상자 속의 주인인 나의 마음과, 여섯 개 각각의 거울 속에 나타난 나의 모습들의 마음(良心)이, 똑 같다는 사실만은 필연이며 당연한 순리인 것입니다.

 

  우리 60여 억 명의 인류 각각이, 대동소이(大同小異: 거의 같고 조금 다름. 비슷비슷함)하지만 100% 닮은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는 사실은, 우리들 인류로서는 우주의 주인의 형태(모습)를 가름할 수도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주의 주인의 형태(모습)를 알아야, 우리 인류가 얼마만큼 닮았는지 알 수 있거나 또는 짐작이라도 할 수 있을 터인데, 우주의 주인의 형태(모습)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인류가 얼마나 닮았다거나 안 닮았다고 할 사안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우리들의 짐작으로 우주의 주인은, 영(靈: logos: 大意識)의 형태로 우주 최고위 차원(次元)세계에서 우리 인류를 지켜보고 계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주의 주인과 나(또는 여러분 자신들과)의 모습(형태)이 닮았다고 확신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럼 또 다른 무엇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이 물음 역시, 육신을 가진 우리 인류로서는 감히 근접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겠으나, 우리 인류의 눈높이에서 살피고자 합니다.

우주의 광대함을 말할 때, 이 우주에는 수천 억 개의 위성(衛星)이 모여 하나의 은하계가 형성되고, 또 이런 은하계가 수천 억 개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수천 억 개의 위성× 수천 억 개의 은하계= 수 억 만개(부지기수)의 위성 중에 하나인 지구라는 위성에서, 생명(삶)을 유지하고있는 모든 동물과 식물들에게서 어떤 공통점이랄까 닮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곧 우주의 주인과 관련이 있다고 단정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모든 동물과 식물들에게 어떤 공통점이 있으며, 그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곧 사랑이라는 것(母性愛)입니다.

  수많은 종류의 식물과 동물은 단순하게, 제 혼자 태어나서 제멋대로 살다가 제 혼자 죽어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단순한 편견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식물과 동물의 개체 각각이 제가 잘나서 혼자 힘으로 태어나는 것도, 독불장군 식으로 제 혼자 제 마음대로 살다가 아무런 의미 없이 죽어 가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미의 지극한 사랑으로 태어나고, 어미의 보호아래 성장하면서 이웃을 돕고 이웃에 베풀어 가며 살다가, 생명이 다할 때에는 누군가에게 자신을 제공하고 죽어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미와 새끼의 관계에서 발동되는 모성애는 단순히 어미의 모성애라기보다, 우주의 주인의 마음을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동물과 식물이 공통적으로 가지고있는 모성애와 달리, 60여 억 명의 우리인류에게는 어떤 공통점이 있으며, 그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곧 건전한 양심(良心: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바른 말과 행동을 하려는 마음)을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이런 건전한 양심을 가졌으면서도, 자신의 행위로 인하여 혹자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기도 하고, 혹자는 바른 말과 행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까요? 그것은 욕심과 탐욕이 많은 사람은 양심의 발동을 억제시키고, 욕심과 탐욕이 적은 사람일수록 양심의 발동이 허용되어지기 때문이며, 누구나 자신의 욕심과 탐욕으로 인하여 타인에게 피해를 주었을 때, 후회하고 반성하는 마음(양심)의 가책(呵責: 꾸짖어 나무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전 인류가 하나같이 갖게되는 양심의 가책은, 전 인류의 공통적인 현상이며 동시에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동물과 식물의 우위(優位: 만물의 영장)에게 주어지는 특권인 것입니다. 이 양심의 가책은 곧 우주의 주인(태초의 창조주)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양심의 가책은, 인종과 종교, 남녀노소는 물론 빈부와 유․무식(有․無識)의 차이를 초월하여 누구나 갖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은 단 하나(우주의 주인)의 주인으로부터 물려받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60여 억 명의 인류 각각의 마음은 우주의 주인(태초의 창조주)의 마음이기는 하지만, 60여 억 명의 인류 각각이 우주의 주인의 마음과 같은 동일(同一)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참 나!’는 태초의 창조주와 동일(同一)일 수는 없지만 온갖 마음은 창조주를 닮으므로 서, 창조주에 가까워져 결국은 하나의 마음으로 합치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주의 주인(태초의 창조주)의 마음과 나 또는 여러분의 마음이 일치되는 그 찰라 에(더디어),

  “나(我)는 곧, 신(神: 우주의 주인)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욕심과 탐욕을 버린 마음으로, 마치 ‘내리사랑’과 같은 무조건적이고 무한대적인 진실한 사랑을 이웃(동료와 형제)에게 나누거나 이웃을 도우며 살아갈 수 있다면 ‘참 나!’는 곧, ‘우주의 주인’을 닮은 것이며 또한 ‘나(我)’ 이외(60여 억 명)의 모든 사람들도 이러한 마음을 가지므로 서, ‘우주의 주인’을 닮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주의 주인의 마음가짐을 닮을 수 있다면 우리 모두(전 인류)는, 형제인 동시에 동료로서 전쟁과 테러를 없애고 증오(憎惡)와 질시(嫉視)를 버리고, 애정(愛情)과 사랑으로 나누거나 도울 수 있다면, 인간 세상 자체가 바로 천국이요 극락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by 다사치 | 2009/09/16 06:52 | 나는 신이다 | 트랙백 | 덧글(0)

참 나는!

                참 나(我)는!

가. 거울 상자 속의 나!

나. 우주 속에서의 나!

 

  불교인들이 말하는 ‘참 나를 찾아라!’는 말은, ‘나 혼자만의 나’가 아닌 것처럼 이 글을 읽고있는 여러분 자신에게도, ‘참다운 여러분의 모습을 찾아라’는 말과 같은 뜻 일거라고 생각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욕심을 버리면 만인이 다 부처라고도 했었고 또 석가모니는, 무욕무탐의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을 다스릴 수 있다면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였듯이, ‘참다운 나’라는 것은 어느 특정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60억 지구인 개개인 모두가 참다운 자신을 찾는 것과 같을 거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 개개인에게도 ‘참다운 자신들의 모습을 찾아라’는 말과 상통할 것이며, 따라서 이 글을 쓰고있는 필자자신이 참 나를 찾는 수단과 방법은 곧, 모든 사람 개개인이 참다운 자신들의 모습을 찾는 수단 방법과 같은 과정을 경유한다해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너무 자주 인용하다보니 한계를 느끼기도 하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 개개인이 창조주와 같이 무욕무탐의 청결한 마음과 가장 가까웠을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시기는 온갖 욕심이 생기기 이전인 유아기 때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유아기가 지나면서부터는, 보다 크고 많은 것과 보다 좋은 것들을 갖기 위한 투쟁의 연속이 곧 욕심이라 한다면, 유아기를 비롯하여 비록 성인이 되었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욕심을 버릴 수만 있었다면, 누구나 다 이미 부처님이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인생살이에 있어 욕심을 버리는 것이 제일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 욕심을 버리는 일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이기에 종교인들은 일생을 걸고 욕심 버리기를 연습하는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필자 또한, 이 글을 읽고있는 여러분에게까지 욕심을 버리자고 주문 따위는 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정도의 무욕무탐의 설교나 설법은 종교지도자들이 신도에게나 주문할 사항이지, 이 글의 주제인 ‘참 나’와도 다소의 연관성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되어 언급한 것은, 어쩌면 평생을 찾아 헤매야할 ‘참 나’의 모습이, 그런 창조주(우주의 주인. 부처님. 하느님)의 또 다른 모습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 거울 속의 나(我)

  그러면, ‘참 나’를 찾기 위하여 지금부터 ‘하나. 차원세계’ 편에서 언급한 거울 속의 세계를 비롯하여, 4차원세계의 모양 즉 ‘정육면체의 거울상자 속’으로 여행을 떠나 볼까 합니다. 정육면체의 거울상자 속으로 여행하기 전에,

  ․ 먼저 한 면(개)의 거울 속의 세계로 가 봅시다.

누구나 거울 앞에 들어서기만 하면, 반드시 거울 속에서도 자신과 똑 같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거울 앞에 서있는 자신과 거울 속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 앞의 어느 부분에서, 거울 앞에 서 있으니 거울 속에는 없어야 하는데도 거울 앞과 속에서 동시에 존재하는 현상을 즉 ‘없으면서도 있고’ 반대로, 거울 속에 서 있으니 거울 앞에는 없어야 하는데도 거울 속과 앞에서 동시에 존재하는 현상을 즉 ‘있으면서도 없는’ 것이라고 정의해 놓은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지요?

따라서, 거울 앞이든 거울 속이든 또 자신의 실상이든 자신의 허상이든 오직 한 개체만 존재한다는 사실과, 거울 앞에 서있는 것은 자신이며 거울 속에 서있는 것은 자신의 모습(허상)이라는 사실도, 아울러 상기해 두기 바랍니다.

  ․ 다음은 양면(두개)의 거울 속의 세계로 들어가 봅시다.

양면(두개)의 거울이란, 자신을 중심으로 전․후 또는 좌․우에 거울 두 개를 마주보게 세워놓은 것으로, 그 양면(두개)의 거울 사이에 들어가 보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지 살펴봅시다. 즉, 한 개의 거울 앞에 서보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허상)은 하나였는데, 좌․우(두개)의 거울사이로 들어가 보면 좌측거울 속에도 우측거울 속에도 많은 자신의 모습(허상)이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곧, 거울이 한 개였을 때는 거울 속에도 한 개의 모습(허상)이 존재하였는데, 거울이 한 개가 추가되어 두 개일 때는 훨씬 많은 모습(허상)이 자신(실체)의 의지와 같이 따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두개의 거울 중간에는 하나의 실체(자신)가 존재하는 것인데, 좌․우측 두개의 거울 속에는 많은 허상(모습)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두 개의 거울 사이에서 일어나는 현상도 거울 앞과 거울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똑 같이 자신의 모습(허상)이 존재하는 현상에 대하여 ‘있으면서도 없고’ 반대로, ‘없으면서도 있는’ 현상을 이해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또한, 자신을 중심으로 한 양면(두개)의 거울 앞에 서있는 것은 자신(실체)이며, 좌측 거울 속이나 우측 거울 속에 서있는 것은 모두 자신의 모습(허상)이라는 사실과, 또 자신은 오직 한 개체뿐이라는 사실도 아울러 다시 한번 상기해두기 바랍니다.

  ․ 그럼 이제부터, 정육면체(여섯 개)의 거울상자 속의 세계에도 같이 들어가 봅시다.

앞․뒤 거울과 좌․우 거울 및 상․하 거울 등 여섯 개 각각의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허상)이 얼마나 많은지 헤아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즉, 하나의 거울 속에는 하나의 모습(허상)이 존재하였는데, 양면(두개)의 거울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습(허상)이 존재하였고, 정육면체의 거울상자 속에는 여섯 개의 거울 속 각각마다에 부지기수의 모습(허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여섯 면의 거울상자 중앙에 서있는 것은 자신(실체)이며, 여섯 면의 거울 속 각각마다에 서있는 것은 자신의 모습(허상)이라는 사실과, 또 자신(실체)은 오직 한 개체뿐이라는 사실도 아울러 상기해 놓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 여섯 면의 거울을 각각 제 1거울, 제 2거울, 제 3거울, 제 4거울, 제 5거울, 제 6거울이라고 명칭을 부여하겠습니다. 제 1거울 속의 5번째 모습(허상)과, 제 2거울 속의 50번째 모습(허상)과, 제 3거울 속의 500번째 모습(허상)과, 제 4거울 속의 5000번째 모습(허상)과, 제 5거울 속의 5만 번째 모습(허상) 및, 제 6거울 속의 50만 번째 모습(허상)들 모두가, 정육면체의 중앙에 존재하는 나 자신(실상: 주인)의 의지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현상들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정육면체 거울상자 중앙에는 단 하나의 실체(주인)가 존재하는 데도 전후, 좌우, 상하 등 여섯 면의 거울 속에는 부지기수의 허상(모습)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그렇게 많은 부지기수의 허상(모습)들도 단 하나의 실체(주인)가 추구하는 의지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사실과 또 자신(실체)은 오직 한 개체뿐이라는 사실도 아울러 상기해 놓기 바랍니다.

  또한, 정육면체의 거울상자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도 거울 앞과 거울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비롯하여, 양면(두개)의 거울 앞과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 등과 꼭 같이 자신의 허상이 존재하는데 대하여, ‘있으면서도 없고’ 반대로 ‘없으면서도 있는’ 현상을 이해 할 수 있었으면, 크게 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정육면체거울상자 속을 ‘소우주’라고 한다면, 그 정육면체거울상자 속에 존재하는 ‘나(我)’는 곧 ‘소우주의 주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여섯 개의 거울 속 각각에 존재하는 허상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주인이자 유일한 ‘나(我)’의 의지에 따라 말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모습(허상)들에 대하여, 단순히 거울현상에 불과하다고 외면하거나 단정하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나. 우주 속의 나(我)

  작금의 관련 학자들 연구결과에 의하면, 우주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하며 그 나이는 약 120억 년 내외이고, 또한 우리 모두가 살아가고 있는 우주라는 공간(용적 또는 부피)에는, 수천 억 개의 별(위성)이 각각의 공전과 자전으로 형성되어 하나의 단위가 된 은하계가 존재하며 또, 수천 억 개의 별(위성)이 모여 형성된 이러한 은하계도 수천 억 개가 광활한 우주 속에서 각각 공전과 자전으로, 자신들의 일생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약 120억 년(내외) 전에 누군가(절대자)에 의하여, 우주가 창조되어졌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이렇게 광활하다고 하는, 수천 억 개(의 별)×수천 억 개(의 은하계)= 수억 만개(부지기수)의 별(위성)이 각자 자신의 궤도를 따라, 공전 또는 자전을 하면서도 별과 별(위성)간에 충돌(또는 이합 집산)등이 생각보다 적다는 사실과 또, 각 위성(별)의 생성과 소멸에도 어떤 질서나 법칙이 존재하므로 서, 그 질서나 법칙에 의한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도 지극히 당연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질서나 법칙의 존재를 굳이 인정하려한다면, 약 120억 년 전에 누군가에 의하여, 우주가 창조되어졌을 때부터 존재되어 왔을 것이며 또, 수천 억 개(의 별)×수천 억 개(의 은하계)= 수억 만개(부지기수)의 별(위성) 중에 오직 지구라는 위성에만, 우리 인간과 같이 지능을 가진 생명체가 존재하겠는가? 하는데도 많은 의문은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지구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구는 약 60억 명쯤으로 알려져 있지만, 지구가 생성된 이래로부터 지금까지 탄생이라는 순간을 경유한 인간들이 살다가, 죽어간 숫자도 과연 얼마나 많을지는 어느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이렇게 많은 인간들 중에서, 어떤 인간은 탄생과 동시에 죽어가기도 하였을 것이며 또 다른, 어떤 인간은 당시의 시대에 맞게 자신의 천수를 누리다가 죽어가기도 하였을 그들의 의지와 탐욕 또는 망상에 의하여, 진보(進步)와 폐허가 반복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며, 이같이 반복되는 과정을 거치므로 서,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나마 발전하면서 유지하게 되었을 것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 창조주(우주의 주인)와 우리인간과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혹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그것은, 우주의 역사를 약 120억 년이라는 사실을 전제하에서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우주의 주인(창조주)께서, 지금으로부터 약 120억 년 전에 우주를 창조하였을 것이라고 수긍되어진다면, 우주의 부속물인 수 천억 개의 은하계를 비롯하여 각 은하계마다 수 천억 개의 위성(별)과 함께, 각 위성(별)의 부속물들도 순차적으로 창조되었을 것이라고 가정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 천억 개의 은하계×수 천억 개의 위성(별)= 수 억만 개의 위성 중에 하나인 지구, 그 지구의 부속물인 약 60억 명의 인류를 포함하여 수 만 종의 동물과 식물들도 결국, 창조주(우주의 주인, 하느님, 부처님)께서 만들어 놓은 위대한 걸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창조주(우주의 주인, 하느님, 부처님)께서는 우리인류에게 무엇을 또는, 어떤 가르침을 주고 싶었을지도 살펴봅시다. 이 부분에서도, 남(종교인)들은 일생동안을 그분들의 수많은 가르침들을 찾아 고행을 거듭하는데, 기껏 필자 따위가 감히 그분들의 한마디 가르침만 인용한다는 것은, 주제 넘는 짓일 수도 있을 것이나 그렇다고, 그분들의 모든 가르침을 다 열거한다는 것도 전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우선 하느님은,

  “원수를 사랑하라”

고 하였다고 합니다. 앞의 어느 부분에서는 단순한 원수이야기로 간단히 언급한 바 있었지만,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원수라 함은 우리인간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원수가 아닌,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地讐: 하늘을 함께 할 수 없는 철천지원수) 또는,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地讐: 한 하늘에서 더불어 살 수 없는 원수)등, 원한의 정도가 너무나 커 쉽게 용서하고 사랑하기 어려운 대천지수(戴天地讐: 함께 하늘을 이고 살수 없는 원수)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중국의 예기(禮記) 곡례편(曲禮篇)에는,

  “父之讐는 不與共戴天하고 兄弟之讐는 不反兵하며 交遊之讐는 不同國이라”

즉,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으므로 반드시 죽여야 하고, 형제의 원수를 만났을 때 집으로 무기를 가지러 갔다가 놓쳐서는 안 되므로 항상 무기를 휴대하고 다니다가 그 자리에서 죽여야 하며, 친구의 원수와는 한 나라에서 같이 살 수 없으므로 나라 밖으로 쫓아내던가 아니면 역시 죽여야 한다”

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이런 대천지수(戴天地讐: 함께 하늘을 이고 살수 없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이므로, 이 대천지수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으려면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용서하지 못할 사람 없으며, 또한 사랑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 누구나 쉽게 말로서만 대천지수도 사랑한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원수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인데, 대천지수를 사랑하려면 제일 먼저 자신을 그리고 다음으로는 가족을 그 다음으로는, 이웃을 제 몸 같이 사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이나 가족 그리고 이웃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면서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사랑이며, 하느님을 속이는 사랑이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인간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는 수단과 방법은, 친인척을 불문하고 개별적인 친소관계를 떠나며, 인종과 피부색 언어 및 종교 그리고 태어난 곳을 불문하고 모든 인류를, 제 몸같이 사랑하는 것만이 참되고 진실 된 사랑이라 할 것입니다.

 

  다음, 부처님의 가르침도 알아봅시다.

  모든 인간이 한결같이 탐욕을 버릴 수만 있다면 ‘만물이 다 부처’라고 했으며 또한, 모든 인간이 스스로 욕심을 버릴 수만 있다면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다’고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누군가에 의해서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증진에 의해서만이, 부처님이 된다는 것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은,

  “모든 중생이 본성을 깨닫고 그 본성인 진리 되로 세계를 이루어가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은 이 진리를 깨달아 진리 본연의 참 자기를 회복하여 참된 지혜와 덕성과 권위를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일체 중생의 진면목이며 일체 존재의 근원입니다. 따라서 모든 중생은 자신의 본성인 진리를 깨달으므로 서 ‘참 나!’를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 나!’를 찾는 길은 자비심(大慈大悲: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크게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며, 번뇌(百八煩惱: 불교에서 나온 말로 인간의 過去, 現在, 未來에 걸친 108가지 번뇌로서, 六官: 耳(소리), 目(색깔), 口(맛), 鼻(냄새), 心(뜻), 體(감각)이 서로 작용해 일어나는 갖가지 번뇌가 좋고(好), 나쁘고(惡), 좋지도 싫지도 않은(不好不惡) 즉, 평등(平等)의 3가지 인식 작용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곧 6×3=18가지의 번뇌가 된다. 거기에 탐(貪), 불탐(不貪)이 있어 18×2=36가지가 되고, 이것을 過去, 現在, 未來 즉 前生, 今生, 來生의 3世에 36×3=108가지)로부터 해탈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부처님께서는 ‘참 나!’를 찾는 가장 가까운 지름길은 번뇌를 벗어 던지는 일이며, 번뇌를 벗어 던지는 가장 가까운 지름길은 탐욕(욕심)을 버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자비심은 모든 중생이 한결같이 가져야 하는 마음의 기본 바탕이며, 자비심을 가지므로 서 번뇌(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도생활(?)을 하다보면 스스로 부처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우주의 주인께서는 우리인류가 무엇을 어떻게 하기를 바랐을까요? 지금까지, 하느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과, 부처님의 ‘모든 중생은 자신들의 본성인 진리를 깨달어라’는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과, 부처님의 ‘모든 중생은 자신들의 본성인 진리를 깨달으라’는 가르침을 동시에 실천하는 것이, 참 나!를 찾는 것인가(?)하는 의문이 있을 것이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곧 욕심을 버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므로 이(원수를 사랑하는)것만으로도 ‘탐욕(욕심)을 버리는 것’인 동시에, ‘탐욕(욕심)을 버리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 또한, 곧 원수를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므로 이(탐욕을 버리는)것만으로도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우리인류가 행하고 따르기 쉬운 것은 ‘하느님의 가르침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일까?’ 두말 할 여지도 없이 육신을 가진 우리 인간이 감당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역시, 하느님이나 부처님 정도나 되니까 가능하고 또한 가르침까지 주었지, 육신을 가지고 인간(3차원)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인류들로서는 감히 흉내도 못 낼 일들일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도, 금세기 최고의 종교지도자라고 추앙(推仰: 높이 받들어 우러름)받는 분들 중에서 하느님 또는 부처님이 주신 가르침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인정 할 수 있는 지도자가 과연 몇 사람이나 있었는지(?) 찾아보기바랍니다. 보통의 인간으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기에, 60~ 80년의 생을 사는 기간동안에 하느님이나 부처님 같은 반열에 오르라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며 인간의 본성을 모르면서 인간을 기만한 것인 동시에 아울러, 인간들의 허약한 심성을 뒤흔들어 놓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우주의 주인께서는 태초부터 하느님이나 부처님과 같이 무리하게 원수를 사랑하라 혹은 욕심을 버리라는 요구는 하지 않았습니다. 즉,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라 혹은 욕심을 버리는 것을 하루아침에 이루기를 바라지 않고, 쉬운 단계(일)부터 차근차근 배우고 익혀서 인내심(지식)이 축적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망치질도 제대로 못하는 신출내기 목수(?)에게, 한달 이내에 ‘궁궐을 지어 준공검사를 받아라’는 불가능하고 터무니없이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고, 못을 제대로 치는 법, 나무를 고르는 법, 기초와 주춧돌을 놓는 법, 궁궐의 각 요소에 쓰일 나무를 다듬는 법 등을 차근차근 배우고, 기술이 축적되어 궁궐을 지을 실력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만, 못을 제대로 못 치면서도 나무를 다듬으려고 하면 못을 제대로 칠 때까지, 못 치는 시기로 다시 돌려보내(輪回시키)면서 까지 기초부터 숙달하기를 원한다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몇 개의 단계가 있을지라도, 그 첫 단계부터 각 단계마다 차근차근 확실하게 배우고 익힐 수 있게, 다시 되돌려보내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나’의 참 모습 즉, ‘참 나!’는 이렇게 찾아보면 어떨는지요?

  정육면체거울상자 속(소우주)의 주인은 현재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이고, 우주 속에서의 ‘나’는 정육면체의 거울각각의 속에서 주인의 의지에 따라 살아가는 모습(허상)일 수 있다고 말입니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참 나!’는 바로, 태초의 창조주(우주의 주인)의 의지에 의하여 최초로 창조되었을 때, 그 모습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또한, 태초의 창조주의 의지에 따라 최초로 창조되었을 때의 그 모습이라면, 필자와 여러분은 둘이 아닌 하나이며 남이 아닌 형제이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60여 억 명에 달하는 인류 모두는 필자와 여러분과 둘이 아닌 하나이며 남이 아닌 형제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by 다사치 | 2009/09/14 06:42 | 참 나는? | 트랙백 | 덧글(0)

이웃의 정리

                이웃(社會)의 정리.

  우리들은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이기주의(利己主義)’ 또는 ‘이기심(利己心)’이라는 말들을, 많이 듣기도하고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기주의(利己主義: 윤리학에서, 자기의 쾌락을 증진시킴을 도덕적 행위의 유일한 목적으로 하는 이기적 쾌락주의)란, 다른 사람이야 어떻든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방식이나 태도를 말하는 것으로, 자기 욕심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을 빗대어(바로 지적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넌지시 지적해 말하다) 이타주의(利他主義: 이기주의 의 반대)를 강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들의 춥고 배고픔은 철저히 외면하면서, 자신들만은 등 따시고 배부름을 삶의 유일한 목적으로 추구하는 부류들에게, 경종의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고대 그리스: BC 384~BC 322)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 개개인이 유일적으로 살아가는(즉 한사람 또는 한 가족만이 하나의 사회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어울리고, 또 여러 사람들과 부대끼며 서로를 이해하고 돕는 과정에서 쌓인 신뢰(信賴)에 의하여 이웃을 느끼며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을 하거나 연상할 때마다, 이런 이야기가 뇌리를 스치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건강한 남녀가 정상적인 임신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활동성이 강한 약 2000만개 이상의 정자(精子)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실제로는 건강한 남성의 경우 한번에 3억~ 5억 개의 정자를 사정한다 고함) 그러나 실제로 난자(卵子)의 막을 뚫고 임신에 골인하는 영광스러운 금메달은(예외가 있긴 하지만) 단 한 개에게만 주어지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난자의 막을 뚫고 골인한 단 하나의 정자 역시, 자신 혼자 힘 만으로서는 절대로 난자에게까지 도달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약 3억 개 이상의 정자가 하나 같이 난자를 향해 질주하는 과정에서, 꼬리를 힘차게 움직이는 것은 물론 질 분비물인 강한 산성을 중화시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억 개의 정자가 망망대해를 헤엄치듯 꼬리를 강하게 움직여 파동을 일으키게 되는데, 수억 개가 일으키는 파동의 영향은 시너지(synergy: 분산 상태에 있는 집단이나 개인이 서로 적응하여 통합되어 가는 과정)효과를 발생하게되고, 그 효과에 의해 더욱 힘차고 수월하게 전진하는 동시에 강한 산성에 맞서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오직 공동의 목표인 임신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씨(種子: 동물이나 식물이 생겨나는 근본이 되는 것)라고도 할 수 있는 정자 시절부터 금메달을 차지할, 자신 또는 누군지 는 모르지만 3억 분의 1에 해당하는 단 하나를 위해, 적어도 이기적(利己的)인 일생은 아니었든 것 같습니다. 만약 3억 개의 정자(精子) 각각이 이기적인 욕심에서 개별 행동으로 이눈치저눈치 살피며 일생을 살아 왔다면, 인류의 종족은 대(代)를 잇지 못하고 말았을지도 모르는 일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동물이나 식물도 자신 혼자서는 결코 세상을 살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동물은 말할 것도 없이, 각종 식물도 생태적으로 좋은 환경과 비옥한 토질에서는 대부분이 생장(生長)성장만 추구하는 반면, 환경이나 토질이 열악하거나 또는 어떤 방해로 말미암아 생존에 대한 위기 의식이 있어야 번식(繁殖) 성장을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만물이 다 이렇게 자신 혼자의 힘만으로는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네 인간도 ‘나 혼자’ 또는 ‘우리 한 가족’만으로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와 지금의 이 사회에도 어떤 연관이 있을 것이며, 또한 어떤 ‘정리도 필요하지 않겠느냐?’하는 것입니다. 굳이 직설(直說)하자면,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음으로 양으로 또는 알게 모르게 표현할 수 없는 영향을, 내가 받은 데 대하여 조금이라도 보답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재산이라도 많았으면 그중 일부를, 뚝 떼어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면 간단하고 쉽겠지만, 그렇지도 못하기에 마음만 무거워질 뿐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고 낙심만 하고 있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느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겨 보게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자비심을 베풀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무조건적인 ‘봉사 즉 사랑’을 강조한 것이라면 이웃의 사랑 없는 봉사활동도 없을 것이며, 기독교에서의 헌금과 불교에서의 보시는 ‘나눔 즉 분배’를 강조한 것이라면 내 것의 분배 없는 나눔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종교의 교리와 그 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느님과 부처님 또는 우주의 주인과 같은 차원(천당과 극락 또는 영계)세계 또는 아주 가까운 차원세계에서, 안식을 얻거나 또는 보다 발전된 미래를 위한 수단으로 ‘봉사활동 즉 사랑’과, ‘나눔 즉 분배’를 가르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봉사활동 즉 사랑’의 표현에 대하여도 쉽게 결론 내리고 단정할 일은 아니겠으나, 일상사에서 신체활동이 자유스러운 사람들은 물론 신체활동이 부자유스러운 사람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행하여지고 있는 것 모두가, 다 같은 이웃 사랑의 봉사활동이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양자에 대한 ‘봉사활동 즉 사랑’의 표현에 대한 우선순위와 가치를 논할 수는 없겠지만, 신체활동이 자유스러운 사람에게보다는 신체활동이 부자유스러운 사람들에게 행하는 봉사로, 그들의 수족이 되어주는 봉사야말로 ‘하느님과 부처님 또는 우주의 주인’이 베풀고자하는 사랑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눔 즉 분배’의 형태도 많은 경험을 하였을 것입니다. 성실한 납세를 포함하여 가끔씩 보도되는 바와 같이,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헌납하는 것도 교회에서의 헌금과 불전의 보시도 나눔의 한 형태라는 데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특히, 헌금과 보시자의 의사와는 달리 수탁자의 치부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나 천당에서 안식을 얻거나 또는 보다 발전된 미래나 내세를 위한 수단으로, 반드시 십일조와 헌금을 내야하고, 극락세계에 가기 위해 반드시 연등을 사고 보시를 해야하는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하느님의 사랑과 부처님의 자비는, 신체활동이 부자유스러운 사람에 대한 봉사와 기아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배고픔을 들어주는 나눔이야말로 헌금과 보시의 참 뜻일 것이며, 이것이 바로 ‘하느님과 부처님 또는 우주의 주인’이 인식하고 있는 진실한 사랑의 표현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하더라도 하나의 가정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생활하는 인간과, 하느님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인 사랑과 자비의 적극적인 실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충분하고 흡족한 대안은 아닐지라도, 퇴직 이후부터 어떤 계획과 실천으로 얻어지는 수입의 몇 분의 일(1/가족 수+ 1)이라도 필요로 하는 곳에 보시(布施)할 수 있다면, 이것으로서 만족하고자 할 뿐입니다.

 

     

by 다사치 | 2009/09/12 07:42 | 이웃의 정리 | 트랙백 | 덧글(0)

가정의 정리

                가정(家庭)의 정리.

가. 과욕(過慾)은 업을 쌓는다.

나. 받고싶은 되로 행하라.

다. 유산의 정리.

 

  정작 이 글(후회하지 않을 오늘)은 2003년 12월 말경에 거의 완성해 놓고, 2년여가 지니는 동안 “다섯. 정리기(整理期: 마지막 布施)” 편을 손도 못 댄 이유는, ‘가정에서의 정리’가 제일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지금은 마음 되로 정리할 수 있는 어려움이 없어졌는가, 그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이야기이지만, 이렇게 장문의 글을 준비해 놓은 상태에서, 얼마 되지도 않을 정리기(整理期)기 때문에 미완(未完)의 상태로 접어두기에는, 너무도 무성의(無誠意)한 것 같아 최근 들어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리기의 모든 부분을 포함하지만 특히 여기서는, 계획이라기 보다 ‘이렇게 라도 하고싶다’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당부하는 것입니다.

 

    가. 과욕(過慾)은 업을 쌓는다.

  어찌 살아있는 인간이 욕심을 버릴 수 있을까 만은, 너무 지나친 욕심은 자제(自制)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통상적으로 '내 것'은 알뜰하게 챙겨야하겠지만, ‘내 것이 아닌 것’ 또는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었든 것’ 들에 대하여 지나치게 챙기다보면, 업(業)을 쌓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통상적으로 피땀 흘린 대가로 얻어진 금품은 ‘내 것’일 터이고, 부모의 유산(遺産)도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상속으로 내 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재화(財貨)를 얻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실행하여 객관적 타당성에 의해 얻어진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 것이 아닌 것’ 또는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었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치 앞도 모르는 것이 인생사라 했듯이, 어떤 사건이나 사고 또는 어떤 원인으로 인하여 운명하였을 때, 가해자 또는 원인제공자 등으로부터 단 한푼의 금품도 수수(收受)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건 사고 또는 어떤 원인으로 운명(殞命: 사람의 목숨이 끊어짐)했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運命: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필연적이고 초월적인 힘)이거나, 현세(現世)에서 저지른 죄업(罪業)에 대한 업보(業報: 불교에서, 선악의 행업으로 말미암은 과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양친(父母)중에 한사람이라도 생존해 있을 경우에는, 절대로 부모 명의의 부동산을 매도(賣渡) 또는 저당(抵當) 등의 처분을 못하게 일러두어야 하고, 또 승낙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살림의 전권(全權)을 넘겨주지 말아야 하며 특히, 곳간 열쇠라고 할 수 있는 핵심이 되는 권한은 마지막까지 움켜쥐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에 짝을 잃은 한 분(父 또는 母)의 외롭고 가냘픈 마음이 미사여구(美辭麗句)에 현혹되거나, 혼자 된 부모의 의지할 곳 없는 처지를 이용한 자식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핵심을 넘겨주고 나서 낭패를 당하거나 땅을 치는 보습도 흔하지 않았습니까?

  아울러 명절 차례(茶禮)와 조상님들의 기제사(忌祭祀)도, (물론 형편에 따라) 장남부터 막내까지 윤번으로 모시게 하는 것과 이참에 지방(紙榜: 종이로 만든 神主)쓰는 법을 개선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치매나 중풍 또는 현재로서는 상상하지 못할 원인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이면 머뭇거리지 말고, 해당 시설이나 보호소에 입원시켜야 할 것입니다. 괜히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부모 때문에 자식들 고생시키지 않으려는 것은, 세상의 모든 부모들도 똑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 받고싶은 되로 행하라.

  아무래도 혼자 남게될지도 모르는 아내와 관련하여 자식들에게 일러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연들은 우리들 주변에서 너무나 흔하기도 하지만 또한 많은 사례들이 있어 왔기에 꼭 짚어둬야 할 사연들입니다. 분명 예외는 있을 터이지만...

  직장인 시절에, 어떤 사건들을 처리 할 때면 이런 생각을 많이 하기도 했습니다. 통상적(通常的)으로나 또는 보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만만(다루기에 손쉬워 보이다)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아닌, 자신들의 부모님 중에서도 모친(母親)이더라는 것입니다. 특히 부친 사후(死後) 모친 혼자 생존해 있을 때 이런 경우가 더욱 흔하다는 것은, 자식에게 약한 모성을 여지없이 짓밟는 패륜(悖倫)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되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손자병법(孫子兵法)에,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 했던가? 아마도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처음부터 대하고 또 오랫동안 대면하면서 살다보니, 모성(母性)의 약점이라면 약점(고슴도치도 지 새끼가 제일 예쁘다 듯이, 자식을 생각하는 지극 정성을 오판하여 그것을 약점으로, 또는 한번쯤 대들어보는 불효 막심한 행동도 곧이어 용서해주는 약한 심성)을 정확히 아는 것도 이유라면 이유일 것입니다. 여기에도 물론 예외도 있을 터이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높고 깊으면서도 가장 온화하고 포근하게 감싸주는 모성(母性)은 어디에서부터 생겨났을까?

  ‘한달 두 달 피를 모아, 석 달 넉 달 입덧나

  다섯 달에 반 짐 실어, 여섯 달에 육 점 안고

  일곱 달에 구 삭(朔) 받아, 여덟 달에 한 짐 가득 실어

  아홉 달에 운무 좌겨 하옵시고, 열달 가망 곱게 채워

  좋은날 좋은 시를 개려, 순산으로 돌아보니 ...’

 

  직장생활 중 직원들에게 자주 이야기한 것이 생각납니다. 특히 민원실근무의 특징은, 민원인 대다수가 거의 비슷한 내용과 때로는 불만이 쌓여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이때 직원들은 민원인의 막무가내(莫無可奈)식 억지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되고,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민원인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짜증과 불친절한 경우도 가끔은 있었습니다. 민원인들이야 말하기 좋지요 공무원이 불친절하다고, 과장 서장을 찾으면서 한바탕 소란을 피울 때면 참으로 가관 중에 가관입니다. 그렇다고 달리 방도가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참을 수밖에, 직원들을 다독거리며

  “여러분들의 가족이 어느 기관의 민원실을 방문했을 때, 그 민원실 직원으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았으면 좋겠습니까? 아무리 귀찮고 짜증나도 다시 한번 생각해서, 꼭 그렇게 하십시오”

라는 이야기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식(子息)들에게 어떤 대우를 받고 싶습니까?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다시 한번 생각해서, 꼭 그대로 하십시오”

라는 이야기도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앞의 어디쯤에서 부모자식간에도 업(業)과 업보(業報)가 연결되어진다고 하였듯이,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부모자식간에 이어진 연결고리를 끊지 못하는 경우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 유산의 정리.

  부모가 남긴 유산의 분배과정에서 법정 다툼으로 이어지는 것은 요즈음도 흔하게 볼 수 사연들입니다. 유산이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지금까지 모인 모든 재산은, 가족들 모두의 노력과 절제(節制)에 의하여 공동으로 모아졌다고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퇴직 당시의 동산과 부동산의 가액(價額)을 산정 하여 가족수 분의 일(1/가족 수)로 미리 정하고, 동산은 분배하는 것이 좋을 것이나 그렇게 하기에는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양친(父母) 모두 사후. 부모명의의 동산 및 부동산을 막론하고 모든 채권과 채무를 빠짐없이 정리한 후, 동양의 유교문화권에서 이해가 쉽지는 않겠지만 자녀수에 따라, 균분(均分)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남과 막내 또는 아들과 딸을 구별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물론입니다. 또한 부모님의 유산(遺産)이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일정비율은, 사회로 환원하는 문화와 전통을 만들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한다면, 그것은 금상첨화(錦上添花)가 아니겠습니까?

  위 모든 사항에 대하여 ‘지금은 세상이 변하고 있다’며, 괜한 걱정들을 한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대상이 돈, 돈(金錢)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아무리 많은 액수의 돈을 가졌다 하더라도, 거기에 흡족함을 못 느끼는 것은 우리네 인간들의 욕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우리들 주변이나 우리사회에서 ‘내노라!’하는 고위공직자는 물론 재벌의 총수도 아직 ‘견금여석(見金如石: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하는 사람은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by 다사치 | 2009/09/10 07:36 | 가정의 정리 | 트랙백 | 덧글(0)

거짓 나는!

                거짓(현재를 살아가는 동안의) 나(我)는!

  가. 도마 카리스마?

  나. 아비와 같은 생활은 싫다!

  다. 바보 같은, 내 인생!

    (1) 대인관계는?

    (2) 부조와 품앗이.

    (3) 그래도, 후회는 않는다.

  라. 남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은?

 

  거짓(현재를 살아가는 동안의) 나(我)는,  다시 말해서 육신과 생명을 동시에 갖고, 현재 인간(3차원)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나(我)는 도대체 누구인가? 평범한 보통사람들은 우리인간사회에서 사람을 소개하거나 소개받을 때, 그 사람의 인적사항과 직업 및 주요경력을 소개하게 되면, 벌써 어떤 사람인지 대충 감을 잡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적사항과 직업 및 주요경력 등은 사실상, 그 사람의 바깥으로 드러난 겉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으로는, 이 겉모습에 가려져 있는 인간의 내면을 자세히 알고 소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같은 평범한 인간이 인간의 내면을 제대로 알 수 있는 방법들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내면을 자세히 알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면, 직원을 새로 채용하거나 친구를 사귀는데도 많은 참고가 될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사람을 직접 상대하여 사귀고 겪어보기 전에는, 그 인간의 자세한 속마음을 속속들이 알 수 있는 방법들은 없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 나!’를 찾고자 하는 필자의, 이런 겉모습에 불과한 것들은 생략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겉모습이 이 글 중에서 ‘나(我)는 누구인가?’하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필자에 관한 이야기로는, 앞의 ‘넷. 활동기’부분에서 제법 소상하게 소개하였지만, 그것은 겉모습에 불과하여 자신을 다 이야기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좀더, 자세하게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데 무척 어렵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년. 독일 칼브 生)도

  “혼자서 밥벌이를 하고 있는 겸손한 직공이라 할지라도 지금 이 자리에 그의 옛 생활을 목격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그는 격지에서 품팔이하든 때의 이야기를 엄청나게 부풀려서 흥미롭게 아니 그보다 더 전설 같은 말투로 이야기하는 법이다”

라고 했듯이 군 복무를 마친 우리나라 남자들 모두는, 그 당시 가장 훌륭하고 가장 용감하고 가장 정의감으로 뭉쳐진 시대적 영웅이었음을, 자화자찬하는 모습들이 떠올려지지만 이런 감상에는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이런 때일수록, ‘나는 내 자신이 가장 잘 안다’는 평소의 소신을 상기하고 떠올리면서, 이런저런 변명으로 양심에 부끄럽지는 않아야 할 것이라고 다시 한번 다짐도 해 보았습니다. 아울러 모든 관련 당사자들이, 훗날 이 글을 보게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필자에 대한 신뢰성과 ‘나는 내 자신이 가장 잘 안다’는 평소의 소신에 대한 신뢰에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서 모든 당사자들이 얼마나 인정하고 수긍하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과 함께, 영웅담 같은 자화자찬으로 웃음거리나 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필자라는 인간은, 양가 부모님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자식노릇 제대로 못한 것은 젖혀놓고, 한 여성을 반려자로 만났으면서도 아기자기한 남편노릇 제대로 못한 것 또한 물론이고,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 자상하고 친구 같은 아비노릇도 제대로 못했다는 자책감과 함께 벌써 정리기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한 바와 같습니다. 참으로 보잘것없고 평범함에도 못 미치는 불쌍한, 한 인간일 뿐입니다.

 

    가. 도마 카리스마?

  필자보다 조금은 나은 가정환경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아내는, 약 4~ 5㎞정도 떨어진 이웃 면의 국민학교 소재지인 빈촌에서 맏이로 태어났으면서도, 4남매 중에서, 유난히 부모님의 절대적인 사랑과 후원에 힘입어 소위 대장노릇(?) 하듯 하면서, 별 다른 구김살 없이 성장하였습니다. 거친 사내동생들 틈에서, 맏이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유지할 수 있도록 옆에서 기를 살려준 무조건적인, 부모님의 관심과 배려의 결과였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 동생들이, 누나를 대하는 모습에서 한결같이 공손하며 깍듯한 인상이 풍겨지고, 또한 누나 말이라면 함부로 거역하지 못할 정도이며 웬만한 가정사에도, 반드시 누나의 의견도 참고하여 결정되어지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73년 초, 중매로 만나게 된 우리 두 사람은 첫 맞선 자리에서부터, 서로가 호감(?)을 가졌었고, 양가의 필요와 사정에 의하여 맞선 10일만에 전격적으로 결혼을 하게 되었으나, 그로부터 30여 년 동안 온갖 시집살이에 갈등도 많았을 것입니다. 당시의 시골 풍습은 지금과 같이 데이트도 마음 되로 할 수 없었든 것은 물론이고, 서로 만나자는 연락을 하기도 쉽지 않았기 때문에 연애라고 할 수 있는 기간도 없었습니다. 결혼 전에는, 대장노릇(?)에 ‘금이야! 옥이야!(금지옥엽)하며 성장한 아내의 신세가, 누구 나와도 마찬가지겠지만 결혼 후에는 시집에서 제일 졸병(卒兵) 신세로 급전직하한 것은 물론, 많지 않은 농사일에도 매달려야 했기에 시집살이 또한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아내는, 수줍음을 유난히 많이 타면서도 티 묻지 않은 순수함과 올곧은 성격의 바른 소리와, 매사에 사리가 밝으면서 쾌활하고 명랑한 성격에 깔끔함이 풍겨지는, 전형적인 시골처녀의 모습이었으나 지금은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답게, 변해도 너무 많이 변해버린 상태입니다. 지금도 가끔씩, 친구들이나 가족모임에서 불쑥불쑥 내뱉는 언동 속에는, 시집살이를 비롯하여 신혼시절에서의 설움이 한으로 베어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상가상이라 할까, 필자의 성격 또한 다소 봉건적이면서도 앞에서 밝힌바와 같이 밝고 개방적이지 못한 신경질적이고 내성적이며, 남에게 아쉬운 소리는 물론이고 이런저런 부탁도 적당히 못하는 것은 차지하고, 순리를 따르되 원칙을 추구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이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아내의 마음고생은 말할 수 없이 컷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업선과 악업악과’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정말 우리 부부는 전생의 업에 의해 업보를 주고받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는 전제아래, 선업선과 악업악과에 의한 업과 업보의 연속은 윤회에 의한 다음 생애에서도, 계속되는 연결고리인 만큼 두뇌 활동에 의한 지식축적이 가능한 인간(3차원)세계에서, 우리 스스로의 의지로 ‘업장 소멸을 위해 최선을 다해보자’고 다짐도 해 보았지만, 그런 약속만으로는 쉬운 일도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첫아이를 낳고는 고양이로 변하고, 그 다음 둘째 아이를 낳고는 호랑이로 변하더라’는, 어떤 유행가의 가사처럼 결혼전과는 180도로 크게 변해버린 아내, 평범한 주부로서 보통사람들이 느끼고 만족하게 되는 행복마저도 가져보지 못했든 아내, 그것은 순전히 보통사람으로서는 커녕 가장답지 못한 필자의 성격과 무능력에서 기인한 것이며, 특별히 아기자기한 추억거리도 만들지 못한 무능함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도마 카리스마(charisma: 많은 사람을 휘어잡는 능력이나 자질)?”

이렇듯, 필자는 아내에게 남편노릇을 제대로 못했다고 늘 빚을 지고있는 기분인데, 2002년 12월 초순 아이들이 핸드폰 2개를 사 갖고 와서 제 어미와 아비에게 주게 되었는데, 그 핸드폰의 주인 이름을 어떻게 표시하느냐(?)하는 과정에서, 아내의 제안으로 새겨놓은 필자의 핸드폰임을 표시하는 이름입니다. 우유부단한 필자의 성격으로 아름다운 추억이나 특별히 아기자기했든 기억도 없는 상태에서, 가정 생활에서는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이었든 필자를,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었든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내 또한 결혼 이후부터 줄곧, 필자의 성격상의 변신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레저생활이나 문화생활 등 여가활동 면에 대하여는, 지금은 완전히 포기한 상태이며 남들에게는 기대 가득한 하계휴가기간도 우리에겐, 통상적인 평범한 일상중의 하루하루일 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한가족이 함께 가져보지 못한 바캉스는 기대도 않는 다는 듯이, ‘그저 집에서 가만히 쉬는 것이 제일 좋은 피서 방법이더라’라는 비아냥거림과 함께 최근 들어 가끔씩,

  “퇴직하고 나서 수월스럽게 관광여행을 다니자!”

는 제의에

  “그러자!”

고 대답은 하고 있으나, 그때는 또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을 뿐입니다.

 

    나. 아비와 같은 생활은 싫다?

  필자는, 1980년 후반기부터 파출소장으로 근무하는 기회가 많아짐에 따라 덩달아 본의 아니게, 가정생활과도 많이 동떨어지게 되었습니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6․25때 걸린 비상사태가 지금까지 해제되지 않았다’는 야유 섞인 비아냥거림이 회자되고 있는바와 같이, 필자의 근무처인 경찰조직도 명절 및 연말연시나 ‘○○ 소탕 ○○일 작전’등, 자체비상상태에 접어들게 되면 그놈의 정착근무가 짧으면 3~ 4주 보통은 그 이상이었으니, 퇴근이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습니다.

  직원이나 이웃사람들은 하기 좋은 말로, ‘잠깐 집에 가서 옷이나 갈아입어라’고 권하기는 하지만 정착근무 그 자체가, 파출소의 기본근무라는 생각 때문에 일요일마다 옷을 가져오게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고, 손수 세탁을 해서 해결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훗날, 장기간의 정착근무로 집에 가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으면서도, 비상상태가 해제되기만을 기다렸으니 참으로 ‘바보 같은 생각’이라고 자책하면서도, 지금까지 후회는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상급기관 지휘관들도, 자신들의 출세와 감독자에 의한 눈 도장을 위해 스스로 집에 안 들어가면서, 파출소장도 단위 지휘관이라며 정착근무를 강요한 것이었습니다. 경찰서장 이상의 지휘관들의 임기는, 1년 남짓했으니 그 1년 동안만 눈 딱 감고 각자의 사무실에서 정착근무를 하게되면, 승진이나 영전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으니 그런 정도라면 가벼운 마음으로 누구나 할 수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공무원 법에 규정된 연가 또한, 연가보상비가 지급된 1990년 이후부터 다소 완화되긴 하였지만, 그래도 1990년대 후반까지는 직원들의 근무감독 공백을 우려하는 감독자들의 관심도에 따라, 결재권자의 눈치를 살펴야 했기에 겨우 2~ 3일 동안 벌초나 하고 오는 수준이었습니다. 결국 감독자의 입장에서, 파출소장은 연가를 안가는 것이 제일 좋고, 가더라도 2∼ 3일만 다녀오라는 식의 권고(?) 같은 무언의 압력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휴가 가서 쉬고 즐기는 것보다는, 아예 휴가 안가고 제자리를 지키는 것이 마음을 편하게 하니, 자의반 타의반으로 포기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남들과 같이 휴가비로 펑펑 쓸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으며, 비교적 1990년대 후반부터는 파출소장의 연가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 듯이 하였으나, 그 때도 언제 나처럼 경제적 사정 등에 의해 하계휴가도 계속해서 포기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렇듯 퇴근도 제대로 못하고 직장에만 매달려 있는 힘없는 아비, 보통사람들은 해마다 가족들과 함께 즐기는 바캉스도 떠나지 못하는 불쌍한 아비, 경제적으로도 항상 쪼들려 먹고 싶고 갖고 싶은 것 제대로 해결해 주지 못하는 무능한 아비, 또래의 친구들에게 자랑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별 볼일 없는 한심한 아비, 신접살림을 차린 직후 한두 차례를 제외하고 15~ 16번의 이삿짐을 옳길 때를 비롯하여 16번의 입학과 졸업식에 한번도 함께 하지 못한 무정한 아비의 모습이, 아이들의 눈에는 어떻게 투영되고 각인되었든지(?) ‘아버지 같은 공무원생활은 하지 않겠다’고 하더라는 말을, 훗날 아내로부터 전해들었을 때 유구무언 그 자체였습니다.

  다시 한번, 스스로의 무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래! 아무려면 아비보다는 나은 일을 해야지’라며 혼자말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은 바보 같은 아비의 공무원생활 뿐이었지만, 모든 공무원사회가 다 아비의 경우와 같이 ‘그렇지 만은 않다’는 이야기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 바보 같은 내 인생!

  필자는, 성장기를 거쳐 활동기를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 비록 ‘관포지교(管鮑之交: 관중(管仲)과 포숙아(鮑淑牙) 사이와 같은 사귐이란 뜻으로, 시세(時勢)를 떠나 친구를 위하는 두터운 우정을 일컫는 말)의 예’에까지는 아니더라도, 흉금을 털어놓고 속마음이나 정담을 나눌 수 있는 동료나 친구도 새겨 놓지 못했습니다.

  춘추 시대 초엽, 제(濟)나라에 관중(?~BC 645)과 포숙아라는 두 관리가 있었다. 이들은 죽마고우(竹馬故友)로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관중이 공자(公子) 규(糾)의 측근(보좌관)으로, 포숙아가 규의 이복 동생인 소백(小白)의 측근으로 있을 때 공자의 아버지 양공(襄公)이 사촌 동생 공손무지(公孫無知)에게 시해되자(BC 686) 관중과 포숙아는 각각 공자와 함께 이웃 노(魯)나라와 거( )나라로 망명했다.

  이듬해 공손무지가 살해되자 두 공자는 군위(君位)를 다투어 귀국을 서둘렀고 관중과 포숙아는 본의 아니게 정적이 되었다. 관중은 한때 소백을 암살하려 했으나 그가 먼저 귀국하여 환공(桓公: BC 685~643)이라 일컫고 노나라에 공자 규의 처형과 아울러 관중의 압송(押送)을 요구했다. 환공이 압송된 관중을 죽이려 하자 포숙아는 이렇게 진언했다.

  “전하, 제(濟) 한 나라만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신(臣)으로도 충분할 것이옵니다. 하오나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시려면 관중을 기용하시오소서”

도량이 넓고 식견이 높은 환공은 신뢰하는 포숙아의 진언을 받아들여 관중을 대부(大夫)로 중용하고 정사를 맡겼다. 이윽고 재상이 된 관중은 과연 대 정치가다운 수완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안다(倉 實則 知禮節: 창름실즉 지예절)’

  ‘의식이 풍족해야 영욕을 안다(衣食足則 知榮辱: 의식족즉 지영욕)’고 한 관중의 유명한 정치철학이 말해 주듯, 그는 국민 경제의 안정에 입각한 덕본주의(德本主義)의 선정을 베풀어 마침내 환공으로 하여금 춘추(春秋)의 첫 패자로 군림케 하였다. 이 같은 정치적인 성공은 환공의 관용과 관중의 재능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이긴 하지만 그 출발점은 역시 관중에 대한 포숙아의 변함없는 우정에 있었다.

그래서 관중은 훗날 포숙아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나는 젊어서 포숙아와 장사를 할 때 늘 이익금을 내가 더 많이 차지했었으나 그는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를 위해 한 사업이 실패하여 그를 궁지에 빠뜨린 일이 있었지만 나를 용렬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일에는 성패(成敗)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벼슬길에 나갔다가는 물러나곤 했었지만 나를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운이 따르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나는 싸움터에서도 도망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나를 겁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노모가 계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를 낳아 준 분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이다 [生我者父母 知我者鮑淑牙]”

 

    (1) 대인 관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자들 세계에서 회자되는 말로는, 일 면식이 없었든 사람이라도 술자리를 같이하고 기생집에 함께 가서 오입하고, 목욕탕에라도 같이 가는 등의 생활을 한 두 번만 반복하게되면, 가장 짧은 시간 내에 흉허물이 없어지면서 절친한 우정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도 풀어보면, 술을 같이 마셨으니 이미 술친구는 다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으며, 기생집에 가서 함께 오입하고 즐겼으니 다같이 도덕군자는 아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목욕탕에서 발가벗고 마주서 바라보면 더도 덜도 없이 똑같이 다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너나 나나 똑같은 보통사람이라는 동질성이 확인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술이라는 기호식품은 사람과 사람사이를 연결시켜주는 가교 역할은 물론이고, 사람과 사람과의 정리(情理)를 생기게 하거나 더욱 돈독히 하는 역할도, 아울러 가졌다 할 것입니다. 따라서 고금을 통하여,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통상적이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만남의 수단으로는, 술자리밖에 더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술자리의 경우, 대접한 경우보다 대접받은 경우가 훨씬 더 많았으니 두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며, 기생집이나 목욕탕 등 심지어는 협력단체 위원들과의 회식이나 야유회 등의 경우에도, 관외로의 이탈 등은 적어도 근무시간동안은 엄두도 낼 위인이 못 되었으니, 절친한 친구는커녕 인간관계에서도 별 볼일 없는 존재였을 것입니다.

  성격 또한,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인지 어떤 좌석에서나 ‘이런 이야기도 해야 하는가?’하는 생각을 하게되면 결론은, 언제나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상대방 쪽에서는 ‘저 사람의 속내를 모르겠다’할 것이고 속내를 모르니 우정을 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필자의 성격 탓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관내의 많은 사람들과의 술자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 상대편이 무엇을 하며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하고나 술자리를 가질 수도 없었고 또한 직업상으로도 그럴 수는 없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술기운이 거나해지면 그야말로 쓸데없는 잡담을 늘여놓으며 좌중을 지배하려 하였으니, 그 때부터 상대방들도 ‘인간성과 속내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술기운이 돌기전의 술좌석이나 평상시의 좌석에서, 꼭 필요하지 않은 이야기나 쓸데없는 잡담이라도 늘여놓았어야 할 것인데, 그것도 못하는 바보였다는 것입니다.

  요즘도 흔히들 하는 말로 ‘아무개!’ 하면, ‘아 그 사람! 대인관계가 좋아서 누구하고나 형님! 아우!’하는 식으로 ‘인간관계가 넓어 친구가 많다’고 통칭되는 사람을, 소위 ‘마당발이야!’라고 표현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마당발이라는 별칭을 갖게 된 사람의 경우, 대인관계가 좋으려면 많은 사람들의 이런저런 부탁도 많았을 것이며, 술자리 또한 빈번했을 것입니다.

  아울러 이런저런 많은 부탁을 들어 줄 수 있으려면, 자신의 관련업무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관련업무도 포함되었을 것이고, 그러려면 누구에게나 ‘형님! 아우!’라고 부를 수 있는 친근한 넉살과, 형제 같은 끈끈한 유대관계도 필요했을 것입니다. 결코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필자로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이럴 때의 변명 중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합당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성격 탓!’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990년대 중반 어느 날, 작은아이로부터 뜻밖에 사무실로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었는데 내용인 즉, 친구 한 명이 폭행사건에 연루되어 ○○파출소로 갔는데, 좀 도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대강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크게 문제될 성싶지 않아, ‘너희들 일은 너희들 스스로 해결하라!’며 다만, 처리과정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거든 ‘그때는 꼭 다시 연락하라’고 거절하고 나서 생각해보니, 아이와 그 친구들이 어떻게 받아 들였고 또 얼마나 황당하고 실망하였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입니다.

  소위, 부조리한 상태가 유지되던 우리조직의 경우 어떤 사건과 관련하여, 같은 직원이 부탁하게되면 실로 황당하고 참담한 경우를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말도 안 되는 무 경우를 개탄하면서 우리사무실에서 만이라도 경미한 사건이고, 직원가족이 연루된 경우라면 합리적으로 판단해서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처리하되, 적극적으로 훈방하도록 하고 그 대가는 절대로 바라거나 받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 결과,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 합의가 되어 훈방한 사례들도 많았습니다.

  이렇듯, 술과 관련하여서나 성격적으로도 대인관계에서는 별 볼일 없는 상태에서, 아이들의 사소한 부탁까지 외면한 결과 긍정적인 기억은 누구에게서나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2) 부조와 품앗이.

   예로부터 우리조상들은 집안에 경사가 있을 때 부조하는 축의금과, 갑작스런 애사가 발생했을 때 부조하게 되는 조의금도, 다양했든 품앗이의 한 형태로 지금까지 유지되어온 우리민족고유의 미풍양속입니다. 이러한 미풍양속이, 품앗이의 한 형태로 인식되어서인지 직장 내에서는 친소관계를 떠나 남발되는 경향이 많았으며, 적어도 1990년대 초반까지는 직원들의 직계존속과 비속에 대한 경조사에는 적극적으로, 공(파출소장으로서의 역할)․사(품앗이 당사자로서의 역할)를 불문하여 지원하고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경부터 이러한 품앗이라는 말이 무색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로는, 소위 신세대의 출현과 다른 직(職)에 비해 인사이동이 잦은 것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의 사유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조사비용도 만만치가 않은 것이, 파출소장이 그렇게 대단한 직책이라고 웬만한 경조사는 거의 다 알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997년 주택을 신축하면서부터,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판공비의 범위 내에서만 사용하다보니, 남들처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충분하게 사용할 여유는 없었으며, 너무 많이 외면하다보니 이런 사정을 눈치챈 경리업무를 담당한 직원 중에는, 자제의 혼사도 있을 텐데 조금씩이라도 품앗이를 주는 것이 어떠냐(?)는 식의 권고에, 일언지하로 ‘만약 아이들의 혼사가 있더라도 직장 내에서는 단 한사람도 알지 못할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선언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2000년 7월쯤에 가족들에게도 말해 둔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못난 아비의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인지 아니면, 집안의 경제사정상 혼수비용이 없다고 판단해서인지, 두 녀석이 한결같이 결혼의사가 전혀 없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무작정 ‘알아서 할 것이니 기다려 달라’는 말밖에는 전혀 진전이 없어 보이니 답답하나, 자신들의 인생은 ‘자신들이 알아서 살아가겠지’하는 자위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품앗이의 성격이 강했든 경조사의 부조금을 주고받는 형태가, 급기야는 관내 대상업소에까지 확대되면서부터는 부조리의 유형인 유착비리로 발전하는 등, 치부나 뇌물전달의 수단으로 변천함에 따라 최근 들어서는 공무원행동강령 등에서 규제하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따라서 이미 말한 되로 퇴직 전후를 불문하고, 아이들 혼사가 있더라도 직장생활과 관련된 직원들에게 알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며, 또 아이들에게 한날 한시 한 장소에서 ‘형제가 합동결혼식을 할 수 있게 준비하라’고 일러두기는 했었지만, 그저 희망사항만이 아니기를 바랄 뿐입니다.

 

    (3) 그래도, 후회(後悔)는 않는다.

  일생을 통 털어 이분의 일(½)에 해당하는 활동기(공직생활)중의 기간에 대하여, 아쉬움은 있을지라도 결코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1980년대부터 각종비상근무 등 장기간의 정착근무에도 근무위치를 지키며, 잠깐동안이라도 집에도 안 들어가면서 속옷을 가져다 입거나, 손수 세탁해서 해결하는 등의 생활도 지금 와서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외근경찰관의 기본근무라는 개념은, 평온한 상태가 지속되는 때에는 계획되고 예정되어있는 기본근무를 하다가도, 범죄가 발생하면 즉각적인 초동조치를 취해야 하기 때문에, 근무위치에 대기하는 것이 곧 주(主) 근무이며 따라서 이러한 근무가 곧, 기본근무이기 때문입니다.

  옛날(春秋시대), 중국의 어느 나라 군주가 한 지방관(地方官)을 불러들였습니다. 그 지방관은 군주의 부름을 받고, 조정관료들과 사이에 있었든 지난날의 여러 가지 논쟁과 설전들을 떠올리며, 궁궐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군주는 서둘러 입궐한 지방관에게, 몇 마디 덕담을 나누다가 얼굴 색이 굳어지며

  “경을 파직하겠노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지방관은,

  “전하(殿下)! 신이 불민하여 백성을 잘못 다스렸음을 인정하옵니다, 그러나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그러자 군주도,

  “짐(朕)은 경의 그 경륜을 들었을 때만해도 누구보다 훌륭한 지방관이 될 것이라 믿었는데, 지금은 조정의 모든 관료가 하나 같이 경(卿)을 탄핵하니 짐도 어쩔 수 없노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지방관은 더욱 머리를 조아리며,

  “전하! 신(臣)도 그 동안의 경험을 거울삼아 앞으로는 훌륭한 관리가 될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니 다시 한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군주는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정 그렇다면, 일년의 말미를 줄 터이니 그 동안은 훌륭한 관리가 되도록 충성을 다 하라!”

며 한차례의 기회를 더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방관은 머리를 조아리며,

  “신(臣) ○ ○! 견마지로(犬馬之勞: 임금이나 나라에 대하여, 자기의 애쓰고 진력(盡力)함을 낮추어 이르는 말)를 다하여 성은에 보답하겠나이다”

하며 물러가서 다시 일년동안 열심히 지방민들을 다스렸습니다.

  약속한 일년이 가까워오자 그 지방관은 군주가 부르기도 전에 대궐로 들어가 다시 군주 앞에 부복하였습니다. 부르지도 않은 지방관이 입궐하여 부복하는 것을 본 군주는 파안대소하며,

  “그 동안 노고가 많았도다! 이번에는 조정관료들이 경의 칭찬에 침이 다 마르는구려”

하며,

  “이제는 좀 더 큰일을 하도록 하라!”

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방관은,

  “전하! 신의 사직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하며 일년 전과는 달리, 오히려 사직을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군주는 지난 일년 동안의 노고 치하와 함께 승차도 고려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사직을 청하는 관리에게,

  “지난 일년동안 지방백성을 잘 다스려 모두들 칭송이 자자하거늘, 왜 사직을 청하는가?”

라며 의아스럽게 생각하든 군주가 물었습니다.

  “전하! 먼저 번의 지방관생활은 전하를 위하여, 그 후 일년동안의 지방관생활은 조정관료들을 위하여 일 했사옵니다”

군주는 두 눈을 휘둥그래 뜨며,

  “그게 무슨 말이냐?”

며,

  “더 자세히 아뢰라”

고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지방관은,

  “전하! 마치 어버이가 자식들을 돌보듯 전하를 위하여 지방백성을 다스렸을 때는, 신을 파직하려하였습니다”

군주의 얼굴빛이 변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이어,

  “하오나 최근 일년간은, 조정관료들을 위하여 열심히 일들을 한 결과 이제는 승차시키려고까지 하니, 신으로서는 이런 녹봉(祿俸)생활은 싫사옵니다”

하며 사직의 윤허를 재촉하는 것이었습니다. 흙빛이 다 된 얼굴로,

  “짐의 잘못이로다! 짐의 허물이로다!”

탄식하며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듯 한숨짓든 군주는, 하직인사를 여쭈는 지방관에게,

  “경은 부디 짐을 용서하여 주시오!”

비통한 심정으로, 신하들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잘못을 뉘우치며 후회하고 있었지만, 지방관의 사직을 만류할 수는 없었습니다.

 

  모르긴 해도 그 지방관은 도연명(晉 陶淵明 365~ 427)의 귀거래사(歸去來辭)라도 읊고 싶었을 것입니다. 도연명이 진(晉)나라 팽택(彭澤)의 현령(縣令)으로 있을 때 일이다. 어느 때인가 군(郡)에서 보낸 독우(督郵)에게 예복을 입고 가서 뵈라 하므로, 도연명이 이레 탄식하며

  “내, 닷 말 곡식 때문에 소인 앞에 허리를 꺾을 수 없다”

하고 그 날로 사표를 내고 곧바로 이 귀거래사를 읊으며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귀거래’는 곧 ‘벼슬살이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리라’는 말이다. 도연명은 남달리 고귀한 성품을 지닌 사람으로서, 사람의 마음이 도(道)를 위하여 쓰이지 못하고 한갓 몸의 노예(奴隸), 곧 입의 구종(口從)노릇에 허덕이는 것을 슬퍼하여 전원으로 돌아가 농부들과 함께 밭 갈고 산수(山水)와 더불어 노닐며 자연을 노래한 전원시인이다.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歸去來兮(귀거래혜): 돌아가자꾸나! 벼슬살이 그만두고 내 고향 전원으로 돌아가자꾸나!

  田園將蕪胡不歸(전원장무어늘호불귀리오): 손 볼 사람 없어 전원이 온통 거칠어지려 하는데 아니 돌아가고 어쩌리오

  旣自以心爲形役(기자이심위형역하니): 고귀한 이 마음 값있는 일에 쓰이지 못하고, 제 입의 구종노릇에 허득이게 버려 두었든 지난날의 잘못된 생각들!

  奚惆悵而獨悲(해추창이독비): 하지만 그렇다고 어찌 지나간 한때의 잘못에 얽매여 넋 놓고 슬퍼만 하고 있으리오!

  悟已往之不諫(오이왕지불간이고): 이왕에 잘못된 일은 뉘우쳐도 소용없는 일.

  知來者之可追(지래자지가추): 앞으로 다가오는 일만은 지난날을 미루어 얼마든지 고쳐나갈 수 있겠지

  實迷塗其未遠(실미도기미원하니): 사실 벼슬길 험한 길에 잘못 들어, 한동안 내 갈 길을 잃고 헤매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그리 깊이 들지는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覺今是而昨非(각금시이작비로다): 이제는 깨달아 바른 길을 찾았으니 벼슬살이 그만 둔 지금은 참으로 장한 일이요, 제 입에 구종노릇 하든 어제는 진정 잘못된 일임을 뉘우치노라

  舟遙遙以輕颺(주요요이경양하고): 배는 가벼히 흔들흔들 고향을 바라보며 떠나가는데

  風飄飄而吹衣(풍표표이취의): 바람은 한들한들 옷자락에 나부끼고

  問征夫以前路(문정부이전로하니): 예서 고향까지 얼마나 남았을 까고, 나그네 붙잡고 남은 길을 물어 가는데

  恨晨光之熹微(한신광지희미로다): 해 떨어지기 전에 집에 닿긴 글렀는가? 어느새 희미한 저녁 빛이 어둑어둑 지니 서운한 마음 한이 서리네

  乃瞻衡宇(내첨형우하고): 이윽고 낯익은 저기 저 허술한 대문과 오두막집!

  載欣載奔(재흔재분하니): 어찌나 기뻤든지 단숨에 뛰어가니

  僮僕歡迎(동복환영하고): 심부름꾼 사내아이는 반가워 어쩔 줄 모르고

  稚子候門(치자 후문이라): 어린것들은 날 기다려 대문 밖에서 손 흔들어 나를 기다린다

  三徑就荒(삼경취황이나): 정원의 세 갈래 작은 길에는 잡초가 무성하여 황폐해가고 있으나

  松菊猶存(송국 유존이네): 하지만 소나무와 국화는 날 보란 듯 푸름을 자랑하며 꿋꿋이 서 있네

  携幼入室(휴유입실하니): 어린것들 손잡고 방으로 들어서니

  有酒盈樽(유주영준일세): 언제 빚었는가 항기로운 술이 항아리에 가득일세

  引壺觴以自酌(인호상이자작하며): 술항아리 끌어 옆에 끼고 혼자서 잔질하며

  眄庭柯以怡顔(면정가이이안이라): 정원에 우거진 나뭇가지 둘러보니 얼굴에 가득 기쁨이 넘실거리네

  倚南窓以寄傲(의남창이기오하니): 세상에 거리낄게 무엇인고 햇빛 밝은 남녁창에 기대어 버젓이 앉았으니

  審容膝之易安(심용슬지이안이라): 이제야 참으로 알겠구나! 무릎하나 들일 요

자그마한 집이지만 벼슬살이보다 그 얼마나 마음 편안한가를!

  園日涉以成趣(원일섭이성취하고): 날마다 정원을 거니니, 거닐수록 멋이야 더욱 세로워라

  門雖設而常關(문수설이상관이랴): 문이야 달아놓음 무얼하랴, 찾는 이 없어 언제나 굳게 닫혀있는 것을

  策扶老以流憩(책부노이류게): 지팡이에 늙음을 의지하여 멋대로 쉬다가

  時矯首而遐觀(시교수이하관하니): 가끔은 머리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본다

  雲無心以出岫(운무심이출수하고): 구름은 무심히 산허리를 돌아 나오고

  鳥倦飛而知還(조권비이지환이라): 새도 날기에 지쳤는가 제집으로 돌아올 줄 아는구나

  影翳翳以將入(영예예이장입하니): 저녁 해는 어둑어둑 서산에 떨어지려는데

  撫孤松而盤桓(무고송이반환이로다): 한 그루 소나무의 푸르른 그 절개, 내 마음인양 어루만지고 어루만지며 차마 발길 못 떼네

  歸去來兮(귀거래혜): 돌아가리라! 돌아가고파 돌아왔는데, 다시 미련을 두어 무엇하겠는가.

  請息交以絶遊(청식교이절유): 이제부터는 세상사람들과 교제를 끊고, 놀지도 않으리라.

  世與我而相違(세여아이상위하니): 세상은 나를, 나는 세상을 이렇게 잊었는데

  復駕言兮焉求(복가언혜언구리오): 여기서 다시 수레에 멍에 메어 무얼 찾으려 달리겠는가

  悅親戚之情話(열친척지정화하고): 참 마음을 주고받는 친척들과의 정다운 이야기 이것만이 내 기쁨이고

  樂琴書以消憂(낙금서이소우): 거문고와 책, 이것만이 내 즐거움이라. 온갖 시름 다 실어 보내리라

  農人告余以春及(농인고여이춘급하니): 농사꾼이 찾아와 봄이 왔다 알려주니

  將有事於西疇(장유사어서주로다): 나도야 서쪽으로 밭갈이 가야겠네

  或命巾車(혹명건차하고): 때로는 헝겊 씌운 수레를 타고 험한 산길을 따라 언덕 넘어 달리고

  或棹孤舟(혹도고주하여): 어느 때는 외로운 배 한 척 띄워

  旣窈窕以尋壑(기요조이심학이요): 깊은 골짜기 시냇물 찾아들고

  亦崎嶇而經丘(역기구이경구하니): 험한 산을 넘어 언덕을 지나가리라

  木欣欣以向榮(목흔흔이향영하고): 산에는 나무마다 봄이 즐거워 마음껏 부풀어오르려 하고

  泉涓涓而始流(천연연이시류): 얼어붙었던 샘물도 봄 소리에 녹아 졸졸졸 흐르기 시작하네

  善萬物之得時(선만물지득시하며): 때를 얻어 흥겨운 만물을 부러워하며

  感吾生之行休(감오생지행휴로다): 갈수록 다가오는 인생의 끝, 무덤을 느낀다

已矣乎(이의호): 다 그만 두어라!

  寓形宇內復幾時(우형우내복기시간데): 이 몸이 세상에 몸 붙여 둘 날이 앞으로 몇 때나 되겠기에

  曷不委心任去留(갈불위심임거류하고): 남은 인생을 내 어찌 마음대로 자연의 죽고 삶에 맡기지 않겠는가?

  胡爲乎遑遑欲何之(호위호황황욕하지): 이제 새삼 무엇 때문에 서둘며 이제 다시 무엇을 찾으려고 어디를 가고자 하겠는가?

  富貴非吾願(부귀비오원이요): 원래부터 부귀는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요

  帝鄕不可期(제향불가기): 그렇다고 임금계신 서울에야 바라지도 않았다

  懷良辰以孤往(회양진이고왕하고): 따뜻한 봄이 오면 동산을 거닐기도 하고

  或植杖而耘耔(혹식장이운자): 어느 때는 지팡이 밭에 꽂고 김매고 북을 돋우어 주리라

  登東皐以舒嘯(등동고이서소하고): 또 어느 때는 동쪽 언덕에 올라 조용히 시를 읊어도 보고

  臨淸流而賦詩(임청류이부시): 맑은 시냇가를 거닐며 시를 지어 세월을 보내리라

  聊乘化以歸盡(요승화이귀진하니): 자연의 변화에 맡겨 이 생명 다하는 그대로 돌아가니

  樂夫天命復奚疑(낙부천명복해의하랴): 주어진 천명을 마음껏 즐길 뿐, 여기서 다시 무엇을 의심하고 주저하랴.

 

                靑出於藍 

  또한 스스로, 선호(좋다고 소문난) 부서를 바라거나 희망하지 않은 것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이에 대해, 아내는 남들처럼 수단방법을 가릴 것 없이 좋다고 소문난 부서로 갈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남의 일인 양, 강 건너 불 구경하듯 발령 나는 되로 기다린 결과로, 가족들 고생만 시켰다며 일침을 놓은 적은 있었지만, 그것도 능력 밖의 일이었기 때문에 후회 할 일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가끔씩 동료들과의 이야기도중에, ○도 ○도 없는 주제에 멋모르고 이런 직(職)에 들어와서 ‘이렇게 밖에 될 수 없는 것 아니냐?’는 푸념들만 할 뿐입니다.

전국시대의 유학자(儒學者)로서, 성악설(性惡說)을 창시한 순자(荀子)의 글에 나오는 한 구절 중에,

  “학문은 그쳐서는 안 된다(學不可以己) 푸른색은 쪽에서 취했지만(靑取之於) 쪽빛보다 더 푸르고(而靑於藍) 얼음은 물이 이루었지만(氷水爲之) 물보다 더 차다(而寒於水)”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은 끊임없이 발전과 향상을 목표로 하여 노력해야 하고 중도에서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학문은 더욱 깊어지고 순화되어 한 걸음씩 완성에 가까워질 수 있다. 여기서 ‘푸름과 얼음’의 비유는 모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학문과 마찬가지로 그 과정을 거듭 쌓음으로써 그 성질이 더욱 깊어지고 순화되어 가는 것이다.

  스승에게 배우기는 하지만 그것을 열심히 익히고 행함으로써 스승보다 더 깊고 높은 학문과 덕을 갖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스승이 너무 훌륭하면 훌륭할수록 그를 능가하기는 어렵다. 이(靑出於藍: 쪽에서 나온 물감이 쪽보다 푸르다는 뜻으로, 제자가 스승보다 나음을 일컫는 말)와 비슷한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非蛙不中

  옛날 어느 고을에 이름이 제법 알려진 선비가 젊은 생도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 스승에게 글을 배우려고 많은 생도들이 찾아 들었습니다. 그 생도들은 어느 정도 글을 배우고 익혀 과거를 보면 영락없이 등과를 하게 되었고, 스승의 명성도 더욱 높아갔습니다. 그러자 스승의 주변에서는,

  “후진양성도 좋지만 입신출세하여 가문의 명예도 지켜라”

는 성화가 이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생도들을 가르치는 스승도 과거에 뜻을 두고 응시하게 되었는데, 그 스승은 그때마다 계속해서 낙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안타까운 일이 계속되자 스승의 친구는 위로인지 책망인지,

  “자네가 가르치는 생도들은 한결같이 등과를 하는데, 어떻게 자네는 그때마다 낙방인가?”

하며 술잔을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말없이 듣고만 있든 친구인 선비는 고사 한 토막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무더운 한여름 숲 속에서 꾀꼬리가 신나게 노래하다 잠시 쉬게 되었다 네. 그 때 뜸부기가 화답이라도 하듯 곱지 않은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 것이었어. 뜸부기의 노래가 끝나자 옆에 있든 뻑국이가 손 빽을 치며 ‘앙코르!’를 외치는 거야. 뜸부기는 뻑국이가 자신의 노래 소리에 손 빽을 치며 ‘앙코르!’를 외치는 바람에 신이 나서 우쭐거리며, 또 다시 노래 한 곡을 더 불렀지.

바로 그때 먼 발치에서 지켜보든 까치가

  “야! 뜸북아 너는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우리 모두를 도와주는 거야!”

라며 말참견을 하였다 네. 그러는 동안 인근에 있든 온갖 새들이 모여들며 꾀꼬리에게는 칭찬을, 뜸부기에게는 격려의 박수를 보내게 되었지. 이때 심술궂은 까마귀가,

  “뜸부기 노래 소리도 장난이 아닌데! 조금만 더 갈고 닦으면 머지않아 ‘짱!’도 되겠어”

라며 공치사를 하자, 다른 새들도 까마귀를 거들며 뜸부기에게 엄지손가락을 올려 보였다 네. 뜸부기는 좀 더 열심히 갈고 닦으면 꾀꼬리가 대수냐(?)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지.

이때 좌중의 눈치를 느낀 까마귀는,

  “애들아! 우리끼리 이러면 뭐하냐? 아무래도, 웃 동내에 계시는 황새 영감님께 누구목소리가, 더 아름다운지 심판을 한번 받아보는 것이 어때?”

라고 하자 꾀꼬리는 벌래 씹은 얼굴을 하였고, 뜸부기는 환영하는 빛이었다 네. 더디어 꾀꼬리와 뜸부기는 이웃들의 희망을 저버리지 못하고 웃 동내에 계시는 황새 영감님을 찾아갔었어.

  둘은 영감님께 공손히 절하고 영감님을 찾아 오게된 사연을 아뢰자, 황새 영감은 그것 재미있겠다며

  “모월 모일 모시에 마을광장에서 너희들의 노래를 들을 것이니, 그때까지 각자가 열심히 연습하라”

고 하더라 네. 사실 꾀꼬리는, 황새영감님이 들어보고 자시고 할 것이 자신의 손을 들어 줄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모월 모일 모시에 양쪽의 노래를 다 듣고 판단해 주겠다는 말에 자존심도 상하고 심사가 뒤틀렸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어.

  하지만 뜸부기는 일생에 한번 찾아올까 말까한 기회라 여기고, 그때부터 새벽마다 열심히 노래연습을 하였지. 더디어 약속한 시각에 마을광장에는 인근의 온갖 새들이 구름같이 모인 가운데, 꾀꼬리와 뜸부기의 노래시합을 시작하게 되었다 네.

  먼저 꾀꼬리가 구성지게 한 곡을 뽑자 황새영감은 노래 소리에 취해 넋이 나간 듯이 앉아 있다가,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다음은 뜸부기 차례라는 듯 고개를 돌리자 뜸부기가 노래를 시작했었다 네. 이윽고 뜸부기의 노래도 끝나자 황새영감 편찮은 기색이 역력했었다 네. 객석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지만, 꾀꼬리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그러나 뜸부기는 느긋한 표정으로, 황새영감의 판정을 기다리고 있었어.

  뜸부기는 한참동안 망설이든 ‘새벽의 일’을 참 잘했다고 자위하며 느긋한 표정으로 역시 ‘꿩 잡는 게 매!’라며, 적극적으로 모험 삼아 실천한 자신의 행동을 자화자찬하고 있었지. 사실 뜸부기는 황새영감이 심판해 주겠다고 했지만, 양심에 비추어 가당치도 않다는 것도 느끼고 있었기에, 이참에 모험이라도 한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동이 뜨기 전에, 나락 논에서 살이 통통 오른 개구리 몇 마리를 잡아들고 황새 영감을 찾아갔었다 네.

이른 시각에 나타난 뜸부기를 보고 황새 영감은 대뜸,

  “아직 약속시각이 아닌데 뭐 하러, 이렇게 ‘일찍부터 기다릴 필요가 있느냐?’며 가서 노래연습이나 제대로 하라”

고 타이르자, 황새영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보자기를 꺼내 놓으며,

  “영감님 그 동안 자주 찾아뵙지도 못 하였거니와, 오랜만에 뵈니 기력도 쇠하신 것 같고 얼굴도 많이 수척했습니다. 이놈들로 영감님 몸보신이라도 좀 하십시오 그리고 앞으로는 자주 문안 여쭙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오늘 있을 노래시합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라고 인사하고는 누구에게라도 들킬까봐 주위를 힐끔거리며 사라지고 말았지.

이윽고, 정적을 깨뜨리며 황새영감이 입을 열기 시작하는데,

  “꾀꼬리 너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은(銀) 쟁반에 옥 구르는 소리로 질리지 않는 구나”

그리고는 뜸을 드리고 나서 뜸부기의 노래 소리도 평가하게 되었다 네. 황새영감은, 그렇지 않아도 근래 들어 입맛이 없어지면서 때아닌 여름에 코뿔기운도 있었든 터라, 개구리 몇 마리로 이른 아침식사를 하고 나니 힘이 불끈 솟는 기분을 느끼면서. 새벽일도 그렇거니와 또 ‘앞으로도 자주 찾아뵙겠다’는 말이 자꾸 귓전을 때리는 것은 무슨 영문인지, 몽롱한 정신을 바짝 차린 상태에서

  “오늘의 뜸부기 노래 소리가 내 귀에는 더 아름답게 들리는구나”

라고 평가함으로서 뜸부기의 판정승으로 끝나게 되었다 네. 새벽의 일을 우연찮게 알게된 꾀꼬리가,

  “하하! 비와부중(非蛙不中: 개구리를 준비 안 해 적중시키지 못했다)이야”

혹은,

  “아독무와부득지(我獨無蛙不得志: 나만 개구리를 구하지 않아 뜻을 얻지 못했다)로구나”

외치며 뒤도 안 돌아보고 어디론가 쓸쓸하게 날아 가버리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뜸부기는, 새벽의 일을 귀신도 모를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중국 후한 때 양진은 상서학자로 그는 학문을 좋아하고 훌륭한 인품에 일 처리가 분명하였다. 그 해박한 지식은 당대의 유가에 견주어서 ‘관서의 공자라고 했다’ 한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그를 관서의 공자라 칭송해 마지않았다. 그는 민가에서 학문을 강의하여 쉽게 벼슬에 오르지 못했지만, 나이 50세가 되어 간신히 지방의 관리가 되었다(서당의 선생님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느라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했으나, 50세가 되어 지방의 관리가 되었다). 왕밀은 양진이 형주의 자사였을 때 자사보다 아래 벼슬인 무재로 천거된 사람이었다.

  그(양진)가 창읍이라는 곳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 그곳의 현령은 왕밀이었는데, 양진의 천거에 의해 벼슬을 한 인물이었다. 말하자면 왕밀에게는 은인이나 다를 바 없었다. 왕밀은 밤이 깊어지자 무슨 일을 도모하려는지, 가지고 온 금 10량을 은근히 양진에게 주었다. 그러나 양진은 거절하며,

  “당신의 옛 친구는 당신의 사람됨을 이해하고 있는데, 당신이 그 옛 친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닌가?”

그러자 왕밀이 말했다.

  “한밤중의 일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자 양진이,

  “천지지지 아지자지(天知地知我知子知: 하늘이 알고 땅이 알며 내가 알고 그대가 안다는 뜻으로 온 세상의 모든 일이란 비밀이 없다는 말)라 하거늘, 어찌 아는 사람이 없다고 이르는가?”

이 말에 왕밀은 슬그머니 황금꾸러미를 가지고 사라졌다.

 

  아울러 필자는, 약 30여 년 간을 근무하는 과정에서 징계 한번 안 받은 것은 물론이고 또한, 20여 년 간 후배직원들을 지휘감독하면서도 그렇게 많은 직원 중에서 단 한 명도, 징계 한번 안 받게 지휘해 왔습니다. 결국 30여 년 간의 공무원생활을 마감하는 현 시점에서, 가장 보람을 느끼며 스스로의 큰 위안으로 삼고 싶기는 하지만 이 또한, 가장 보편적이고 평범한 사안이라 자랑이라고 할만한 사항은 아니며 대체로, 직원들의 심성이 고왔든 탓이기도 할 것입니다.

  어울리지 않게, 자화자찬 한 것 같아 다소 쑥스럽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결코 쉬운 일도 아니었으며 앞의 어느 부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모든 업무의 적극적인 처리 의지와 확실한 끝맺음이 아니고는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일상적인 반복교양과 각각의 업무마다 처리과정을 확인하는 꼼꼼함과 간섭 아닌 간섭의 결과일 것이며, 이에 대해서도 직원들은 대체로 두 부류로 나누어지는데, 그중 한 부류의 직원들은 ‘○대 악당’이라 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면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적당히 못 넘어가는 소심한 성격과, 별나지도 모나지도 못한 순진함의 결과일 수도 있을 것이며, 어쩌면 도전정신과 모험정신의 결여라고까지 하다보면, 급기야는 어떤 말이 대두하여 수렁으로 전락하는 급전직하도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라. 남의 눈에 비친 모습은?

  이렇게 바보 같은 모습들이, 제 3자인 타인의 눈에는 과연 어떻게 비쳐졌을까? 혹은 어떻게 판단하고 평가하며 또, 필자를 연상하는 많은 사람들의 뇌리를 제일 먼저 스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각인각색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마치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장 정확하고 확실한 종합적인 판단은, 가장 지척에서 매일같이 보고 듣고 느낀 아내와 아이들의 판단일 것이며, 많은 사람들은 필자의 능력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시적이며 단편적인 모습만 접할 수 있었던 것이기에, 또 다른 하나의 편견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남의 눈에 비친 모습이 중요하다 할 수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설사 타인의 눈에는 어떤 모습이었든 능력 있는 다정한 남편, 권위 있고 소양을 두루 갖춘 친구 같은 자상한 아비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대 인간관계에서조차 만족할만한 신뢰는 고사하고 인간성 자체도 재고할 수밖에 없는 여지를 남겼으며, 동료나 직장과 관련된 이웃의 경조사마저 많이 외면했으니 그들(제 3자)의 눈에 비친 모습은, 말하나마나 뻔한 모습 그대로일 것이며 여기에 아내나 아이들의 눈에 비친 모습을 더한다면, 그야말로 황당하고 난감하여 무어라 변명의 여지도 없을 것이나, 이 부분은 여러분의 경험과 판단에 의한 몫으로 남기고자 합니다.

  또한, 1995년경부터 2000년 위 절제수술 전까지는 약 6∼ 9㎞의 거리를 도보로 출퇴근하였으나, 위 절제수술 이후부터는 조금씩 자제하고 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건강을 위해서 걷기 시작했고 또, 그렇게 이야기도 하였지만... 이에 대하여 이웃사람들은, 지금까지 자가용승용차도 사지 않고 도보로 출퇴근하는 모습에 대하여, 절제와 검소함이 생활화된 의지의 표현이라느니,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본받아야 할 애국자라는 등, 칭찬 아닌 칭찬(?)들을 하고 있으나, 별로 액면 그대로 받아 들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흔하디 흔한 자가용승용차를 못사는 이유가 다름 아닌, 사실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 승용차를 못사는 것인데, 과연 이웃사람들 개개인의 눈에는 어떻게 비쳐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한 빌딩 아닌 빌딩(?)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승용차 하나 안 사며 버티고있는 것은, 그 동안 축적해 놓은 재산을 감추기 위해서라고 하지 않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이미 2000년 초에도 들은바가 있었기 때문에, 유비(流蜚) 통신을 타고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되며, 또 가끔씩 방문하는 친인척 중에서는, 겨울철에 ‘이 집에 올 때는 반드시 겨울옷을 껴입고 오게 된다’는 이야기 등을 비롯하여 지지리도 궁상맞은 모습에, 개개인이 갖게되는 감정이나 느낌은 어떤 것이었는지 알 길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자괴감으로 인한 탓인지, 가끔씩 ‘성공적인 삶이란 어떤 것일까?’ 다시 말해서 3차원세계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일생을 살다가 4차원세계로 되돌아간 사람들 중에, 인간으로 태어난 목적을 가장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고 할 수 있는 사람과 또 그의 삶은 어떠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지구라는 땅을 밟고 살다간 부지기수의 사람들 중에, 석가모니와 예수님의 삶이 ‘가장 성공적인 삶이었다’고 하는데, 어찌 보면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성공적인 삶이란?’ 우리 같은 무지렁뱅이들의 수준에서, ‘오르지 못할 나무 쳐다보지도 말라’는 말같이 ‘가장’ 성공적인 삶은 제켜두고, 보통사람들의 성공적인 삶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표사유피(豹死留皮: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뜻. 사람은 사후(死後)에 이름을 남겨야 함의 비유)라는 말같이 자신의 이름 몇 자를, 남녀노소 불문하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게 하는 것이 성공적인 삶이라 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널리 그리고 후세에까지 남기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통성명을 하며 사귀었고 또 이름을 알리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하였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지 자문해 보아도 그 결과는 알고 자시고 할 가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60여 억 명의 인류 중에서, 또 한 시대를 장식했든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지만 이들 중에도, 자신의 의지에 의하여 이름을 남기게 된 사람들을 포함하여,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름을 남기게 된 사람 등, 그들의 언행에 대한 선악과 삶에 대한 공과가 뒤엉켜 분간이 쉽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언행의 선행(善行)과 삶에서의 공적이 많은 사람이야말로 성공적인 삶으로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이러한 요건들도, 인간세상에서의 기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by 다사치 | 2009/09/08 07:16 | 거짓 나는? | 트랙백 | 덧글(0)

참나를 찾아

여섯. 참나(眞我)를 찾아(나는 신이다)

1. 거짓(현재를 살아가는 동안의) 나(我)는!

  가. 도마 카리스마?

  나. 아비와 같은 생활은 싫다!

  다. 바보 같은, 내 인생!

    (1) 대인관계는?

    (2) 부조와 품앗이.

    (3) 그래도, 후회는 않는다.

  라. 남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은?

2. 참(과거 현재 미래가 똑 같아야 할) 나(我)는!

  가. 거울 상자 속의 나!

  나. 우주 속에서의 나!

3. 나는 신(神)이다

 

  나(我)는 누구인가? 또한 이 글을 읽고있는 여러분은 누구일거라고 생각합니까? 나(我)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 현재를 살아가면서 이 글을 쓰고있는 ‘나(我)!’ 자신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글을 읽고있는 여러분도, 더도 덜도 말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 자신 그대로 일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씩 불교계에서는 ‘참 나를 찾아라!’고 하는 말들을 들을 때마다, ‘나가 내’고 ‘내가 나’지 ‘내(나)가 나(내)’ 아닌 또 다른 누구(참 나)를 찾으라는 말인가? 부처님은, 왜(?) 어떤(?) 의미로 ‘참 나를 찾아라!’고 했을까? 그러면, 지금의 나는 ‘거짓 나’라는 말인가? 하는 의문과 함께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참 나’와 참 나아닌 ‘거짓 나’가 어딘가에 또 있단 말인가?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종잡을 수도 없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참으로 황당하기 조차하였습니다.

  그래서 인지 이 글을 쓰기 시작한 2002년 초까지만 해도, 이런 제목(참 나를 찾아)의 글을 쓰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체, 마음속으로 작정하고 있었든 그리고 생각나는 되로 또 시간 나는 되로 무료함을 달랜다는 생각에서 쓰다보니, 결국은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앞의 어느 부분에서도 이야기 한바와 같이,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또는, ‘성공은 99%의 노력과 1%의 영감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고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였듯이, 이 글을 쓰는 동안의 어느 한 순간에 혹시, ‘참 나!’라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하는, 그 무엇인가가 머릿속을 스치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4차원세계에 관한 이야기 중에 ‘거울 앞’에 서있는 나는 ‘참 나’이고, ‘거울 속’에 비친 나는 참 나가 아닌 ‘거짓 나’가 아닐까(?)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나(필자)는 누구나 가지고있는 고유한 이름과, 자신을 포함하여 누가 언제 어디서나 구별할 수 있는 특정한 외모를 가졌으며, 제각기 다른 특유한 성격과 탐욕의 덩어리로 뭉쳐진 육체를 가진 ‘나!’ 결국, 현재 이 모습의 ‘나’는 껍데기나 가면에 불과한 ‘나’라는 것이고, 이러한 ‘나’가 아닌 진짜인 ‘내’가 누구인지 찾으라는 것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만이 전부가 아닌 ‘진짜인 나! 즉 인간세계에 오기 전 나의 모습, 또는 사후세계에서의 나 혹은 나라는 존재를 비롯하여 최초로 창조되었을 때의 모습을 찾아라’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런 나를 어찌어찌 하면 찾아 볼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든 것입니다.

  따라서 몇 번의 생(윤회)을 거쳤을지 알 수는 없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와는 무언가 다른 어떤 모습인 경우도, 있었을 수 있었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현세에서의 발자취를 다시 한번 뒤돌아보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현재와 다른 나의 모습은 바로 유아기 때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현재 이 순간의 ‘나’와, 소위 유아기시절의 ‘나’는 무엇이 어떻게 변한 것들이 있을까(?) 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외부로 표출되어 있는 외면(모)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늙고 병든 육신으로 변하였을 것이고 특유의 성격은 그대로일 것이나, 밖으로 표출되지 않은 내면에서의 차이는 욕심이 있었느냐(?) 없었느냐(?)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비록 유아기시절이었다 하더라도, 배고픔과 불편함은 엄마와의 대화(울음)로 해결하였을 것이고 다만, 욕심이 없었으므로 그 불편사항만 해결되면 천진난만한 세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욕심을 버린 그 모습에서부터 ‘참 나’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참 나!’를 찾는 첫 과제는, 욕심을 버린 나를 먼저 찾는 것이 첫 단계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과 같은, ‘참 나’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인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그 무엇인가를 어설프고 부족하나마 더듬거리며, 정리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바닷가 모래 속에서 밀(小麥)알 하나를 찾아내듯 말입니다. 아울러 나는 과연 누구인가? 생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참(육신이 없는) 나를 찾아라’고 하였으니 참(육신이 없는) 나 아닌, 거짓(?)(육신이 있는) 나도 같이 찾아봐야 되겠다는 생각과 함께, 또한 ‘참(육신이 없는) 나’와 ‘거짓(?)(육신이 있는) 나’가 동시에, 인간(3차원)세계에서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앞의 ‘둘. 생로병사’ 부분에서 제시한 산술적 공식 하나를, 또 인용하게 되었습니다.

  인체(人體: 살아있는 사람)= 육체(肉體: 욕심을 가진)+ 신체(神體: 혼령)

  육체(肉體: 욕심을 가진)= 인체(人體: 살아있는 사람)- 신체(神體: 혼령)

  신체(神體: 혼령)= 인체(人體: 살아있는 사람)- 육체(肉體: 욕심을 가진)

여기서 인체(人體: 살아있는 사람)는, 즉 육체와 생명을 동시에 가진 나를 말하는 것으로 3차원세계의 물질인 육체와, 4차원세계의 생명인 신체(神體)가 함께 하는 즉, 살아(생명)있는 인간 다시 말해서 인간으로 활동하고 있는 ‘나(我)!’를, 의미한다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by 다사치 | 2009/09/06 07:45 | ◎ 참나를 찾아 | 트랙백 | 덧글(0)

육신의 정리

                육신(肉身)의 정리.

가. 가치 있는 삶.

나. 자력(自力)에 의한 삶.

다. 마지막 보시(布施)

 

  우리들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사람들 중에는 지나치게 제 몸을 아껴, 힘들거나 귀찮은 일들을 피하려 하거나 웬만한 일들도 하지 않으려는 경우들을 볼 때마다, 죽고 나면 화장장(火葬場) 불구덩이(爐)속에서 태워지거나 땅속에 묻어 썩혀버릴 것을, 무엇 하려 저렇게 아끼려고 애를 쓰는가? 이용 가능할 때, 적당히 이용하고 활용해야 ‘육신의 건강에도 좋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특히 젊은 층에서도 많더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늙고 병들어 근력(筋力)이 없어지거나 체력이 떨어지고 나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무리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도 마음 되로 할 수 없는, 살아있는 송장(屍體)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임종 직전까지는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것이라면 그 무엇이던 간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추구하고 실행하므로 써, 삶에 대한 보답과 함께 소위 밥값은 하면서 살아야, 진정 보람 있는 삶의 과정일 것입니다.

  그래서 불가(佛家)에서는 ‘무노무식(無勞無食)’이라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와 같이 늙거나 병들어 살아있는 송장(屍體)이 되기 전에, 자신의 육신(肉身)을 최대한 이용하고 처리하여 대다수가 수긍하는 방향으로, 어떻게 정리되어져야 하는지 그리고 그 내용들이 자식(子息)들에게도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우에 따라 여러 가지 방도가 있을 수 있겠지만, 최소한의 방향은 제시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소 이기적 생각이라 할지 모르지만, ‘내 인생의 주인은 바로 나(我)’이듯이 ‘내(我) 육신의 주인 또한 나’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서는 약간의 문제는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이론(異論)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살아생전의 내 육신이 오직 나만의 것’인가에는 찬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의 가정(家庭)이라는 테두리 내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동안에는, 보잘것없는 내 육신이라도 오직 나만의 것이라기 보다는 가족 구성원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정이라는 범위 내에서 부부는 물론, 부모와 자식 그리고 형제자매간에는 서로가 건강과 행복이라는 공동의 목표로 지향(志向: 생각이나 마음이 어떤 목적을 향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족 구성원 모두는, 스스로 자신의 육신을 잘 관리함으로서 불의의 사고를 당하지 말아야할 것이고, 또한 질병에 걸리더라도 적극적인 치료와 정성어린 가족들의 염원(念願)으로 쾌유(快癒) 해야할 것이며, 그리고 어떤 사건과 사고의 주체는 물론이고 객체도 되지 않도록 각자가 힘써 공동의 목표를 달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내(我) 육신의 주인 또한 나’라는 것은 물론, ‘사후(死後)의 내 육신’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의 대다수 유족들의 경우, 망인(亡人)의 육신(屍身)을 편안히 모시고 엄숙하고 장엄한 장례식을 준비하는 것이, 유족으로서 또는 자식으로서 망인에 대한 마지막 효도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형참사 현장이나 해난(海難) 사고 때 시체라도 찾기를 갈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이유들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이론이 있을 수 있겠으나, ‘사후(死後)의 내 육신’의 주인은 ‘나’라는 말에 대하여 여기서는 그냥 접어 둘 것을 당부합니다. 최대한 양보하여 유족들의 생각 되로 장례식을 치르더라도 기껏, 불구덩이에 넣어 태워 한웅큼의 재로 만들거나 아니면, 땅속에 묻어 썩혀버릴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인간이 욕심을 부리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는 것은 물론이고, 타당하지 않은 이유 또한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 개인의 육신이긴 하지만, 살아생전에는 가족 구성원 모두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사후의 내 육신은 내 것’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은 여생은 가치 있고 순전히 자력으로 유지되는 삶이어야 하며, 최후로는 생산적인 재활용 또는 필요한 상대에게 조건 없이 주어져(布施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 가치 있는 삶.

  가치 있는 삶이란, 자신이 살아있는 값어치를 반드시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 값어치라는 것도 경제적이든 비경제적이든 유형이든 무형이든 불문하며, 어느 누구에게든지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줄 수 있는 삶이라면, 그것이 바로 가치 있는 삶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주변에서는, 안타깝게도 남에게 도움을 주기보다는 자신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해 가족이나 이웃의 도움을 받아가며, 근근히 생을 유지해 가는 많은 노약자(老弱者)와 병약자들도 삶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노약자와 병약자(病弱者)들에게까지 삶의 가치를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 말이 조금도 사리에 맞지 않음)이겠으나, 노․병(老․病)과 관계없는 남녀노소를 불문한 실업군(失業群)에 포함된 사람들도, ‘가치 있는 삶’이라는 명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 60여 억 명의 인류가 3차원세계인 인간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오직 부모님들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든 무계획이었든 단순한 사랑의 결실이라고만 생각하기엔 너무 무의미하지 않습니까? 어찌 보면 암컷(雌)과 수컷(雄)이 만나 사랑을 나누고 후손을 남기는 것은, 지구상에 생존하는 수많은 식물과 동물의 본능이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식물과 동물의 본능에 의한 생존경쟁은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는 반면, 본능에 의한 약육강식보다는 사랑과 봉사로 인류애(人類愛)라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많은 선각자(先覺者)들에 의해, 인간세계와 동물세계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본능에 의해 암컷(雌)과 수컷(雄)이 만나 사랑을 나누고, 후손을 남기는 동물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류애(人類愛)라는 정신에 많은 사람들은 빠져드는 것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삶이 유지되는 기간동안 무엇인가를 행하거나 배워야한다는 암시(暗示)이거나 삶에 대한 가치의 추구(追求)라는 것입니다.

  우주주인께서도 개개의 생명체에게 삶이라는 과정을 부여할 때부터, 생명체 각자에게 각기 다른 가치 즉 삶에 대한 값어치를 요구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생명체 각각은 자신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 그 값어치를 충분히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공짜로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시점부터라도, 그 가치(價値)를 얻기 위해 남은 여생동안 무엇이든 열심히 일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이 없는 삶, 즉 도움을 주기는커녕 남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남에게 해를 끼쳐서는, 가치 있는 삶이라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무병장수와 같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임종을 맞이하기 직전까지 무엇인가에라도 열심히 사는 모습으로 소일해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앞의 어느 부분에서도 언급한바와 같이 우리인간 대부분이,

  ․할 일이 없어졌거나,

  ․철이 다 들었거나 또는,

  ․알고 싶은 것을 다 알았으면,

‘죽게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할 일없이 빈둥거리다가 죽게되는 것은 아닐까? 혹은 무엇인가를 깨달았거나 알았으면, 곧 바로 ‘죽게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즉 인간으로서 할 일이 없어졌거나 또는 철이 다 들었거나 아니면 무엇인가를 깨달았으면, 더 이상 인간으로 살아갈 이유가 없어졌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할 일이라 함은 우선 선량한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어야 할 것이며, 누구나 평범하게 할 수 있는 것을 포함하여, 꼭 필요한 것(일)이어야 한다면 예(例)컨데 봉사(奉仕)활동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또 봉사활동이라는 것도 그 범위가 크고 넓어, 어떤 특정활동이 봉사활동에 해당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쉽지 않겠지만, 각자의 양심과 이성에 따라 나보다 어려운 이웃이나 거동이 불편한 이웃을 성심 성의껏 돕는 일 또한, 봉사활동이 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직장에서 퇴직했다고 또는 할 일이나 소일거리가 없이 물러앉아, ‘아! 이젠 할 일이 없구나!’하는 생각은 ‘무병장수와도 적대관계’라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문제는 봉사라는 허울을 쓰고 행하는 봉사 아닌 봉사활동은 무의미 할 뿐 아니라, 그런 활동은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짓’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행하는 활동이, 어려운 이웃과 몸이 불편한 이웃 등 진정 남을 돕기 위한 활동인지(?) 아니면 남을 의식하기 위한 행사에 불과한 것인지(?)는 자신의 양심이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철(知覺: 사리를 가릴 줄 아는 힘)이라 하는 것도 마치 허상에 가까운 말과 같아 무척이나 조심스럽습니다. 앞의 어느 부분에서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것 같아 얼마나 공감하고 이해 할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또는 우리 자식들의 유아기 혹은 유년기 때로 다 함께 거슬러 가 봅시다. 그때는 어린아이이기도 하지만, 아무거나 가지려고 떼를 쓰고 갖지 못하면 울며 응석을 부리다가도, 철이 들기 시작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지게 될 때부터, 비로소 ‘철이 들었다고’들 합니다. 비단 유아기나 유년기 때뿐만 아니라 어른이 다된 우리네 보통인간도 철이 덜 든 경우는 많이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필자의 경우는 1990년대 초반쯤에서야 겨우 조금씩 철이 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바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이전이라고 철부지 어린애 같이 막무가내(莫無可奈)로 놀아난 것도 결코 아니었으며, 더구나 망나니 같은 생활도 아니긴 했지만 그때부터 무언가 조금씩은 달라지는 듯한 자신을 느끼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아직 철이 다든 것은 아니며, 아마도 ‘철이 다 들게되면 그때는 죽게되는 것은 아닐까?’생각한다고도 한바 있었습니다.

  그럼 여러분 스스로는 어떤 면에서 철이 들고있다고 느껴 본적은 없었는지요? 철이 들기 이전에는,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또 아무생각 없이 행동했든 사안들이 철이 들면서부터는, 그 사안에 대하여 ‘욕심으로 인한 과욕이었다’고 반성하거나, 이제부터는 그런 ‘욕심을 자제해야 되겠다’라는 자성의 기회가 있었다면, 그때 비로소 철이 들기 시작했다고 단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철이란 것도, 누구나 떨치지 못하는 욕심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여지며, 또한 우리인간이 ‘알게 모르게 드는 것이 아닌가?’라고 한 적이 있었으나 결국은, 유아기 또는 유년기를 제외하고는 그 사람의 도덕성과 인생관 및 직업윤리 등, 가치관에 따라 일찍 들기도 하고 늦게 들기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알고 싶은 것, 즉 학문적 진실이건 비 학문적 진실이건 또는 과학적 진실이건 비과학적 진실을 포함하여, 모든 인류의 관심분야와 함께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등, 진실을 알고 싶은 것이 없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과 사후세계를 비롯해 알고 싶은 것은 얼마든지 많을 것이며, 종교인이 아니면서도 ‘인생의 도리며 우주의 진리를 알아 무엇에 쓰랴?’하는 식으로, 단념하지 말고 여러분은 ‘왜? 하필이면 우리(여러분의) 부모님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지금의 형제자매를 만나게 되었을까?’ 또한, 이렇게 인간세계에 와서는 무엇을 이루고 성취했는가? 또는 어떤 흔적을 남기게 되었는가? 그리고 참다운 나는 누구인가? 하는 것들을 직접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같이 무지렁뱅이 들이라고 비 학문적 또는 비과학적인 분야에 관심을 갖지 말라는 법은 없으며, 아무리 평범한 인간이라도 종교인이 탐구하고 열망하는 진리를 알고싶어하는 것은 당연한데도, 마치 종교인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양 외면하고 있는 것만 같아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 자력(自力)에 의한 삶.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195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인류의 의료수준은, 대부분의 환자에게 속수무책으로 하늘만 쳐다보며 쾌유를 기원하거나, 정확한 진맥(진찰) 능력과 적합한 약재의 부족으로, 웬만한 의료 서비스도 경험하지 못한 체 운명을 달리하다보니, 인간목숨의 시말(始末)은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여 우리 조상님들은, ‘인명은 재천’이라고 한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쯤은, 치료의학과 예방의학의 발달로 ‘인명은 재천’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공학과 의료기술의 발달로, 당시에는 불치병이고 난치병이든 각종 암(癌) 종류의 질병까지도, 조기에만 발견하게되면 거의 완치수준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수명 연장의 관건은, 얼마나 조기에 질병의 원인을 찾아 낼 수 있느냐? 하는 것과, 각종 질병으로부터 예방하기 위하여 자신의 육신관리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행하느냐? 인데, 지금도 몸의 어디가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고 나서는, 채 1년도 버티지 못하고 대부분이 죽어 가는 것을 이웃에서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인명은 재천이 아니라, 인명은 곧 자신의 육신관리와 질병의 예방과 치료에 따라 좌우된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온전한 육신관리와 함께 질병의 예방과 치료효과로, 당사자의 생명연장이 이루어졌다고 바로 ‘창조주(하느님이나 부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도 생기겠지만, 그것은 생명의 주체인 당사자(인간) 자신의 육신관리는, 자신의 책임범위 안에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창조주(우주의 주인)의 뜻을 거역하는 것은 아닐 것이며, 또한 ‘인체는 소우주’라고 하였듯이 우리육신의 주인은, 바로 우리 개개인 것이기 때문이라고도 한바 있었습니다.

  즉 육신관리라 하는 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해 소식다동(小食多動)과 함께 청정식품으로 필요한 영양(營養)을 골고루 섭취하고 맑고 깨끗한 환경에서 생활하며, 건강에 해(害)로운 과음과식(過飮過食) 그리고 금연은 물론 각종 유해물질로 오염된 식품이나 환경에서 탈피하는 지혜와, 질병의 예방과 치료에도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서 일정기간동안은, 부모님을 비롯하여 이웃들의 도움과 보호를 받으며 성장하게 되는데, 그 이후부터는 순전히 자신의 능력과 체력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삶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태어나는 영아(嬰兒)의 탯줄은 부모나 의사 혹은 이웃의 도움으로 끊어지지만, 그 이후부터는 자신의 의지에 의해 먹거리로 영양(營養)을 섭취하며 성장해 가는 것이, 이세상의 모든 동물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삶은, 태어나서 탯줄을 끊고 독립적인 호흡(呼吸)을 시작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타인의 도움을 배제하고 오로지 자신의 능력에 의하여 유지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명은 재천’이라는 명제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인명은 재천’이라는 말은, 인생이라는 전 과정(생로병사)은 창조주(하늘)에 의해 이미 예정 또는 계획되어져 있다는 것일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위의 이야기들이 상호 ‘모순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우리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구심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무병장수(無病長壽)를 위한 자신의 육신관리와, 자력에 의한 삶이라는 수단은 각기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력에 의한 삶이라는 것은, 노․병(老․病) 또는 각종 사건사고로 인하여 당사자의 생명이 위독하다는 이유로 필요이상으로, 각종 생명연장장치 등에 의하여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자신의 육신관리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운명적으로 죽을 때가 되었는데도 죽지 못하게 생명연장장치 등에 의해 생명이 연장되는 것은, 꼭 가(去)야 할 사람을 가지 못하게 붙잡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고 하겠습니까?

  운명에 의해 갈(死去)때가 되었을 때, 엉뚱하게 붙잡지 말고 아쉽지만 고이 보내줘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억지로라도 생명을 연장하겠다고 부착시킨 생명연장(보조)장치들은, 의학적 판단과 기준에 따라 적절한 시점 즉 자신의 능력이나 의지로 삶을 연장할 수 없을 경우에는 제거하므로 서, 갈 때가 된 사람들은 보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의학적으로 완치나 회복의 가능성이 전혀 없음에도 종교교리와 사회윤리의 틀에 얽매여, 소위 안락사를 부정하고있는 현실은 재고(再考)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가족의 고통이나 이웃의 고생스러운 희생이 안타까워서가 아니라, 노약자(老弱者)와 병약자(病弱者) 자신들의 추(醜)해지는 모습을 가족이나 이웃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도, 환자들의 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장기간 거동조차 하지 못하면 피골(皮骨)이 상접한 몰골은 앙상해질 것이고, 대소변(大小便)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추(醜)한 모습의 당사자는, 정말 조용히 그리고 하루빨리 가고싶은 심정일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당사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갈 때가 된 사람을 가지 못하게 붙잡는 것)은 창조주의 뜻이 아닐 것이라는 것입니다.

  가족들의 입장에서는 애통하고 가엽은 마음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만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혹시나 하는 기대와 지금까지 못한 효도를 다하겠다는 듯, 생명연장기기를 제거하지 못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경제적 사회적 비용과 의료서비스의 효율적 운용 등을 감안한다면, 남아있게 되는 가족과 사회 그리고 국가에도 손실을 끼치는 것인 동시에 창조주의 계획에 의하여, 떠날 때가 된 사람들을 계속 붙들고 늘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는 것입니다.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가끔씩 치매환자를 다루는 가정(家庭)드라마에서, 치매환자의 자식들은 우러나오는 효심(孝心)에서 또는 이웃이나 사회의 이목 때문에, 요양원에 입원시키는 것이 꺼려져 ‘내 부모니까 당연히 내가 돌봐드려야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치매에 걸렸을 경우 자식들에게는 고생시키지 않겠다고 하는 발상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동의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유사한 사례들에 대입하는 발상의 전환과 함께 의식의 대혁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각 병원의 중환자(重患者)실이나 또는 병실에서, 산소호흡기를 포함한 각종보조기기들에 의해 생명을 연장하고 있을, 불치환자들의 의식(意識)유무를 불문하고 의학적 판단에 따라 갈 때가 된 사람들은, 온전하게 보내주도록 다같이 노력해야 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능력과 체력 그리고 의지에 의하지 않은 체 각종보조기기들에 의하여 수명을 연장하는 그런 삶이란, 자력(自力)에 의한 삶이라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늙거나 병들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살아있는 송장 같이 가족이나 이웃에 폐를 끼치는 소위, 고려장(高麗葬)의 대상 같은 삶까지 영위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많은 여러 가지 사실들과 이유들 때문에 의학적으로 완치나 회복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의식불명의 불치환자, 의식이 분명한 말기 암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앞에서 말한 안락사문제도, 공논화하여 사회적 최소공배수를 찾아야 합니다.

  필자 역시 노․병(老․病) 또는 각종 사건사고로 인하여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그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산소호흡기 등 각종기기들을 부착하는 것을 거부한다고 아내에게는 이미 말한바 있었는데, 다행히 적극적으로 동참 의사와 함께 긍정적이었으며, 기회가 되면 아이들에게도 미리 유언으로 남길 예정입니다.

  ※1. 어떤 사건이나 사고 또는 질병으로 인하여 위급한 상황이 닥쳤을 때, 생명연장보조기기를 절대로 부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 임종이 가까워지면 병원으로 옮겨 재활용이 가능한 모든 장기(臟器)의 적출(摘出)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야합니다.

  병원으로 옮겨진 이후 장기(臟器) 적출(摘出)에 관한 모든 조치는 의료진에게 위임할 것이며, 병원에서는 적출(摘出)한 장기(臟器)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시신(屍身)은 의료실습자재로 이용하도록 할 것이며 나머지 시신의 부분이나 조각은, 국내의 산하(山河) 또는 동물원에서, 금수장(禽獸葬)으로 처리해 주면 흡족해 할 것입니다.

다만, 법률상에 문제가 되는 부분은 필자의 이런 심정을 이해 해주시고, 이번 기회에 사회적으로 공론화 시켜서라도, 법률정비와 함께 정책적인 뒷받침을 준비해 주신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다. 마지막 보시(布施)

  약 15억 년 전부터 우리의 형제들인 인류가 이 땅을 거쳐(태어나서 죽어)간 숫자는 가히 부지기수(不知其數)라고 했든 되로 일 것입니다. 그들의 발자취를 남기지 못한 구석기시대이전에는 알 수 없다하더라도, 적어도 구석기시대부터 지금까지 인간들의 믿음이 변하지 않은 것 중하나를 꼽는다면, 사후(死後)세계에 대한 믿음일 것입니다.

  즉 자신들이 죽으면, 그 순간부터 그들의 혼(魂)은 무덤 속에서 영생(永生)한다거나, 또는 남들보다 특별하게 보이도록 자신의 무덤내외(內外)를 최대한 호화롭게 조성함으로서, 인간세상을 살았든 자신의 지위를 증명이라도 하듯 후세(後世)에까지 영원히 알리(자랑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 구석기시대의 지석묘(支石墓)를 비롯하여 왕능(王稜)의 부장품(副葬品) 그리고 현대에 와서 호화롭게 사치한 조상들의 무덤도 이런 범주에서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쯤부터는 이런 의식의 변화도 필요할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바 있는, ‘새로운 장례 문화 ...’에서 주장하고 밝힌 의미를, 기억하고있겠지만 ‘가장 자연스러운 자연으로의 회귀(回歸)’라는 의미는, ‘개×도 약에 쓰인다’는 옛말과 같이 인간으로서의 혼(魂)이 빠져나간 육신(屍體)도, 누군가에게는 쓸모가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그 대상을 찾아 헤맸다고 한바와 같습니다. 다행히도 그 대상을 찾았다고 한바 또한 같습니다.

  만약 그 누군가에게라도 쓸모가 있는 물질(屍體)이라면 그들에게 되돌려져야 당연한 이치인데도 불구하고, 필요로 하는 대상은 따돌리고 화장장(火葬場) 불구덩이 속에 넣어 한줌의 잿더미로, 혹은 땅속에 묻어 썩혀버림으로서 한줌의 흙으로 만들어 놓고 자연으로 되돌아갔다고들 한답니다. 이러한 시신(屍身)처리 방식의 장례문화는, 전 우주적인 자원관리 측면에서나 우주의 섭리차원에서도, 합당(合當)한 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먹거리라면 무엇이나 필요로 할 그들은, 같은 시대를 살아왔든 동물과 식물들이라고 밝혔듯이 사람으로 살다가, 운명(殞命)에 의해 자신의 찢겨진 의복(肉身)이나 남루한 의복을 벗어 던진 혼(魂)으로서는, 쓸모 없게 된 시신(屍身)들이 어디서 어떻게 처리되는지 관심이나 가질까 의문입니다. 아마도 아무런 관심이나 미련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인간들이 쓸모 없게 찢겨지거나 남루(襤褸)한 의복을 아무런 미련이나 거리낌 없이 벗어 던지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인간들이 어떤 미련이나 거리낌 없이 헌 옷을 벗어 던진다고, 반드시 우리들의 혼(魂)도 그럴 것이라는 단정은 성급하다 하겠으나, 인간(人間)과 혼(魂)의 성질상으로 볼 때 우리인간과 똑같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4차원세계로 돌아간 혼(魂)의 입장에서, 자신의 의복(시신)이 처리(화장이나 매장)되는 과정(過程)을 정확히 알게 된다면, 어떤 마음이었을지 3차원세계에 머물고있는 우리들 스스로도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짐작이라도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4차원세계로 되돌아간 인간의 혼은, 설사 생각은 있다 하여도 자신들의 의복을 ‘이렇게(또는 저렇게) 처리해 달라’고 당부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또는 강 건너 불 구경인양 전혀 무관심한 일인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3차원세계에 왔든 흔적을 깨끗이 정리하는 차원에서라도 우리들의 육신(시신)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지 스스로 상상해보고 정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앞에서 언급한바 있는, ‘새로운 장례 문화 ...’에서 주장하고 밝힌 ‘가장 자연스러운 자연으로의 회귀(回歸)’라는 의미를 떠나, ‘이웃사랑’의 의미(意味)라는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접근 하고자 합니다. 물론 결론은 금수장(禽獸葬)이지만 ...

이웃사랑은 (부모가 자식에게 조건 없이 주는)내리사랑과 (자식이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내리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반드시 해야하는 효도, 즉)치 사랑을 제외한 동료 이웃 간의 모든 사랑을 일컫는다고 한바 있었습니다. 또한 이웃사랑에서 나누는 사랑의 대상을 60여 억 명의 전 인류라고 하였듯이, 여기(마지막 보시)에서의 사랑의 대상은 60여 억 명의 전 인류를 포함하여 이 지구상에 존재하며 살아있는 수많은 동물과 식물도 똑같은 동등한 당사자로서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인간들의 육신(시신)의 처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따라서 우리 인류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획득하고 취득하고 구입해서 내가 먹을 수 있게 소위 먹거리를 제공했든 수많은 동물들과 식물들은, 자신들의 의사(意思)유무를 떠나 또는 타의에 의해 자신들의 몸을 던져, 전 우주적인 차원에서 이웃사랑을 실천했든 것입니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우리들은, 한(限)도 끝도 없이 그들로부터 충분하고 흡족한 먹거리로서의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마지막 남은 한 조각(당시로서는 죽은 자신에게 남은 전 재산이요 유일한 물질)에 해당하는 사랑(시신)이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망설여진다는 것입니까?

  어찌 보면 이런 일이 육신을 가진 인간 즉 살아있는 인간으로서는, 생각만 해도 섬뜩하고 꺼림칙해서 놀랄 일일 테지요. 하지만 화장(火葬)문화가 처음으로 도입되었을 때도, ‘어떻게 부모님을 그렇게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 ...’ 하면서, 섬뜩하고 꺼림칙해서 놀랐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쯤은 부모 형제를 화장(火葬)하면서 이와 같이 섬뜩해하고 꺼림칙해서 놀라는 상주(喪主)는 볼 수 없지 않습니까? 모두가 인식의 차이요 생각의 차이며 습관의 차이 또는 문화의 차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4차원세계로 되돌아간 혼(魂)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한(限)도 끝도 없이 받은 사랑에, 조금이라도 베풀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라고 자위(自慰)하지는 않을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마지막 남은 한 조각에 불과한 사랑이라도 헛되게 하지말고 필요한 대상에게 아낌없이 돌려주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3차원(인간)세계 왔다가 최후로 남기는 ‘마지막 보시(布施)가 아니겠느냐?’하는 것입니다.

 

  

by 다사치 | 2009/09/04 07:25 | 육신의 정리 | 트랙백 | 덧글(0)

운명을 거스른 삶

                운명(運命)을 거스른 삶.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파아란 하늘에 쌍무지개가 어우러져 높은 하늘은 더욱 높은데, 꾀꼬리 뻐꾸기 그리고 이름 모를 온갖 새(鳥)들은 저마다 목청을 가다듬어 노래하고, 만발한 난연(蘭蓮)을 비롯한 수많은 기화요초(琪花瑤草)는 한 줄기 바람에 하늘거리며, 소리 없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는 넓은 황금들판에 화려하고 품위 있게 잘 꾸며진 연단(演壇)은, 품격(品格)높은 주인공에 어울리듯 중후장대(重厚長大)한 분위기를 연출하기에 충분했다.

  사회자가 뭔가를 알리는 중간 중간에, 수많은 군중의 연호(連呼)와 환호가 너무도 우렁차게 울려 퍼져 마치 세상이 떠나갈 듯했지만, 무슨 일인지 도대체 영문을 몰라 그저 멍하게 바라보고만 있는데, 잠시후 사회자의 호명에 따라 제각기 사각 모(帽)를 쓴 세 남녀가 연단에 모습을 들어내는 것이었다.

키가 비슷하게 헌칠한 두 남아(男兒)와 조금은 앳돼 어려 보이는 여아(女兒)를 앞에 세워놓고, 이번에는 허연 수염이 발끝까지 내려지고 희한하게 생긴 지팡이를 짚은 산신령(山神靈)(?)같은 어떤 이가,

  “○ ○○ ...”

이어 무어라고 소개하자, 군중들의 함성이 울러 퍼진 잠시 후 장내가 조용해진 후,

  “◇ ◇◇ ...”

이어 무어라고 소개하니, 또 다시 군중들의 연호가 일고 나서 조용해지자 또,

  “☆ ☆☆ ...”

이어 무어라며 소개는 끝나고, 군중들의 환호(歡呼)와 우레 같은 박수소리에 마치 산이 흔들리는 듯했다. ‘아니! 쟤들이.....’ 하는 마음과 함께, ‘얘들아!’ 손을 번쩍 쳐들며 부르다가 그만 잠을 깨고 말았습니다. 꿈이었습니다.

  1970년대 중반 무렵 어느 날, 아내가 꾸었다며 들려준 소위 꿈 이야기인데, 도무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뒤부터 우리들은 ‘둘째도 아들’이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또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군(軍) 내무반장 복무시절, 역학(易學)을 공부한 신임사병 한 녀석이 중대와 대대를 제집 드나들듯 불려 다니느라, 내무반장보고 받기가 바쁠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조금은 한가한 어느 날,

  “반장님도 한번 봐 드릴게요”

  “야임마, 냅도라이마! 좋다꼬 나오모 좋지만, 안 좋고로 나오모 기분 나쁘잖아 짜슥아!”

  “그렇다면 아들이 몇 명인지 나, 알려 드릴게요”

몇 마디의 질문과 함께 잠깐 동안 요리조리 살피더니,

  “아들은, 둘입니다”

  “딸은?”

  “딸은, 남의 식구가 되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는 과연 아들이 한 둘(1~ 2)쯤은 될 것인가 하면서도, 크게 믿거나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은 체 신경 쓰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얼마 후, 아내의 꿈에서 본 듯 둘째를 아들로 맞았습니다. 결국 셋째를 낳게되면 딸인데, 그 이후부터 셋째는 낳지 말자고 아내를 졸랐습니다.‘셋째(女息)를 낳지 말자’는 가장 큰 이유는, 필자와 똑 같은 구조이기 때문이라고 밝힌바 있었고, 두 번째 이유는 둘도 제대로 못 먹이고 못 입히는데 어떻게 셋까지 끼울 수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내로서는,

  “이모도 없고 언니도 동생도 없어 외로우니, 딸은 꼭 낳겠다”

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시집에서 있었든 좋았든 이야기도 자매(姉妹) 혹은 이모들에게 자랑하기도 또한 하고 싶을 것입니다. 반대로 고부간의 갈등이나 시집살이의 서러움도 자매 혹은 이모(姨母)들에게 하소연하기도 또한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니 친정 어머니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딸을 원하는 것이겠지요. 그렇다고 양가 어른들이나 가족들을 상대로 하소연을 하다보면 서로 가슴에 상처의 골만 깊어지겠지요. 자신의 주변에, 여자라고는 없어 너무나 외로워 딸을 낳자는 아내를 달래느라 애를 먹으면서, 갑론을박과 우여곡절 끝에 결국 셋째(女息)는 낳지 않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그랬으면 당시, 정부정책(아들 딸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대로 가족계획(避妊)이라도 잘 실천했어야 했지만, 그렇지도 못했기에 알게 모르게 중절수술로 여식(女息)을 포기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가족계획(避妊)이 제대로 실천된 상태에서 포기했다면, 차례를 기다리고 있든 녀석(셋째)의 혼(魂)은 인간 세상에 태어날 기대도 하지 않았을 텐데, ‘이 때다!’하고 찬스를 잡아 찾아든 그 녀석(셋째)을 인위적인 포기로 인하여, 안타깝게도 생명을 빼앗은 결과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녀석(셋째가 될 혼)에게 무엇으로 보상하고 뭐라고 위로해야 하며, 어떻게 사죄해야할지 감당할 수 없는 책임감으로 마음만 무거워집니다. 차라리 태몽 되로 운명을 받아들여 세 남매를 키웠더라면, 모든 면에서 지금보다는 훨씬 더 나은 삶을 유지할 수 있었을 테지요. 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필자에게 있으며, 또한 그 업보(業報)도 피할 수 없이 감당해야 할 멍에라는 것을, 천번 만번 수긍하고 인정합니다. 다시 한번 그의 명복과 아울러 훨씬 더 좋은 분들을 만나게 되기를 기원하는 것도 물론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개인적인 숱한 역경과, 가족 구성원의 모든 시련도 이로 말미 암이라고 믿고 있으며, 앞으로 또는 내세(來世)에서라도 감당해야할 것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늘의 일은 오늘 마무리한다’는 심정으로, 현세(現世)에서의 일은 현세에서 마무리 할 수는 없을까? 고심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대안을 찾아보았습니다. 만약 지금 이 시점에서라도 인위적으로 포기되는 태아(胎兒)를 구할 수만 있다면, 합당(合當)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어깨가 가벼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누구하고도 상의나 의논도 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지 않습니까. 최소한 하나 이상의 여아는 구(救)해야 할 텐데 ... 말입니다.

  결국 대안이라는 것도, 얼토당토않은 공염불(空念佛)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필자에게 닥칠 미래의 모든 고난도, 당연히 감수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또 감수할 각오입니다. 결과적으로 필자는 세 남매를 키웠어야 할 운명을 거슬러, 고집불통(固執不通)의 독단적인 판단으로 삶을 영위(營爲)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끼로 발등을 내려 찍고싶을 정도로 후회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자식 탐(貪)이 나서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며 운명을 거슬렀다는, 아니 운명을 거스럼으로 인하여 기대에 부풀고 희망에 가득 찬, 죄 없는 녀석(胎兒)의 생명을 빼앗았다는 죄책감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하고 책임을 자청(自請)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대가족을 다룬 가정드라마나, 자녀들이 많아 한 집안에서 북적거리는 것이 부럽다기 보다는 좋게 보인답니다.

 

  그러고 난 얼마 후부터, 그때 왜 ‘나중 언젠가는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전혀 못했을까 또, 옛 어른들 말씀 중에

  “자식은 지 먹을 것은, 지가 가지고 태어난다”

는 말을 귀담아 두지 못했을까, 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난 후에는 이미 지나간 일일뿐이었습니다.

  이렇듯 무지몽매(無知蒙昧: 아는 것이 없고 사리에 어두움)한 과오(過誤)를 진심으로 사죄(謝罪) 합니다. 아내를 졸라 셋째를 포기하게 한 독선을 사죄(謝罪) 합니다. 하나(一)이상 수(數)개의 생명을 빼앗은, 살생을 진심으로 사죄(謝罪) 합니다. ‘.....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무지(無知)를 사죄(謝罪) 합니다. ‘..... 지가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든 어리석음을 진심으로 사죄(謝罪) 합니다. 

  “... ..... ...”

  "논해서 무엇하리! 논해서 무엇하리!"

참으로 안타깝고 애닮아 잊고 싶지만, 절대로 잊혀지지 않을 너무나 큰 충격(衝擊)입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에게는 자녀수를 제한하는 가족계획이 아니라, ‘어떻게 낳아 어떻게 기를 것인가’하는 방향으로 정(定)하고 또한 권(勸)하는 한편, 아울러 오래 전부터 우리 집 가훈(家訓)도 ‘후회하지 않을 오늘을 살자’라고 정했습니다.

  “... ..... ...”  

    

         

by 다사치 | 2009/09/02 07:31 | 운명을 거스른 삶 | 트랙백 | 덧글(0)

마지막 보시

다섯. 정리기(整理期: 마지막 布施)

1. 운명(運命)을 거스른 삶.

2. 육신(肉身)의 정리.

  가. 가치 있는 삶.

  나. 자력(自力)에 의한 삶.

  다. 마지막 보시(布施)

3. 가정(家庭)의 정리,

  가. 과욕(過慾)은 업을 쌓는다.

  나. 받고싶은 되로 행하라.

  다. 유산의 정리.

4. 이웃(社會)의 정리.

 

  우리인간은 누구나 성장기를 거쳐 활동기에 이르게 되고 이 활동기도, 시간의 흐름과 함께 퇴직의 시기가 다가오게 되면서 정리기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즉, 정리기라고 하는 기간은,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소위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정년퇴직을 한 이후부터, 그 동안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나머지 기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임종 할 때까지의 기간으로 정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정년퇴직 후, 유사기관 등에 재취업하여 비록 경제활동을 하더라도 정리기라 할 것이나, 명예퇴직 등으로 평균적인 정년퇴직의 년령대에 미달했을 때는 활동기라 하여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 시기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의 전 과정을 뒤돌아보는 한편, 현재까지와는 달리 필요한 이웃을 위해 조그마한 것이라도 나누며 봉사하고, 더디어 ‘대 단원의 막을 준비한다’는 각오와 함께, 아울러 자신의 남은 여생을 보람 있고 알차게 마무리하므로 서, 한 점 후회 없이 주변잡사를 깨끗이 정리할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랄 것이며, 더 이상 행복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정년퇴직 때까지는 주로 가정생활에 필요한 경제활동과 자식들의 뒷바라지로 인하여, 가정에 많은 관심과 배려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정리기부터는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는 인식으로 가사 이외, 즉 소외되고 외면당했던 필요한 이웃에게 관심을 돌려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활동기 동안에는 자신과 가정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였고 그 결과, 어느 정도 재산도 형성되었을 것이며 자식들의 뒷바라지도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자신의 일신에 관련된 신변잡사와 가정생활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이고 가장 평범한 상태로의 정리와 아울러 소외되고 불우한 이웃에게 봉사와 나눔의 배려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정리 할 수 있게된다면 막상 임종이 임박하였다 하더라도, 편안하고 흡족한 마음으로 맞이하게 될 것이며 더 이상 무엇을 또 바라겠습니까?

  이와 같은 시기가, 누구나 와 마찬가지로 세월의 흐름이 순리에 따라 한 걸음 두 걸음 임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누군가가 말했듯이 ‘세월은 날아가는 화살과 같다’는 말조차 제대로 실감이 나지 않을 지경이며, 엊그제 신임으로 임용 받은 것 같은데 벌써 정년퇴직이라니, 어안이 벙벙할 뿐입니다. 그러나, 신임시절에 갓난 아이였든 조카들이 어느 듯 30대 중 후반으로 장성하였는가하면, 그들의 자식들 또한 미운 오리새끼가 되어있다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벌써 정년퇴직이라는 말이 다소 낯설지 않다는 생각과 함께 어느 정도 실감도 느끼며, 뿐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받아 들여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갖게 된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나와 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부족하나마 쏟았든 열정을, 이제부터는 나와 내 가족이 아닌 그 누군가를 위해서 전과 다름없는 ‘열정을 다해야 하지 않을까?’ 또는, 정리기부터는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 생각하고 ‘형제와 동료라 할 수 있는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도 한 방도가 아닐까?’하는 막연한 생각을 해보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자, 모와 둔 재산도 없을 뿐 아니라 체력 또한 예전 같지 않다는 현실을 간과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의 경우, 사회생활 중 직업전선에서 정년 퇴직한 이후부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될 것이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하고 싶었든 일이나 부족했든 일들을 마무리하고 인간으로서의 한 생애를, 정리하는 시기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세(성장기 활동기 정리기)기간 중, 가장 의미 있고 중요한 시기는 두말 할 여지도 없이 정리기(마지막 보시)라는 생각도 하게 될 것입니다. 치열했든 생존경쟁에 살아남기 위하여 전후좌우도 살피지 못하고 앞만 보고 달리다가, 비로소 결승점을 통과하고 나서 자신의 발자취를 확실하게 되돌아보고, 나와 관련된 모든 일들을 정리하는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글에서의 정리(整理)란, 3차원세계인 인간 세상에 태어나서 일생동안 각각의 중요한 단계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현 시점에서, 자신과 관련되었든 모든 세상사(世上事)를 포함하며 특히, 자신의 육신과 관련된 신변잡사 그리고 자신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가정사를 비롯하여,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형제와 동료라 할 수 있는 소외되고 고통받는 필요한 이웃을, 염두에 둔 정리(整理)로 귀결된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앞의 장(章: 셋. 성장기, 넷. 활동기)까지는 과거사(過去事)였지만, 지금의 장(章: 다섯. 정리기)은 계획에 불과한 미래사(未來事)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다섯. 정리기(마지막 布施)’는 행동보다 언동이 앞서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말보다는 행동이 먼저이거나 또는 언행(言行)이 최소한 동시에라도 행하여져야 할 터인데, 행동보다 언동이 앞서게 되는 것을 경계하고자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경우, 행동보다 언동을 앞세움으로서 허풍쟁이답게 신뢰를 잃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꼭 필요하고 절실한 대상과 방법을 찾기 위해 그 방도를 강구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by 다사치 | 2009/08/31 06:48 | ◎ 마지막 보시 | 트랙백 | 덧글(0)

애천하

                애천하(愛天下): 평천하(세계평화)

가. 전쟁과 테러의 중지.

나. 대량살상무기의 폐기.

다. 국가간의 존중.

  (1) 8․15는 반쪽 해방인가?

  (2) 일본, 부끄러운 줄은 알고 있나?

  (3) 한일관계, 이것도 업보인가?

  (4) 임진(壬辰), 을사(乙巳) 그리고, 다음은?

  (5) 세계 지도국의 자격(資格)

  (6) 밀반출된 문화재의 원상회복.

라. 전 인류의 기아로부터 해방.

마. 인간 존엄성의 실현.

 

  공자님께서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심신을 닦고 집안을 정제한 다음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한다) 즉, ‘탐욕스러운 자신의 마음을 양심적으로 깨끗이 하고 난 다음 가정을 바르게 하여 모범을 보이고 그 다음에 나라를 다스리고, 나서 천하를 평정하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필자는 자신을 사랑하고 난 다음 가족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나라를 사랑하고, 나서 지구촌의 전 인류를 사랑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아울러 필자는 각 단계의 순서를 강조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순서의 의미는 이미 밝힌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평천하(平天下) 즉 천하를 ‘평정한다’는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평정에는 여러 가지 의미의 평정(平正: 공평하고 정직함. 또는 平定: 난리를 평온하게 진정시킴, 적을 무찌르고 자기편에 예속시킴. 그리고 平靜: 평안하고 고요함, 침착하여 마음의 동요가 없음 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신제가치국(修身齊家治國: 심신을 닦고 집안을 정제한 다음 나라를 다스리고)의 의미를, 인간이면 누구나 갖기 쉬운 욕심을 버림으로서 자신의 마음을 도덕적으로나 양심적으로 깨끗이 하고, 집안의 근심과 우환거리를 없앤 다음 백성들이 마음놓고 살 수 있는 분위기와 여건조성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평천하(平天下: 천하를 평정한다)의 의미라면 평정(平靜: 평안하고 고요함, 침착하여 마음의 동요가 없음)으로 알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에는 평정(平定: 난리를 평온하게 진정시킴, 적을 무찌르고 자기편에 예속시킴)해야 할 것이지만, 괜히 이웃나라를 침공하는 등 분란의 소지를 자초하거나, 이웃나라가 약하다고 평정(平定)하려는 것도 평천하는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평정(平定)은 백성들을 전쟁터로 동원해야하고 그 백성들은, 전쟁터에서 죽거나 다치는 일로 인하여 결코 백성들은 마음의 평정(平靜)과는 상반된 개념이므로, 평천하(平天下)는 곧 평정(平靜)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의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평천하까지 이룬 군주는 찾는다는 것이 가히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민족 1만여 년 역사의 일부인, 조선왕조시대에는 27대(代)의 군주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성군으로 꼽히는, 제 4대 세종대왕(世宗大王: 1397~1418~1450), 제 21대 영조(英祖: 1694~1724~1776), 제 22대 정조(正祖: 1752~1776~1800)임금 중, 특히 세종대왕은 평천하까지 완전무결하게 성공한 성군중의 유일한 성군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세계 유일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한편 영조(英祖) 정조(正祖)등 두 임금도, 탕평책으로 평천하에 심혈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당파싸움이 끊이지 않은 것 또한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므로, 소위 백성들의 마음은 평정(平靜: 평안하고 고요함, 침착하여 마음의 동요가 없음)을 가지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고구려 제 19대 광개토대제(廣開土大帝: 374~391~413)도, 또한 대한민국 제 5~9대 박정희(朴正熙 1917.11.14~1979.10.26) 전 대통령도 이런 맥락에서 살펴보면, 수신제가치국(修身齊家治國: 심신을 닦고 집안을 정제한 다음 나라를 다스리고)까지는 성공한 지도자로 손색이 없다 할 것이나, 평천하(平天下: 천하를 평정한다)까지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보게되는 것입니다.

 

  또한 2500여 년 전 공자님 시대에는, 이웃나라라고 해야 기껏 중원대륙에서 명멸하는 군주들이나 인식하고 있었을 뿐, 자신들이 살고있는 반대쪽이나 지구 따위는 안중에는 물론이고, 감히 상상도 못하고 살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평천하’하면 개개 군주들의 지배범위 내에 속하는, 이웃 몇 개의 나라안의 이야기로 통칭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과 같은 교통과 통신수단이 없는 상태에서는 서울에서 북경까지 한달 이상이 걸리고, 왕복에 두 달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 상태이니, 지금과 같은 지구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며, 세상(지구)이 어떻게(?) 생겼는지 관심조차도 갖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2500여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은,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서울에서 북경까지 한 두 시간이면 충분한 것은 물론이고, 한 두 시간 전에 발생한 어떤 사건 사고나 중요 소식도 즉시 또는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게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2500여 년이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멀게만 느껴지든 이웃나라가 그만큼 가까운 이웃으로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 즉, 이렇게 이웃나라와 또는 우리와 반대편에 위치한 나라와의 시간적으로 가까워진 현상을 혹자들은, 간단하게 지구촌(地球村)이라고 표현한답니다.

  ‘지구촌(地球村)!’ 이 얼마나 의미 있고 깊이 있으며 적절한 표현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지구는 이제 거대한 하나의 촌락(村落)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공자 님 시대의 평천하(천하를 평정한다)는 한사람의 군주(제후)가 다스리는 한 국가 또는 이웃 몇 개의 나라에 대한 ‘평천하’였다면, 2500여 년의 시간이 경과한 지금에서의 평천하는 지구촌 전체를 평정(平靜)한다는 의미의 ‘평지구’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필자의 ‘애천하’도 이상과 같은 논리에 따라, 한 국가의 백성뿐만 아니라 지구촌에서 생활하고있는 60여 억 명의 백성 전체를 사랑해야 한다는 애지구 이어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평천하(平天下)와 평지구(平地球), 애천하와 애지구는 모두 같은 맥락으로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천하 애천하 평지구 애지구’ 이 모두가 말로서 표현하는 것은 쉽고 간단한데, ‘세계평화유지’라는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은 어렵고 불가능하다는데 큰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지구촌에는 각자 주권을 가진 크고 적은 나라가 약 200여 개국이상이 있는가 하면, 또한 이 200여 지도자와의 의사 일치를 본다는 것은, 과히 하늘에서 별을 따오는 것만큼이나 어렵기도 하거니와 현실적인 실현가능성 또한,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을 잡으려는 듯 황당무계하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크고 적은 갈등이 상존하고 있으며,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감돌고있는 곳도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일 것이며, 특히 중동지역에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테러행위의 악순환은 계속 이어지고 있는 실정인가 하면, 2001년 9월 11일 테러이후 중동지역을 거점으로 한 ‘알 카에다’라는 테러조직은, 친 미국계의 우방국 곳곳에도 테러행위가 자행되고있는 중이며, 동북아에서는 북한 핵 문제로 북․미간의 갈등을 비롯하여 가끔씩 속을 뒤집어 놓는, 한․일간의 과거사 문제는 물론 부국과 빈국간의 남북문제를 포함하여 공개되지 않고 표면화되지 않은, 당사자들간의 갈등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존재하고 있는 것 또한 부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디 이런 것뿐이겠습니까? 각 종교(그리스도교 불교 유교 이스람교 힌두교)간에도 그 교리에 의한 갈등과 얽히고 설키면, 실로 무궁무진한 갈등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지구촌의 백성들이 안타까울 뿐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지구촌 곳곳에서 표출되었거나 잉태되고있는 수 없이 많은 갈등들은, 어느 누구라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맥없이 손을 놓고 곪아(테러행위나 전쟁이)터지기를 기다린다면, 어리석고 무고한 백성들만 마치 소모품처럼 어이없이 죽어 가는 참상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이 문제이겠습니다. 이러면서도 ‘세계평화’를 입에 담을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200분의 1에 해당하는 이 좁디좁은 한반도 땅덩어리 안에서도 남․북한간의 갈등은 재쳐두더라도, 남쪽내부에서 만도 사분 오열의 양상을 보이고있는 갈등들을 염두에 둔다면 가히, 첩첩산중이라 할 것이며 이렇게 난마처럼 얽히고 설킨 갈등들이 200배 이상 쌓였다면 더더욱 유구무언일 것입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하였든 남쪽내부에서의 갈등을, 흔한 지역간의 갈등으로 치부하면서 해당 주민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의도들도 상당히 표출되고 있으나, 그 책임은 전적으로 그 잘난 정치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녕 우리 모두가 긴장하며 경계해야 할 부분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좌경사상과 주사파 그리고 한총련으로 활동하였든 이념가들의 책동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주의 광대함(수 천억 개의 별이 모여 하나의 은하계를 형성하고, 또 수 천억 개의 은하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수 억만 개중의 하나에 해당하는 지구라는 위성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인, 기껏 70~ 80평생을 남보다 더 잘살기 위해 죄 없고 힘없는 무지한 백성들만, 상대국 지도자의 욕심에 의해 죽어가야 한다는 현실을 놓고 볼 때, 참으로 와각지쟁(蝸角之爭= 蝸牛角上之爭: 달팽이 촉각 위에서의 싸움이란 뜻으로 대국(大局)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는 매우 하찮은 일로 다투는 것, 또는 좁은 범위 안에서 싸우는 일 또는 인간 세계의 비소(卑小: 보잘것없이 작음)함의 비유)이라 아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전국시대, 양(梁: 魏)나라 혜왕(惠王)은 중신들과 맹약을 깬 제(齊)나라 위왕(威王)에 대한 응징책을 논의했으나 의견이 분분했다.

그래서 혜왕은 재상 혜자(惠子)가 데려온 대진인(戴晉人)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대진인(戴晉人)은 도가자류(道家者流)의 현인(賢人)답게 이렇게 되물었다.

  “전하, 달팽이라는 미물(微物)이 있는데 그것을 아십니까?”

  “물론 알고 있소”

  “그 달팽이의 왼쪽 촉각 위에는 촉씨(觸氏)라는 자가, 오른쪽 촉각 위에는 만씨(蠻氏)라는 자가 각각 나라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서로 영토를 다투어 전쟁을 시작했는데 죽은 자가 수만 명에 이르고, 도망가는 적을 추격한지 15일 만에야 전쟁을 멈추었다고 합니다”

  “그런 엉터리 이야기가 어디 있소?”

  “하오면, 이 이야기를 사실에 비유해 보겠습니다. 전하, 이 우주의 사방상하(四方上下)에 제한(際限)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끝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소”

  “하오면, 마음을 그 무궁한 세계에 노닐게 하는 자에게는 사람이 왕래하는 지상(地上)의 나라 따위는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은 하찮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으음, 과연”

  “그 나라들 가운데 위(魏: 梁)라는 나라가 있고, 위나라 안에 대량(大梁: 開封) 이라는 도읍이 있으며, 그 도읍의 궁궐 안에 전하가 계십니다. 이렇듯 우주의 무궁에 비한다면 지금 제나라와 전쟁을 시작하려는 전하와 달팽이 촉각 위의 촉씨, 만씨가 싸우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과연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소”

대진인(戴晉人)이 물러가자, 제나라와 싸울 마음이 싹 가신 혜왕(惠王)은 혜자(惠子)에게 힘없이 말했다.

  “그 사람은 성인(聖人)도 미치지 못할 대단한 인물이오”

 

  그러나 EU(유럽연합)의 경우에서 보더라도, 인류공동의 목적을 위한 절대절명의 과업이라는 공배수만 얻을 수 있다면, 오히려 쉬운 문제일 수도 있지는 않을까요? 이와 함께, 지구촌에서 생활하는 60여 억 명의 인류 모두가, 하나같이 부처님의 말씀처럼 탐욕을 버리고 자비심을 가지거나, 예수님의 말씀처럼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을 가진다면, 가칭 “지구국(地球國: 지구연방공화국)”의 건국으로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EU(유럽연합)와 같이 한 지역을 한 개의 국가형태로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촌 전체를 하나의 국가형태로 조직하여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이 보장될 수 있거나, 또는 평균적인 삶이 보장될 수 있게 하는 것만이, 진정한 세계평화의 목표이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과 같은, 약 200여 개 국가의 지도자들은 각기 자신들의 국가이익만을 국가경영의 목표를 최우선으로 한다면, 진정한 세계평화란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금을 막론하고, 군주의 통치이념과 통치수단은 대동소이하다 할 수 있는 반면, 인간의 탐욕은 갈수록 다다익선(多多益善: 많을수록 더욱 좋음)으로 만족함에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한(漢)나라 고조 유방(劉邦)은 명장으로서 천하통일의 일등공신인 초왕(楚王) 한신을 위험한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계략을 써 그를 포박한 후 회음후(淮陰候)로 좌천시키고 도읍 장안 (長安)을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어느날, 한(漢) 고조(高祖)는 한신과 여러 장군들의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한신에게 이렇게 물었다.

  “과인은 몇 만의 군사를 통솔할 수 있는 장수감이라고 생각하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폐하께서는 한 10만쯤 거느릴 수 있으실 것으로 생각하나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예, 신(臣)은 다다익선(多多益善)이옵니다” (高帝嘗與韓信言諸將能否 各有差 上問曰 如我能將幾何臣曰 陛下不過能將十萬 上曰 於君何如 曰 臣多多而益善耳)

  “다다익선? 핫핫핫...”

고조는 한바탕 웃고 나서 물었다.

  “다다익선이란 그대가 어찌하여 10만의 장수감에 불과한 과인의 포로가 되었는고?”

한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하오나 폐하,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옵니다. 폐하께서는 병사의 장수가 아니 오라 장수(將帥)의 장수(將帥)이시옵니다. 이것이 신이 폐하의 포로가 된 이유의 전부이옵니다”

 

  그러나, 교육의 질과 양의 다양화와 보편화에 따라,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로 그 종국적인 목표에 설정한다면, 진정한 세계평화도 요원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금을 통틀어 대동소이한 군주의 통치수단과, 250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통치이념이 크게 발전되지 못하고, 약 200여 지도자들이 자신의 국가이익에 절대절명의 목표로 삼는 현실은, 통치이념의 발전이 없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모든 사물과 인간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발전되어 가는 것이 정상인데, 유독 군주(제후)의 통치이념은 마치 제자리걸음이라도 한양 발전을 외면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욕심을 자제할 수 있는 그룹의 지도자들이 출현해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역사발전의 순리인지 인간의 지혜가 발전한 것이지 분명치 않지만, 비록 경제적인 측면이 강함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그 시험대의 첫 걸음(EU: 유럽연합)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불행 중 다행이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구국(地球國: 지구연방공화국)의 궁극적인 목표는 완벽한 한 개의 국가형태를 의미하는 것이며, 인간의 존엄성이 최대한 보장되는 지구상의 ‘어느 한 국가’형태를 모델로 한다면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지구국(지구연방공화국)의 건국이라는 현실은,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음을 충분히 인식하면서도 ‘지성이면 감천!’이라든가,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또는 ‘1%는 커녕 0.1%의 영감’을 기대하는 마음에서, 뜻 있는 많은 인사들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물론 가진 자를 중심으로 특히, 부국의 지도자를 비롯하여 억만장자들의 동참에 대한 의식의 대전환을 바라는 마음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지구곳곳)에서 내노라하는 각국 및 각급 지도자여러분! 여러분의 책임 하에 있는 각계각층의 백성이나 소속원 중에서 기아로 죽어 가는 사람은 없습니까? 인간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배고픔)도 해결해 줄 수 없다면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하는 것 아닐까요? 여기에서도 각자 할 말은 많을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연적 요인과 인위적 요인이 각각 또는 두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긴 하겠습니다 만...

 

  이쯤에 와서 필자는,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 사람답게 살면서 자신의 개성과 능력을 발휘하는 가운데, 스스로 행복을 느끼며 살기 위해서는,

  첫째, 지구(자연)환경이 좋은 곳에서 태어나야하고,

  둘째, 사람(지도자)을 잘 만나야하고,

  셋째, 의지(욕구)가 충만한 인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지구(자연)환경이 좋은 곳이라는 말은, 기후 지형 토질 등 여러 가지의 요소가 있을 것이기는 하지만, 쉽게 말해서 인간 개개인 누구나 그 자연환경에 적응할 수 있고 적극적인 개척정신에 의하여, 자신의 이상을 실현 할 수 있는 곳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예컨대 사막지역에서라면, 제아무리 강한 의지와 개척정신으로 황무지를 일구려해도 인간의 의지와 힘만으로 참다운 삶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사람(지도자: 父師君)을 잘 만나야한다는 말은 최소한 3부류의 기본적인 인간을 말하고자 하는데, 제일 먼저 부모를 잘 만나야하고 두 번째는 선생님을 잘 만나야하고, 마지막으로 각급 지도자를 잘 만나야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 누군들 부모를 잘(못) 만나기를 희망 되로 할 수 있을까 마는, 정의롭고 다양한 소양을 갖추고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가는 부모님의 모습에서 자식들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부모를 잘못 만나 불행하게 사는 사람도 많은 것을 볼 때, 적어도 성장기에 해당하는 시기까지는 (아무리 輕薄短小하더라도) 부모님의 극진한 사랑과 따뜻한 보살핌을 느끼고 살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선생님이란 교단에서 지식을 전해주는 스승님(師)은 물론, 직장생활에서의 상급(감독)자와 사회생활에서의 선배들을 통칭하는데, 각급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師)은 사심 없이, 자신의 지식을 송두리째 넘긴다는 의무감이 충만해야 할 것이며, 직장생활에서의 상급자는 업무에 관한 지식들을 사회생활에서의 선배는 공동체생활에 관한 지식들을 충분히 전해줄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직장이나 사회생활에서의 상사나 선배들의 태만한 게으름과 잘못된 요령들은 안 배우느니만 못할 것이며, 이런 상사나 선배들에 길들여지면 평생동안 그 버릇은 고쳐지지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지도자란, 한 국가의 대표 즉 국가 원수를 비롯하여 각 종교나 각급 단체의 지도자 및 무수하게 조직되어있는 그 조직의 지도자들을 말하고자 하는데, 국가의 지도자로는 조선시대의 세종대왕과 같이, 노비와 같은 천민들의 한 많은 마음도 어루만질 줄 알아야한다는 의미이며, 각급(종교) 단체의 지도자는 그 단체에 속한 모든 사람이 인간본위, 또는 인권 최우선의 인간존중사상을 가진 지도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백성은 굶어서 죽어 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치와 방탕 또는 특수목적에만 매달리는 몇몇 국가지도자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이 인간답지 못한 종교의 교리 속에서는, 인간존중사상(인간의 존엄성)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최소한, 사람(父師君)만이라도 제대로 만나기만 하였다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은 보장 될 것이며, 여기에 자신의 적극적인 성취욕구와 의지의 실천이 더해진다면 그것은 금상첨화(錦上添花)일 것입니다.

  끝으로 의지(욕구)가 충만한 인간이어야 한다는 말은, 이상의 두 가지 요건(좋은 환경과 좋은 사람)과는 상관없이 어떤 환경과 어떤 류형의 인간(지도자)을 만난다 하더라도,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인간다운 삶의 의지를 실현하고자 하는 적극적이고 헌신적이며 자발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아무리 좋은 두 가지 요건(좋은 환경과 좋은 사람)이 부합되었더라도, 나태하며 게으르고 의지가 없으면 부처님께서도 하느님께서도 우주의 주인께서도, 구제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가난은 하늘도 구하지 못한다는 옛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상의 3가지 기본적인 요건을 다 가지느냐? 못 가지느냐? 그 자체가 업보에 의한 것이라면 더더욱 구제할 방법은 없을 것이기도 하겠습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60여 억 명의 인구가 태어난 지역과 피부색 그리고 종교와 인종에 의해, 혹은 아국과 타국 그리고 아방과 상대방의 지도자를 잘못 만났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전쟁과 테러로 어이없이 죽어 가는 참상을 방치한다는 것은, 전 인류공동의 책임인 동시에 비도덕적 비윤리적 양심의 소유자라 할 것입니다.

  마치 남이야 굶어죽든 맞아죽든 ‘나만 호의호식하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심보 즉, 놀부 심보보다 더한 철면피(鐵面皮: 무쇠처럼 두꺼운 낯가죽이라는 뜻으로, ‘뻔뻔스럽고 염치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와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해서 이것은 아닌 것입니다. 같은 형제자매 중에서도 약골로 태어나는 자 또한 반드시 있게 마련이며, 지능과 체능 및 체력이 평균에서 떨어지는 자식도 분명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죽하면 ‘자릿값!’이라는 말도 있지 않았습니까?

또한, 비록 업보에 의한 약자 편이었다 하더라도 강자이거나 힘있을 때 또는 조금 많이 가졌을 때, 작은 것이라도 나눔으로 인하여 전체적으로 평균적인 인간다운 삶에로, 한 걸음씩 더 다가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구촌 60여 억 명의 모든 인간들에게 전체적으로는 공평하게, 자질과 능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즉 예능방면에 소질이 있으면 체능방면에는 다소 소질이 떨어지듯이, 좋은 점을 하나 주었으면 나쁜 점도 하나주었고, 나쁜 점을 다섯 개 주었으면 좋은 점도 다섯 개를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적절한 예(例)가 될지 모르겠으나. 가인박명(佳人薄命= 北宋 후기 적벽부(赤壁賦)를 지은 蘇軾(字: 子瞻, 號: 東波)의 시: 아름다운 여인은 운명이 기박함 또는 여자의 용모가 너무 아름다우면 운명이 기박하고 명이 짧다)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아래 시의 작자 소식(蘇軾:1036-1101)이 항주, 양주 등의 지방장관으로 있을 때 우연히 절에서 나이 삼십이 이미 넘었다는 예쁜 여승을 보고 그녀의 아름다웠을 소녀시절을 생각하며 미인은 역사적으로 운명이 기박하였음을 시로 쓴데서 전하여 졌음.

  “두 볼은 엉긴 우유와 같고

머리는 옻칠을 한 것처럼 새까맣고,

눈빛이 발에 들어오니 주옥과 같이 빛난다.

본디 흰 비단으로써 선녀의 옷을 지으니,

입술연지는 천연의 바탕을 더럽힌다 하여 바르지 않았네

(雙頰凝 髮抹漆 眼光入廉珠的白樂 故將白練作仙衣 不許紅膏汗天質)”

  “오나라 사투리의 애교 있는 소리는

어린아이처럼 앳되고,

무한한 사이의 근심 다 알 수 없네.

예로부터 아름다운 여인 운명 기박함이 많으니,

문을 닫고 봄이 다하니 버들꽃 떨어지네

(吳音嬌軟帶兒癡 無限間愁總未知 自古佳人多命薄 閉門春盡楊花落”

이 시는 1086년부터 1088년 사이에 지은 것이다. 가인박명(佳人薄命)은 어린 승려를 노래한 칠언율시(七言律詩)로 되어 있다.

 

  우리민족의 마음속에 자리잡고있는 삼신할머니: 우리민족은 유난히 3이라는 숫자를 좋아한다. 우리민족이 3이라는 숫자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삼신할머니를 가슴속에 묻고 살기 때문일까? 우리가 삼신할머니를 의식하지 않아도 일상생활 속에서 늘, 3이라는 개념 속에서 살고 있다. 노크를 해도 똑 똑 똑 세 번, 무엇을 하여도 삼세번 등 우리의 생활 속에 베여있는 삼신할머니의 흔적들은 많이 있다.

  우리는 3월 3일을, 삼진(三眞)날이라 한다. 삼진이란, 사람이 태어나면서 삼신할머니로부터 받은 세 가지, 곧 성(性)․명(命)․정(精)을 말하는 것으로 삼신할머니가 인간에게, 아기를 점지하여야만 임신을 하여 아기를 낳을 수 있다는 우리 민족의 믿음은, 곧 인간의 생사는 반드시 삼신이 주관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열살 미만일 때에는 목숨의 안전과 위험, 우환 잘나고 못남 따위는 애오라지 모두 삼신께 위탁한다. 이 말은 삼신할머니가 최초로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말과 통한다.

  우리는 아기를 간절히 원할 때는 무당에게 찾아가 삼신을 받곤 한다. 이것이 바로 ‘삼신신앙’이요 ‘민족의 종교’인 것이다. 물론 ‘삼신신앙’이 종교로서 이름을 가졌다는 기록이나 근거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삼신을 종교 이상으로 믿었다는 기록들을 현재의 우리들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삼신산 마고 봉래 방장 영고와 같은 지명과 어휘들이다.

  또 우리들은 해, 달, 북두칠성을 삼신으로 보기도 하고 한인, 한웅, 단군을 삼신이라고 하기도 한다. 삼신은 내륙지방에서는 마고산(麻姑山)이라 명명하고, 섬에서는 영주산(瀛州山)이라고 부르며 그 섬을 영주라고 한다. 한라산이 있는 제주도의 옛 이름이 영주이기도 한 것은, 제주도가 바로 삼신종교의 성지이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면 진정한 삼신은 무엇을 말하는가? 박제상(朴堤上 363~419?)이 쓴 부도지를 보면은 동이족의 조상은 삼신 마고로부터 시작한다고 하였다. 마고를 어머니로 하여 두 딸인 궁희와 소희로 불러지는 세 분의 신이 바로 삼신이라고 말한다. 궁희는 곧 황궁(黃穹)과 청궁(靑穹)으로 소희는 백소(白巢)와 흑소(黑巢)가 되어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삼신신앙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우리 민족에게 많은 진리를 터득케 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신시 때 나온 천부경의 원리와 삼태극 사상을 들 수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하늘의 직녀성을 삼신이라고도 하는데 직녀성 세별을 마고본성, 실한성, 허튼성이라고 하였다. 이들 세 성을 소리로 본다면 마고본성은 본소리(本音), 실한성은 실한소리(實音), 허튼성은 허튼소리(虛性)가 된다.

  마고본성은 우주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소리로 율려가 되고, 우주의 소리인 율려에 가깝게 내려고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소리가 악기가 되었으며,

허튼소리는 인간들의 쓸데없는 소리가 된다. 우리는 쓸데없는 소리를 헛튼소리, 헛소리라고 하는 것은 즉 우주본래의 소리와는 아주 거리가 먼 소리라는 말로써. 삼신의 허튼성에서 나왔다.

  현재 무당들이 모시는 신당에는 삼신이 없다. 삼신이 어처구니없이 삼불제석이란 이름으로 모셔지고 있으며 우리의 삼신할머니가 불교의 옷을 입고 계신다. 또한 영주산이니 방장산이니 봉래산 등 삼신과 관련 있는 전국의 어느 곳을 가보아도 삼신을 모신 사당을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스스로 잃어버린 것이다. 겨우 칠월칠석이 되면 다인(茶人)들 사이에서 칠성다례를 올리는 정도로 끝이 났다. 이것도 칠성다례가 아니라 칠석다례라고 하여야 한다.

 

  이렇듯 천차만별한 자연적 요인과, 200여 지도자들의 인적 요인을 비롯하여 다양한 종교적 요인이 얽히고 설키면, 이 세상에 상존 하고있는 크고 작은 갈등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은 물론이며, 그 해법도 각양각색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우리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가장 기본적이고 고귀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다 같이 부여받고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아무리 약자라고 해도 주제넘게 함부로 죽이고 죽는 전쟁과 테러행위는 없어져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형제애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기아의 고통)만큼은, 전 인류가 공동의 노력으로 물리칠 수 있어야 할 것이며, 따라서 60여 억 명의 백성이 다함께 행복을 알며 살아가는 세상이 도래해야 하고, 이왕에 인간세상 최고의 이념이 ‘인간존엄성’이라는 대 명제로 설정되어져 있다면, 같은 시대에 태어난 모든 인류(지역 피부색 인종 언어 종교와 상관없이) 공동의 노력으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사회에서 전 인류가 평균적인 삶의 수준으로 발전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첫째, 전쟁과 테러행위를 없애고,

  둘째, 각국이 보유하고있는 모든 대량살상(화생방)무기는 완전 폐기되어야하며

  셋째, 국가간에도 신뢰와 신의를 되찾아 이웃사랑의 실천이 있어야 할 것이며,

  넷째,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류가 최소한 기아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고,

  다섯째, 인간 존엄성을 최고이념으로 하는 사회의 도래를 위하여, 지구국(지구연방공화국)의 건국을 대안으로 제시하게 되었으나, 현실적으로는 공허한 메아리요 무지개를 타려는 형국에 지나지 않은 격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가. 전쟁과 테러의 중지.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지구상에서 모든 전쟁(무력으로 국가간에 싸우는 일, 국제법상 선전포고에 의하여 발생함)과 테러(정치적 적대자 또는 그 단체나 기관의 파괴 구타 학살 방화 등의 온갖 폭력수단을 행사하여 상대를 위협하거나 공포에 빠뜨리게 하는 비합법적인 행위)는 영원히 중지 또는 근절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류사회에서의 전쟁은 우리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만 보더라도, 신라 개국(BC 57년)이후부터 지금까지 약 921회의 전쟁이 있었다고 하니, 세계곳곳에서는 얼마나 많은 전쟁터에서 얼마나 많은 불쌍한 백성들이 소모품처럼 죽어 갔을지, 가히 짐작 할 수도 없어 그저 부지기수라고만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혹자의 경우, 전쟁과 테러행위가 인구증가의 역기능적인 필요악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이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숭고한 이념을 잘못 판단한 견해인 동시에, 강한 자의 욕구 충족을 위해 약한 자를 침략하여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살육하는 행위는, 동물세계에서나 있을 법 한 논리인 것입니다.

  전쟁은 ‘자신의 힘의 우위를 믿고’ 테러는 ‘상대의 힘의 우위를 인정’하는 점에서 구별 될 수 있겠으나, 그 원인은 한결같이 지도자를 포함하여 그 추종자들의 욕심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옛 날 속담에, 아흔 아홉(99)섬지기 부자는 한(1)섬 지기 빈농에게 ‘그 한 섬만 주면 백 섬을 채울 수 있겠다’며 은근한 기대 했답니다. 그 부자는 자신의 입장에서, 백 섬이라는 사실이 더욱 중요했지 그까짓 ‘한 섬쯤이야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지 금전이나 재화는 다다익선 즉,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속담도, 욕심이 목구멍에까지 꽉 차 오른 사람(得壟望蜀: 농을 얻고 나니 촉을 갖고 싶다는 뜻. ①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음을 이르는 말. ② 한 가지 소원을 이룬 다음 또다시 다른 소원을 이루고자 함을 비유. 만족할 줄 모름의 비유)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또한 당시로서는 남보다는 많은 재화를 소유하는 것이 일생일대의 목표요 최대의 즐거움이었을 것이기에, 다다익선이라는 말이 대표적으로 표현되었을 것입니다.

① 후한을 세운 광무제 유수(劉秀)가 처음으로 낙양에 입성하여 이를 도읍으로 삼았을 무렵(AD 26)의 일이다. 당시 전한의 도읍 장안을 점거한 적미지적(赤眉之賊)의 유분자(劉盆子)를 비롯하여 농서(롱書: 감숙성)에 외효(외효), 촉(蜀: 사천성)에 공손술(公孫述), 수양(휴陽: 하남성)에 유영(劉永), 노강(盧江: 안휘성)에 이헌(李憲), 임치(臨淄: 산동성)에 장보(張步) 등이 할거하고 있었는데 그중 유분자, 유양, 이헌 공손술 등은 저마다 황제를 일컫는 세력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외효와 공손술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무제에게 토벌되었다. 외효는 광무제와 수호(修好)하고 서주 상장군(西州上將軍)이란 칭호까지 받았으나 광무제의 세력이 커지자 촉 땅의 공손술과 손잡고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성(成)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참칭(僭稱)하는 공손술은 외효의 사신을 냉대하여 그냥 돌려보냈다. 이에 실망한 외효는 생각을 바꾸어 광무제와 수호를 강화하려 했으나 광무제가 신하가 될 것을 강요하므로 외효의 양다리 외교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건무(建武) 9년(32), 광무제와 대립 상태에 있던 외효가 병으로 죽자 이듬해 그의 아들 외구순(외寇恂)이 항복했다. 따라서 농서 역시 광무제의 손에 들어왔다. 이때 광무제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만족할 줄 모른다더니 이미 농을 얻고도 다시 촉을 바라는구나(得롱望蜀)”

그로부터 4년 후인 건무 13(37)년, 광무제는 대군을 이끌고 촉을 쳐 격파하고 천하 평정의 숙원을 이루었다.

  ② 광무제 때로부터 약 200년 후인 후한 헌제(獻帝: 189~226)말, 즉 삼국 시대가 개막되기 직전의 일이다. 헌제 20년(220), 촉을 차지한 유비(劉備)가 강남의 손권(孫權)과 천하 대사를 논하고 있을 때 조조(曹操)는 단숨에 한중(漢中: 섬서성 서남쪽 한강 북안의 땅)을 석권하고 농(롱) 땅을 수중에 넣었다. 이때 조조의 명장(名將) 사마의(司馬懿: 자(字)는 중달(仲達), 진(晉)나라를 세운 사마염(司馬炎)의 할아버지)가 진언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진격하면 유비의 촉도 쉽게 얻으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자 조조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란 만족할 줄 모른다고 하지만, 이미 농을 얻었으니 촉까지 바라지 않소”

이리하여 거기서 진격을 멈춘 조조는 헌제 23(223)년, 한중으로 진격해 온 유비의 촉군(蜀軍)과 수개월에 걸친 공방전을 벌이다가 결국 계륵(鷄肋: 큰 소용은 못 되나 버리기는 아까운 사물을 이르는 말. 그곳을 닭갈비처럼 먹을거리는 못 되나 그냥 버리기도 아까운 곳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함)이란 말을 남기고 철수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인간의 욕구가, 재화나 재물의 량이 남보다 많고 적음이 객관적 평가의 기준이 되었든 시대에는, 인간세상에서 인간으로서 추구해야 할 최고의 이념이 무엇인지 미쳐 깨닫지 못한 시대에 태어나고, 성장한 인간들에 있어서는 충분히 있을법한 가치였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발전의 순리에 따라, 인간의 의식이 ‘혼자(獨)’에서 ‘이웃과 함께’라는 공동체의식으로의 발전과 함께, 자아실현이라는 단계로 변천하는 현대사회에서는 더불어 사는 지혜와 나눔의 뿌듯함도, 결코 재물이 많음에 대한 흡족 한만 못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매슬로(Abraham Maslow)의 인간욕구 5단계 설에 의하면, 인간의 욕구는 타고난 것이며 이들을 강도와 중요성에 따라 계층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것으로 가정했다. 인간의 욕구는 하위 단계에서 상위 단계를 향해 계층적으로 배열되어 있어서, 그 하위 단계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그 다음 단계의 욕구가 발생한다는 소위 욕구 단계 설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반드시 단계를 거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하였는데,

  ․생리적 욕구: 인간의 가장 기본적 욕구로서, 음식물 물 산소 잠 성 추위나 더위로부터 보호 등을 비롯하여, 배고픔에 대한 먹고싶은 욕구.

  ․안전욕구: 개인의 환경 내에서 확실성 정돈 조직 예측성 등을 보장받고자 하는 등 외부로부터의 피해를 받지 않으려는 욕구 또는 보호본능.

  ․애정과 소속의 욕구: 사랑하고 사랑을 받고 집단에 소속되어서, 집단의 일원으로서 의미를 찾으려 하는 욕구.

  ․자기 존중의 욕구: 능력 신뢰감 개인의 힘, 적합성 성취 독립 자유 명성 인식 수용 주목 지위, 주위의 평판 등 타인으로부터 존경받고 싶은 욕구.

  ․자아 실현의 욕구: 최상의 욕구로서 앞 단계의 모든 욕구가 충족 될 때에 나타난다. 자신의 재능 능력 잠재력 등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등이다. 즉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 성취하고 싶은 욕구.

 

  따라서 전쟁과 테러는, 당하는 쪽은 물론 가하는 쪽도 다 같이 피해를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지도자 자신들의 욕심을 다소는 억제 할 만 한데도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죄 없고 가엾은 무지렁뱅이 같은 수하장졸과 애꿎은 백성들을 죽임으로서, 조금 더 갖는다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세계평화와 인류공동의 번영을 위하고, 같은 시대에서 삶을 함께 시작한 행운을 헛되게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의미 없는 만행중의 만행입니까?

  그러나 200여 지도자 모두가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천지개벽할 사건이겠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들도 인류공동의 번영과 인간최고의 이념은 교육을 받을 만큼은 받은 지도자들이기에, 인간사회의 최고이념의 실현이라는 명제에는 반대할 이유는 제시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인간세계에서는, 어느 누구도 어떤 명목으로도 자신의 욕구충족을 위하여 전쟁과 테러의 수단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악인 동시에 실정법에 의한 즉, 강도살인죄와 같은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최고이념의 실현을 방해하는 집단에게는 즉각적인 응징은 물론, 재기의 힘조차 남겨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마치 한 국가에서 공동체의 질서유지를 위해 영원히 격리시키는 방법으로, 즉 한 나라에서 실현하고 있는 국법질서유지를 위한 효과와 같이 말입니다.

  결국 국민스스로가 국가의 통치기능과 수단을 선택하게 되는 민주사회로,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대 명제를 민주사회에서 추구해야 할 최고의 이념이요 절대절명의 가치로, 변천함에 따라 인간의 소유개념도 발전해야 할 당위성은 충분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늦었음을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현실은, 우리 모두가 보고 듣고 느끼는 바와 같이 이러한 이야기 자체를 꺼내기도 쑥스러운 환경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현재 지구상에서 유일한 초강대국은 역시 미국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옛날부터 ‘권불십년’(權不十年: 권세는 10년을 가지 못한다는 뜻으로, 권세는 오래가지 못함을 이르는 말)이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뜻으로, 한번 성하면 반드시 쇠퇴할 날이 있음을 이르는 말)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주변 지역에서 패권을 잡았던 로마제국도, 해가 지지 않는다던 대영제국도 지금은 역사 속에서만 접할 수 있게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요?

  ‘세계의 경찰’이라는 미국의 대 국제관계 활동 중에서는 때로는 공평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며, 때로는 순전히 자국의 이익만을 위한 경우는 물론이고 또한 다분히 내정 간섭 적인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소위 ‘악의 축’으로 불리는 즉 깡패국가들의 깡패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한 경찰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데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세계의 경찰이라는 의무를 다 하기 위해서는 오직 ‘세계평화’를 최우선으로 하는, 공평하고 공정한 경찰활동이어야 하며 투명성이 수반되는 경찰활동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계인이 공감하는 객관적인 경찰활동과 미국이 주장하는 주관적인 경찰활동의 구별의 기준은, 두말 할 것 없이 조직폭력배를 소탕하듯 명분이 있어야 하되, 그로 인한 인명의 살상이 최소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개체의 국가에서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찰이라는 국가기관인 공권력이 존재하듯이, 세계평화라는 대의를 위해서는 세계경찰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경찰이 공정성을 잃고 편파적일 때는 공권력의 권위가 무너지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고, 오히려 한쪽으로부터 원망과 비난을 받게 된다는 것도 불문가지일 것입니다. 특히 미국의 대 이라크 전쟁은, 조작된 정보에 의한 것이지 허위정보에 의한 것인지 우리 같은 무지렁뱅이야 알 수 없었지만, 세계의 여론은 비판적이라는 사실을 미국과 영국은 깨달아야 할 것이며, 전쟁과 테러는 또 다른 보복으로 악순환은 계속적으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악의 축 또는 깡패국가로 지칭되는 나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평화를 갈망하는 많은 나라 사람들은 진정한 ‘깡패국가는 오히려 미국!’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만 국력의 차이로 미국이 무서워 제대로 말을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소위, 세계의 경찰임을 자부하는 미국으로서는 이러한 국제여론에 억울하다는 하소연도 있을 수 있겠지만, 많은 세계인도 미국인 못지 않은 양심과 도덕심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세계의 많은 나라 곳곳에서는,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 의한 경찰활동을 반대하고 있는 실정이며, 이러한 반미운동은 미국의 대의명분이 결여된 경찰활동에 의한 자업자득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평화라는 대의명분이 결여된 미국의 세계경찰활동 즉, 공정성을 잃고 자국의 이익만을 위하여 또는 힘의 과신을 믿고 행한 경찰활동이, 업을 쌓는 수단이 되는 동시에 언젠가는 여러분의 세대에 쌓은 업에 의하여, 여러분의 후세들이 ‘업보’를 받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세계경찰활동은, 정당하거나 합당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또한, 대의명분도 결여된 채 행하여지는 여러분의 지도자들에 의해 또는, 상대국 지도자를 잘못 만났다는 죄로 어이없이 죽어 가는 우리의 이웃(형제와 동료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보고 어떤 생각들을 하고있습니까?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듯이, 미국이라는 거대한 힘도 언젠가는 이 지구상에서 사라져갈 날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여러분의 세대에 쌓은 업에 의하여 여러분의 후세들이 ‘업보’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의 업을 쌓지 않고 또 업장소멸을 위해서 미국은 세계 각지의 반대세력과 마주앉아 협상해야 합니다. 특히 중동지역 반미세력과의 반목을 없애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형제요! 동료!’라는 의식의 대 전환이야 말로, 전쟁과 테러를 예방하고 영원히 근절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금과 같은 민주와 풍요를 미국을 비롯한 몇몇 국가들만 누리며 살고 싶은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형제와 동료라 할 수 있는 많은 세계인과 함께 나누며 살고 싶은 지도, 오직 미합중국을 포함 몇몇 민주국가 국민여러분의 선택에 달렸다는 사실도 깨우칠 수 있었으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다.

  한 국가의 경찰이나 세계경찰도, 공정하고 정의로운 경찰이어야 존경과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것이지, 편파적이거나 공정하지 못한 경찰활동을 지지하거나 옹호해 줄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 대량살상무기의 폐기.

  지구상에 보관되고 생산중인 모든 대량살상(화․생․방)무기도 완전히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984년 어느 특강시간에 당시 미국과 소련에서만 보유하고있는 핵무기(核武器: 원자핵의 분열반응 또는 융합반응에 의해서 일어나는 방대한 에너지를 살상 및 파괴효과에 이용하는 무기의 총칭)가 총 6500기 정도라고 하였는데, 이 정도의 분량은 전 인류(약 60여 억 명)를 5번을 전멸시키고도 남는다고 하였습니다. 이후 미․소간의 전술 핵 감축회의에서 얼마나 감축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만, 일부 지도자들은 핵무기 개발에 사활을 걸고 스스로의 무덤을 파고있는가 하면 특히, 동북아에서는 핵무기 확산을 방지하고자 북․미간의 긴장이 점차 고조되고 있습니다.

  핵무기관련 현황을 살펴보면, 기존 핵무기보유 5국(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중국)과, 이후 핵무기를 보유했을 것으로 인정되는 3국(인도: 1998년 5월 11일과 13일 5차례 핵실험 단행. 파키스탄: 1998년 5월 28일 6차례 핵실험 단행. 북한) 특히 북한은 2003년 4월 23일 북경 3자 회담 중간 휴식시간에 북한의 이근 대표와 미국의 켈리 대표간의 비공식 접촉자리에서 북측 대표는

  “우리는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 이미 1993년에도 똑같은 시인을 한 바 있다... 8천 개의 폐 연료봉의 재처리를 거의 마쳤다”

라고 밝힌 것으로 보아 현재 8개국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8개국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대량살상(화․생․방)무기는, 국제기구의 감독아래 전량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기존 보유 5개국)는 핵무기를 가져도 되고, 너희들은 갖지 말라고 해서는 공평하지도 않고 너무 독선이라는 것밖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위험하거나 무서운 무기라면, 자신들(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부터 완벽하게 폐기하고 타 국가도, 제조 또는 보유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이치에도 맞고 설득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대량살상무기는 독과점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를 부정함과 아울러 한반도의 비핵화와 마찬가지로, 전 세계의 비핵화를 위하여 중지를 모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당대 당사자의 살상으로 끝나는 재래무기와는 달리, 대량살상(화․생․방)무기는 당대 당사자는 물론 후대와 자연생태계에까지, 초토화하는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핵무기확산방지보다는 핵무기개발 보유 자체를 금지하는 것으로 국제적인 연대와 핵무기 관련 정책의 전환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북한 핵 문제에 대한, 기존 핵무기보유 5개국의 대처방법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북․미간의 현안인 북한의 핵 개발 문제는, 1994년 제네바 합의와 1995년 콸라룸푸르 경수로 제공합의를 통해 타결되자, 우리기술로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함에 따라 전체비용의 80~90%에 해당하는 경제적 부담을 안게 되었고, 북․미간의 핵 협상에 있어서도 기존 핵 보유 5개국 중, 다른 4개국(중․소는 대화에 의한 평화적 해결만 주장, 영․불은 별다른 언급 없음)은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식으로 무사태평인 가운데, 오직 미국만 확산 방지에 악전고투하고 있는 것은 핵 보유로, 느긋해진(득을 보고있는) 다른 4개국에 비해 형평에도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경수로 제공비용은, 수익자부담원칙을 준용하는 취지에 맞게 기존 핵 보유 5개국이 전담케 했어야하며, 그 확산방지대책 또한 기존 보유 5개국이 주도적으로 외교적으로 대화에 의할 것인지(?), 경제 또는 무력으로 제재할 것인지(?) 방안들을 논의하거나 같이 제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경수로를 제공하겠다고 섣불리 나섬으로서 결과적으로, 그 비용의 80~90%에 해당하는 경제적 부담을 안게 된 것은 우리 쪽의 실수였으며, 그 확산방지에 다른 4국과는 달리 미국만 매달리다보니 마치 핵 확산방지 책임은 미국에만 있는 양, 혼자만 떠 안고 고전하는 것은 기존 보유 4개국에 비해 형평에 어긋나는 것은 물론이며, ‘심지어는 적대관계까지 가게 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도 미국이 전 세계의 집중포화를 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한편으로는 이러한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세계최강의 군사력만으로 미국을 유지하는 상태라면, 미국의 지도자들도 과거의 잘못에 대하여 진심으로 참회하는 가운데, 정의롭고 공정한 세계경찰로 탈바꿈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언제 또 다른 크나큰 재난을 당할 수 있을 것이며, 속담에 ‘열 사람이 도둑 한 명을 못 지킨다’고 했듯이 한 두 명의 테러범을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북한의 핵 문제 해결(핵 폐기) 후 미국 측의 해법에 의하면, 북한의 경제적 보상규모의 대부분을 우리(대한민국)에게 전가시키려는 것 같은데, 이러한 발상도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당연히 북한의 경제보상의 대부분은, 이미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들이 부담(수익자 부담원칙의 준용)해야 마땅할 것이며, 그런 부담을 하기 싫으면 보유하고 있는 모든 대량살상무기를 폐기하면, 부담을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경수로 제공합의의 경우에서와 같이 우리가 그 대부분을 부담하게 된다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결과들이 핵무기를 보유하지 못한 약자의 고통이고 보니,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식으로 누구나 핵무기를 개발 보유할 욕심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혹자들은, 같은 민족끼리인데 너희(대한민국)가 보상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겠지만, 이것(핵과 관련된 경제보상과 핵과 무관한 순수한 민족간의 경제지원)은 지원해야 할 당위성에서 차원이 틀린 것이며, 핵과 관련된 경제보상이외에도 핵과 무관한 순수한 민족간의 경제지원이 필요한 곳 또한, 독일의 경우에서 보듯 ‘산 넘어 산이요 물 건너 물’의 형국이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북한이 핵무기를 갖게되면 주변(한국과 일본)국도 그만한 영향을 받게 될 것은 불문가지이기 때문에, 햇볕정책이나 인도적 지원 운운 할 것 없이 대화 또는 제재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동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핵무기뿐 아니라 화학․생물무기도,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 완전히 폐기하는 것도 두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다. 국가간의 존중.

  국가간에도 인간사에서의 이웃사랑과 같이 서로를 이해하며 공평한 평등관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앞의 ‘성장기’ 어느 부분에서도, 이웃사랑에 대하여 잠깐 언급 한 바와 같이 국가간에도 이웃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배려하고 존중 할 수는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고대 그리스, BC 384~BC 322)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이 개인으로서 존재하고 있어도 그 개인이 유일적(唯一的)으로 존재하고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타인과의 관계 하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 즉, 인간은 사회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의 말과,

  또 ‘인간은 사회에서 여러 사람들과 부대끼며 다른 사람과의 대화는 필수이다. 즉 인간은 다른 사람과의 지속적 만남을 통해서 존재할 수 있으며, 그러기에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도와주며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행동이나 사고 등은 인간간의 접촉을 통해 학습되고 발전된다’는 말처럼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면, 한 개의 국가 또한 유일적으로 존재하는 것보다는, 이웃과 어울리고 교류하며 존재하는 것이 보다 나은 삶을 보장하는 것이 아닐는지요?

  ‘이웃사촌’이라는 말도 풀어보면, 위급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있는 친척보다는, 매일같이 얼굴을 대하며 희노애락을 함께 느끼고 살아가는 이웃사람이, 친척보다 더욱 필요하게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지구상의 어느 나라이든 자신들의 ‘한 국가’만으로 현재와 같이 또는, 발전된 미래의 풍요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삶은 이어질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공업생산국과 농업생산국의 교류로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문화와 예술의 교류로 세계인의 정서를 평준화시키므로 서, 행복지수의 극대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에서와 같이 국가간에는 이웃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대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수요와 공급에 따른 교류와 무역으로, 각국이 공평한 수평적 대등 관계로 복원 또는 유지되도록 발전 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이지만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Second World War: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침입과 이에 대한 영국․프랑스의 대독선전에서부터, 1941년의 독일․소련 개전 그리고 태평양전쟁의 발발을 거쳐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에 이르는 기간의 전쟁)에서의 패전과 함께, 우리나라는 독립하였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가끔씩 과거사문제를 돌출 시켜 피해자를 고문(?)하는 한일관계를, 단편적으로나마 조명하고자 합니다. 동남아 각국과도 연관된 문제이기는 하지만, 가장 큰 피해 당사자인 우리로서는 일본의 오만방자에 속수무책으로 고문당하면서(?) 그냥 눈감고 지낼 수만은 없기 때문입니다.

 

  (1) 8․15는 반쪽 해방인가?

  1945년 8월 15일 소위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 언에 의하여,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과 함께 독립을 맞이했습니다. 우리민족은 말할 수 없는 큰 감격과 팔만 사천의 털구멍이 동시에 열을 뿜은 덧 한 환희에 휩싸였고, 소위 일본 천황은 항복문서에 조인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일본은 가끔씩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더니 얼마 전에는, 육․해․공군 자위대 연합작전으로 무인도 탈환(연습)훈련을 스스럼없이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정확한 속셈이야 알 수 없지만, 이러한 훈련은 이웃나라들을 겁주려는 의도가 분명한 것은 물론이고, 힘을 과시하며 기선을 제압하려는 오만방자인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한 8․15해방은 완전한 해방과 독립이 아닌 반쪽짜리 해방이요, 독립이라는 것입니다.

  역사적 자료를 살펴보더라도 독도가 한국영토였음을 일본 스스로도 인정하였든 것입니다.

․512(신라 지증왕 13)년: 이사부 우산국 정벌 신라영토에 귀속시킴(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13년 조)

․1432(조선 세종 14)년: 신선입도지리지(세종실록지리지)에 우산도와 무릉도의 개략적인 위치를 우산과 울릉의 두 섬은 서로 거리가 머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서로 바라볼 수 있다(우산, 무릉2도 재현정동해중 2도 相距不遠 風月淸明卽望)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역사기록은 독도와 울릉도의 관계를 뚜렷이 밝힌 세계 최초의 문헌으로 평가된다.

․1454(조선 단종 2)년: 세종실록중 권148권에서 권 155까지의 8권 8책에 지리지로 써 세종실록지리지라고도 하는데 권 153강원도 울진현조에 그 부속도서로 써 우산도와 무릉도를 열거 신선입도지리지를 그대로 옮긴 것이라고 머리에 밝히고 있다.

․1667년: 은주시청합기를 비롯한 일본측 역사서도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있다.

․1696년: 안용복 일행은 17세기에 조선과 일본간에 울릉도 영유권 문제가 야기되었을 때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일본으로부터 확인 받았다.

또한 일본에서도 메이지 초기에 어민들이 울릉도와 독도 근해에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종래 그들이 다케시마 섬(竹島)이라 부르던 울릉도를 마쓰시마 섬(松島)으로, 마쓰시마 섬이라 부르던 독도를 다케시마 섬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는데, 일본의 일부 지방인들은 1894년까지도 여전히 울릉도를 다케시마 섬이라 불렀다고 한다.

․1809년: 만기요람은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우산국의 땅이며, 우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라고 기록, 우산국 안에 울릉도와 독도가 포함되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일본은 울릉도를 죽도, 독도를 송도로 불렀다.

․1881(고종 18)년: 울릉도 개척령 반포(척민정책). 일본어민의 울릉도 근해 출어에 대한 일본정부에게 엄중항의.

․1900(대한제국 광무4)년 10월 27일: 관보 제 716호의 칙령 제41호 울릉도, 즉도 석도(독도)를 울릉군수가 관할토록 함.

․1905년 2월 22일: 독도의 일본령 편입결의 도금현 고시 제40호로 독도의 동현편입 발표.

․1905년: 독도망루설치 해군통신기지로 이용. 광무 10년 3월 5일 울릉도 군수 심흥택 보고서 (매천야록)에 독도 관련기록.

․1910년: 한국수산지 제1호 제1편에 한국령으로 표기

․1946년 1월 29일: SCAPIN 제677호-연합군 최고사령관이 항복문서의 시행을 위해 일본정부에 보낸 각서 울릉도, 독도, 제주도를 일본의 통치권에서 제외.

․1948년 6월 30일: 미공군 폭격연습중 독도 출어 중인 어민 30명 희생. 한국정부의 항의에 따라 1953. 2.27자 미공군 연습기지에서 제외.

․1951년 6월: 독도 조난어민 위령비 건립.

․1953년: 일본이 미국기를 게양하고 조난어민 위령비 철거, 일본영유 표지 설치, 한국 어민 독도근해조업에 대한 항의.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일본에 항의 각서 발송. 그 해 8월 5일 영토비 건립, 해양경비대 파견 협의.

․1953년 4월 27일: 울릉도 주민으로 구성된 독도 의용 수비대 창설(대장: 홍순칠)

․1954년: 항로표지(등대)설치. 동년 8월 1일 점화개시 각국에 통보.

․1956년 4월 8일: 국립경찰의 경비임무 인수결정

․1956년 12월 30일: 경비임무 인계인수

․1966년 4월 12일 수비대장 홍순칠 공로훈장 수여.

․1980년: 최종덕 독도 전입.

․1986년 7월 8일: 동인의 사위 조준기(61. 3. 20 생) 주민등록 전입(가족 3명 6개월간 어로작업목적)

․1991년: 김성도(56세)외 가족(1명) 전입(서도)

․현재: 한국 해양경찰이 수호근무(동도)

 

  또한 세계 각국의 옛 자료(문헌)에도 한국영토임(적어도 일본 영토가 아니었다는 인식)이 공인(公認)되고 있다는 것이다.

독도가 유럽인들에게 알려진 것은,

1849년 프랑스 포경선 Liancourt(리앙쿠르)호에 의하여 알려져서 그것을 리앙쿠르 암초(Liancourt Rocks)라고 부른 것이 시초이다. 그 후

1854년 러시아군함 및

1855년 영국군함 Horne st(호네스트)호에 의하여 측량되어 영국의 해도에 호네스트 암초로 기재되었다.

따라서 한국정부에서는 1881년 종래의 울릉도 공도 정책을 지양하고 개척령을 발표하여 강원․경상․전라․충청도민을 이주시켜 재개발을 시작하였으며, 따라서 독도도 울릉도 어민들의 여름철 어업기지로 이용되었다.

이상과 같이, 국내․외 모든 자료가 대한민국영토임을 1500여 년 전부터, 만천하가 인정하고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억지주장을 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역사 즉 팽창주의의 습성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일본이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이유 중 가장 그럴듯한 주장은 무엇일까? 알아보겠습니다.

  첫 번째 주장: 1905년에 ‘국제법’에 따라 합법적으로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 하였다. 즉 일본은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에 의해 독도를 국제법에 합당한 절차에 따라서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였기 때문에 독도에 대한 한국점령을 ‘독도강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측의 반박: 1904년 8월 대한제국정부의 주요 부서에 일본인 재정고문과 외국인 외교고문관을 두게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일본에 의해 강제된 한․일 협정서가 체결되었다. 이로서 대한제국은 실질적으로 외교권이 박탈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일본은 당시 러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독도에 러시아 군함활동을 정찰하기 위한 망루를 세우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의 나카이 요사부로라는 어업사업가가 일본정부에 독도에서의 강치 등 어로의 독점 권을 대한제국정부로부터 얻기 위해 일본정부가 교섭해줄 것을 고려하고 있는 도중 독도를 정찰기지로 이용하려는 일본 해군성의 요구에 의해 결국 량고島(독도)를 일본정부에 편입하고 자신에게 빌려줄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게 된다.

  결국 일본 각의와 내무성의 검토를 거친 후에 시마네현 고시에 의해 독도를 ‘다케시마(죽도)’라 부르고 일본영토에 편입시키게 되었다.

이에 대해 한국 측은 ‘편입’이라는 것은 일본스스로 독도가 이전에 일본영토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며, 일본의 결정이 정당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독도가 무주지 였다는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하지만, 1900년 10월 대한제국정부는 독도가 대한제국 영토임을 재확인하였으며, 국제법에 합당한 절차를 따르기 위해서는 영토편입에 관한 충분한 절차를 밟아야 하지만, 일본은 일개 지방자치단체의 고시로 독도편입을 고시하였으며, 이해 당사국인 한국에는 그로부터 1년 후인 1906년 3월에 문서가 아닌 서면으로 당시 울릉군수 심흥택에게 별일 아닌 듯이 알렸다는 것이다.

이는 대한제국정부가 당시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겨, 일본이 독도가 아니라 어떤 땅을 강제 점령했다 하더라도 저항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주장: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문서에 일본이 포기할 영토로 독도가 명시되지 않았다. 즉 1946년 1월 연합국 최고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전후처리로 일본에 보낸 ‘정치상 행정상 일본으로부터 분리하는데 대한 각서’에는 독도가 일본 영토로부터 분리되는 지역에 포함되었지만, 1952년 4월 발효된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는 분리되는 지역으로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의 영토라는 주장이다.(현재 가장 첨예하게 논쟁이 되고 있는 부분)

  우리측의 반박: 최근에 밝혀지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과정을 살펴보면 당시 5차 협상까지는 독도가 한국 땅으로 명시되었지만, 일본의 미국인 고문인 시볼드의

“이 섬에 기상과 레이더기지를 설치하는 것을 미국의 국익차원에서 고려될 수 있으며, 미 국무부에 독도를 일본 땅에 명시할 것을 건의”

한 결과로 결국 독도가 한국 땅이란 명시가 빠지게 되었다. 이는 우방으로서의 미국이 아닌 철저한 미국의 국익차원에서 독도를 고려한 미국의 자세와 일본의 치밀한 계획의 합작품이라 할 것이다.

  또한 미국의 독도시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이 1948년 6월의 무고한 울릉도 어부들을 살해한 ‘독도폭격사건’일 것이다. 독도를 미 공군의 사격연습장으로 지정해 폭격연습을 하던 중, 우리 어민들을 무고하게 살해했건만 은폐하려했던 미국의 모습에서, 그들의 철저한 국익에 근거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정부의 대 독도 기본정책.

  그렇다면 정부의 독도에 대한 기본정책방향을 분명하게 추진함과 아울러 추가적인 대책도 필요할 것입니다.

  ․독도는 한국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한국의 영토이며 어떠한 외교적 교섭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정부의 확고부동한 정책입니다.

  ․독도 영유권을 공고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독도에 대해 평온하고 실효적으로 지배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며 이러한 실효적 지배가 장기간 계속될 경우 독도 영유권에 대한 이의제기는 사라질 것입니다.

  국제법상 전쟁 등의 방법을 통한 현상변경이 없는 한 ‘실효적 지배’ 여부가 영토 주권의 핵심적 요건입니다. 또한 실효적 지배는 국가 권력의 계속적이며 평화적인 행사(continuous and peaceful display of sovereignty)가 관건입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우리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독도가 대외적으로 분쟁지역으로 인식되지 않도록 관리해 나가는 데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명백히 우리의 영토인 독도에 대해 일본과 공공연한 마찰을 야기하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독도가 분쟁지역이라는 인식을 주게 되어 결과적으로, 앞서 말씀드린 우리의 독도영유권을 공고화하는 데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기와 같은 정책을 시행함과 동시에 우리정부는 독도 영유권문제에 대해 일본이 의문을 제기할 때마다 우리의 확고한 입장을 일본측에 신속하고 적절하게 전달해 왔음을 알려드립니다.

  이렇게 국내외적으로 한국영토임을 공인되고 있는 독도를, 어느 날 갑자기 자기네 영토라고 우기는 것을 역사적으로 볼 때, 온갖 노략질과 침략을 일삼던 팽창주의 야욕과 섬나라 근성을 버리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울러 지금부터라도 적극적인 주권행사는 물론, 원주민도 복귀시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영토로서의 실효적 지배임을 확신시켜야 합니다.

 

  (2) 일본, 부끄러운 줄은 알고 있나?

  일본의 우익단체를 중심으로 역사교과서를 왜곡하고 있는 것은 바로, 천인공노할 자신들의 과오에 대하여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있는지 또는, 자신들의 과오에 대하여 얼마나 철면피(?)한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얼마나 수치스러운 과오였으면 그렇게까지 감추고 싶었겠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들의 과오에 대하여 뉘우침은 물론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고 이해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과 같이 그들의 속마음을 알길 없으니, 어느 쪽이 맞는지는 아무도 속단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양심적으로 ‘부끄러워서 감추고 싶었다’는 심정이라면,

역사교과서는 역사적 사실 그대로 만들고, 교과서 되로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 인류가 동물과는 달리 역사를 배우고 가르치는 것은, 지난날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역사는 반복 한다’고 했다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구촌의 여러 나라들은 선대(조상)들의 공과(功過)를 비롯하여, 이웃나라를 침공하였거나 또는 침략 받은 사실들도 빠짐없이 후손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랍니다.

  비록, 몇 십 년 또는 몇백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라도 그들의 후손이나 그 후손의 후손들도, 선조들의 공과를 함께 느끼며 당시의 선조들과 꼭 같은 심정으로 위로와 반성을 하면서도, 때로는 비분강개로 치를 떨거나 철저한 대비로 치명적인 피해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새로운 의지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닐는지요?

  그렇다면 더더욱 선조들의 공과는 물론, 필설로도 다하지 못할 수치스러운 가해나 피해사실도 반드시, 후세들에게 가르쳐야할 이유는 자명하지 않습니까? 일본의 극우단체 및 국수주의자 그리고 일본국 국민여러분은 분명하고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성장하고 있는 여러분들의 후손들이, 선조들의 파렴치한 만행들을 진정으로 반복되게 하고 싶지 않거나 정상적인 양심을 가진 인간이기를 원하거나 또는, 인륜의 도리에 비추어서도 부끄러운 과오였는지를 분별할 능력을 가질 수 있게 키우고 싶다면, 사실은 사실 되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감추고 알리지 않는다고 과연 여러분의 후손들 중에서, 그렇게도 숨겨두고 싶었든 ‘종군 위안부’에 관한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죽을 때까지 모르는 지나가는 경우가 과연 얼마나 될 것이라 생각합니까?

  여러분의 후손들이, 그 좁은 (일본)땅덩어리 속에서만 살기 바라지는 않을 것이며, 훗날 지구촌의 어느 나라에서 세계사를 공부하는 기회도 있을 것이고, 또한 세계 각국의 친구들도 사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의 후손들이, 모국인 일본에서 정상적인 교육기관인(초․중․고등)학교생활에서 배우지도 듣지도 못한, ‘종군 위안부’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여러분의 후손)들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상상해보기 바라며, 또 그들은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자신의 여식(女息)들 중에 ‘종군 위안부’생활을 강요당하는 상상을 하게되었을 때, 얼마나 큰 절망과 좌절을 맞을 것이며 당시 피해자의 입장에서 가해자에게 어떤 저주를, 퍼부을지도 상상해 보기 바랍니다.

  또한,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숨기고 왜곡한 여러분들을 과연 잘했다고, 심판하고 동정할 그(후손)들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학교생활에서 가르치지 않은 의혹과, 조상들의 짐승 같은 만행에 다시한번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를 대비하여 지금부터라도 용기를 발휘하여 역사적 사실은 사실 되로 가려 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용기가 필요하겠지요. 아마 그럴 것입니다. 자신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들쳐 내는 것도 용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해도 역사를 사실 되로 가르치기 못하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며, 피해자가 있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잘, 잘못의 판단은 그(여러분의 후손)들의 인간됨됨이와 지식에 의한 가치관에 따라, 각자가 알아서 판단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부끄러움도 모르는, 비 윤리 비도덕적 ‘인면수심’이라면,

  인간이 수치심이나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알고 느끼기 시작한 역사적 시기는 언제부터였을 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글자를 배우기 시작한 한참 이후부터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선사시대에도 서로의 의사를 소통하는 언어는 분명 존재하고 있었겠지만, 소위 자신들의 행적을 각종기호나 부호 등으로 남기고 싶었든 역사시대에서도, 당분간은 윤리와 도덕이라는 개념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은 채 모르고 살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시아권에서도 한자가 사용되고 나서 한참 후 즉, 유학(儒學)에 심취하면서부터 수치심이나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알고 느끼기 시작하지 않았을까요?

  따라서 일본의 경우도, 한반도의 삼국시대 이전에도 그들 나름 되로의 언어와 글자가 있었겠지만, 백제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부터 자신들의 문화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즉 백제 제 13대 근초고왕(近肖古: ?~346~375) 때 아직기(阿直岐: ?~?)가 최초로 일본에 한학을 전하고,

제 14대 근구수왕(近仇首: ?~375~384) 때 왕인박사(王仁博士: 일본문화의 스승 ?~?)가 논어(論語)와 천자문(千字文)을 전했으며,

제 25대 무령왕(武寧: ?~501~523) 때 단양이 고안무등이,

제 26대 성왕(聖: ?~523~554) 때 유귀(柳貴)등은 오경박사(五經博士)로서 한학과 유학 등을 전하였으며, 그리고

제 30대 무왕(武: ?~600~641) 때 관륵(觀勒)은 천문․역법․지리 등을 전하고,

성왕 때(552) 노리사치계는 최초로 불교를 전했으며, 혜총은 쇼토쿠태자의 스승이 되고, 도장은 성실론(成實論)을 저술하였다. 아좌태자는 쇼토쿠태자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그밖에도 화공(畵工)․와공(瓦工)과 경사(經師)․율사(律士)․의사들을 보내는 등 백제문화는 일본의 문화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결국 일본은, 유학과 천자문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비교적 늦게 전해진 탓으로, 아시아권 다른 나라들과 똑 같은 도덕적 잣대를 요구하고 적용하려는 것이 조금은 ‘지나치다’는 생각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서 넘어가려고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백제 제 13대 근초고왕(近肖古: ?~346~375) 때부터, 백제의 영향을 받은 일본은 문화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으면서도, 현재 일본의 경제규모는 전 세계의 선두그룹에 진입한지, 이미 오래 전의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백제의 영향으로 늦게나마 문화발전에 전기를 맞은 일본은, 도덕적 감성과 경제적 감성의 발전에 ‘밸런스가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으며, 이렇게 균형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인 윤리와 도덕심의 발전은 접어둔 채, 오직 돈벌이에만은 혈안이 되었든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인지, 혹자들은 말하기를 일본을 ‘경제적 동물’이라고 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또 납득되지 않는 부분으로는, 일부 몰지각한 우익단체 및 국수주의자들이야 ‘그렇다’치더라도, 일본을 이끌어 가는 각료급 소위 지도층 그룹 중에서도 이러한 철면피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본의 지도층그룹이야 말로, 배울 만큼은 배웠고 또한 역사적 사실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수시로 망언을 늘어놓는 자들은, 부끄러움도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윤리와 도덕이라는 정신세계로부터 일탈한 것이며, 군국주의시대 당시를 동경하고 있거나 또는 군국주의시대로의 회귀를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모습이 재현되는 것은 아닌지(?) 주변국들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아닐까요? 따라서, 지구촌의 모든 구성원들은 이러한 일본의 이중성을 정확하게 파악 인식하고, 제2의 군국주의시대로의 회귀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적극적인 대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한일관계, 이것도 업보인가?

  앞에서도 언급했든 바와 같이, 필자는 비교적 어렸든 시절부터, 업(業= 원인: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 이것이 미래에 선악의 결과를 가져오는 현세에서 받는 응보)과 업보(業報= 결과: 전세에 지은 악업의 보답)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으나 맹신하거나 생활에 어떤 심각한 영향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전혀 터무니없는 괴변으로 치부하지는 않았고, 또 철저하게 믿고 따르는 스타일도 아니었으나, 다만 인과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쉽게 이해되었고 인정하는 편이었습니다. 따라서 전생의 어떤 (선․악)업으로 인하여 현세에서 (상응하는)‘업보를 받을 수 있다’ 또는 현세에서 (선․악)업의 결과는 미래 세에서 반드시(상응하는)‘업보를 받지 않을까(?)’하는 가능성 정도는 늘 인정하고 있었든 것입니다.

그런데 각종 사건사고현장을 임검하는 과정에서 예컨데,

  야간주거침입절도사건의 현장을 임검하는 경우 피해자들은, 이웃사람이 지나가는 골목길의 발자국소리에도 자지러지게 짖어되든, 저놈의 개가 ‘어제저녁에는 한번도 짖지 않더라’는 이야기들도 수없이 많이 들었습니다.

  또 1990년대 초반 어느 해 9월 초순, 생애 두 번째 하계휴가를 출발하려는 날 아침 7시경 관내에서, 유아용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 사장으로부터 도난신고가 접수되었는데, 간밤에 공장내부의 고가장비를 ‘모조리 도둑맞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지난밤에는,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때늦은 많은 가을비가 전국적으로 내리면서 저지대에는 침수되는 경우까지 있었습니다.

  그 공장에는, 당시만 해도 흔하지 않은 보안시스템이 가동 중이었기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나, 임검 과정에서 밝혀진 것은 번개의 영향으로 단자내부에 있든 휴즈가 끊어져, 보안시스템이 작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도난피해자들의 구구절절한 사연과 안타까운 사정을 어찌 필설로 다 할 수 있을까마는, 상당수의 경우가 ‘아! 이 집에는 그럴(도둑맞을) 운이 있었든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또는 공개적으로 할 말은 아니었기에, 주변순찰강화만 약속 할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전혀 뜻밖의, 사정으로 의외의 결과가 발생되었거나 대인관계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는, 가끔씩은 ‘업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들을 하는 경우는 있었었지요. 그러나 이 글, 특히 ‘생로병사’부분 즉 ‘업과 업보’라는 상관관계에 이르러, 좀더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면서부터 세상사의 많은 부분에서 ‘선업 선과’와 ‘악업 악과’라는, 의식이 늘 머리 속을 맴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필자는 비교적 활달했든 학교생활을 제외하고는, 내성적이며 소심하고 순리를 따르는 편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에서 상대방 누구에게나 가슴아픈 말 한마디 한 기억은 없으나, 다만 집에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자신으로서도 이런 사정을 알고 있으면서 아무리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안 되는 것은 차지하고, 심지어는 신경정신과진료도 생각한 적이 있었으나, 결국 용기가 없어 그만 두고 말았습니다.

  우리 부부는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거나 눈에 안보이면 궁금하고 보고싶으면서도, 집에 들어가는 시간부터는 전혀 딴사람이 된 듯이 애정 어린 다정한 말, 한 마디는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특별히 갈등을 일어 킬 만큼 대단한 문제가 있었든 것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따라서 아내와 아이들은 순전히 필자의 이런 성격으로 인하여 마음 고생을 참으로 많이 하게 되었고, 이런 가정이 깨어지지 않은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천만다행이라 할 것이나, 그것은 오로지 아내의 지극한 이해와 인내의 결과이기도 하답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고 하기 이전에, ‘내 자신은 내가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든 자신이기에 아내에게는, 다정하고 애정 넘치는 남편 노릇도 아이들에게는 인자하고 자상한 아비 노릇도, 제대로 못했노라고 기술한 바와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부부는 ‘전생에 어떤 악업이 있어 현세에 이렇게 갈등이 끊이지 않나 보다’라며, 전생의 업에 의한 현세의 업보가 다 해결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두뇌활동에 의한 지식축적이 가능한 현세에서 내 스스로의 의지에 의하여, 의식적으로 업의 고리를 끊으면 현세에서는 물론 내세에서도 이러한 ‘갈등관계는 없어질 수 있다’고, 고백하며 소위 업장소멸을 약속까지 했지만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려면 신이 아닌 사람의 일인데, 두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렇다고 한두 번의 시도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에, 계속해서 노력 할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하는 것입니다. 아마 이러다가 결국은 뜻을 이루지도 못하고 혼자 속만 끓이다가 죽고 말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와 같이, ‘업과 업보’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대입하는 버릇이 반복되면서 특히, ‘국가간의 존중’편에서는 지금의 한․일관계도 어떤 ‘업의 의한 업보는 아닐까?’하는, 생각이 강하게 머리를 스치는 것은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역사적으로 한․일 관계에서 악업 이래야

  우리측에서는,

신라 제30대 문무왕 1(文武 ?~660~681)년, 신라에 의하여 백제 제31대 의자왕 20(義慈 ?~641~660)년, 백제의 패망과 함께 많은 계층의 백제 인들이 신라의 침략에 반대하며, 굴복하지 않고 조상들의 뼈가 묻힌 정들었든 고향을 등지고 일본으로 망명한 사실과,

계속되는 왜구들의 잇따른 노략질을 응징하는 차원에서 조선 제 4대 세종대왕 1(도 元正 1397~1418~1450)년, 대마도정벌(좁은 뜻에서는 1419년 6월 이종무(李從茂: 1360~1425)를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로 임명하여 정벌한 일을 말하나, 넓은 뜻으로는 앞서 있었던 고려 창왕(昌王) 때와 조선 태조(太祖) 때의 정벌까지 포함)이 있었을 뿐인데 반하여

  일본측에서는,

역사적으로 3국 시대부터 한반도에서의 약탈과 납치가 끊이지 않았고, 임진(壬辰: 1592 선조 25 단기 3925)년 4월 13일 저녁 일본군 선봉이 부산 영도에 침입, 4월 14일과 15일 제 1군 상륙과 부산진성 함락(부산첨사 정발 전사) 동래성 함락(동래부사 송상현 전사)으로 소위 임진왜란이 시작되어,

  정유(丁酉: 1597 선조 30 명(明)기 만력(萬曆) 25)년 재란을 거쳐, 무술(戊戌: 1508 선조 31 일(日)기 경장(慶長) 3)년 11월 19일 조․명 연합수군이 노량 해전에서 최후 승리(이순신 전사), 12월 11일 조․명 연합 육군 사천성 입성으로, 더디어 6년 7개월 간의 전쟁 끝에 종전을 맞이한 왜란은, 우리의 많은 보물의 약탈과 백성들의 납치가 자행되었고

조선(朝鮮)제26대 고종(高宗 1852~1863~1907~1919)대 이든,

1904년 04월 14일 제1차 한일협약,

1905년 11월 17일 제2차 한일협약 이른바 ‘을사조약’의 체결로,

  조선 제27대 순종(純宗 1874~1907~1910~1925) 4(1910년 8월 10일)년 ‘한일합방’과 함께, 1945년 8월 15일까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은 것을 ‘국가 간에 있어서 업보’라고 한다면, 이것은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것’은 아닌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작금의 한․일 관계의 갈등이 고대부터 지금까지의 ‘업에 의한 업보’라고 한다면, 일본만 다그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양쪽 모두가 과거사에 대한 깊은 참회와 용서를 구하는 것은 물론, 사랑의 손길로 어루만져야 할 것입니다. 과거의 경우처럼, 일본 쪽의 망언이나 왜곡에 대하여 전 언론과 온 국민이 하나같이 냄비 끊듯 열 받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저들은 오히려 즐거워하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면 꼭두각시놀음이 따로 없었다는 것을 같이 알아두자는 것입니다.

 

  (4) 임진(壬辰), 을사(乙巳) 그리고, 다음은?

  일본의 극우인사들은 대륙을 노리는가? 그리고 제2의 을사, 제3의 임진은 있을 것인가? 섬나라로 이루어진 일본이란 나라는, 폭이 좁으면서도 길쭉한 고구마모양의 국토가 언제 바다 속으로 침몰할지 모르는 위기를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진관련 학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에 지진이 많은 이유를 지각판의 맞닿는 부분에 놓여있기 때문이라는 학설이 뒷받침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옛날 어느 시기에, 아틀란티스 대륙이 바다 속으로 침몰했다는 학설도 있잖습니까? 그래서 옛날부터 일본의 지도자들은, 불안 속에서의 섬나라보다는 안전한 대륙으로 옮겨 후손들의 번영을 갈구(渴求)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런 의구심에 대한,

  첫 정황(政況)이 임진왜란(壬辰倭亂)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정국은, 사색당파로 국론은 분열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그야말로 허수아비 같은 존재였든 반면 일본의 경우는, 16세기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공(公)에 의해 천하통일의 기반이 마련된 사회적 이점을 발판으로, 일본의 전국시대를 평정한 도요또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사까이(당시 일본의 경제 중심지) 장사꾼인 시마이 소오시쓰(島井宗室)에게 밀명을 내려, 조선의 여러 가지를 살피게 하는 등 출병준비를 서두르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사까이의 장사꾼(상공인)들은 조선출병을 반대의견을 보였으나, 전국(戰國)을 통일하여 오만해진 히데요시는 자신의 업적 쌓기와 영토팽창에 혈안이 되어,

  1592년 04월 13일, 정명가도(征明假道: 명나라를 치는 데 필요한 길을 빌려 달라고 요구한 말)의 깃발을 앞세우고, 당시로서는 첨단무기라 할 조총으로 무장한 2만 2500명의 선봉이 부산포를 침공함으로 시작된, 임짐왜란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보름여 만에 한양(漢陽)이 함락되는 절대 열세 속에, 온갖 치욕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하기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침략전쟁의 경우, 거의가 개전초기에 초토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이기도 하지만, 특히 조선의 경우에는 앞선 왕조(고려)에서 약 100여 년 간의 무인정권의 폐단으로 말미암아, 율곡 이이(李珥) 선생의 십만 양병론도 빛을 보지 못한 때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조선에도 잠자는 영웅 그리고 잠자는 호랑이(의병대)가 있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임진(1592)년 04월 13일부터 무술(1598)년 11월 19일까지 약 7여 년 동안 참전 왜군 개개인은 원 없이 살육을 저질렀으며, 전국에 산재한 각종 문화재를 약탈하고 기능인 그리고 남녀노소를 불문한 민간인들을 납치하여, 그들의 전후복구에 이용했었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일 것입니다. 필자는 임진왜란이라는 단어가 머리에 떠오를 때마다, 그야말로 ‘하느님이 보호하사 …’하는 말과 걸맞게 생각되는 것은 역시 역사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경우이지만 ‘만약에 …’라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어떤 이가 없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그 일을 대신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 해도 임진왜란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감히 말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과연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없었(이순신 장군이 태어나지 않았거나 또는 집안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전통에 따라, 문신으로 출사했거나 아니면 무과 급제에 이어 몇 번의 죽을 고비를 있었든 만큼 어느 전투에서 전사라도 했었)더라면, 우리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되었더라면 지금쯤은, 우리도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으로 살아가게 되지는 않았을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일본의 역사에서는 임진왜란을 승전으로 기록했는지 또는 패전으로 기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필자의 눈에는 패전이라 단정합니다. 승전이란 전쟁의 목적이 달성되었을 때만이 승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계전사(世界戰史)상 만인에게는 이기고 오직 일인에게 패하므로 인하여, 그 전쟁 전체가 패전으로 기록된 사례가 또 있을까? 그래서 필자는 임진왜란을 ‘만인지승 일인지패(萬人至勝 一人至敗: 만인을 이기고도 단 한 사람에게 패하여 모든 전선에서 패퇴했다)의 전쟁’으로 명명하고, 아울러 일본의 패전임을 규정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정황은 을사보호조약에 의한 한일합방(조선의 식민지화)입니다. 당시의 조선의 정황도, 대원군과 민 황후간의 권력다툼이 한창이었을 때, 물밀 듯이 들이닥치는 외세에 적절한 대응은커녕, 무조건 쇄국정책으로 세계열강들의 비위만 건드린 결과로 ‘계륵 같은 조선, 일본에게나 줘 버리자!’는 대세에 일본의 대륙진출 야욕편승과 일단의 매국집단의 눈부신 활약으로 결국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지요. 하지만 그때도 잠자는 호랑이는 전국각지에서 궐기로 대일 전선을 형성하였고, 일본군들은 동학도 등 닥치는 되로 살육하고 역사를 왜곡날조 하는 것은 물론 방방곡곡의 매장문화재를 마음 되로 파헤쳐, 밀반출 또는 손괴로 그 만행은 극에 달했든 것도 다 아는 사실일 것입니다.

  비록 조선 의병들의 저항이 있긴 했으나 자제심을 잃은 일본은 가당치도 않은 태평양전쟁의 개전으로 ‘1944년 4월부터 지원병력 2만 670여명, 징병 20만 9270여명, 군무원 14만 5000여명 계 37만 4940여명 등, 이렇게 해서 1930년부터 패전까지 15년 동안 재일 조선인의 숫자는 약 10배로 늘려, 조선의 남자들을 총알받이로 또는 노동력 보충을 위한 징용으로, 처녀들은 종군위안부로 끌고 갔으며, 천인공로 할 만행도 스스럼없이 저질러놓고 지금까지도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있지 않습니까? 임진왜란 당시에는 상공인들이 조선출병에 반대하였는가하면, 을사보호조약으로 식민지화한 당시에도 일본의 식자층이라 할 수 있는 허무맹랑한 꿈에서 깨어있고, 양식 있으며 인간의 존엄을 인정하고 있었든, 동경제국대학교수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같은 분(黎明會를 조직 주관함. 1919년 3월 19일 동경의 학사회관에서 재일 유학생 8명을 초대하여 그들의 의견을 들었다. 또한 1919년 6월 6일 여명회 제 6회 정기강연회에서, ‘조선통치의 개혁에 관한 최소한의 요구’라는 내용으로 강연했다. 앞서 1916년 「중앙공론」6월호에 ‘만주와 한국을 시찰하고’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이 글에서 조선에 있어서 당시의 무단정치를 통렬하게 비판하며 동화정책의 불가능을 말하고, ‘이민족(식민)통치의 이상형은 그 민족의 독립을 존중하고 또 독립이 완성되므로 써 정치적인 자치를 허용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라고 주장했다)과 그 외에 다른 몇몇 지식인들도 기본적으로는 일본의 대조선정책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발언했다 는 사실도 상기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 그리고, 다음은?’ 즉 세 번째 침략전쟁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판단합니까? 필자로서는 세 번째 침략전쟁이 있을 쪽으로 기울러진다는 사실입니다. 그 근거가 될 수 있는 최근의 움직임이 바로 독도문제입니다. 독도문제는,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다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일본인 자신들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1905년 시마네현 고시이전에는 자신들의 영토가 아니었다는 사실(실제로 일본은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에 의해 독도를 국제법에 합당한 절차에 따라서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였기 때문에 독도에 대한 한국점령을 ‘독도강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함)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소위 친일적인 내각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도 하였지만, 외교권이 상실된 상태에서 적절한 대응수단이 있을 수 없었고 또 중앙정부도 아닌 일개 지방정부의 고시로, ‘독도 편입’이라는 사실은 사회 평균인의 정상적인 의식을 가진 보통 사람이라면, 정말 얼토당토않은 억지라는 사실도 간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은, 천에 하나 만에 하나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한국의 동의 또는 묵인할 경우를 대비하여, 그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다는 소식은 있으나 우리정부는 과연 어떤 대응을 준비중인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그저 묵묵부답? 또는 무 대응으로 일관해서는 절대로 안될 것입니다.

  이렇게 끈질기게 일본의 일방적인 주장이 계속된다면, 이런 일도 충분히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구상에는 약 200여 개 이상의 국가가 있다고 합니다. 그 중 거의 대부분(99.9%)은 전혀 아는 바도 없거나 무관심한 상태인 반면, 단 1%도 안 되는 2개국만이 독도를 두고 티격태격하는 가운데, 일본은 수시로 한사람 한사람을 만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마치 마술사의 주문처럼 각인시키고 있는 반면, 한국은 역사적 실효적 지배로 독도는 한국 영토라며 논쟁거리도 안 된다고 판단하여, 코웃음만 치고 있는 격은 아닌지 심히 우려스럽습니다. 이때 처음에는 전혀 알지도 못하고 있든 독도문제가 일본이 피해자라는 계속된 주장에 어느 한 사람이 ‘독도는 왜 불법 점령하고 있소?’라는 물음에 우리정부의 대응방향이 독도의 운명을 좌우할 것입니다. 그때는 물론 정부로서도 적절한 대응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소위, ‘쎈까구열도’라는 무인도에 일본의 우익집단들이 상륙하여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도 실효적 지배를 인정받기 위한 속셈인 것입니다.

  그럼 사람의 의식은 어떻게 정해질까? 우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그리고 판단하겠지요? 전혀 아는바가 없었든 독도문제가 마치 마술사의 주문 같은 일본의 공세에 길들여진(체면술에 걸린) 어떤 사람이 언젠가는 ‘한참 전에도 독도를 한국이 불법 점령했다더니, 아직도 반환되지 않았는가?’하는 의식이 하나 둘 씩 자리잡게되면 문제는 달라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독도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대화? 아니면 전쟁? 대화의 방법은 회의적입니다. 왜냐(?)하면, 대화로 해결하려면 어느 일방이 전부 또는 일부의 양보 없이는 전혀 가능성이 없을 것이고, 적어도 현재로서는 싫지만 다른 해결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네요. 그래서 ‘임진(壬辰), 을사(乙巳) 그리고 다음은?’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언제쯤 일본이 독도를 차지하기 위해 실력행사(전쟁이라도 불사할 각오)로 나올까? 이것 역시 전적으로 엿 장사 마음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세계의 이목을 의식하고 주판알을 팅겨 볼 것입니다. 자신들의 의도를 관철하기 위하여 가장 비난을 덜 받고 목적달성의 가능성이 최대한 무르익어 갈 때를 기다릴 것인데, 그 상황의 도래시기는 세계적인 경제침체로 혼란에 빠지고 미국과 러시아(중국)의 관계가 악화된 상태에서, 남북이 6․25와 같은 전쟁 혹은 극도로 혼란한 상황을 포착하고 마치 어부지리를 취하듯, 그들의 전통적인 장기(長技)인 기습으로 독도를 침공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겠습니다. 이때 한국의 국방력이 개입하게 된다면 ‘얼씨구나 좋다!’ 하면서 전면적으로 한반도를 공략하지 않을까? 이것이 ‘… 그리고 다음은?’에 해당될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간에 세 번째 전쟁으로 이어진다면 그들은 군사시설을 포함하여 그들과 경쟁관계에 있었든 산업시설(제철 조선 반도체단지 등)이 순식간에 집중적으로 토초화 시킬 것이라는 사실은 불문가지일 것입니다.

  그럼 대화는 처음부터 가능성이 없고, 전쟁은 ‘죽기 아니면 살기’로 아무래도 일본의 일방적인 우세 속에 우리의 피해가 엄청날 것이고,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전혀 없는 것일까? 우리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독도문제에 관한 한, 묵묵부답이나 침묵으로 일관하지말고 적극적으로 상대하여 그들의 주장이나 아직 표면화되지 않은 그들의 속마음까지 읽어내어, 거기에 알맞은 대응책개발이 필요할 것입니다. 일본의 주장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공도(空島)상태이든 독도를 시네마현에서 ‘독도를 편입한다’고 하니까, 한국정부가 느닷없이 주민을 이주시켜 ‘불법점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논리라면 세계 곳곳에 산재해있는 무인도를 대상으로 우리 ‘영토로 편입한다’고 선언하면 어떨까요? 이에 걸맞은 경우가 소위 ‘썬까구열도 상륙사건’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로서는, 우선 독도문제전담팀을 구성하되 정권에 따라 좌지우지되거나 연령과 관계하여 진퇴 함이 없이, 일 할 수 있는 한은 평생동안 연속성을 가지고 논리개발 및 중지를 수렴하는 등, 전력을 경주하여 일본의 억지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설득력 있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대응논리를 전담 개발케 하는 것입니다. 전담팀의 구성과 함께 이런 대응방안은 어떨까요? 그 하나는,

 

  중앙정부도 아닌 지방정부에서 ‘어느 날 갑자기’ 편입이라는, 종이 한 장 내 던지고 영유권을 주장하는 허구성에 집중하여 대응하는 동시에, 국제법적인 절차상의 문제점과 조선이라는 나라를 전체적으로 집어삼킨 상태에서, 편입이란 가당치도 않은 지방정부의 외교행위는 정상적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을 공략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상대방이 정상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무능력상태를 이용하여 일방적인 편입의 부당성은 유․무효를 초월하여 허구(虛構)이어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는,

  대동아 공영이라는 침략야욕을 들어낸 일본이 제 1차 한일협약(1904. 04. 14)이후부터, 진주만 기습으로 촉발된 태평양전쟁에서 소위, 일본천황이 항복(1945. 08. 15)한 역사적 사실과 독도문제를 연계해야 합니다. 즉 제 1차 한일협약부터 태평양전쟁에서 패할 때까지 있었든 모든 정치(전쟁)행위는 천황의 의지였으며, 따라서 1945. 08. 15일 항복선언으로 말미암아 침공한 영토에서 모두 철수하였듯이 그 기간동안 강․온 전략으로 자신들의 욕구를 채운 모든 행위(편입발언 등)도 무효라는 점을 부각해야 합니다. 소위 일본천황의 항복에 의해 우리는 해방되었으나 일본이 독도문제를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의 해방도 반쪽해방에 불과할 것입니다.

  일본에서 소위 ‘천황의 명령’은 가히 절대적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관념인데, 일본의 우익집단들은 ‘무조건 항복’을 수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무조건 항복에 의해, 전쟁은 중지되었고 각 점령지에서 철수한 것은 차지하고 정상적인 국제관계에서 이루어진 외교행위 이외의 모든 불법적인 행위(일개 지방정부에서 …편입 따위)도 당연히 무조건 철회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당연한 순리이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천황의 항복명령을 거역하는 우익단체들의 의도에 대하여 현 아끼히또 천황은 입장을 밝혀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현 천황의 입장표명이 없거나 경우에 어긋나게 우익집단의 편파성 입장표명이 된다면 일본인들의 천황숭배는 결국 면종복배가 되는 것입니다.

 

  (5) 세계 지도국의 자격(資格)

  어느 단체(조직)에서, 그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과연 어떤 자격을 갖추어야 할까? 지도자의 면모는 그 단체(조직)의 얼굴과 같아, 단체(조직)의 성격과 내향(內香)을 가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그 자리에 욕심을 부린다고 또는 경력 쌓기 용이나, 선심성 나눠 가지기 식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지도자의 자격으로는, 아무래도 부정과 비리에서 청렴해야 할 것이고, 윤리와 도덕적으로 인류의 보편적인 양심을 가진 정직한 사람이어야 할 것이며,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사는 사람(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답게 인권적 차원에서 민본주의의 인생관은 물론, 시대감각에 뒤떨어지지 않는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와 같은 자격을 두루 갖춘 합당한 지도자를 찾기란,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와 같이 어려운 일이겠지만, 문제는 찾아보면 어디엔 가에는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격 있는 사람 같은, 사람은 침묵하거나 수수방관 또는 강 건너 불 구경하듯 하고, 자리에 연연하며 감투 욕에 눈이 멀어 수신(修身)이 덜 된 사람들이, 단체(조직) 또는 나랏일을 공평무사하게 처리하기란 정말 어려울 것입니다. 특히 자신들과 같은 집단의, 이익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어느 사회에서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우리사회에서도 소위 학식과 덕망을 두루 갖춘 고위직 인사들 중에서도, 고의적으로 ‘월세계약서 이중작성’ 또는 소위 실수로 ‘일부과제자료 신고누락’등 부정과 비리에 연루되어, 사회적 비난이 있었든 것은 다 아는 사실일 것입니다. 적어도 법을 전공한 사람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감수하기는커녕 이렇쿵 저렇쿵 변명만 늘여 놓는 모습에는 소(牛)가 웃을 일이며, 오히려 그 자리에 밀려나지 않으려고 안절부절 하는 인간의 몰염치한 양심에서 한편으로는 불쌍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와 같은 고의 또는 실수는, 국민의 납세의무를 배우지 못했거나 또는 배웠더라도 나라의 녹(祿)을 받지 않는 사람의 행동이었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이 사회에 그런 사람밖에 없다니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또한 소위 관행이라는 미명아래 스스럼없이 행하여지고 있는 각종 명목의, 거마비 전별금 촌지 떡값 여비 판공비의 규정 외 지출 사례비 리베이트 등, 기타 어떤 명목이더라도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노력의 대가이외의 금품을 사절할 줄 아는 지도자, 정말 멋있지 않습니까?

  굶주린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헐벗은 사람에게는 입을 것을 나눌 줄 알고,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에게는 그 고통을 분담하려는 마음 자세와,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에게는 그 해소를 위한 방도를, 실의에 빠진 사람에게는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마음가짐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부끄러운 일에 대하여는,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이 남에게 알려졌거나 알려지지 않았거나, 또는 타인에게 공개되었거나 공개되지 않았더라도 스스로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하며, 혹시 공개되었을 때에는 구차한 변명보다는 자신의 실수를 솔직히 인정하고, 얼굴을 붉히며 잘못을 시인할 줄 아는 정직한 사람도 흔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남이 저지른 부끄러운 행동에 대하여도, 교훈으로 삼을 줄 알고 안타까워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노예가 노예(奴隸)인 한, 이것과는 친구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 친구 관계는 사람과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과 '인간에게는 과실도 있거니와 약점도 있고 타락도 있다. 그러나 또 향상도 있거니와 미점(美點)도 있고 성공도 있다. 이와 같은 좋은 점을 인간에 인정하고, 인간을 믿는 것이야말로 널리 인간을 사랑하는 기초가 되리라'는 말들을 상기하며, 인권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를 젖혀두고,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은 물론 옛날에 살았든 사람 또는 앞으로 태어날 사람 모두를, 내 가족과 같이 사랑하는 마음가짐이 아닐까요? 비록, 옛날 우리 집에서 머슴을 살았거나 노비였더라도 시대적 조류에 따라, 우리 가정에서의 동년배와 같은 대우와 사랑하는 마음가짐도 필요하다 할 것입니다.

  작금의 국제정세는 정치적 국경은 이전투구와 같은 살벌한 가운데, 그 이외의 경제적 문화적 국경은 유야무야 하는 소위, 자유무역시대와 함께 협력동반자 관계로 도래하고 있습니다. 협력하기 위해서는, 다소 계산적인 면에서 줄 것과 받을 것이 거의 비슷해야 가능할 것이며, 동반하기 위해서도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평등사상에 기초한 상호존중의 호혜정신이 충만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지도자가, 되려는 모든 사람들이 완전무결하게 충족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회의 평균적인 사람들의 공감과 인정을 받을만한 사람이어야 하나의 조직(단체)의 지도자로서, 최소한의 역량을 가졌다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계의 지도국이 되려는 국가의 지도자들도 이와 같은 범주를 벗어나지 않아야 할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양식 있는 일본인 중에서는, 을미사변 당시 국모시해 암살단 후손들 중에 일부인사 그리고 종군위안부 정책을 규탄하는 일부인사들은, 선조들의 경거망동으로 이웃나라의 국모를 시해한 망나니스러움과 선배들의 파렴치한 전력에 머리 숙여 사죄했다는 보도가 있었든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작금의 일본정부당국자들의 형태는 세계지도 국이 될 수 없는 자격미달 국입니다. 그것은, 일본정부 당국자들이 패전이후부터 지금까지 적어도 종군위안부 문제만큼은, 이 세상 끝까지 감춰두고 싶은 심정인 것 같습니다.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감추려니 또 하나를 감추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는데, 그 고육지책이 바로 역사교과서 왜곡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본정부당국자의 의식은 인류 보편적인 양심은 물론 인권적 차원에서도 함량미달로, 세계지도 국으로서는 결격이 되는 것입니다. 일본정부 입장에서는 종군위안부 문제를 인정하자니, 배상문제가 걸려있는 동시에 역사교과서에 올려 후세에 가르치려니 곤혹스럽기도 하겠지만, 반면에 국제관계에서는 과거사문제에 대한 일본인들의 의식 수준과 관련하여,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욱 많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배상문제는 약간의 금품으로 해결되겠지만, 선배들의 파렴치한 동물적 만행(蠻行: 야만스러운 행위)은 도저히 인정하고 후손에게 가르치기 어렵다고 이 세상 끝까지 감춰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머지 않아 장래에 용기 있고 양식 있는 지도자의 출현으로 반드시 인정하고 머리 숙여 사죄할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일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철이 덜 들었거나, 젊었을 때의 왕성한 격기(激氣)로 인하여 그럴 수도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나이가 지긋해지면서 옛날의 어두웠든 과거를 회상하는 시기가 되면, 누구나 반드시 자신의 철없었음에 또는 왕성했든 격기로 인한 부끄러웠든 과거에 대하여 반성하게 되고, 후회하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차원에서 일본도 패전이후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였고, 그 경제력에 걸맞은 세계지도 국이 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식의 균형적인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경제력만 믿고 감투를 탐내게되고 이에 편승한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에 의해, 쥐나 개나 감투를 얻어 쓰게 되지요. 이는 마치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졸부들과 같은 부류로, 학식과 덕망을 두루 갖췄다고 하지 못할 것이며 만인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훌륭한 인격체로서의 자질도, 갖지 못했다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일본정부당국자들은, 경제대국이라는 자만심에서 깨어나야 하고 그간 쌓여온 과거사문제 처리부터, 세계인이 수긍할 수 있을 정도로 처리하는 것이 급선무이어야 하며, 한평생의 인생을 유린당한 피해자들의 심정을 역지사지로 되돌아보고, 하루속히 그들의 억울함에 머리 숙여 사죄하므로 서 남은 여생과 이미 떠난 넋이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힘없는 피해자들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전 주한 일본대사였든 스노베(須之部)씨는, ‘일본이 한국과 우호적인 관계로 지낼 수 있을지 어떨지에 따라 국제국가로서의 일본을 재평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듯이, 세계의 지각 있는 많은 사람들도 일본의 거취를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또한 염치없이 세계지도 국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면수심의 일본은 마땅히 축출되어야 합니다.

 

  (6) 밀반출된 문화재의 원상회복.

  어떤 일본의 학자는, 한국의 고대사 연구에 관한 예술품이나 고서 등의 자료는 한국에서보다, 일본에서 찾는 것이 훨씬 수월하고 그 종류도 다양하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임진왜란(1592)과 식민지시대를 거치는 기간동안에 집중적으로 밀반출되었을 것으로 추정만 할 뿐, 언제 어떤 문화재가 누구에 의해서 어떤 명목으로 반출되었는지 자료는 고사하고, 실태 파악도 못한다는 사실이 안타깝지만 사실인 것 같습니다. 특히 ‘몽유도원도’ 같은 경우에는, 구전으로만 전해져 오다가 어느날 갑자기 일본의 어느 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진 경우라는 것입니다. 훗날 일본의 양심세력이 국정의 핵심으로 떠오르는 날 실태파악과 함께 반환도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해 봅니다.

  “오! 무릉도원”

     그림의 오른쪽에는,

  현란하고 유려하다 못해 귀기조차 감도는 필치로, ‘夢遊挑源圖’라는 다섯 글자가 살아있는 듯 꿈틀거린다. 옅은 황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 쓰여진 이 다섯 자의 글씨야말로, 조선조 서예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안평대군이 그림을 보고 필생의 기를 모아 써냈다는 그 글씨였다. 한 자, 한 자에 변화가 가득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균형이 잡혀, 그림을 보호하는 듯 한 형태를 취하는 것이, 힘은 넘쳐 있었고 이미 인간세계의 경지를 떠나 있는 듯했다.

     제목 옆의,

  “世間何處夢挑源 이 세상 어느 곳을 도원으로 꿈 꾸었나”로 시작하는 안평대군의 찬시(讚詩)는 몽유도원도를 꺼내 볼 적마다 감회를 억누르지 못하여, 그림이 그려진 후로부터 삼년이 지난 辛未(1450)년 정월 어느 날 밤, 홀연히 꿈과 그림이 떠올라 써 낸 것으로, 담청색 바탕에 쓰여진 주홍빛 글씨의 현란 함은 보는 이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였다.

     그림의 왼쪽에는,

  안평대군의 발문(跋文)이 쓰여 있는데, 이 발문에는 자신이 꿈을 꾸고 안견이 그림을 그리게 된 과정을 설명한 글로, 이제까지와는 달리 정연한 글씨로 자신이 본 도화원을 그려내고 있었다.

  丁卯(1446)년 04월 20일 밤. 내가 마악 잠이 들려 할 즈음, 정신이 갑자기 아련하여지면서 깊은 잠에 빠지고, 이내 꿈을 꾸게 되었다. 홀연히 인수(仁嫂: 박팽년)와 더불어 어느 산 아래에 이르렀는데, 봉우리가 우뚝 솟고 골짜기는 깊어 산세가 험준하고 그윽하였다. 수십 그루의 복숭아나무가 어우러진 그 사이에 오솔길이 나 있고, 숲 가장자리에 이르러 갈림길이 되어 있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를 몰라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 터에 마침네 산관야복 차림의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 하면서 나에게 말하기를,

  “이 길을 따라 북쪽 골짜기에 들어가면 도원에 이르게 됩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인수와 함께 길을 찾아 들어가는데, 절벽은 깎아지른 듯 우뚝하고, 수풀은 빽빽하고 울창하였으며, 시냇물은 굽이쳐 흐르고 길은 구불구불 백번이나 꺾이어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골짜기에 들어가니 동천(洞天)이 탁 트여 넓이가 2- 3리 정도 되어 보이는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구름과 안개가 자욱히 서려있고, 멀고 가까운 곳의 복숭아나무 숲에는 햇빛이 비쳐 연기 같은 놀이 일고 있었다. 대나무 숲속의 띠풀 집은 사립문이 반쯤 열려있고, 흙으로 만든 섬돌은 거의 다 부스러졌으며, 닭이나 개, 소, 말, 따위는 없었다. 집 앞에 흐르는 냇가에는 오직 조각배 하나가 물결 따라 흔들리고 있을 뿐, 그 쓸쓸한 정경이 마치 신선 사는 곳인 듯싶었다. 이에 한참을 머뭇거리며 바라보다가 인수에게 말하기를

  “…‘암벽에 기둥 엮고 골짜기 뚫어 집 짓는다’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니겠는가? 정녕 이곳이 도원동이로다”

라고 하였다. 마침 옆에 몇 사람이 뒤따르고 있었는데, 정부(貞父: 최 환)와 범옹(泛翁: 신숙주) 등이 운에 맞춰 함께 시를 짓기도 하였다. 이윽고, 신발을 가다듬고 함께 걸어 내려오면서 좌우를 돌아보며 즐기다가 홀연히 꿈에서 깨어났다.

  오호라, 큰 도회지는 실로 번화하여 이름난 벼슬아치들이 노니는 곳이요, 절벽 깎아지른 깊숙한 골짜기는 조용히 숨어사는 자가 거처하는 곳이다. 이런 까닭에, 오색찬란한 의복을 몸에 걸친 자의 발걸음은 산속 숲에 이르지 못하고, 바위 위로 흐르는 물 보며 마음 닦아나가는 자는 꿈에도, 솟을대문 고대광실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서로 길을 달리하는 까닭이니 필연적인 이치이기도 한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낮에 행한 바를 밤에 꿈꾼다’하였다. 나는 궁궐에 몸을 기탁하여 밤낮으로 일에 몰두하고 있는 터에 어찌하여 산림에 이르는 꿈을 꾸었단 말인가? 그리고 또 어떻게 도원에까지 이를 수 있었단 말인가? 내가 서로 좋아하는 사람이 많거늘 도원에 노닒에 있어 나를 따른 자가 하필이면 이 몇 사람이었는가? 생각건대, 본디 그윽하고 궁벽한 곳을 좋아하며 마음은 전부터 산수자연을 즐기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아울러 이들 몇 사람과의 교분이 특별히 두터웠든 까닭에 함께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가도(可度: 安堅)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옛날부터 일컬어지는 도원이 진정 이와 같을 것인지는 알 수가 없겠거니와, 뒷날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옛날 그림을 구하여 나의 꿈과 비교하게 되면, 무슨 말이 있게 될 것이다. 꿈을 꾼지 사흘째(1446. 04. 23) 되는 날에 그림이 다 되었는지라, 비해당(匪懈堂) 매죽헌(梅竹軒)에서 이 글을 쓰노라.

 

  그림도 그림이지만, 중국의 사신들도 조선에 와서 글씨 한 토막 얻어가 ‘자랑하였다’고 하는 안평대군의 글 또한, 희대의 보물이라 일컫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담황색의 색조를 띠고 있는 그림은, 입체감이 뚜렷하게 느껴지는 봉우리와 계곡, 시냇물, 복숭아밭이 어우러져 상상의 세계에서만 접할 수 있는 도화경을 현란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었다.

  그림의 왼쪽은 현실세계를 나타내는 야트막한 야산이고, 그 오른쪽에는 도원의 바깥 쪽 입구를 나타내는 바위산이, 곧바로 옆에는 도원의 안쪽 입구를 나타내는 또 다른 바위산이 그려졌다. 현실세계인 야산과 이상세계의 돌산을 대비시키며, 그 야산에서 돌산으로 복숭아나무를 따라 나 있는 한 갈래의 길이 깊은 산속으로 풀어졌다가, 다다른 곳에 절로 눈길이 모아진다. 이 길이 바로 도원으로 들어가는 길로,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박팽년과 함께 가는 도중 산관야복 차림의 사람이 가르쳐 줬다는 길이었다. 길은 복숭아밭을 끼고 돌다 바위산을 휘돌아서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폭포 왼쪽 산허리에 다시 모습을 나타내는데, 완만한 곡선으로 휘어진 것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함과 유유함을 느끼게 한다.

  도원에는 복숭아가 주주렁 달린 나무들이 매우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무엇으로 찍었는지 보이지 않을 정도의 하얀 점들을 찍어 복숭아 열매를 그려낸 것에 대하여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복숭아를 한 개도 빠짐없이 분명히 드러나 있는 이 그림은, 현대의 기법이라 해도 쉽게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어디서 솟았는지 모를 청간수가 모여, 그림의 한 가운데 폭포를 이루었다가 다시 왼쪽 현실세계의 계곡을 향해 흐르는, 시원한 물줄기는 보는 이의 가슴에도 그 기세를 느끼게 한다. 이 물줄기가 만든 냇가의 한편에 한가롭기 이를 데 없는 집 한 채 외로이 서 있으며, 그 밑에는 나룻배 한척이 매어져 물길 따라 춤추는 듯 사공을 기다리는데...⃨

 

  아울러 수매(數枚)의 별지(두루마리)들이 감겨져있는데, 그중 한 장을 펼친 두루마리의 맨 끝에는, ‘고양 신숙주’라는 본관과 이름이 단아하면서도 날아갈 듯 한 필치로 쓰여 있었다.

消息盈虛一理通(소식영허일리통)

                       소멸하고 생장하며 차고 기우는 것 한결 같은 이치인데,

形神變化妙難窮(형신변화묘난궁)

                       형체와 정신의 변화는 기묘하여 헤아리기 어렵네,

膏盲不必論因想(고맹불필론인상)

                        깊은 곳에 담긴 뜻 제멋대로 이야기할 일 아니러니,

眞忘須明覺夢同(진망수명각몽동)

                       참과 거짓 모름지기 꿈과 현실이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하네.

 

野渡孤舟自幽獨(야도고주자유독)

                       들판 나룻터에는 외로운 배 절로 호젓하고,

山靑水碧謠寒玉(산청수벽요한옥)

                       산 푸르고 물 파란 가운데 차가운 구슬 흔드는 듯,

蒹葭簿出亂汀洲(겸가부출난정주)

                       갈대와 부들줄기 물가에 어지러이 돋아 있는데,

日夕東風吹軟綠(일석동풍취연록)

                       해질녁 동풍이 부드러운 잎새를 스치네.

 

孰覺惺惺爲彼槁(숙각성성위피고)

                       저 마른 나무처럼 또렷이 깨어있는 이는 누구이며,

孰夢栩栩爲此灝(숙몽허허위차호)

                      이 질펀한 물같이 꿈속에서 훨훨나는 이는 누구이며,

孰主張是必有然(숙주장시필유연)

                       누가 이것이 반드시 그러하다고 주장하고,

孰能辨之歸太昊(숙능변지귀태호)

                       누가 이를 가려 저 높은 하늘나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유려한 필치가 결코 안평대군의 그것에 못지않아, 한자, 한자가 살아 움직이는 정통파 유학자의 혁혁한 정신은 왕족이었든 안평대군의 글씨와는 달리, 정격 속에 엄격함이 배어 500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대면하는 이의 정신은 압도당하고 엄격하면서도 화려한 신숙주의 글씨에 빨려 들어가게 한다. 안평대군의 꿈에 대한 철학적 의미를 조망하며 시작된 글은, 이후 주옥같은 서정적 문장과 형이상학적 가치탐구가 어우러져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재주와 역사를 생각하며 연신 한숨짓게 만든다.

  우리들은 벼슬아치들이 이제까지 쓸모없는 유학에 빠져 몇 자리 안 되는 권좌를 놓고 싸우기만 해 온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그들의 세계가 이토록이나 보편성을 통찰하고 세상의 근본구조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문체 또한 예술적인 향기가 드높았다. 그 훌륭한 예술적 구도는 글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돈된 편안함과 더불어 절제된 지적세계에 자연스럽게 공감하도록 하고 있었다.

  수재는 정절을 지키기 어렵다는 말을 떠 올리며, 그가 사육신의 단종 복위계획이 탄로 난 후, 단종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던 이율배반적 모습이 그의 글씨에 그대로 나타나는 듯하였다. 사람을 홀리는 듯 한 빼어난 글씨와 뛰어난 문장은 안평대군이 꿈꾸었든 도원을 읊고 있었으나, 역시 속세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이는 듯했다. 그렇기에 감동은 더욱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오고. 글씨와 문장의 현란함에 놀라 몇 번이나 ‘고양 신숙주’의 이름을 되뇌어 본다.

 

  이어서, 펼쳐진 두루마리 끝에는 ‘한산 이 개’라는 본관과 이름이 쓰여 있었다. 역시 담황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 쓰여진 찬시는, 신숙주의 글에서 보았든 현란하고 화려한 글씨와는 전연 다른, 두텁고 무심한 글씨가 그 수수한 모습을 드러내고, 짧은 문장은 글을 쓴 사람의 텁텁한 성격까지 느끼게 한다.

地位淸高道自楰(지위청고도자유)

                       지체가 높고 생각이 고상하신 분 도가 절로 트여,

超然物外夢仙區(초연물외몽선구)

                       초연히 세상 밖의 신선 사는 곳을 꿈꾸셨네,

烟霞洞密花開落(연하동밀화개락)

                       자욱히 놀낀 그윽한 동굴에 꽃이 피고지고,

竹樹林深路有無(죽수림심로유무)

                       대나무 숲 깊은 곳엔 길조차 있는지 없는지,

 

漫說丹砂能換骨(만설단사능환골)

                       단사로 기골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쓸데없는 소리,

何須白日强懸壺(하수백일강현호)

                       허구 헌 날 어찌 억지로 호리병 건다는 말인가,

披圖爲想神遊適(피도위상신유적)

                       그림을 펴놓고 신선 세상에 마음껏 노닐고도 싶으나,

愧我心塵跡更蕪(괴아심진적경무)

                       내 마음에 티끌 먼지 끼고 지나온 발자취 더욱 거칠어 부끄럽기만 하구나

  글의 첫머리에는 역시 대군에 대한 칭송을 읊고 있으나 글의 길이만으로도 그가 아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글은 도저히 안평대군의 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내용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은근히 풍자하는 내용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것이었다.

  안평대군이라는 권력자의 꿈 이야기를 듣고 마치 청룡이 나르고 백호가 포효하는 듯한 현란함을 글의 전면에 드러냈든 신숙주의 글과는 전혀 다른 소탈함과 더불어 묵직함이 담겨있는 글을 보며 다시 한번 사육신과 생육신의 삶과 가치관의 차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토록 화려한 도원몽 찬시를 지어며 안평을 따르든 신숙주가, 반대편인 수양대군에게 주저없이 붙어 버리는 모습이나, 대군에게 이토록 무심하게 짧은 글 한 토막 툭 던져놓듯 한 이개가, 단종복위의 충직한 꿈을 실행에 옮기다 고역을 겪는 모습이 대비되어, 인생사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글의 내용과는 별개로 김종서의 글씨는 한자, 한자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고, 그 깨끗한 성품과 굽히지 않는 기개가 글씨체에 그대고 옮겨져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이 밖의 다른 별지(두루마리)들에도, 모두 당대에 제일가는 거유 문사들의 재기 넘치는 찬시들이 이어졌다. 하연량, 송처관, 김담, 고득종, 강현덕, 정인지 등의 대 학자와 삼대 악성의 하나로 꼽히는 박연, 다시 이적, 최항, 박팽년, 윤자운, 이예, 이현로와 당대의 문장가로 꼽히는 서거정, 사육신의 대표 성삼문, 김수온 등의 대 학자와 승려 만우에 이르기까지 조선조 초기를 대표하는 거목들의 글이 망라되어 있었다. 한사람, 한사람의 글씨가 서로 방식은 다르되 학문적으로 그리고 체험적으로 완성의 경지에 다달아 있는 것이 보면 볼수록 감탄과 더불어 마음의 평화까지도 느껴지는 것들이었다.

  더군다나 이 글들은 안평대군의 도원몽이라는 한가지 주제에 대해 이들 거유 대학들이 몇 년의 시차를 두고 지은 문장들이기에 각자의 성향과 사상, 문장력 등이 매우 잘 드러나고 있었다. 이런 경우가 흔치않아 몽유도원도와 이에 첨부된 찬시들은, 조선조의 근간이 되는 유학과 선비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비단, 그림과 글씨라는 유형문화재로서의 가치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지식사와 정신사연구의 출발점이 된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가 여느 자료에 견줄 바가 아닐 것이다.

  조맹부의 송설체를 본떠 독자적 글씨체를 완성한 안평대군의 서도에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 집현전 학사들의 글씨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당대의 정신과 사상을 장악하고 있든 신숙주 정인지 서거정 등의 거유 대학들이 계유정난이라는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당하여 이제까지의 학문과 사상을 송두리째 팽게치고 권력자에게 빌붙어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 운명은, 자신의 신념과 죽음을 맞바꾼 성삼문, 이개, 박팽년 등 사육신으로서의 꿋꿋한 기개와 운명이 서로 상반된 길을 걷고야마는 역사의 비정이 이 글들에서 생생하게 느껴지고, 인간의 실체에 대하여 깊은 사유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시서에 능통했든 당대의 대 문호 안평대군이, 꿈을 꾸고 나서 놀라워하는 모습에서부터, 물감을 가다듬고 종이를 펼친 채 대군의 꿈 이야기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고스란이 그림에 담아내려고 머릿속을 정리하며 고심하는 안견의 옹골찬 모습, 그리고 당대의 거유들이 자신의 사상과 학문의 성취를, 이 한 장의 두루마리에 펼치기 위해 시상을 떠올리며 꼿꼿이 허리를 펴고 먹을 가는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리에 맴돌고 있었다. 안견의 기백어린 손끝에서 찍어내는 물감의 현란한 색채와, 충절어린 집현전 학사 거유 대학들의 자신만만한 손끝으로 일궈내는 단아한 검정 글씨에서, 은은하게 피어나는 묵향을 느끼게 한다.

[복숭아밭은 도원의 세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도연명이 도화원기에서 무릉도원(武陵桃源: 신선이 살았다는 전설적인 중국의 명승지. 중국 진나라 때 호남 무릉의 한 어부가 배를 저어 복숭아꽃이 아름답게 핀 수원지로 올라가 굴속에서 진나라의 난리를 피하여 온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하도 살기 좋아 그동안 바깥세상의 변천과 많은 세월이 지난 줄도 몰랐다고 한다)을 설정한 이후로 모든 유학자들이 꿈에 그려온 유토피아였다]

※ 위 글은, ‘가즈오의 나라’(김진명 작)에서 관련 글들을 발췌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

 

  라. 전 인류의 기아로부터 해방.

  우주에 지구가 생성된 이래 지금까지 한정된 지표면에서, 약 60여 억 명의 전 인류가 호의호식하며 잘 살기란 어쩌면 전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세계 각국의 특정계층에서는 호의호식하거나 또는 사치와 방탕으로, 각종 재화를 낭비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국가 안에서도 특정 계층과 일반서민들 사이에는, 그 격차가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크고 넓은 것은 물론이고, 국가간에도 부국과 빈국이 있는가 하면 부국의 특정 계층과, 빈국의 일반서민들 사이에서의 격차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지구상에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일컬어 ‘나와 너는 우리!’라는 의식과 함께 우리 모두의 형제이자 동료인 수많은 인간들 중에서도, 최 상류계층은 호의호식의 원인으로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가 하면, 최 하류계층은 배를 곯아 영양실조로 죽어 가는 경우도 있다는, 현실을 모르는 사람도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가난은 하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이 없는 것은 아니나, 호의호식의 원인으로 병들어 죽어 가는 사람과 배를 곯아 영양실조로 죽어 가는 사람들 중에는, 땀 흘려 노력하며 열심히 일 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게으르고 나태해서 아무런 의지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하늘만 쳐다보고 하루하루를 허비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디 이런 인위적인 조건뿐이겠습니까? 세계 약 200여 국은, 각국이 위치한 지역에 따라 기후와 토질 등 자연적인 조건이 열악한 이유도, 충분히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앞에서도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 사람답게 행복한 인간으로 살면서, 개성과 능력을 발휘하며 살기 위해서는 첫째, 지구(자연)환경이 좋은 곳에서 태어나야하고 둘째, 사람(지도자)을 잘 만나야하고 셋째, 의지(욕구)가 충만한 인간이어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었습니다. 또한, 같은 형제자매 중에서도 약골로 태어나는 자 반드시 있게 마련이며, 지능과 체능 및 체력이 평균에서 떨어지는 자식도 분명 있다는 것도, 오죽하면 ‘자릿값이라는 말도 있지 않았느냐?’고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비록 업보에 의하여 약자로 태어나고 자연환경이 좋지 못한 곳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강자이거나 힘있을 때 작은 것이라도 나눔으로 인하여 전체적으로, 평균적인 인간다운 삶에 한 걸음 다가가야 한다고도 하였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 인류의 기아로부터 해방’이라는 이 문제는, 기아에서 허덕이는 사람이나 평균적인 경제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의지만으로는, 실현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오로지 부유층의 대오각성이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즉, 지구상에서 공간적으로는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나와 너는 우리!) 모두의 형제이자 동료인 최 상류층에서, 비록 옥수수 죽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몫을 나눔으로 인하여, ‘굶어 죽어 가는 단 한 사람을 구제하겠다’는 의식의 대 전환이 없이는 불가능하고 또한,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부국의 적극적인 역할 없이는 실현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과 같이 핵무기나 신무기 개발 경쟁에서 손을 떼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나와 너는 우리!) 모두의 형제이자 동료인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세계의 모든 지도자들은 머리를 맞대고 천고만의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산단가가 높은 곡식이나 단위당 수확량이 적은 농사보다는, 비교적 생산단가가 낮으면서 수확량이 많은 농산물의 대량생산과, 관련학자들의 적극적인 사명감으로 똘똘 몽친 연구활동이 함께 한다면 길이 멀게만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 인간 존엄성의 실현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리 인간이 특정 종교나 종파의 교리와 개인의 의식결여로 인하여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경우도,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세계에서는, 우리 인간이 최고의 위치를 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며, 인간이외의 어떤 동물이나 사물이 인간보다 상위의 위치를 점하거나 우선한다는 것은, 우주의 주인이나 부처님 또는 하느님의 진정한 뜻은 아닐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 존엄성의 실현은 곧 민본사상(民本思想: 민심(民心)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사상)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민본사상(民本思想): 우왕(禹王)의 훈계로서 그의 다섯 손자들이 나라를 잃고 한탄하며 부른 노래 속에

  “백성은 가까이 친애할 것이나 하대해서는 안 된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견고하면 나라가 안녕하다”

는 말이 있다. 여기에 우왕의 나라에 대한 우환의식(憂患意識)과 백성에 대한 경외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는데, 우국경민(憂國敬民)의 정신이 ‘민본’의 직접적인 계기로서 촉발된 것이라 하겠다. 유교 경전 속에 나타난 민본의 개념을 보다 구체적으로 분류한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성이 나타난다.

  첫째. 정치적 주체로서의 민본.

  “하늘이 보고 듣는 것은 백성이 보고 듣는 그 자체이다”

라는 말과

  “백성이 하고자 하는 바는 하늘이 반드시 따른다”

는 말에 의거한다. 이는 천(天)과 민(民)의 일치를 의미하는데, 오히려 백성의 판단과 의사가 하늘의 판단과 의사에 앞서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맹자(孟子)는 천자의 자리가,

  “하늘이 준 것이요, 백성이 준 것이다”

고 함으로써 백성이 모든 정치 행위의 주체임을 나타내었다.

  둘째, 정치적 객체로서의 민본.

  이는 백성을 정치적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서, 하늘이 백성을 낳고 왕을 세워 그로 하여금 통치를 대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인정(仁政) 덕치(德治) 왕도(王道) 등의 용어에서 파악되는 위민사상(爲民思想)은 모두 백성을 정치적 대상으로 객체화한 내용들이다.

  셋째, 국가 구성 요소로서의 민본.

  맹자는 국가의 요소를 토지․인민․정사(政事)라 했고, 또한 백성과 국가와 군주 가운데 백성을 가장 존귀한 존재로 인식하고,

사직(社稷= 사직대제 社稷大祭: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지내는 조선시대의 국가 제례(祭禮)로, 종묘제례(宗廟祭禮)와 더불어 조선시대 중요한 제례이며, 토지와 곡물은 국가의 대본(大本)인 만큼 땅을 관장하는 신인 사(社)와, 오곡을 주관하는 신인 직(稷)을 제사하는 의례이다. 즉 사신(社神)과 직신(稷神)에게 제를 올려 국토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했던 것. 사직은 또 국가의 주권을 상징하기도 하여 한 국가가 건국되면 국가적 차원에서 사직단을 세우고 사직대제를 봉행했으나 일제 강압에 의해 1908년(순종 2년)에 폐지됐다가 서울올림픽 개최를 즈음한 1988년 10월 복원해 지금까지 해마다 개천절에 서울 사직동 사직단에서 제사를 봉행해 오고 있다. 2000. 11. 19 중요무형문화재 제111호로,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을 사직대제 보유단체로, 이건웅씨를 보유자로 각각 지정되었다)은 다음으로 인식한 반면, 군주를 가장 가볍게 평가하였다.

  백성 없이 국가가 없고 정치적 목적 또한 실현되지 않는다. 이는 백성이 국가 구성의 기반이요 목적이며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맹자의 민귀군경설(民貴君輕說)은 민본사상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민본사상의 특성을 한마디로 말하면, 결국 민심(民心)을 근본으로 하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우리에게는 ‘민심이 천심’이라는 의식이 잠재해 왔다. 그러므로 민심과 천심이 일치할 때 민본이 되는 것이다. 이는 유교의 정치사상에서 핵심이며 본질이 된다. 민본사상은 어디까지나 백성과 더불어 함께 하며(天人相與), 이념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선(善)에 이르도록 지향하고, 조직적으로는 천하를 통일된 대일가(大一家)로 체계화하려는 데 목적을 가진다.

  결국 상하가 통달되는 천민합일의 새로운 매개자가 요구된다. 여기서 군주라는 새로운 개념이 도입된다.

  “군주는 하늘이 주는 자리요, 동시에 백성이 주는 자리이다”

고 맹자가 언명한 바와 같이, 하늘과 백성이 화합해 양자의 중간자로서 설정된 것이다. 이 군주에게 하늘을 대신해 천하를 다스리도록 천명이 내려지고, 그로 하여금 백성의 부모가 되게 하여 만민을 통치하도록 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하늘 군주 백성은 통일된 한 집(家)의 체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른 바 ‘천하국가’이다. 이 양상은 원래 가정에서 국가로, 국가에서 천하국가로 발전되는데, 이 때는 온 누리가 크게 통합되어 하나의 체계를 이룬다. 이러한 세계의 이상적 모습이 평천하(平天下)의 세계이다.

  그러나 만약 중간자인 군주가 민심과 천심을 거역하고 학정을 한다면, 하늘과 백성은 다시 화합, 그 자리(王位)를 빼앗고 다른 유덕자(有德者)에게 왕위를 넘겨주게 된다. 이는 곧 민본사상에 입각한 혁명사상이다. 이와 같이, 민본사상은 그 정치적 행사가 백성들이 하고자 하는 바를 하늘이 반드시 따른다는 사상이므로, 학문과 교육을 중시하는 교학정치(敎學政治)와 근본을 지키고 백성과 더불어 즐기려는 예악정치(禮樂政治)를 내포하는데, 이것이 곧 왕도(王道)의 내용이기도 하다.

 

  예컨대, 어떤 교리에 의하면 소(牛)를 우상화한다고 하는데, 그런 교리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기대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해당종교 지도자들께서는 현재의 3차원세계가, 인간중심의 세계인지(?) 또는, 소(牛)중심의 세계인지(?) 또는,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종교지도자들께서는 심도 있게 연구하기 바랍니다.

  인간이 존엄성을 얻기 위해서는 존엄한 곳으로부터 와야 한다고 하였듯이, 인류의 진화론을 믿는 공산주의이론에서는 ‘인간은 물질을 먹고살기 때문에, 인간도 하나의 물질 그 자체’라고 하였는가 하면, 인류의 창조론을 믿는 민주주의이론에서는 인간의 존엄함이 전제되고 있는 것과 같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전 인류의 형제이자 이웃이라는 차원에서도, 인간의 존엄함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즉 내가 존엄하기 위해서는 내 부모와 형제 그리고 자녀들까지 존엄한 가운데에서만이, 내가 존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앞의 ‘애가 편의 부부는 동급이고 평등하다’는 부분에서 ‘내가 왕 대우를 받으려면 아내에게는 왕비 대우를 해야 한다’는 이치와 같이 말입니다.

  세계 각 종교와 종파의 지도자 여러분은, 신앙을 가지거나 신을 믿는 궁극적인 목표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즉, 신앙을 가지거나 신을 믿는 궁극적인 목표는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 인간(3차원)세계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하는 과정에 목표를 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또는, 한 인간의 삶을 끝낸 사후세계에서의 안식(천당이나 극락세계로 가는 것)에 목표를 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심사숙고하고 앞의 ‘생로병사’에서와 같이, 우리 인간은 왜 태어나고 병들며 늙어가다, 죽어 가는지도 함께 구해보기 바랍니다. 단언컨대, 인간(3차원)세계에서는 인간이 최고의 위치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실현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by 다사치 | 2009/08/17 06:58 | 애천하(愛天下) | 트랙백 | 덧글(0)

애국(愛國)

                애국(愛國)

가. 성실한 직무수행.

  (1) 최고의 가치 창출.

  (2) 천직 의식.

  (3) 기본근무의 이중성.

나. 당신께 고함.

다. 서생 지몽(書生 之夢)

라. 지도자들의 독선과 아집.

마. 7천만 동포에게 고함.

  (1) 북한의 불변전략.

  (2) 남한의 혼돈 상황.

  (3) 2003년 6월의 현실.

  (4) 대북 정책의 전환필요성.

 

  2500여 년 전, 공자님께서는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라고 하신 말씀은, “나라를 잘 다스리고 다음은, 천하를 평안(平安)하게 하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그 당시의 군주․제후와 지배계층에 속하는 벼슬아치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따라서 설마 아무런 권력도 없고 쥐꼬리만한 권한도 없는 무지렁뱅이 같은 백성들에게까지, ‘나라를 잘 다스려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본의와는 다르게 전쟁터에 끌려나가 죽는 일 아니고는, 착취와 복종의 의무만 업보의 멍에처럼 씌워진 채, 한평생을 노예처럼 살다가 짐승처럼 죽어갔든 것입니다.

  따라서, 2500여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과 그때를 비교한다면 천지개벽을 했을 만큼, 교육의 평등화 다양화 보편화에 따라 각 구성원의 지적수준은 높아지고, 교육제도의 발달로 많은 여건과 환경 등 상황의 발전으로 인하여, 권력의 원천이 힘(力)에서 민의(民意)로의 이동에 힘입어, 현실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증가하는 등 사회제도의 변천에 따라, 일부 위정자와 관료조직의 구성원인 공무원에게만 치국하라는 것으로 해석해서도, 안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님의 치국과 필자의 애국은, 그 주체와 객체의 대상에서부터 자연스럽게 구분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즉 공자시대치국의 주체는,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관료들에게만 한정된다고 한다면 그 객체는 당연히 백성들일 것이나, 2500여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의 애국은 그 주체와 객체가 한 국가의 구성원 모두가 해당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누구나 하기 쉬운 말로 ‘애국!’ 이라는 단어주위에 항상 엄숙함이 깃 들어있는 것은, 조선시대 말 일본군국주의와 맞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숨진 순국선열을 비롯하여,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싸우다 장렬하게 산화한, 국군 경찰 학도병 기타 이름도 흔적도 기억에도 없는 상태에서, 목숨 바친 ‘애국투사들을 연상하기 때문이 아닌가?’도 생각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애국자!’라고 특정 지워진 몇몇 사람만 애국하는 것이 아닌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위관직의 공직자만 애국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인 동시에, 말단 하위직 공직자라고 애국의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도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직업을 가진 사람이나 직업을 못 가진 사람이나 한 국가의 구성원이라면, 애국하는 길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음에도 쉽사리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애국자가 되기 위한 길은 멀리 있거나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사라도 깨끗한 마음으로,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일(事務 業務)을 정성껏 완수하면 그것이 곧, 애국인 것입니다.

  따라서 애국은, 한 국가의 구성원 모두에게 지워진 권리인 동시에 의무이며, 애국하는 형태와 방법도 수없이 많아서 하나하나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헤아리기 어려우며, 모든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생업과 임무를 성실하게 완수하는 것이 곧, 애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회 각 계층에 속하는 구성원 각자가, 스스로의 위치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크고 적은 임무를 성심 성의껏 완수하는 마음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애국이며 구성원 개개인으로서 기본적인 질서를 지키는 것도 아름다운 애국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직자는, 민주주의이념에 따라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과 의무를 다해 국민에게 절대적으로 봉사하는 것도 애국이며, 기업가는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라 자신의 의지와 이념으로 기업보국의 길로 경제발전을 지향하는 것도 애국이며,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현장에서 땀흘려 일하여 인간으로서 삶의 질(質)을 스스로 개선하는 것도 애국이며, 사회구성의 최소 단위인 가정과 가족을 보호하며 봉양하는 것도 애국일 것입니다.

  이렇듯 한 국가의 구성원이면, 누구나 다 애국할 수 있고, 하나하나 적시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그 유형도 다양하기에, 비록 평범하게 느껴질지라도 애국하는 마음자세와 준비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자신에게 지워진 직무(의무)를 성실하게 완수하는 것이, 곧 ‘애국의 한 방법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가. 성실한 직무수행(職務遂行)

  ‘자신의 직무(의무) 완수에 최선을 다하라!’는 그 직무(임무)에는, 반드시 공직자의 업무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수행하는, 육체적 정신적 노동과 시․청각적 효과 등 개개인이 직업으로 선택한 모든 일(事)이 다, 직무인 것입니다. 따라서 직무에는 귀하고 천한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며 급여 생활자가 행하는 업무도, 자영업자의 독특한 업무도 농상어민의 농상어업 활동도, 노동자가 노동현장에서 행하는 각종 노무활동도 연예인의 연예활동도 모두 직무인 것은 물론이며, 또한 직무와 관련하여 생계의 수단인 보수의 유무와 과다에 상관없이, 자원봉사자의 봉사활동도 직무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직무의 범위와 형태도 인위적으로 한정할 수 없을 것이며, 통상적인 연속성이 있는 것이라면 모두 직무라고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통령의 통치행위도 일용직 근로자의 근로행위도, 기업체와 제조업체의 전 임직원이 동일한 목적달성을 위한 각 계층에서 행하는 각종 업무행위와 서비스 행위도, 사형집행관의 업무수행도 직무인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1) 최고의 가치 창출.

  자신이 행하는 직무(업무)의 결과는, 그 어떤 누가 행하는 것보다 최고의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는 확신과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중견기업체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강의하든 어떤 경영학자는 이런 이야기도 했답니다. 즉 어떤 회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많이 필요한 것이 사실인데, 그 모든 자금을 사원여러분들이 다 벌어들여야 한다면서 그렇다면, 사원여러분은 각자 얼마씩 벌여들이면 될 것 같으냐(?)고 물었답니다. 모두들 나름 되로 계산해서 얼마씩이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강의하든 경영학자는 ‘여러분이 회사로부터 수령하는 년(年)봉의 열(拾)배쯤은 벌어들여 주어야 한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근거로 또는 어떤 이유로, 자신이 받는 급여의 열배를 벌여들여야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최 일선에서 뛰고있는 사원으로서는 자신의 일과 같이 얼마나 열심히 일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필자 또한 자신의 직무범위에 속하는 사항은 확실하게 챙겨 빠짐없이 행하려는 마음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면서도 직무를 수행하는 마음가짐 또한 가장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컨디션에서, 정신적 신체적 건강상태를 유지해야하며 항상 순수한 마음으로 정성을 바쳐, 최선을 다 한다는 인식을 가져야 할 것은 물론이고, 아무리 연속적이고 반복적인 직무라 할지라도 처음시작 할 때마다, 완전무결함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2) 천직(天職) 의식이 필요하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천민신분인 망나니에 관한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할까 합니다. 그 당시 최고신분계층인 사대부 양반가에서 최하신분계층인 망나니에게 뇌물 아닌 뇌물을 바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또한 양반가의 학동(學童)들은 백정(白丁)에게 세배(歲拜)도 했다는 것입니다. 참형(斬刑)의 집행기관인 망나니에게 최고신분계층의 사대부 양반가에서 망나니를 찾아가 ‘잘 처리 해달라!’고 부탁하며 뒷돈을 줬다? 또는 양반가의 학동들이 백정에게 세배(歲拜)를 했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어느 양반 가의 식솔 중에서 약간 중한 죄를 범하여 문초한 결과 참형의 벌이 확정된 후, 그 형벌(斬刑) 집행 전날쯤에 사대부 양반가에서는 망나니 집으로 찾아가서, 내일 우리 가문의 아무개가 형(斬刑)을 당하게 되었으니, 부디

  “단(單) 칼(刀)에 성사시켜주기 바라네!”

라며 돈 꾸러미를 줬다는 것입니다. 이쯤이면 이해가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게 즉 잘 봐 달라며 뒷돈을 주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도 충분하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못된 망나니가 심술을 부려 내려치는 첫 칼이 빗나가거나, 또는 내려치는 팔의 힘이 약하여 죄수의 목이 반쯤 베어지게되면 다시 한번, 칼을 내려쳐서 완벽하게 죄수의 목을 베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되면 그 죄수는 잘못 내려친 칼로 인하여 두 번의 칼을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보통인간으로서는 죽음의 순간을 한번만 맞이한다는 것도 여간 두렵고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그 고통도 말할 수 없이 크게 될 것입니다. 그런 죽음의 공포를 한번도 아니고 몇 번씩 맞는다고 상상해보세요.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습니까?

  그렇게 하여 죽음의 두려움을 여러번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 그 첫째 이유이고, 또 형(刑)집행이 완료된 후에는 죄수의 시신을 가족에게 인계하여 장례를 치르게 하는데, 이승에서는 비록 죄를 지어 목을 베었어도 저승에 갈 때는, 온전한 인간으로 가게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외과적 수술을 하듯이, 망나니가 몸통과 머리를 똑바로 붙여 바느질을 잘해서 가족에게 인계하게되는데, 시신의 몸통과 머리가 정상상태로 붙여져야 할 것이기 때문에 사대부 양반들도, 그때는 망나니에게 굽실거린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참형의 집행으로 죽은 부모형제 또는 자식의 목(두상)이 거꾸로 붙어있다고 상상해보면, 천민중의 천민인 망나니가 아니라 그 누구에게라도 고개 숙여, 온전한 시신을 바라는 마음은 똑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반들도 망나니에게 하대(下待)도 쓰지 않고 뒷돈도 주게되었다는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노인들도, 장래희망은 고생 없이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죽어가면서도 고생스럽게 죽어 가는 경우도 많다고 듣긴 했지만, 과연 어떻게 해야 고생 없이 죽을 수 있는지를 우리인간들로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노인들은 겉으로는 표현을 잘 안 해도 나이가 들수록 죽을 걱정을 많이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필자도 죽음의 순간은 가장 평범하게 그리고 가장 편안한 가운데서 엄숙하고 장엄하게 맞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살아생전에는 거지같이 살았거나 또는 부자로 살았거나 아니면 어떻게 살았든 간에,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과정인 죽음의 순간은 추하게 보이지 않으면서도, 종신 해야 할 가족이 다 모인 자신의 안방에서 편안하게 이승을 떠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비명횡사 또는 객사하지 않는 가운데, 죽음의 순간을 모범적인 즉 많은 사람들이 희망하는 바 되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윤리도덕심을 기초로 한 올바른 마음가짐 그리고 순수한 양심과 남(他人)을 도와가며, 다시 말해서 봉사와 나눔 그리고 절제로 훌륭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한마디로 덕(德)을 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어느 감찰담당자가 어떤 직원의 비위가 노출되어 조사를 해본 결과 인간적인 면에서나 도덕적으로나, 직업 윤리상으로 보더라도 그런 자는 징계위원회에 회부하여 파면을 시켰어야 마땅한 자라고 하면서도, 차마 인생이 불상해서 파면절차는 추진하지 않고 징계권자의 결재를, 얻어 타서로 전출상신 했다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듣고, 참으로 씁쓸한 뒷맛을 남겼습니다. 요즘 들어 생각해보면 그 담당자는 ‘자신의 직무를 성실하게 완수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보통의 감찰담당자들은 비위조사 결과 파면을 당할 마땅한 비위가 있어도, 차마 내 손으로는 파면절차를 추진하지 못하겠고 다른 감찰담당자 또는, 그 누군가의 손에 의해 파면되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라면, 조선시대 참형의 집행기관인 망나니만도 못한 직업 윤리관을 가졌다고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인간이 인간의 목숨을 빼앗는 형벌을 가(加)한다는 것은 기독교에서의 ‘원수를 사랑하라!’그리고 불교에서의 ‘살생을 금하라!’는 교리와는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형벌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극형에 해당하는 참형의 집행은, 누구나 거리킴 없이 행할 수 있는 업무가 아니기 때문에, 시키는 되로 할 수밖에 없는 천민중의 천민인 망나니에게 주어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제정하여 시행하고있는 이 법에 의한 참형의 형벌을 집행한 망나니는 사후, 곧바로 종교의 교리 되로 지옥으로 가게 될 것인가? 아니면, 천당이나 극락세계에도 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뿐만 아니라 현(現) 시대에도 사형은 교수형으로 집행하게 되는데, 교수형의 집행관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행위는 각 종교의 교리에 의하면, 인간이 인간을 죽였으니 지옥으로 가게 될 것이 명약관화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형이나 교수형의 집행이 자신의 직무범위에 속한다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하찮은 미물에 불과한 짐승세계에서도 그들 나름 되로 질서가 유지되고 있듯이, 인간세계에서도 어떤 형태로든 질서유지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또 한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며 살기 위해서는, 타인으로부터 간섭이나 방해를 받지 않아야 자신의 임무완수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고, 따라서 그 질서를 위반한 사람에게 형벌을 가해서라도, 질서는 반드시 유지되어야한다는 구성원 공통의 공감대가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고, 또한 그 형벌을 누군가는 다른 사람이 반드시 집행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형벌의 집행자에게 각 종교의 교리에서와 같은 벌칙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예수님이나 부처님께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결론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를 100% 완수하는데는 자신이 최고의 적임자인 동시에, 자신밖에 없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하기 좋은 말로 100%이지 실제로는 그 100% 완수란,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도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나 상하계층간에는, 뚜렷한 시각 차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즉, 피 감독자는 최선을 다해 임무를 완수한다고 자신하고 실행하지만, 감독자의 눈에는 어딘가 부족하게 느끼게 되고 이것저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때는 개구리와 올챙이이야기 즉, 지휘감독자(개구리)가 올챙이(피 감독시절)적 생각 못 한다는 말들도 필연적으로 따라 붙게 되겠지만, 개구리도 개구리 나름이며 올챙이도 올챙이 나름이라는 사실도, 반드시 상기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 감독자는 자신의 지휘감독 하에 있는 부하직원의 직무수행행위가 잘못되었다고, 이것저것 지적하고 시정하게 하면서도 정작 자신도 상급감독자에게 지적을 받게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각 계층의 감독자들마다 똑 같이 반복 재 반복되는 것이며, 상위계층의 감독자일수록 그만큼 시야가 넓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또한 바라보는 각도(時角)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는 사실도 인정해야합니다.

  따라서 감독자의 눈에는 어떻게 비치든 자신의 직무에 대해서는,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솔선수범하고 미쳐 못 느끼고 있었거나, 또는 알고 있었으면서도 행하지 않았거나 혹은 귀찮아서 생략한 부분의 지적에 대하여는, 겸허하게 수용하고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비단 관료조직 내에서만 일어나는 일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며, 가정과 사회에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또한 반복되고 있는 일일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직무수행과 관계되는 기본적인 사항은, 그 직무를 접하게되면서 기본교육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다 배우게되고 아울러, 수시 반복교육도 받고있을 것이기 때문에 지휘감독자와의 큰 시각 차는 없어야 당연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직무수행인 것이 아닐는지요.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도 상당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기본근무의 2중성.

  필자의 현재직무는, 대민 접점 부서인 경찰조직의 최하단위이고 기본단위인 ○○파출소장으로, 관할구역 내 주민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라는 목표아래 범죄의 예방과 이미 발생한 범죄에 대한, 수사 및 직원들을 지휘 감독하는 것입니다. 파출소직원의 근무라는 것은, 예방업무가 위주이어서 아무리 열심히 또는 나태한 근무에도, 개량화 할 방법이 없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소장을 비롯한 직원들의 근무는 제반 규정 및 일일업무지시 등에 의해 모두가 ‘기본근무’라는 형식으로 매일매일 소장에 의해 지정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기본근무 즉, 범죄의 예방이라는 업무는 어떤 형식으로든 실적을 평가할 수 없기 때문에, 직원 개개인의 직업윤리관 도덕심을 기초로 자율과 창의적인 순찰에 의존하고 있으나, 개중에는 감독자의 시각에서 시정 보완할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범죄취약여부를 판단하여, 구성원인 직원각자가 자율과 창의에 의한 순찰을 실시하므로 서, 범죄를 예방하자는 실정인 것입니다.

  이러한 ‘기본근무’라는 것은 범죄예방의 수단으로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필자로서는,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직원 각자에게 부여된 업무는 최선의 방법으로 완수토록 하자는 것인데, 직원들 중에는 특별한 사람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근무시간을 초과해서까지 지휘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규정되어있는 근무시간의 범위 내에서만큼은 아무리 가볍게 여겨지는 업무라도 빠짐없이 챙겨, 훗날의 근무태만 등의 시비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각종의 징계책임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신상관리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사회, 어느 조직에서든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규율을 정하고 그 규율을 위반하면 벌칙이라는 규제가 따르듯이, 일반 사회에서도 법이 있어 그 법을 위반하면 벌을 받게되고 이어, 전과자가 된다는 것도 잘 알고있는 사실일 것입니다.

  따라서 경찰조직내부에서도, 엄한 규율이 있을 뿐 아니라 행정법상 특별권력관계로 인한 상명하복의 관계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행위책임에 대한 지휘(감독)책임이 따르기 때문에 직원들이 각종 책임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업무감독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지휘감독이라는 것 자체가, 일반사회에서도 규율을 위반하면 형벌을 받고 전과자가 되듯, 공직사회에서도 각종규율을 위반하면 그 규율위반의 정도에 따라, 민․형사책임은 물론 행정책임인 징계책임도 감수해야하고, 따라서 조직내에서의 전과자가 되기 때문에 직원의 신상관리는, 소신껏 또는 마음놓고 근무할 수 있는 여건조성을 위해 신상보호차원에서라도 신경을 써 줘야하는 것입니다.

  직원 중에는 미쳐 깨닫지 못해 챙기지 못하거나, 실수하여 규정된 업무가 생략 또는 결략 되는 경우 등, 복무규율을 위반하는 사례들이 종종 있어 많이 챙겨보는 편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직원들의 근무 년 한의 장단에 관계없이 게으르거나 또는 태만한 경우 등도, 많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끝임 없이 챙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諸)들 하는 되로 두고보면 지휘감독책임도 반드시 따르기 때문에, 보통사람보다는 많이 챙기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경우에 따라서는 고맙게 생각하고 적극적인 시정노력을 하며 잘 따르고 있지만, ‘먼저 난 털보다 나중 난 뿔이 더 우뚝하다’고 돼먹지 못한 경우 위계질서의 엄격함도 망각하고 ‘설마 지가 날 어떻게 할거야?’하면서 ‘날 잡아 잡슈!’하는 식으로 버르장머리없이 구는 경우도 있긴 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냥 두고볼 수도 없을 때는 자연히 좋지 않은 소리가 따라다니고, 때로는 나쁜 소문도 퍼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직무를 수행하는 동료들간에는 지식수준과 시각 차를 초월하여 양심과 이성에 비추어 감독자와 피 감독자 서로간의 주장에 대하여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감독자나 지적을 밥먹듯 받는 피 감독자와의 관계에서, 누구의 언행이나 주장이 옳은지 또는 그른지는 동일조직의 동료(직원) 모두가, 올바른 이성과 상황판단으로 서로간의 언쟁과 주장을 판단하고 있을 것이며, 먼 훗날 또 다른 동료들과의 이야기 끝에 현재의 언행과 주장 등의, 줄거리가 회자될 수 있다는 사실도 명심해 두기 바랄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 5대 악당’이라는 등 험담과 헛소문을 내기도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노력(?)으로 말미암아 필자와 같이 근무한 기간동안의 업무와 관련하여, 같이 근무한 직원 중에서는 단(單) 한 명도 징계를 받은 사람은 없게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별것도 아니지만 그 무엇보다도 긍지를 가지며, 또한 자부심도 느끼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러한 전통이 퇴직할 때까지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나, 하도 험한 것들이 많아 어찌될지는 모를 일입니다.

  근래에 들어서는 명시적인 지시나 문서의 하달은 없이, 문제성 있는 직원들을 보내오면서 아무래도 ○○○한테가 아니고는 보낼 곳이 없으니, 버르장머리를 고쳐주든지 아니면 근무에 태만하거나, 위계질서를 어지럽게 할 경우에는 ‘보고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총대까지 짊어지면서 머리통 다 큰 자들과 싸울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자들도 모두 신상보호를 하려니 힘들고 고달플 뿐입니다. 그러기에 마부가 말에게 물을 먹이려고 말을 강으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말에게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다고 옛 선인은 말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데도 어느 날 후배직원이

  “○○ 선배! 직원들 좀 가만히 놔두세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대뜸

  “그게 무슨 말이냐?”

고 했더니 어느 직원이 선배를 좋지 않게 이야기들을 하고 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곧바로 ‘어떤 미친놈이 그래?’ 대꾸하며 ‘내가 제 놈들에게 무엇을 바라기에 좋지 않은 말들을 하고 다녀!’ 그러면서 인간이란 3~ 4사람만 모여도 그 중에는 반드시 모(성질․행동 등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점) 난 사람이 끼이게된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제몫은 해야 되지 않겠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그런 얼마 후 또 다른 후배직원이 위 이야기와 비슷한말을 하며,

  “많은 직원이 부정적으로 이야기하고 다니면 좋을 게 없지 않겠습니까?”

하며,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보다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많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소위 과반수이상에게는 긍정적이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숫자와는 완전히 초월하고 살아 온지 오래되었다면서, 과연 몇 %에 해당하는 사람이 긍정적인 평가를 하느냐?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아니라고 하면서

  “그래? 나도 그런 이야기는 듣고 있다!”

따라서 누가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는지 묻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사람과 혹시라도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즉,

  “두 사람의 근무형태를 자세히 살펴보기 바란다”

고 하며, 직원들간에는 그 두 사람의 ‘근무형태를 비교 분석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자,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지 한참을 의아해하여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자

  “아하 그렇다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동료들 간에서도 근무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는 사람과, 기본근무조차도 나태하고 태만하다고 알려진 사람과의 차이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례는 보잘것없는 미물사회에서도 관찰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구성원의 개체 하나 하나가, 모두 밤낮 없이 자신에게 부여된 업무를 열심히 완수하는 것처럼 보이는 꿀벌사회에서도, 약 80%정도는 하나같이 각자 부여된 업무를 열심히 완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나머지 약 20%정도는 게으르고 태만해서 미처 제몫도 하지 않고 놀고 먹는 놈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재미있는 것이 열심히 일하는 약 80%에 해당하는 놈들만 따로 분리시켜놓고 살펴봐도, 또는 게으르고 나태한 약 20%에 해당하는 놈들만 따로 분리시켜놓고 살펴봐도, 어느 쪽을 막론하고 한결같이 약 20%정도는 역시 놀고 먹는 놈이 반드시 있더라는 것입니다. 사회공동생활의 표본으로 여겨지는 꿀벌사회에서도 이러할 진데 우리인간사회는 말해 뭐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사회의 어느 조직을 불문하고, 자신의 직무를 열심히 찾아 행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는 반드시 있게 마련인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몫은 물론이고, 남의 몫까지 하는 사람도 있는가하면 남에게 빌붙어 자신의 몫도 못하는, 즉 무임승차하는 사람도 더러는 있더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어느 사회 어느 조직에서든, 자신의 몫은 물론이고 남의 몫까지 하는 사람에 의하여, 그 조직이 유지되고 있다 할 것입니다.

  필자의 근무 부서는 조직의 기본단위인 소(小)그룹으로 약 20여명이 근무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20%정도에 해당하는 약4~ 5명은 자신의 몫은 물론이고 남의 몫까지 하는 사람으로, 능동적으로 또는 감독자의 지시에 적극적으로 당면업무를 수행하고 있으나, 그 외 나머지 인원은 그저 그렇고 그런 편이며 따라서, 그 4~ 5명으로 인하여 그 소규모 조직의 많은 업무를 처리하는 실정이며, 소위 문제성 운운하는 자들은 상위단위인 중(中)그룹에서 약 1%내외에 해당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이런 문제성 운운하는 자들은 어느 조직에서나 어느 시대에나 있게 마련인 것 같습니다.

  또한 현재의 조직에 들어온 이후, 상당한 갈등이 있긴 했었지만 천직으로 알고 모두 15명의 소장을 모셨는데, 각 소장들마다 장단점이 있었든 것은 물론입니다. 그 장단점 중에는 윤리도덕심을 기초로 한 공․사적 언행들 중에서, 본받을만한 것과 버릴 것들을 취사선택하여 내가 만약 파출소장의 위치에 있다면, 이럴 때는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하는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판단을 하였으므로, 항상 사심을 버리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직원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다면, 오로지 정년퇴임 시까지 신상에 흠(瑕疵)이 없이 깨끗하고 명예롭게, 퇴직하게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 자들도 이런 필자의 마음을 모르지는 않으면서도 다만 하기 싫고 또 연령이 약 50대(代)만 되어도 귀찮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누구의 간섭도 아니 받고 하기 싫으면 아니 해도 될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닌데, 그런 결단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필자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오랜 기간동안을 파출소장직무를 수행하면서 수많은 사건과 사고를 처리하였고, 또한 수많은 계층의 사람들과 대화는 물론 어떨 때는 논쟁도 가졌으며, 매 사건 하나하나를 입건 또는 훈방으로 처리할 때마다, 사회정의와 법 감정 그리고 직업윤리관을 기초로 가해자와 피해자 또는 사건관계자에게, 그 이유를 명확하게 제시하여 이해나 설득시키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사건사고를 접할 때마다, 먼저 그 사건의 정황과 가해자 및 피해자의 심리상태 또 사건개요를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안타깝게 여겨지는 경우도 많았든 것은 사실입니다.

즉 권한범위 내에서 훈방할 수 있는 사안도 당사자의 반성이 없으면 훈방하고 싶지 않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당사자의 눈물어린 후회와 뼈저린 반성이 있어도 권한 밖의 사안으로 입건해야할 경우에는, 역지사지의 심정이 되어 눈시울이 젖어오는 것을 경험하기도 하였습니다. 형벌의 여러 가지 목적 중에는, 아무리 흉악한 범죄인이라도 할지라도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만들기 위한, 교화의 목적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형벌이라는 사회의 벌보다 자신의 양심적인 가책이 더 큰 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쯤에서 훈계 방면한 사례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1990년 초겨울 어느 날 오후, 직원들의 수군거림을 느끼고 한 직원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직원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엊그제 야간 근무할 당시 112신고를 접하고 현장에 도착해보니 20대 초반의 여자가, 만취상태에서 길(道路)가에 미쳐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을 토(吐)한 채, 널부러져 있는 것을 파출소로 싣고 왔습니다. 길가에서는 자신의 안방 침대에서보다 더 편한 상태로 정신을 잃은 채 잠자고 있었는데, 경찰관이 ‘아가씨! 일어나서 집으로 가서 잠자라’며 깨우자, 정신이 조금 드는 듯하다가 다시 쓰러지기를 반복하여 결국 파출소로 싣고 왔다는 것입니다.

  파출소에 도착해서 또다시 ‘여기는 ○○파출소인데 아가씨 집(宅)이 어디인지 말해주면 우리가 집에까지 태워다 주거나, 가족에게 연락해서 데려가게 하겠다’며 ‘어디 사는 누구인지’를 묻자, 보통사람 누구나 와 같이 파출소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파출소로 왔느냐(?)”

며 소위, 선량한 시민을 경찰이 집에도 못 가게 한다면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등 흔히들 가끔씩, ‘경찰 25시’ 또는 ‘파출소 24시’등 프로에서 소개되는 그대로였습니다.

술을 어느 의사는 ‘향정신성 식품’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향정신성 식품을 섭취하게되면 우선 정상인의 정신상태에서와 같은 사물의 판단능력이 저하되고, 성격이 대담무쌍해지며 두려울 것이 없어지고 따라서 부끄럼이나 수치심이 없어지면서 소위, 이성(理性)의 통제범위를 벗어나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적당한 주량의 선을 넘어서면 그때는 기억조차 없어지는, 다시 말해서 테잎이 끊어지는 상태로까지 가게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기억도 할 수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억에도 없어지는 상태에서의 언행에 대하여는 필설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필설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들을 남녀노소가 다같이 연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상태가 바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세상에서 자기만이 잘났다고 뽐내는 일)으로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술 때문이기는 하지만...

  술을 마시는 사람이라면 한번씩은 기억상실상태의 경험이 있을 줄 알지만, 무서울 것이 없어지면 눈에 보이는 것도 없어지는 사람들의 언행은 그야말로 기고만장 바로 그것이지요. 이런 경우를 주로 주사라고들 하는데 물론 기억상실상태라고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기억상실상태의 주취자라고 모두가 주사를 부리는 것도 물론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의 처녀가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과 행패를 부리는 과정에서 옆에서 진정시키든 경찰관의 뺨을 때렸다는 것입니다.

  필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경찰관이라면, 자신의 업무처리과정에서 발생하는 약간의 피해에 대하여는 수인(受忍)의 의무도 주어져 있다고, 강조해 왔든 터라 뺨을 맞은 직원도 반격이나 보복은 하지 아니하였고, 옥신각신하든 중에도 겨우 주소지를 알아내어 가족에게 인계하였는데, 그 아가씨는 가족으로부터 자신의 언행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듣고,

  “설마 내가 파출소에서 그렇게까지 했을까?”

고개를 가웃 거리면서도,

  “저녁때에 파출소 해당직원에게 사과를 하겠다”

고 전해 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아가씨가 찾아오면 ‘소장 앞으로 데려 오라’ 일러놓고, 사건의 내용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그 전말을 짐작하고, 그 아가씨를 어떻게 처리해야하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소장이 퇴근한 이후에는 부소장이 사건의 내용을 판단하고 가족에게 인계한 이후이니, 다시 의법 처리 할 수는 있었지만 법에 의한 처벌만이 능사는 아니며, 이미 그 아가씨도 경찰관들이 자신을 처벌할 의사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처벌보다는 자신의 과오를 진심으로 뉘우치게 하고 참회하게 하므로 서, 또한 주사의 습관화를 하루라도 일찍 차단할 수 있는 가능한 방법으로,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설프게 훈계랍시고 하다보면 역효과가 날것이 뻔하고, 또 본의와 다르게 초점이 흐려지면 젊은 여자에게 뜻밖의 오해를 가지게 되면 소위 ‘소드래’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칫 잘 못하다가는 성적 농담으로 비쳐지게되면 아니한 만 못할 것이어서, 참으로 사서 고생하는 심정으로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대부분의 주취자들은 경찰관에게 행패를 부리거나 싸워도 경미한 사안이라고 훈계방면을 하게되면, ‘아하! 이 정도는 처벌의 대상도 아니 되는구나’하는 오해를 가지게되며, 자신의 친구들과 모인 어느 좌석에서든지 경찰관과 싸워서 이긴 것으로 착각하고, 무용담이라도 되는 양 자랑삼아 떠벌리고 공권력의 권위를 무시해도 괜찮은 것으로 오인하게될 것이고, 그 무용담(?)을 들은 친구들 역시 다음 기회에 경찰관의 각종 공무집행에, 정당한 항의의 수준을 벗어난 방해로 경찰관에게 달려들고, 억지를 부릴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필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어느 좌석에서 수 차례 들은바가 있었기에, 설사 사안이 경미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친구 앞에서 적어도 무용담으로는, 자랑 같은 이야기를 못하게끔 따끔한 훈계로 반성하게 하든지, 아니면 국가권력의 대명사인 공권력에 도전해서는 아무 이득도 볼 것이 없다는 방향으로, 반성하게 하여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게 해야하고 결국은 반성의 시발점이 되도록 하는, 방법이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친구들 앞에서 무용담(?)이라도 되는 양 자랑하는 사례는 흔히 있을 수 있는 것이기에, 그 아가씨도 자기친구들 앞에서 자랑삼아 ‘야! 엊그저께 내가 술 한잔 마시고 파출소에 들어가서, 짭새들 혼도 내주고 한바탕 스트레스도 풀었지!’하는 식으로 하지는 못하게 해야하고, 반면에 그 사건만 생각하면 스스로 수치심이나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방향으로 훈계나 야단을 쳐야할 것이며, 그러면서도 그 아가씨의 행동은 분명한 주사인데, 그런 주사는 못 고친다는 것이 정설이나 어릴 때부터 고치려고 노력하게되면, 가능성도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그 아가씨의 주사도 고쳐주는 방향으로, 목표를 정하고 다시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사서하는 고생이었으며, 바쁜 오후였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아가씨가 도착하면 필자가 지금까지 생각하고 목표로 삼았든 사항들을 이야기하고 끝으로, 자신이 파출소에 들어와서부터 CCTV에 녹화된 한편의 다큐물(物)을 감상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윽고 약속시간이 되었는지 그 아가씨는 도착하였고 필자에게 이르렀습니다. 그 아가씨에게

  “엊그제 파출소에 왔든 일이 기억나느냐?”

고 물었더니, 참인지 거짓인지 모를 일이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필자가 준비했든 되로 지금까지 생각하고 우려했든 모든 사항을 이야기해 주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당시의 진실을 직접 확인하라며 CCTV에 녹화된, 한편의 다큐물(物)을 상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야! 이○○들아”

하는 장면이 방영되면서부터 표정이 달라지며 울음보가 터지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점점 더 거세지기에 상영을 끝내고 몇 마디 덧붙여 돌려보내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 아가씨는 그 이후부터는 술자리가 있을 때마다 어떻게 처신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필자의 희망사항으로는 부디 술좌석에 임하는 대상이 누구이든 술좌석에 임할 때마다, 지난 어느 날 과음으로 자신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정신을 잃은 채 길거리에 널브러져 자다가, 파출소로 데려간 경찰관에게 욕설과 뺨을 때리며 행패를 부렸든 그 악몽 같은 사연들이 동영상처럼 연상되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만약 필자의 희망 되로 술좌석에 임할 때마다, 그 동영상이 주마등처럼 연상된다면 그 아가씨의 음주문화가 확 달라게 될 것이고, 아울러 동료들의 과음도 자제시켜 줄 것입니다. 그러나 지각없거나 철딱서니 없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현상이 없이 ‘언제 무슨 일이 있었더냐(?)’는 식으로 잃어버리고 나면, 자신의 음주습관도 주사도 계속될 것이며, 따라서 필자는 헛고생만 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나. 당신께 고(告)함

  여기까지 와서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망설여지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비록 얼마 길지 않는 일생을 통틀어 지금 같이 희망도 비전도 없어 보이는 나라모습은 일찍이 본적이 없었습니다.

  필자의 애국심이라는 것이 특출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누가 인정해주지 않아도 또한 어느 누가 기억해 주지 않고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 하더라도, 대한민국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수많은 애국자중에서도 미력을 바쳐 언제 어디서나 나라의 장래를 위해 열의와 성의를 다한 조그마한, 애국이었음을 자부합니다. 그것은 학창시절 때부터, 마을공동사업과 간척사업은 물론이고 산림녹화사업 등 새마을사업에도 참여하였으며, 이후로도 정부시책에 호응하여 적극적으로 실천하였고 직장에서의 업무수행과정에서도, 비품이나 용지 한 장 아껴 쓰라고 직원들을 닥달하다 싶히 하였습니다.

  비품절약은 물자절약인 동시에 외화절약이기에 일생동안 사랑하며 가꾼 이 조국을, 보다 영광되고 자랑스러우며 살기 좋은 상태의 환경으로 후손에게 물러줘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언론사 세무조사 후 비위 언론사가 검찰에 고발되고 한참동안 정기적인 업무수행이다, 한쪽에서는 보복이다 시끄러웠든 2001년 7월 어느 날 동료직원 한 사람이

  “아직도 ○○일보를 보십니까?”

라며,

  “○○는 ○○출신이니까 ○○○편이겠네요!”

하는 말에,

  “신문이나 방송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지 내편이 아니면 자신의 취향에 맞아도 아니 보고, 내편이면 취향에 맞지 않아도 보느냐?”

하면서,

  “왜? 이렇게 편을 가르는지 모르겠다”

며,

  “그럼 당신은 그 쪽 편이겠구먼! 무슨 이익을 얼마나 많이 보았느냐?”

고 대꾸하고,

  “○○와는 동성동본이기는 하지만 득 본 것 없고 ○○시대에서도, 특별히 손해본 것은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고 했지만, 무슨 말이든지 좀 더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언론사세무조사와 관련된 필자의 소견을 이야기했었는데,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그 직원은 한참동안 멋쩍어 하는 것이었습니다.

  5․6공화국정부에서는, 수 천억 원의 비자금을 관리하다 전직대통령이 구속되는 상황을 지켜봐야 했는가 하면, 문민정부와 국민의정부를 거치는 동안 한심한 작태가 끊이지 않았든 나라모습은, 모든 국민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하였고 정치수준이 경제수준을 따라잡는 날은 가히, 백년하청이라 생각한 것은 필자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민정부와 국민의정부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사회 각 계층의 구석구석에는 각종 부조리와 비리가 성행하였고, 부조리와 비리를 저지를 수 없는 아무런 권한과 권력도 없는 서민들은, 사회규범인 실정법의 준법정신도 희박해지고 외면하는 등 OECD회원 29개국 중, 우리 정부의 민주제도 시행 수준은 과연 몇 위(位)쯤 이며, 관료사회(월 급여 또는 년봉 수령자를 통 털어)의 청렴도와 직무에 대한 성실도는 과연 몇 위쯤이며, 또한 우리 국민의 민주주의 준법의식 수준은 과연 몇 위쯤인지? 알고 싶을 뿐입니다.

  참으로 거세개탁(擧世皆濁: 온 세상이 다 흐리다는 말로, 곧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다 올바르지 않다는 뜻)을 탓하지 않을 수 없을 지경이었지 않습니까?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아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치인은 말할 것도 없고 기업인도 지식인사회도 전문직종사자도 자영업종사자 등 각종비리와 부조리가 적발되고, 관료사회에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지연 학연 혈연으로 얽히고 설켜, 형님 아우가 한통속으로 놀아나는 그 지경이라니 민초들은 준법정신도 질서의식도, 송두리째 팽개치고 무법천지(?)와 같은 혼란 속에 법이 있으되 법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 사회를 지켜보며, 국가의 장래가 참담함을 느낀 것은 필자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음주운전으로 단속되는 경우에도, 죄의식을 느끼며 후회하고 반성하기보다는 재수가 없어 나만 걸렸다며, 단속 경찰관에게 반항하거나 오히려 공무집행을 방해하여 더욱 더 큰 벌칙을, 자초하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음주운전의 결과는, 자신의 가정을 망칠 수도 있는 것은 물론 남의 가정까지 망치는 원인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용서받을 수도 또한 용서할 수도 없는 범죄행위인 것임을 인식하고, 누구든지 삼가하고 제지해야 할 것입니다.

  문민정부에 들어와서는 대통령의 아들이 구속되는 사태를 지켜보며, 할말을 잊었는데 한술 더 뜬 국민의정부에서는 그것도 두 아들이 구속되었는가하면, 전화를 받은 사람은 분명히 나서는데 전화를 보낸 사람은 없는 세상, 소위 언론사대책이라는 문건이 분명히 여기 있다고 하는데도 그 문건을 기안 한 사람은 없는 세상, 모 언론사 기자가 비서실 모 부서 모모 비서관으로부터 언론사 죽이기 프로그램 이야기를 들었다고 폭로하는데도, 모두가 ‘나는 안 그랬다!’며 꼬리를 감추며 숨어버리는 세상, 또한 사상초유로 최장기간 최대인원을 동원하여 초정밀 잣대로 언론사 길들이기라고 회자되고있는, 보복성 짙은 언론사세무조사(23개 언론사에서 총 1조 3594억 원의 소득 탈루 사실을 적발하여 총 5056억 원을 세금으로 추징)로 인하여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면서도, ‘정기적인 업무수행이다’ ‘그게 아니고 보복이다’라는 양쪽주장에 어리둥절한 민초들은 각자가 알아서 판단해야하는 세상, 미국의 시민권을 얻기 위해 원정 출산도 마다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며, 같은 시대 같은 하늘아래에 살았다는 명예스럽지 못한 억울함을 후손들은 어떻게 판단하고, 무슨 말로 위로해 줄 것인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지식인층에서,

  "

by 다사치 | 2009/07/26 06:41 | 애국(愛國) | 트랙백 | 덧글(0)

오! 무릉도원

               “오! 무릉도원”

     그림의 오른쪽에는,

  현란하고 유려하다 못해 귀기조차 감도는 필치로, ‘夢遊挑源圖’라는 다섯 글자가 살아있는 듯 꿈틀거린다. 옅은 황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 쓰여진 이 다섯 자의 글씨야말로, 조선조 서예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안평대군이 그림을 보고 필생의 기를 모아 써냈다는 그 글씨였다. 한 자, 한 자에 변화가 가득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균형이 잡혀, 그림을 보호하는 듯 한 형태를 취하는 것이, 힘은 넘쳐 있었고 이미 인간세계의 경지를 떠나 있는 듯했다.

     제목 옆의,

  “世間何處夢挑源 이 세상 어느 곳을 도원으로 꿈 꾸었나”로 시작하는 안평대군의 찬시(讚詩)는 몽유도원도를 꺼내 볼 적마다 감회를 억누르지 못하여, 그림이 그려진 후로부터 삼년이 지난 辛未(1450)년 정월 어느 날 밤, 홀연히 꿈과 그림이 떠올라 써 낸 것으로, 담청색 바탕에 쓰여진 주홍빛 글씨의 현란 함은 보는 이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였다.

     그림의 왼쪽에는,

  안평대군의 발문(跋文)이 쓰여 있는데, 이 발문에는 자신이 꿈을 꾸고 안견이 그림을 그리게 된 과정을 설명한 글로, 이제까지와는 달리 정연한 글씨로 자신이 본 도화원을 그려내고 있었다.

  丁卯(1446)년 04월 20일 밤. 내가 마악 잠이 들려 할 즈음, 정신이 갑자기 아련하여지면서 깊은 잠에 빠지고, 이내 꿈을 꾸게 되었다. 홀연히 인수(仁嫂: 박팽년)와 더불어 어느 산 아래에 이르렀는데, 봉우리가 우뚝 솟고 골짜기는 깊어 산세가 험준하고 그윽하였다. 수십 그루의 복숭아나무가 어우러진 그 사이에 오솔길이 나 있고, 숲 가장자리에 이르러 갈림길이 되어 있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를 몰라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 터에 마침네 산관야복 차림의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 하면서 나에게 말하기를,

  “이 길을 따라 북쪽 골짜기에 들어가면 도원에 이르게 됩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인수와 함께 길을 찾아 들어가는데, 절벽은 깎아지른 듯 우뚝하고, 수풀은 빽빽하고 울창하였으며, 시냇물은 굽이쳐 흐르고 길은 구불구불 백번이나 꺾이어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골짜기에 들어가니 동천(洞天)이 탁 트여 넓이가 2- 3리 정도 되어 보이는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구름과 안개가 자욱히 서려있고, 멀고 가까운 곳의 복숭아나무 숲에는 햇빛이 비쳐 연기 같은 놀이 일고 있었다. 대나무 숲속의 띠풀 집은 사립문이 반쯤 열려있고, 흙으로 만든 섬돌은 거의 다 부스러졌으며, 닭이나 개, 소, 말, 따위는 없었다. 집 앞에 흐르는 냇가에는 오직 조각배 하나가 물결 따라 흔들리고 있을 뿐, 그 쓸쓸한 정경이 마치 신선 사는 곳인 듯싶었다. 이에 한참을 머뭇거리며 바라보다가 인수에게 말하기를

  “…‘암벽에 기둥 엮고 골짜기 뚫어 집 짓는다’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니겠는가? 정녕 이곳이 도원동이로다”

라고 하였다. 마침 옆에 몇 사람이 뒤따르고 있었는데, 정부(貞父: 최 환)와 범옹(泛翁: 신숙주) 등이 운에 맞춰 함께 시를 짓기도 하였다. 이윽고, 신발을 가다듬고 함께 걸어 내려오면서 좌우를 돌아보며 즐기다가 홀연히 꿈에서 깨어났다.

오호라, 큰 도회지는 실로 번화하여 이름난 벼슬아치들이 노니는 곳이요, 절벽 깎아지른 깊숙한 골짜기는 조용히 숨어사는 자가 거처하는 곳이다. 이런 까닭에, 오색찬란한 의복을 몸에 걸친 자의 발걸음은 산속 숲에 이르지 못하고, 바위 위로 흐르는 물 보며 마음 닦아나가는 자는 꿈에도, 솟을대문 고대광실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서로 길을 달리하는 까닭이니 필연적인 이치이기도 한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낮에 행한 바를 밤에 꿈꾼다’하였다. 나는 궁궐에 몸을 기탁하여 밤낮으로 일에 몰두하고 있는 터에 어찌하여 산림에 이르는 꿈을 꾸었단 말인가? 그리고 또 어떻게 도원에까지 이를 수 있었단 말인가? 내가 서로 좋아하는 사람이 많거늘 도원에 노닒에 있어 나를 따른 자가 하필이면 이 몇 사람이었는가? 생각건대, 본디 그윽하고 궁벽한 곳을 좋아하며 마음은 전부터 산수자연을 즐기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아울러 이들 몇 사람과의 교분이 특별히 두터웠든 까닭에 함께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가도(可度: 安堅)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옛날부터 일컬어지는 도원이 진정 이와 같을 것인지는 알 수가 없겠거니와, 뒷날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옛날 그림을 구하여 나의 꿈과 비교하게 되면, 무슨 말이 있게 될 것이다. 꿈을 꾼지 사흘째(1446. 04. 23) 되는 날에 그림이 다 되었는지라, 비해당(匪懈堂) 매죽헌(梅竹軒)에서 이 글을 쓰노라.

 

  그림도 그림이지만, 중국의 사신들도 조선에 와서 글씨 한 토막 얻어가 ‘자랑하였다’고 하는 안평대군의 글 또한, 희대의 보물이라 일컫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담황색의 색조를 띠고 있는 그림은, 입체감이 뚜렷하게 느껴지는 봉우리와 계곡, 시냇물, 복숭아밭이 어우러져 상상의 세계에서만 접할 수 있는 도화경을 현란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었다.

  그림의 왼쪽은 현실세계를 나타내는 야트막한 야산이고, 그 오른쪽에는 도원의 바깥 쪽 입구를 나타내는 바위산이, 그 안쪽에는 도원의 안쪽 입구를 나타내는 또 다른 바위산이 그려졌다. 현실세계인 야산과 이상세계의 돌산을 대비시키며, 그 야산에서 돌산으로 복숭아나무를 따라 나 있는 한 갈래의 길이 깊은 산속으로 풀어졌다가, 다다른 곳에 절로 눈길이 모아진다. 이 길이 바로 도원으로 들어가는 길로,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박팽년과 함께 가는 도중 산관야복 차림의 사람이 가르쳐 줬다는 길이었다. 길은 복숭아밭을 끼고 돌다 바위산을 휘돌아서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폭포 왼쪽 산허리에 다시 모습을 나타내는데, 완만한 곡선으로 휘어진 것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함과 유유함을 느끼게 한다.

  도원에는 복숭아가 주주렁 달린 나무들이 매우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무엇으로 찍었는지 보이지 않을 정도의 하얀 점들을 찍어 복숭아 열매를 그려낸 것에 대하여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복숭아를 한 개도 빠짐없이 분명히 드러나 있는 이 그림은, 현대의 기법이라 해도 쉽게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어디서 솟았는지 모를 청간수가 모여, 그림의 한 가운데 폭포를 이루었다가 다시 왼쪽 현실세계의 계곡을 향해 흐르는, 시원한 물줄기는 보는 이의 가슴에도 그 기세를 느끼게 한다. 이 물줄기가 만든 냇가의 한편에 한가롭기 이를 데 없는 집 한 채 외로이 서 있으며, 그 밑에는 나룻배 한척이 매어져 물길 따라 춤추는 듯 사공을 기다리는데...⃨

 

  아울러 수매(數枚)의 별지(두루마리)들이 감겨져있는데, 그중 한 장을 펼친 두루마리의 맨 끝에는, ‘고양 신숙주’라는 본관과 이름이 단아하면서도 날아갈 듯 한 필치로 쓰여 있었다.

消息盈虛一理通(소식영허일리통)

                       소멸하고 생장하며 차고 기우는 것 한결 같은 이치인데,

形神變化妙難窮(형신변화묘난궁)

                       형체와 정신의 변화는 기묘하여 헤아리기 어렵네,

膏盲不必論因想(고맹불필론인상)

                       깊은 곳에 담긴 뜻 제멋대로 이야기할 일 아니러니,

眞忘須明覺夢同(진망수명각몽동)

                       참과 거짓 모름지기 꿈과 현실이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하네.

 

野渡孤舟自幽獨(야도고주자유독)

                       들판 나룻터에는 외로운 배 절로 호젓하고,

山靑水碧謠寒玉(산청수벽요한옥)

                       산 푸르고 물 파란 가운데 차가운 구슬 흔드는 듯,

蒹葭簿出亂汀洲(겸가부출난정주)

                       갈대와 부들줄기 물가에 어지러이 돋아 있는데,

日夕東風吹軟綠(일석동풍취연록)

                       해질녁 동풍이 부드러운 잎새를 스치네.

 

孰覺惺惺爲彼槁(숙각성성위피고)

                       저 마른 나무처럼 또렷이 깨어있는 이는 누구이며,

孰夢栩栩爲此灝(숙몽허허위차호)

                       이 질펀한 물같이 꿈속에서 훨훨나는 이는 누구이며,

孰主張是必有然(숙주장시필유연)

                       누가 이것이 반드시 그러하다고 주장하고,

孰能辨之歸太昊(숙능변지귀태호)

                       누가 이를 가려 저 높은 하늘나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유려한 필치가 결코 안평대군의 그것에 못지않아, 한자, 한자가 살아 움직이는 정통파 유학자의 혁혁한 정신은 왕족이었든 안평대군의 글씨와는 달리, 정격 속에 엄격함이 배어 500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대면하는 이의 정신은 압도당하고 엄격하면서도 화려한 신숙주의 글씨에 빨려 들어가게 한다. 안평대군의 꿈에 대한 철학적 의미를 조망하며 시작된 글은, 이후 주옥같은 서정적 문장과 형이상학적 가치탐구가 어우러져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재주와 역사를 생각하며 연신 한숨짓게 만든다.

  우리들은 벼슬아치들이 이제까지 쓸모없는 유학에 빠져 몇 자리 안 되는 권좌를 놓고 싸우기만 해 온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그들의 세계가 이토록이나 보편성을 통찰하고 세상의 근본구조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문체 또한 예술적인 향기가 드높았다. 그 훌륭한 예술적 구도는 글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돈된 편안함과 더불어 절제된 지적세계에 자연스럽게 공감하도록 하고 있었다.

  수재는 정절을 지키기 어렵다는 말을 떠 올리며, 그가 사육신의 단종 복위계획이 탄로 난 후, 단종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던 이율배반적 모습이 그의 글씨에 그대로 나타나는 듯하였다. 사람을 홀리는 듯 한 빼어난 글씨와 뛰어난 문장은 안평대군이 꿈꾸었든 도원을 읊고 있었으나, 역시 속세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이는 듯했다. 그렇기에 감동은 더욱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오고. 글씨와 문장의 현란함에 놀라 몇 번이나 ‘고양 신숙주’의 이름을 되뇌어 본다.

 

  이어서, 펼쳐진 두루마리 끝에는 ‘한산 이 개’라는 본관과 이름이 쓰여 있었다. 역시 담황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 쓰여진 찬시는, 신숙주의 글에서 보았든 현란하고 화려한 글씨와는 전연 다른, 두텁고 무심한 글씨가 그 수수한 모습을 드러내고, 짧은 문장은 글을 쓴 사람의 텁텁한 성격까지 느끼게 한다.

地位淸高道自楰(지위청고도자유)

                       지체가 높고 생각이 고상하신 분 도가 절로 트여,

超然物外夢仙區(초연물외몽선구)

                       초연히 세상 밖의 신선 사는 곳을 꿈꾸셨네,

烟霞洞密花開落(연하동밀화개락)

                       자욱히 놀낀 그윽한 동굴에 꽃이 피고지고,

竹樹林深路有無(죽수림심로유무)

                       대나무 숲 깊은 곳엔 길조차 있는지 없는지,

 

漫說丹砂能換骨(만설단사능환골)

                       단사로 기골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쓸데없는 소리,

何須白日强懸壺(하수백일강현호)

                       허구 헌 날 어찌 억지로 호리병 건다는 말인가,

披圖爲想神遊適(피도위상신유적)

                       그림을 펴놓고 신선 세상에 마음껏 노닐고도 싶으나,

愧我心塵跡更蕪(괴아심진적경무)

                       내 마음에 티끌 먼지 끼고 지나온 발자취 더욱 거칠어 부끄럽기만 하구나

  글의 첫머리에는 역시 대군에 대한 칭송을 읊고 있으나 글의 길이만으로도 그가 아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글은 도저히 안평대군의 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내용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은근히 풍자하는 내용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것이었다.

  안평대군이라는 권력자의 꿈 이야기를 듣고 마치 청룡이 나르고 백호가 포효하는 듯한 현란함을 글의 전면에 드러냈든 신숙주의 글과는 전혀 다른 소탈함과 더불어 묵직함이 담겨있는 글을 보며 다시 한번 사육신과 생육신의 삶과 가치관의 차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토록 화려한 도원몽 찬시를 지어며 안평을 따르든 신숙주가, 반대편인 수양대군에게 주저없이 붙어 버리는 모습이나, 대군에게 이토록 무심하게 짧은 글 한 토막 툭 던져놓듯 한 이개가, 단종복위의 충직한 꿈을 실행에 옮기다 고역을 겪는 모습이 대비되어, 인생사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글의 내용과는 별개로 김종서의 글씨는 한자, 한자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고, 그 깨끗한 성품과 굽히지 않는 기개가 글씨체에 그대고 옮겨져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이 밖의 다른 별지(두루마리)들에도, 모두 당대에 제일가는 거유 문사들의 재기 넘치는 찬시들이 이어졌다. 하연량, 송처관, 김담, 고득종, 강현덕, 정인지 등의 대 학자와 삼대 악성의 하나로 꼽히는 박연, 다시 이적, 최항, 박팽년, 윤자운, 이예, 이현로와 당대의 문장가로 꼽히는 서거정, 사육신의 대표 성삼문, 김수온 등의 대 학자와 승려 만우에 이르기까지 조선조 초기를 대표하는 거목들의 글이 망라되어 있었다. 한사람, 한사람의 글씨가 서로 방식은 다르되 학문적으로 그리고 체험적으로 완성의 경지에 다달아 있는 것이 보면 볼수록 감탄과 더불어 마음의 평화까지도 느껴지는 것들이었다.

  더군다나 이 글들은 안평대군의 도원몽이라는 한가지 주제에 대해 이들 거유 대학들이 몇 년의 시차를 두고 지은 문장들이기에 각자의 성향과 사상, 문장력 등이 매우 잘 드러나고 있다. 이런 경우가 흔치않아 몽유도원도와 이에 첨부된 찬시들은, 조선조의 근간이 되는 유학과 선비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비단, 그림과 글씨라는 유형문화재로서의 가치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지식사와 정신사연구의 출발점이 된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가 여느 자료에 견줄 바가 아닐 것이다.

  조맹부의 송설체를 본떠 독자적 글씨체를 완성한 안평대군의 서도에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 집현전 학사들의 글씨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당대의 정신과 사상을 장악하고 있든 신숙주 정인지 서거정 등의 거유 대학들이 계유정난이라는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당하여 이제까지의 학문과 사상을 송두리째 팽게치고 권력자에게 빌붙어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 운명은, 자신의 신념과 죽음을 맞바꾼 성삼문, 이개, 박팽년 등 사육신으로서의 꿋꿋한 기개와 운명이 서로 상반된 길을 걷고야마는 역사의 비정이 이 글들에서 생생하게 느껴지고, 인간의 실체에 대하여 깊은 사유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시서에 능통했든 당대의 대 문호 안평대군이, 꿈을 꾸고 나서 놀라워하는 모습에서부터, 물감을 가다듬고 종이를 펼친 채 대군의 꿈 이야기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고스란이 그림에 담아내려고 머릿속을 정리하며 고심하는 안견의 옹골찬 모습, 그리고 당대의 거유들이 자신의 사상과 학문의 성취를, 이 한 장의 두루마리에 펼치기 위해 시상을 떠올리며 꼿꼿이 허리를 펴고 먹을 가는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리에 맴돌고 있었다. 안견의 기백어린 손끝에서 찍어내는 물감의 현란한 색채와, 충절어린 집현전 학사 거유 대학들의 자신만만한 손끝으로 일궈내는 단아한 검정 글씨에서, 은은하게 피어나는 묵향을 느끼게 한다.

    [복숭아밭은 도원의 세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도연명이 도화원기에서 무릉도원(武陵桃源: 신선이 살았다는 전설적인 중국의 명승지. 중국 진나라 때 호남 무릉의 한 어부가 배를 저어 복숭아꽃이 아름답게 핀 수원지로 올라가 굴속에서 진나라의 난리를 피하여 온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하도 살기 좋아 그동안 바깥세상의 변천과 많은 세월이 지난 줄도 몰랐다고 한다)을 설정한 이후로 모든 유학자들이 꿈에 그려온 유토피아였다]

 

위 글은, ‘가즈오의 나라’(김진명 작)에서 관련 글들을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by 다사치 | 2009/07/24 07:30 | 古事 ... | 트랙백 | 덧글(0)

애가(愛家)

               2. 애가(愛家: 齊家)

  ‘수신제가…’ 운운 할 때부터 공자님 말씀을 상기하였다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즉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수신제가…’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활동기의 이야기를 전개해 나갈 순서문제로 골몰하다가, 나와 가족 그리고 나라의 순서로 정하게 되었다는 것은, 처음부터 밝혀두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공자님 말씀에 관한 공부를 하려면 누구나 언제든지 논어(論語)를 공부하면 될 일이기 때문이고, 또한 필자는 현시대의 평범한 보통사람들의 눈높이에 알맞은 이야기로 여러분의 이해를 돕고자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애가(愛家: 齊家)편에 들어와서 생각해보니,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 어떤 제목에서보다 강하게 망설여지고 부끄러워지는 것은, 남편노릇 아비노릇 자식노릇 제대로 못한 꼴찌남편 꼴찌아비 불효자인 주제에 무슨 ‘수신제가…’가 어쩌고저쩌고 할 ‘자격이 있겠느냐?’는 생각에 상당한 시간적 고뇌 속에서 방황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더듬거리며 기어오다 싶히 지탱해온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지(己) 잘난 맛에 사는 게 인생이다'라는 이 한마디를 변명으로 대신하고픈 심정에 이해 있기 바랍니다.

  사실 공자님의 말씀인 제가와 필자의 애가는 부부간의 갈등과, 계층간의 갈등을 조화시키려는 것임으로 어찌 보면 단순한 과제이겠으나, 옛날부터 ‘마누라(妻)와 자식은 내 마음 되로 할 수 없다’고 전해오는 말과 같이, 쉬운 일이기는 커녕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인 것 같기도 합니다. 이러한 조화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면 공자님 까지 ‘제가 후에 치국하라’고 하셨겠습니까? 내 자식도 내 마음 되로 못하면서 어떻게 전혀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내까지 내 마음 되로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사람마다 성장배경과 개성이 다르기 때문에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생활에 있어 가장 기초적 단위인 가정의 화목과 가정에 대한 확실한 사랑 없이, 또 그 무엇을 제대로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와 자식간의 즉, 계층(階層)간의 갈등문제 중에서도 특히 혼사문제 만큼은, 정반대의 입장이 되는 경우도 많이 보고 들었을 것입니다. 최근 들어 쾌나 인기 좋았든 여자 탤런트중의 한사람이, 결혼한 얼마 후에 예쁜 딸아이를 순산했다는 보도를 접한 몇 달 후, 우연히 인터뷰내용을 자동차 속에서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 탤런트(아기 엄마)는 결혼할 무렵, 부모님들의 반대가 좀 있었든 것 같습니다. ‘결혼해서 살 사람은 자신(여자 탤런트)인데 왜! 엄마 아빠가 자신의 결혼을 반대하느냐?’고, 약간의 언쟁까지 있었든 모양입니다.

  물론 자신의 의지 되로 결혼은 성사되어 지금은 예쁜 딸아이의 엄마가 되었지요. 그러면서 자신의 예쁜 딸아이는 나중에 커서 결혼 적령기가 되면, 아주 좋은 사람을 찾아 결혼시켜주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자신이 결혼할 대상은 자신이 찾아 자신의 의지 되로 결혼했으면서, 자신(여자 탤런트)의 딸은 자신(여자 탤런트)이 좋은 신랑감을 찾아 결혼시켜 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 여자 탤런트는 아주 짧은 시간동안에 딸을 가진 부모마음과 자식의 마음을 체험한 것이었지요. 또한, 필자는 제가(愛家: 齊家)편에서 실질적인 보통사람들의 가정사 문제를 다루고 싶은데, 자칫 잘못하다가는 ‘○○의 자서전’ 성격이 짙어질 수 있음을 경계하고 있으며, 네집이나 내집 할 것 없이 공통적인 가정사 문제를 다루도록 노력할 것임을 밝혀두고자 합니다.

 

    가. 부부(夫婦)는 동급(同級)이고 평등(平等)하다.

  옛날부터 전해내려 오는 말 중에 ‘여자팔자는 디룽박 팔자!’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의 정확한 의미는 모르나 누군가가 무슨 뜻인지를 물어 오길래 ‘아마 이런 의미가 아닐까?’하며,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즉 같은 초가지붕 위에서 영글은 박(바가지)들은, 소비자에게 팔려가기에 따라 어떤 바가지는 장식품으로 뭇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도 하고, 또 어떤 바가지는 곡식을 푸는 곡식 바가지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바가지는 주막에서 술을 푸는 술 바가지가 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人糞)을 푸는 ○바가지로 변신하듯, 여자들 또한 부자를 만나면 부자댁 마님이 되고, 평민을 만나면 ○○댁이 되고 상것을 만나면 ○○네가 되기도 한다는 내용으로 이야기하였는데, 과연 제대로 표현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필자의 세대까지만 해도 어떤 남자를 만나 결혼하느냐? 에 따라 고위관직의 사모님이 되기도 하고,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사는 경우도 있을 것이며 반대로, 남편의 능력에 따라 보잘것없는 하위직의 마누라가 되기도 하고 또는,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생활을 하는 경우도 흔한 일이었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곧 예나 지금이나 여자들은 ‘어떤 남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 여자의 신분도 남자의 신분과 같아진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한편으로, ‘여자팔자는 디룽박 팔자!’라는 의미를 이렇게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아홉 남매의 맏이인 갑(甲)돌이와 결혼한 갑순이는, 종가집 종부(宗婦)로서의 지위를 자연스럽게 차지하게 되었을 것이고, 집안의 대소사(조상님들의 기제사를 비롯하여 시동생들과 시누이들의 혼사 등)를 주관하면서, 여듧명의 동서들과 시누이들을 지휘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갑순이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시동생들과 시누이들로부터도 ‘형수님!’ 또는 ‘올께 언니!’라는 존칭을 비롯하여, 그 아홉 남매의 배우자들로부터도 상응하는 존칭을 받는 것은 물론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막내인 임(壬)돌이와 결혼하였더라면 종가집의 막내며느리에 불과하여 여듧명의 동서들과 시누이들의 지휘를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가문의 장자인 갑(甲)돌이와 결혼한 갑순이는 맏며느리(宗婦)로서의 권한과 책임으로 종가의 대소사를 주관하였는데 반해, 막내인 임(壬)돌이와 결혼하게 되었다면 갑순이에게는 아무런 권한과 책임이 없는 것은 물론 종가의 대소사에서도 허드렛일이나 뒤치다꺼리밖에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혹여, 갑(甲)돌이의 숙부와 결혼하였더라면 현재의 낭군인 갑(甲)돌이를 비롯하여 아홉 남매는 물론 그 배우자들로부터 매일 같이 상위 항렬(叔姪)에 대한 예우를 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자가 한 가문의 어느 위치에 있는 남자를 만나 결혼하느냐하는 것은, 형제의 서열에서 상위 항렬(숙질)의 서열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팔자를 가졌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 2가지 의미 중, 어느 경우라도 통용되는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인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전반 무렵 인권과 관련하여 배운 것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남녀평등’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조선(朝鮮)시대 500여 년 간, 이 땅에서 살았든 아녀자들의 지위는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남자는 하늘(天), 여자는 땅(地)!’이라는 말로 그 실체를 인정받지 못하고 살아왔지만, 갑오경장(1894. 7. 27~1896. 2 초: 전근대와 근대를 구분 짓는 분기점)과 동시 사회제도개혁(문벌과 반상제도의 혁파, 공사 노비법 및 문무차별의 폐지, 역인 창우 피공등 천인의 면천, 연좌법의 폐지, 양자제도의 개선, 조혼금지, 과부의 재가허용 등) 이후부터 차차로 개선되어 왔다고는 하나 결국 남녀평등은 이루어지지 않았나 봅니다.

  따라서 ‘남녀평등’이라는 말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구호와 함께 남자와 여자는 인간적 인격적으로 평등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든 농경사회에서의 남존여비사상은 가부장적 가정경제체제 하에서 보는바와 같이, 경제활동의 주체가 남자들이 전부였든 이유도 있었을 것이고, 또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고 외쳐 되든 할아버지세대와 같이 생활하든, 아버지세대의 의식이 미처 따라잡지 못한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 남녀평등이 어느 정도 정착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1970년대 어느 때부터 ‘여성상위 시대’라는 구호가 자주 들리는 듯하더니, 1980년대 후반부터는, 남녀평등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는 뒤집어져서 여성상위시대의 개막이 도래한 것이었습니다. 즉 남녀평등이 아니라 이제는, 여남평등을 교육해야할 여성상위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었지요. 그것은 남녀평등에 대한 교육의 결과라고 판단하기보다는,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기회가 늘어나면서부터 소위 가정의 경제주체가, 남편으로부터 아내에게로 옮아간 것이며 또한 가족구성원 각자에게 경제활동 참여기회가 늘어나면서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이런 현상은 다시 말해서, 한 가정의 지휘통솔수단으로 이용되었든 경제권 소위 돈줄이, 가장의 지배범위를 벗어나 아내에게 또는 가족 골고루에게 분산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결과 즉, 남녀평등시대에서 여성상위(여남평등) 시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남성들이 여성을 배우자로 고르던 시대에서, 반대로 여성들이 남성을 배우자로 고르는 추세로 진입하였고, 사회생활 중에서도 남성들은 돈 한푼 움켜쥐고 벌벌 떠는 쫌생이가 다되어 가는 반면에, 여성은 씀씀이가 대담해지는 경향에 익숙해지고 있는가 하면, 남성들이 여성을 배우자로 고르는 경우에도 때에 따라서는 평생 동안 돌쇠(큰머슴)가 되겠다는 약속은 물론이고, 공주처럼 또는 왕비같이 살게 해 주겠다는 공약으로 구혼함으로서, 상대의 관심 끌기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결혼 후에 진짜 큰 머슴이 되거나 공주 또는 왕비대우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얼마나 다급하고 자신이 없으면 감언이설도 서슴없이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부가 동등하다’는 의식이라면 이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그럭저럭 결혼을 하게 되더라도 이번에는 혼수로 인한 갈등으로 시댁의 양에 미흡하게 되면, 신부와 친정집에서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되며, 심한 경우 신랑까지 합심하여 줄기찬 구박 끝에 파혼의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경우도, 부부가 동급이라는 의식이 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사숙녀 그리고 처녀총각여러분! 여러분의 배우자가 가정에서 ‘어떤 신분으로 남느냐?’에 따라, 여러분 자신의 가정적 사회적 신분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러한 신분이야말로 ‘사람위에 사람없고 사람밑에 사람없다’는 평등한 인격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제 3자인 누군가가 지정해주거나 조선시대의 반상제도(班常制度: 조선시대 국가․사회적 신분제도의 通稱으로

  ․최고지배계층(兩班): 고려말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 독서인(讀書人) 지주층 (地主層),

  ․중간지배계층(中人): 서얼(庶禽) 기술관 향리(鄕吏) 토관(土官) 서리(胥吏), ․일반피지배계층(良人 庶民): 농민 수공업자 상인 기타직종사자,

  ․최하 피지배계층(奴婢): 공사노비(公私奴婢) 재인(才人) 백정(白丁) 무격(巫 覡) 점복인(占卜人) 기타 천업(賤業)종사자)

에서와 같이 정해져 있거나, 또는 돈으로 매매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상응하게 우대해 주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왕이나 왕비같이 살고싶은 분이라면, 여러분의 배우자를 왕비나 왕같이 우대하고 섬기며 살게되면 자연스럽게 여러분 자신도, 왕이나 왕비가 스스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우대와 섬김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다 같은 정도라야 하는 것은 물론일 것입니다.

  반면에 여러분 자신은 우아하게 귀족같이 살면서 여러분의 배우자는 상것같이 천(賤)하게 여긴다면, 여러분의 신분도 반드시 상것이 되고 천하게 추락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만물과 만사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 수평상태가 이루어지듯이, 왕은 왕비와 같이 살아야 온전한 왕이 되는 법이지, 왕이 천한 신분과 함께 살아서야 온전한 왕이 될 수 없으며, 그렇다면 겨우 평민으로나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닮는다’는 옛말도 있듯이 왕비는 인격적으로 왕을 닮으려 할 것이고, 반면에 상것들은 배우자의 천한 행동에 익숙해져 갈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1980년 중반 무렵에 이런 이야기를 듣고 참으로 한심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즉 어떤 사람(그 얼마 후에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게 되었지만)이 결혼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지는 정확한 이야기는 못 들은 상태에서 무슨 논쟁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양가의 남녀는 결혼을 하기로 약속하고 그 결혼직전에 생긴 문제였기에, 그 결혼에 크게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나 봅니다. 하지만 예비신랑이 생각하기에는 예비신부 댁이 보잘것없는 상것으로 보였는지, 어쩌고저쩌고 입씨름을 하다가 당시 서설 퍼런 ○○○에 근무하든 친척형의 힘을 빌려, ‘찍소리 못하게 짓밟아 두었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 예비신랑은 자신의 가문이 배후(빽 背後)가 든든하고 소위 뼈대있는 집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며, 자신의 예비신부 댁은 보잘것없이 찍소리도 못하는 가문이라고 생각했다는 말도 되겠습니다. 필자가 보기엔 이 혼사는 인격적으로는 궁합부터 맞지 않는 혼사였지만 자기과신에 열을 올리고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부부는 동급이라 했으니, 그 신부는 신랑과 같이 배후가 든든하고 뼈대있는 가문의 안주인이 되었겠느냐? 하는 것인데, 이 경우에는 신랑이 신부에게 배후가 든든하고 뼈대있는 가문의 안주인으로 만들어 주어야만, 동급이 되는 것이지 신부의 노력만으로는 영원히 동급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가정의 주변에서는 신랑 또한 보잘것없이 찍소리도 못하는 여자의 신랑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이치는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에게 평등을 주어야지 힘없는 자가 힘있는 자에게 줄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냉대와 멸시만 되돌아 올 뿐이겠지요.

  수년 전에 방영된 어느 드라마의 줄거리를 소개하겠습니다. ○○○집 막내딸과 연애중인 총각의 이야기인데 극중의 처녀는, 결혼이라는 인륜지 대사를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여자가 결혼하면 자신의 경제활동과 취미생활도 못하게 될 뿐 아니라, 아이 낳아 키우고 집안 청소와 빨래하고 소위 가사노동에만 종사해야 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자신이 희생하면서 사서 고생을 하겠느냐?는 주장이었고, 극중의 총각은 그런 처녀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은 마음에, 결혼만 해주면 여왕같이 살게 해 주겠다는 등의 감언이설(?)로, 처녀의 마음을 돌리기에 열중이었습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 없다’든가 ‘지성이면 감천’이라든가 헤아릴 수 없는 우여곡절 끝에, 처녀는 총각의 감언이설을 굳게 믿어 여왕같이 살게 될 것으로 확신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무엇인가에 씌웠는지, 더디어 청혼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단 결혼 후 청혼 공약이 틀리면 그 즉시 헤어진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습니다.

  한편 친정댁 가족들은 평소 딸(처녀)의 성격과 언동으로 보아 자신의 가문에서 처녀귀신이 나오게 되었다며, 전전긍긍하든 중인지라 결혼 합의 소식에 쌍수를 들고 대 환영을 하며 그렇게도 완강하든 딸의 마음을 돌려놓게 한, 총각(사위)이 얼마나 고맙고 대견했는지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딸에게 결혼하고 나면 결혼 전에 한 말과는 달리,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잘 살아라’고 걱정반 충고반으로 타이르기도 하면서, 결혼식은 거행되었고 신혼여행도 다녀오면서 새 신랑 신부는 친정 집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친정댁 가족들은 딸의 성격으로 보아 마음 놓을 수 없어, 안절부절못하며 어떻게든지 딸 내외가 백년해로하기만을 바라며, 딸과 사위의 눈치만 살피면서도 이윽고 저녁식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식사 도중에 사위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예비동작을 본 새색시가 ‘무엇 하려느냐?’고 물으니, ‘물이 먹고 싶어서…’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새색시는 신랑이 일어서려는 것을 제지하며, 스스로 물을 떠오는 것이었습니다. 저녁식사를 하든 가족들은 신부의 평소 언행으로는 상상도 못했든 광경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모두가 깜짝 놀라며, 여왕같이 살겠다든 딸이 물시중을 하는 것을 보고 의아해 하면서, ‘여왕마마께서 어떻게 물시중을 다 하게 되었느냐?’고 묻자 딸은, ‘나를 여왕같이 대우해주는 우리 신랑이 나를 버리고 떠나버리기라도 한다면, 나는 영영 여왕노릇도 못할 테니 그 정도의 물시중은 당연히 내가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제 서야 가족들은 깊은 한숨을 내몰아 쉬며 안심하는 것이었습니다.

  부부가 동급이고 평등하기 위해서는 또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정에서의 자동차 운전은 거의가 남편 몫으로 행하여지고 있습니다. 가까운 거리의 나들이를 할 때나 멀게는 여름철 바캉스를 떠나거나 또는 명절 때, 고향방문 등을 비롯해 거리와 시간에 관계없이 출발지에서부터 도착지에 이르기까지 초지일관, 운전대를 잡고 더위와 긴장으로 파김치가 된다고 합니다. 이럴 때 그들의 아내는 아이를 안고 또는 옆 좌석에 앉아 졸음이 오면 졸고, 잠이 깨면 조잘거리다가도 때로는 짜증과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지요?

  아마 청혼 할 때부터 그들은 운전을 전담하는 큰 머슴이 되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았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아니 능력의 한계까지는 아니더라도 남편의 그런 파김치가 아내의 눈에는 어떻게 비쳐지는지 궁금합니다. 각 가정마다 상이한 환경과 여건 속에서 남편과 똑 같이 운전대를 교대로 잡아야 한다는 강요는 아닙니다. 설사 강요를 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 문제는 누구의 요구나 권유보다는 아내스스로가 결정하고 노력해서 실천해야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한 가정의 안주인으로서 또는 사랑하는 남편의 반려자로서, 장시간의 긴장으로 파김치가 되는 여러분의 남편을 위해 아내여러분이 스스로, 자동차운전 교습을 마치고 잠깐씩이라도 운전 교대를 할 의향은 없습니까? 아마 모르긴 해도 그런 광경을 지켜보게 되는 이웃의 수많은 사람들은, 얼마나 부러워하고 마음속으로 흠모하게 될 것이며, ‘사랑한다’는 백 번의 말보다는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는 그 모습에 가슴 찡한 애정을 느끼면서 또한 마음속으로 축복해 줄 것입니다. 그렇기에 부부는 동급으로 살아야하고 평등해야하며 같은 수준으로 즉 인격적으로 한 쪽이 부족하다면 채워서 억지로라도 동급으로 만들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가정폭력의 문제도 같은 범주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가정폭력이란, 가족구성원 내에서 발생하는 폭력행사의 일체를 말하는데, 주체는 남녀 불문이나 객체에 있어서도 남녀노소를 불문합니다. 가정폭력 또한 옛날에는 주로 남편이 힘없는 아내를 대상으로 많이 발생하든 것이, 최근에 와서는 아내가 힘없는 남편을 대상으로 폭력이 빈발하고 있기도 하답니다. 따라서 주체와 객체가 누구인가는 불문하고 가정폭력이 발생하는 것도 부부는 동급(同級 平等)이라는 의식의 대 전환 없이는 예방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가정폭력문제도 새롭게 부각되는 사회문제중의 하나입니다. 지금까지 이런 사례가 없어서가 아니라, 대부분의 피해자가 옛날과는 달리 강력하게 문제제기를 하므로 서, 새롭게 부각된다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가정폭력의 경우 피해자의 한결같은 이야기는 맨 처음 폭행을 당하였을 때, 다시는 ‘안 그르겠다’는 가해자의 말을 찰떡같이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창피해서 누구에게 이야기 할 수도 없더라는 것이었지요. 하긴 그럴 만도 할거라는 생각입니다.

  부부간의 가정폭력이라는 사실이 밖으로 알려질 경우, 양 당사자 자신들에게 ‘망신’이라는 마음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망신이라는 생각 때문에 신고나 주변에 알려지는 것이 싫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지요. 필자 또한 이러한 망신 설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아기자기하며 행복하게 잘 살아가는 대다수의 부부들에게는 망신스럽고 창피하기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가정폭력의 피해를 당하고 있는 피해자 여러분! 비록 망신스럽기도 하겠지만, 지금부터라도 계속해서 피해를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반드시 필요한 법적 조치를 강구하라고 권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 법적 조치를 구하기 전에 피해사실을 제일먼저, 자녀에게 알리고 다음은 상대방(가해자)의 가족에게 알리고, 그 다음은 피해자인 자신의 가족에게 알리는 순서로 외부에 들쳐 내야 합니다.

아울러 배우자의 도박 때문에 애태우는 경우에도 위와 같이 들쳐야 하겠지만, 도박은 쉽사리 근절되지 않는 경우도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면피한 가면을 하나하나 벗겨 개과천선의 기회를 주어야 할 것이며, 그것도 아니다 싶으면 그때는 법적 심판을 청구하기 바랍니다. 부부는 동급이고 평등하기 위해서는 폭력만은 반드시 없애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정폭력과 유사한 사례는 또 있습니다. 배우자의 불륜(외도) 즉 바람을 피우는 경우에도 당사자로서는, 처음에는 딱 잡아떼고 오리발을 내밀 것이며 오히려 적반하장(賊反荷杖: 도둑이 되레 매를 든다는 뜻으로, ‘잘못한 사람이 도리어 잘한 사람을 나무라는 경우’를 이르는 말)으로 생사람 잡는다고 항변 할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격언이 틀리지 않는다면 흔적도 남게되는 것이 인간사의 진리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실직고하게 될 것이고, 아이들을 생각해서 깨끗이 청산하는 쪽으로 의견 접근도 이루어 질 수도 있을 것인데, 여기까지는 수많은 가정사중의 한 토막이라 자위하며, 심기일전하여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할까, 더럽고 치사한 것이 정(情)이라 하였던가? 깨끗한 청산으로 의견 접근이 안되거나, 약속이 이행되지 않는 경우 등도 많더라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혼자만 속을 썩여봐야 ‘나!’만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입니다. 이때부터는 순차적으로, 불륜 당사자의 형제자매에게 그 다음은 당사자의 부모에게 알려 방도를 강구하게 하고, 그래도 청산이나 정리는커녕 불륜이 계속될 경우 마지막으로 자녀들에게도 알리므로 서, 최종적인 정리를 준비하여야 합니다. 이 경우 가정폭력에서와는 달리 자녀들에게는 최종적으로 나중에 알리므로 서, 최후의 한 가닥 희망의 여지를 남겨두고자 하는 소망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부터 피해자인 자신의 형제자매 또는 부모와 함께 최종적인 법적 정리 절차를 준비하는 것은 어떨는지요?

 

    나. 부모를 이기는 자식(子息)들?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마누라와 자식은 내 마음 되로 할 수 없다는 말의 한 부분이기는 하나, 가정사 모두가 정상적으로 유지되어온 가풍이나 내력이 있는 집안에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가정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 같이 보이기는 하지만, 이외로 순탄하지 못한 가정들도 많더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가정에서도 원인 없는 결과가 있을까(?) 만은, 그 이유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을 줄 압니다. 그러니까 자식들로 인한 부부간의 갈등과 경제적인 문제로 인한 부부간의 갈등 끝에는, 반드시 부부 중 누군가는 포기하게 되는 것이 비정상적인 가정에서는 필수적으로, 따라다니는 가정사라고도 생각됩니다.

  부모가 자식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부모자신들이 자식에게 수범을 보여주지 못해서 그런 결과가 생긴 경우도 있을 것이며, 또 부부간의 갈등의 여파가 그 자식들에게 어떤 영향을 준 경우도 있을 것이며, 어릴 때부터 적절한 가정교육의 부재가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부모가 자식을 이기지 못하는 유형(類型)들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나, 우선 학업 문제를 비롯하여 장래문제도 해당될 수 있을 것이고 그들의 혼사문제 또한 만만치 않은 것들은 생각보다 수없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필자는 직업과 관련하여 많은 계층의 많은 사람들과 대화하였다고 한 바와 같이, 집집마다 문제없는 가정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천석(千石)꾼 집안에는 천(千)가지 걱정과 만석(萬石)꾼 집안에는 만(萬)가지의 시름이 있다’는 말과 같이, 겉보기와는 달리 편안해 보이는 가정은 생각보다 적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우리들 주변에서도 많이 보고 듣는, 이야기중의 하나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봐 주길 바랄 뿐입니다. 그 중에서도 몇 가정의 내부사정을 들여다보겠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들 주변에는 흔한 일이 되고 말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되고 말았을까? 또 ‘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렇다면, 지금은 어떻게 달리 방도가 없는 것일까?’등 수없이 사색에 빠져도 보고, 고심도 해 보았지만 특별한 대안은 있을 수 없더라는 결론이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무법천지와 같이 다 흐트러져버린 가정의 질서를 바로 잡는다는 것이, 민주적이고 비 물리력에 의한 방법으로는 도저히 가망 없는 상태이며, 죽기 살기로 비민주적인 물리력으로 질서를 회복하려다보면, 부모자식간의 인륜에도 어긋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말귀를 알아듣고 따라와 주기라도 한다면 걱정할 것 없겠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가장으로서의 권위마저 무너져버린 마당에, 필시 우이독경(牛耳讀經: 쇠귀에 경 읽기라는 뜻으로 ‘아무리 가르치고 일러주어도 알아듣지 못함’을 이르는 말)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부부 중 어느 한사람의 책임이라고만 할 수 없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자기합리화와 갖가지 변명이나 얼토당토 않는 논설만 늘여놓게 될 것이고, 애초부터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는 가장 평범한 진리도 몰랐다는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문제들을 하나씩 짚어보고 이와 같은, 전철을 피할 수 있는 교훈으로 남겨지기 바랄 뿐입니다.

 

  먼저 학업문제에 대해서는 앞의 어느 부분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특별히 공부에 취미가 없는 자식들은 부모를 닮았거나 닮지 않았거나, 상관없이 책과는 멀어지게 되나 봅니다. 어느 댁 가장은 평소에 집에라고는 몇 일에 한번씩 들어오는 편이었는데 그때마다, 자식들의 학업진도를 챙기다보면 야단도 치게되고 꾸중도 많았겠지요? 그렇다고 그 댁의 가장이 외도를 하거나 나쁜 짓을 하느라고 그렇게된 것이 아닌 줄은, 가족모두가 알고는 있었지만 그런 문제는 별개였고, 자식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몇 일에 한번씩 야단맞는 것쯤은 아랑곳하지도 않았고 ‘세월이 좀 먹느냐?’는 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 댁 안주인은 남편의 의도와 자식들의 장래를 생각해서라도, 자식들의 학업진도를 조금씩 챙겨 줄만도 하였지만, 오히려 남에게는 없는 자식 둔 것으로 착각하였는지 아니면, 하늘아래 둘도 없는 자식이라는 생각에서인지 나무라고 꾸중하는 남편에게, ‘애들 그만 잡으라!’는 식으로 분위기를 흐려놓기가 일쑤이니, 그 댁 가장은 안주인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다가 지치고 급기야는 부부싸움까지 발전하자 ‘그래 아이들 문제로 더 이상 싸우지 말자’하고는 그만 두 손 바짝 쳐들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 댁 가장은 다소 봉건적이라고 할까 보수적인 색채가 농후한 것으로 보였지만, 그 댁내에서는 그런 남편 그런 아비가, 시대에 뒤떨어지고 별 볼일 없는 보통사람에도 못 끼이는 한심한 인간일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조금은 있었던지, 아이들 용돈문제도 남편과는 다른 생각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이런 일로 집에 들어 올 때마다 큰소리가 담을 넘게되고, 심지어는 싸우기까지 하게 되니 듣기 좋은 노래 소리도 한 두 번이라고, 이들 중 누군가는 져주고 말아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이 몇 마디 이야기로 그 당시 그 댁의 분위기를 다 전달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지만, 그 댁 남편은 집에 들어올 때마다 반복되는 일상사에 지쳐 어이없이 두 손 바짝 쳐들고 말았다는 군 요! 그런 결과는 너무도 뻔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그 댁 자식들은 아비는 이미 포기한 상태이니 제켜두고, 어미의 여망에도 아랑곳없이 별로 학교다운 학교에는 갈 수도 없었으며, 공부는 하기 싫고 놀기 좋아하는 아이들이 많은 학교에서 논다니들과 어울리면서 늘 생활에 쪼들리는 별 볼일 없는 자신의 부모와는 달리, 소위 노는 법을 배웠는지 직장이라고 다닌답시고 월급한푼 구경도 안 시켜주더니, 요즘 한창 유행하고있는 카드 빚 2000여 만원까지 부모가 대신 갚아주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가정의 경제사정이 썩 좋은 것도 아닌 것이었습니다. 용돈문제 때는 여유가 있는 것처럼 비쳐졌지만 중․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용돈이라야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결국은 어릴 때부터, 용돈관리의 요령도 못 배운 상태에서 필요한 용돈은 제때에 주었으니 돈 궁(窮)한 줄도 몰랐고, 그렇다고 남들처럼 아르바이트라도 어렵게 고생하여 돈을 벌어 보았더라면, 돈에 대한 사회적 가치를 알만도 하였겠지만 몇 번 다니는 듯 마는 듯 하였으니, 돈 알기를 우습게 알게 되었을 것이며 어린 시절 가정에서 적절한 배움도 없었으니,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놈의 직장은 왜 그렇게 자주 옮기는지 어떤 때는 입사 시험준비를 하는가하면, 얼마 후에는 팽겨치고 또 직장이랍시고 다닌다면서 이렇게 들죽날죽 한다니, 보나마나 ‘월급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소위 시험준비기간에는 머리라도 빡빡깍고 방안에 틀어박혀 공부라도 열심히 하였다면, 남들의 눈에 백수(白手乾達)로 보이지 않았을 덴데 그 모양이 남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는지, 여기저기서 심부름만 맡아온다면서 지금은 아주 ‘보수 없는 심부름센터’라는 것입니다.

  이때도 하루속히 마음 정한 되로 한가지 일에 증진하기를 당부해 보았지만, 이미 부모 말은 귓전에도 안 들어가는 모양이니 어쩔 도리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참 편하게 산다고 느낀다는 군 요. 그러다 훗날 본격적으로 고생문에 들어서게 되면 그때는 부모 탓, 조상 탓으로 끝이 없을 테지요.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빈손으로 왔기 때문에, 갖고싶은 것만큼은 반드시 노력(고생)을 해서 얻어져야하는 것인데, 부모 눈치만 살핀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기야 얼마나 많은 재산인지 모르겠지만 또 그런 상태에서 재산 물려줘 봐야, 물려받은 재산 제대로 지키지도 못할 것입니다.

 

  또 자식들의 혼사문제도 부모에게는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결혼이란 한 인간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대사인지 말 할 필요도 없이 ‘인륜지 대사’라는 말도 있고, 또 ‘바닷가의 모래알 같이 수많은 청춘남녀 중에서 단(單)하나만 선택하고 나머지 전부를 미련 없이 그리고 영원히 포기하는 것과 같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니 결혼의 당사자가 자신의 배우자를 잘 만나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을 테지요. 그런데 그 배우자가 ‘왜? 하필이면’ 부모의 마음에는 안 드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모입장에서 보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세상사를 보고 듣고 느끼고 또, 사회생활에서 쌓인 경험과 예감이라 할 선입감이 있어 다른 이야기를 하게되면, 같이 살아갈 사람은 ‘엄마 아빠가 아닌 바로 나!’ 라며 빡빡 우겨 되는 것을 보고 있으려면,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서로 사랑하기 때문! 이라고 강변하는 데는 더 이상 말할 필요조차 없어지고 말게 되지요. 그들의 눈에는 이미 콩깍지가 끼어 심할 때는 자신을 낳아 그때까지 키워준, 부모는 안중에도 없어지게 되고 오히려 ‘부모와 의절하더라도, 헤어질 수 없다!’거나 또는 ‘자식으로 생각지도 말라!’는 등 부모가슴에, 못질을 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어 왔다는 사실도 많이 알려져 있을 것입니다.

마치, 격전장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비굴하게 물러서지 않는 용감무쌍한 전투 병처럼 용기백배한,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한껏 뽐내며 안하무인의 독불장군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쯤 되면 이미 콩깍지가 끼인 그들 사이에, 조그만 하게 비친 그들의 성격차이나 개성의 차이도 훌륭히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 할 것이고, 더군다나 '애인을 얻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의 아주 이상한 행동도, 다른 이유로 했더라면 분명 가혹한 비난을 받았을 행동을, 관용할 뿐 아니라 심지어 찬양하기도 한다'(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는 주장처럼, 다소의 심술이나 상식에 어긋난 행동도 독특한 개성 때문이라고 자위하면서, 자신들의 선택이 탁월했음을 자신하고 있을 것입니다.

  결국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경제적으로 부유할 때나 빈궁할 때나, 검은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서로를 이해하고 아껴 줄 사람은 바로 ‘이 사람! 단(單) 한사람!’ 뿐이라고 항변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역경과 시련과 각오로 연애 결혼한 부부들은 결혼식장에 모인 수많은 하객 앞에서 언약한, 혼인선서를 끝까지 지키면서 이혼이라는 사례는 일절 없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상대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중매 결혼한 부부보다는,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부유할 때나 곤궁할 때나, 서로를 이해하고 아끼며 검은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백년해로하며, ‘이혼’이라는 낱말은 그들의 사전에는 없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 또한, 너무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더욱이 그것이 남녀간의 사랑이라면…

  또한 결혼식이란 축하 받기 위한 의미도 있을 것이나, 신랑신부는 말할 것도 없이 양가간의 약속인 동시에, 예식장에 모인 하객들은 두 사람의 결혼식이 자유롭고 평온한 가운데서 거행되는 전 과정을 지켜보았다는 증인의 의미도 있을 것이며, 하객들에게는 공개적인 동의를 구하는 동시에 광고의 의미와 계속해서 끝까지 지켜봐 달라는, 자신만만함을 과시하는 의미도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수많은 하객들 앞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이혼을 계획하는 부부여러분! 이혼을 하려면 당시의 하객모두에게 동의를 구하는 동시에 광고도 반드시 해야하지 않을까요?

  어느 댁에서는 결혼 적령기를 훨씬 넘긴 막내딸이 자신의 결혼상대라면서 데려온 총각은, 그 나이까지 소위 ‘사’ 자(字)항렬의 직업을 갖기 위해 공부중이라면서 결혼을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말로는 허락해 달라고 하였지만 사실은 통지 형식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댁의 부모는 앞으로 수년간 자신의 딸이, 시댁의 살림을 도맡아 꾸려야할 결혼을 승낙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딸은 일방적으로 부모허락 없이도 결혼할 수 있는 나이가 넘었으니, 설사 ‘승낙하지 않아도 결혼하겠다!’는 배수의 진을 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 댁은 주위에서도 소위 뼈대있는 집안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딸의 혼사로 인하여 구설수에 휩싸이는 것이 싫어, ‘울며 겨자 먹는다’는 식으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순순히 백기를 들고 말았든 것입니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공무원으로 재직중인 아내의 급여로 막중한 시댁의 살림을 도맡아 꾸려가면서도, 비교적 다른 소리내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사가 공평한 것인지, 아니면 호사다마라고 해야 옳은지는 분간이 쉽지 않지만, ‘사 자(字)도 사 자’ 나름이라고 그 댁의 사위가 얻고자하는 사 자(字)는 무슨 사 자인지, 결코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었든 모양입니다.

  결국 그 ‘사’ 자는 영영 멀어져 포기하고 심리적인 안정을 찾는답시고, 백수생활도 상당기간 지속하다가 나중에는 나이가 들어 웬만한 직장은, 눈에도 차지 않게 되고 차일피일 일자리를 구하려는 의욕이 떨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주변에서도 흔한 일은 아니지만 가끔 아내의 수입이 있으면, 그 남편은 직장생활에 태만해지기도하고 또는 예전과는 달리, 경제적인 씀씀이도 일방적인 낭비가 심해지더라는 예에서와 같이 그 남편도 직장을 구하려는 열의가 다소 식어가더라는 것입니다.

  그 남편은 신세타령 조상 탓으로 한동안 세월을 보내면서 직장 구하는 일에는 소홀하였든 모양입니다. 그럴 즈음, 친정댁부모는 결혼 승낙 운운하며 처음으로 집에 왔을 때부터 과감하게 두부 모 자르듯, 완강하게 말렸어야 했을 것을 그놈의 집안망신 어쩌고저쩌고하며, 미뤄둔 결과가 이렇게 되었다고 후회하며 한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 모르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부모자식간의 갈등이 있는 가정의 부모님 여러분!

위와 같은 경우, 그 딸의 부모 말같이 사회생활의 경험과 직감으로 딸의 혼사를 반대한다고, 순순히 물러설 자식들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마치 자신들의 의지와 사랑을 시험 당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양, 결혼 반대의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자신들의 결혼의지도, 비례해서 강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결혼 반대의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부모자식간의 천륜마저 파괴되는 것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필자 또한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끼리 싸우며 다투고, 여러 가지 사연과 갈등의 이야기를 직접 보기도 듣기도 하였지만, 이런 경우 부모가 자식을 이겼다는 이야기는 한두 번 들은 적이 있을 뿐입니다. 아! 이것이 어찌 이기고 지고 하는 게임이겠습니까? 만은, 부모의 의향을 따른 자식들은 생각보다 적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더 이상 반대하지도 말고, 아무쪼록 잘 살기만을 바라는 마음가지기 바라며 모든 것이 운명이거늘 생각하십시오. 위 예(例)의 이야기는, 이미 십 수년이 지났으니 지금쯤은 어떻게 상황들이 바뀌어졌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중요한 것은 인생사 모두에는 연습이 없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운명이라면…

 

    다. 인간사랑과 동물사랑

  1945년 8월 15일 일본군국주의의 무조건 항복에 의해 식민지상태에서 해방된 우리나라는, 좌우익의 갈등 속에서 미처 정신을 차리기 전인 1950년 6월 25일, 북한공산집단의 남침으로 민족상잔의 참화를 견뎌내고, 신생민주주의의 혼란에서 헤메다가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말미암아 먹고사는 문제에서 해방되면서부터, 우리주변의 가정에서는 소위 애완동물을 사육하는 사례들이 많아졌습니다. 애완동물도, 단순히 고양이나 강아지에서 시작한 것이 이제는 맹수는 물론이고 악어와 멧돼지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도 다양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필자주제에 남이야 애완 동물을 키우건 말건 상관할 바 아닌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다시 한번 분명하게 확인합니다.

  그렇지만 한마디 덧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되새겨보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기 어려운 대상은, 바로 자신의 원수(怨讐)라고 생각했든 것 같습니다. 하기야 2000여 년이라는 시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당시로서는 인간들조차 먹고살기 어려운 세상에 동물까지 먹이고 사육할 거라는 상상은, 감히 못했을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따라서, 동물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원수부터 사랑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 자신의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가족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할 것이고,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먼저 자신을 더욱 사랑할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대상의 순서를 정한다는 것 자체가, 필자의 월권으로 생각하면서도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위하는 차원에서 살펴보고자 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누구에게 아낌없는 가장 큰사랑을 베풀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보다 연인을 더 사랑한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적이고 감상적인 애정의 표현일 수는 있을 것이고, 또한 살신성인의 수범을 보이는 경우도 있을 것이나, 우리 같은 평범한 인간이라면 자신을 가장 사랑하고 그 다음은 가족을, 그 다음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순리일 것입니다. 그 사랑의 순도(純度)와 크기에 여유가 있다면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도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꼭 여유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요. 그 여유가 아니더라도 인간을 먼저 사랑하고 동물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나, 문제는 동물을 그렇게 사랑하려면 인간도 충분히 사랑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다시 한번 되돌아봅시다. 그런 애완동물에게 고귀한 사랑을 듬뿍 베풀 수 있는 사람이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자신을 비롯하여 가족(父母 兄弟 姉妹)에게 먼저 지극 정성의 순수한 사랑을 흠뻑 베풀고 나서, 그 다음으로 동물이나 식물에게 자신의 순수한 사랑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노부모나 형제에게는 봉양을 제대로 못하면서 자신이 마치 사랑의 전도사이기라도 하는 양, 애완동물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거짓사랑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사랑을 베푸는 대상에서 부모형제보다 개(犬)가 우선은 아닌지 다시 한번, 자성해 봐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즉 애완동물에게 베푸는 거짓사랑의 사례로는, 그 동물들이 병들거나 다치면 밖에 갔다버리는 일은 비일비재한 실정이며, 늙고 병든 노부모를 버리거나 학대하는 인간도 없지 않다는 사실은 가끔씩 보도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니 꼭 애완동물을 사육하는 사람이, 자신의 노부모를 버리거나 학대한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노부모가 생존해 계시면서 애완동물을 사육하는 사람들께서는 노부모와 애완동물 중 어느 쪽에, 당신과 당신의 가족들이 그 지고지순한 사랑을 충분히 베풀고 있는지 스스로 자문(自問)해 보기바랍니다.

 

  혹자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외출했다가 집으로 들어올 때면, 어떤 인간이 그렇게 ‘반갑게 맞아 주더냐?’며, 자신이 사육하고 있는 애견을 자랑하기도 한답디다. 그렇다면, 그 애견은 그것(반갑게 맞아주는 행위)도 못하면 누가 돈 들여 키우고 사육하겠습니까? 그 애견은, 자신을 돌봐주고 키워주는 사람 누구에게나 반갑게 맞이해야 하는 것이, 자신(犬)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애완견이나 애완동물을 사육하는 사람은 정(情)이 풍부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인정(人情)이 메말라서 그렇다’ 하고는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특히 애완견을 업고, 안고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기르는 애완견더러,

  “우리 막내(둥이)”

라거나, 혹은

  “우리 가족!”

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어떤 젊은 아낙은,

  “엄마가 거기 들어가지 말랬지”

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깜짝 놀랄 수밖에... ‘막내(둥이)?’ 그리고 ‘가족’ ‘…의 엄마’라고? 대단하십니다. 외출했다가 귀가할 때 아무리 반갑게 맞아주고 사랑스러운 재롱으로 귀엽다 하더라도, 개는 개(犬)일뿐이지 결코 막내나 가족은 될 수 없는 짐승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막내(막내둥이: 형제자매 중에서 맨 마지막으로 태어난 사람)나 가족(家族: 어버이와 자식, 형제자매, 부부 등과 같이 혈연과 혼인 관계 등으로 한집안을 이룬 사람들의 집단) 그리고 ‘…의 엄마’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 또는 배우자의 부모들에게 얼마나 큰사랑을 베푸는지 궁금할 뿐입니다. 여기서(인간사랑과 동물사랑)의 문제는, 가족이라는 범위 내에서 ‘자신을 포함하여 배우자 및 직계비속 이외의 인간(직계존족)에게는 인정(人情)이 메마르고, 애완견이나 애완동물에게만은 정(情)이 풍부한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애완견이나 애완동물을 사육하는 사람은, 자신을 포함하여 배우자와 부모 그리고 자녀 등 가족을 더 많이 혹은 최소한 동등하게라도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구성요소 최소단위인 가정의 구성원인 일촌(一村)의 범위 내로 한정하였지만, 부모와 자녀의 경우는 같은 가정내에서 생활여부에 관계없으나, 대부분 분가하였을 이촌(二村)인 형제자매는 제외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동거 및 별거와는 상관없이 일촌(一村)인 부모와 자녀에 대하여, 자신이 사육하는 애완견이나 애완동물보다 관심을 덜 가지거나 외면한다면 이는 곧, 천륜(天倫: 부모와의 사이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과 인륜(人倫: 자식과의 사이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에 반하는 패륜적 행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완견이나 애완동물보다는 최소한 일촌 이내의 가족을 훨씬 더 넓고 깊게(많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되는 것은, 세상에 어떤 사람이 부모와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며 또, 애완견이나 애완동물보다 부모와 자식을 더 넓고 깊게(많이)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 하면서, 누구나 항변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논쟁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말(言)로는 너무나도 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맞는 말이겠지만 안타깝게도, 사람(가족)에게 베푸는 사랑과 동물에게 베푸는 사랑 모두가 그렇게도 중후장대한 것인지를, 누구나 판단 할 수 있는 척도가 없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누구든지, 동물에게 베푸는 사랑보다 사람에게 베푸는 사랑이 보다 훨씬 더 중후장대(重厚長大)함을 항변하려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할 것입니다.

 

   

by 다사치 | 2009/07/20 07:19 | 애가(愛家) | 트랙백 | 덧글(0)

애기(愛己)

                1. 애기(愛己): 수신(修身)

  가. 돈! 만악지 원인.

    (1) 돈에 대한 만인의 공통점.

    (2) 돈, 그 개체 각각의 여정.

    (3) 돈이 주는 교훈.

      (가) 배곯은 설음.

      (나) 나도 죽어야 할 텐데.

      (다) 갈등 부른 마음고생.

      (라) 배꼽이 되어버린 내 집.

      (마) 설상가상이 된 우환과 손재수.

      (사) 회상의 뒤끝에서

  나. 제(諸) 잘난 맛에 산다.

  다. 젊어 고생.

  라. 후회하지 않는 삶.

  마. 신용사회의 적응.

 

  예수님은 ‘원수(怨讐)를 사랑하라!’고 하였답니다. 그것은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신을 비롯하여 가족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이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으려면, 원수이외의 모든 사람과 사물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가짐과 포용력, 그런 자질과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요? 자신을 비롯하여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사랑이며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정한 ‘참 사랑’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 어느 누구라도, 자신(肉體와 神體)을 가장 또 제일 크고 깊이 사랑하는 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랑보다도, 가장 원초적이고 기본적이며 지고지선의 사랑인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자신을 가장 사랑하고 그 다음은 누구를 사랑해야 할까요? 그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자신과 가까이에 있는 자신의 가족(父母와 妻子 그리고 兄弟姉妹)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 다음으로는 자신과 가까이에 있는 자신의 이웃(親舊․親姻戚․同僚․住民)을 사랑하는 것일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자신과 가까이에 있는 자신의 고장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 다음으로는 자신과 가까이에 있는 자신의 나라 그리고 천하(地球)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과의 관계에서 가장 가까운 대상에서부터 차차 그 범위를 한 단계씩 넓혀가며 사랑하라는 것일 것입니다. 따라서 활동기에서 이야기 할 순서에 대하여도 한동안 고심해 왔었는데, 그러고 보니 자신(己)사랑을 먼저 이야기하고 나서 가족(父母와 子息 그리고 兄弟姉妹)사랑, 그 다음은 이웃(親舊․親姻戚․同僚․住民)과 나라(國家)사랑, 마지막으로 천하(地球)사랑 순서로 전개하면 될 것 같군요.

  아울러 공자(孔子: BC 551~ BC 477)님 말씀 중에,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심신을 닦고 집안을 정제한 다음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한다)’라는 말이, 필자의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가급적 필자도 이(修身: 愛己, 齊家: 愛家, 治國: 愛國, 平天下: 愛天下)순서에 의하여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즉 ‘자신을 사랑하라!’ 여러분!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가장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가장 확실하게 사랑해야 할 대상은, 바로 ‘여러분 자신’ 즉 여러분의 육체(肉體)와 신체(本靈)라고 말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의 육체는, 그 사람 혼의 의복에 불과한 것입니다. 앞부분에서는 신체(魂․靈․神)이야기도 나왔지만 그 신체(神體)라는 것도 우리의 육체와는, 차원이라는 보이지 않는 장애로 인하여 느끼거나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신체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우선 여러분 자신(肉體)을 확실하게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기적인 행동으로 남으로부터 멸시받지 않게 하고 또한 남의 손가락질이나 지탄받지 않도록 수범을 보이므로 서, 남보다는 자랑스럽게 또 남보다는 훌륭하게 가꾸어 칭송과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을 정도의, 자기성찰을 의미하는 것이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갈고 닦는 수행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것은 곧 이타적인 마음자세를 가져야하며 탐욕과 허영을 버리고 밝은 눈과 맑은 마음을 가지려는 고행의 길, 자신의 원초적인 양심을 지키고 욕심(파란 색안경)을 버려 청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 즉, 수신의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밖에도 자신을 사랑하는 수단 방법은 무수히 많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것인가?’ 또는, 어떤 행동으로 인하여 ‘남으로부터 멸시를 받고 손가락질을 당하는가?’하는 각각의 유형 또한, 일일이 열거 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사실도 인정 할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 몇 가지의 경우라도 슬기롭게 대처하므로 서 남으로부터 멸시와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는 것 자체가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것일 거라는 것입니다.

 

  가. 돈(金錢)! 만악지 원인(萬惡之 原因)

  돈(金錢 또는 貨幣)의 수입과정과 지출과정은, 우리인간생활에 있어 수많은 행동 중에서도 수 만가지 선악(善惡)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돈으로 인하여 자신의 명예와 가정을 망치고 또한 이웃을 망치는 사례들은, 우리들 주변에 얼마든지 산재해 있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돈에 의해, 흥하기도 망하기도 또는 패가망신을 하는 경우도 우리는 심심찮게 접한 바도 있었습니다.

  『♬♩♬♪ 돈돈돈 돈에 돈돈 악마에 금전

원수로다 물결 같은 금전이로세 ․․․․․♬♩♬♪』

이 노랫말은 누가 언제 만들어서 얼마나 널리 불러졌는지 또 그 의미는 무엇을 뜻하는지 등 정확한 의미도 모르면서, 어린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불렀든 노래 한 토막으로, 당시에도 뒷부분의 가사는 모른 체 여기까지만 불렀든 기억이 납니다.

이 즈음에 와서야 그 의미를 생각해보면

  『♬♩♬♪ 돈돈돈 돈에 돈돈 악마(惡魔)에 금전(金錢)』‘세상을 살아 숨쉬고있는 모든 사람에게 한(恨)이 맺히도록, 존경받으며 누구나 탐내는 돈(金錢)은 다루기에 따라 악마(惡魔)와도 같아라’

  『원수(怨讐)로다 물결 같은 금전(金錢)이로세 ♬♩♬♪』‘어찌 어찌하여 내 손에 들어 왔어도 잠깐동안 머물렀다가 마치 내가 주인도 아니 되는 냥 나를 떠나 물결같이 흘러가니 허망할 따름이다’라는 정도의 뜻으로 돈의 실상을 노래로 표현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돈(金錢 貨幣)!’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금전(金錢)혹은 화폐(貨幣)를 ‘돈’이라고 읽고 표현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한글에서는 금전(화폐)을 돈이라고 읽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 말(돈)의 의미는 돈의 용도상으로 보나 돈이라는 물질의 기능과, 그의 일생을 살펴보더라도 돈(금전 화폐)은 ‘돌고 돈다’ 즉, 회전 또는 유통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금전(화폐)의 ‘한 개’는 영원히 ‘나의 것’일 수도 없고 또한 영원히 ‘나와 무관 할 수도 없는 것’으로, 금전(화폐) 자신은 일생을 사는 동안 사방 팔방으로 돌아다니다가(回轉 流通) 설혹, ‘내 손에 들어 왔다’ 하더라도 잠깐 머무르기만 하였을 뿐, 이내 나를 버리고 떠나 가버리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만금을 쥐었다고 영원히 내 것은 아니며, 잠깐 머물렀다가 다른 곳으로 밀물같이 빠져나가니 얼마나 야속하고 원수 같은, 애물단지였겠습니까? 그러니 너무 좋아하지도 말 것이며, 너무 박대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필자는 가끔씩 이긴 하지만, 돈에 관한 평소의 소신을 3가지로 밝힌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때와 장소 및 대상은 다르지만 말입니다.

  첫째. 돈에 대한 만인의 공통점은 모두가 좋아한다.

  둘째. 돈! 그 개체 각각의 여정은 제각기 다르다.

  셋째. 돈의 교훈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이상의 3가지 소신은 말 그대로이며 특별한 해설이나 설명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잠깐씩 덧붙이겠습니다.

 

    (1) 돈에 대한 만인의 공통점.

  누구나 좋아하고 탐내는 동시에, 아무리 많이 가져도 흡족 할 줄 모른다! 즉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은 돈(金錢)을 좋아하고, 또 생명이 유지되는 한 돈(金錢)은 꼭 필요하며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만족하거나 흡족해 하는 사람은 없더라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걸인도, 비록 동냥으로 얻어먹고 살아가더라도 돈이라면 좋아하고 또 필요로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돈에 관한 한, 누구나 좋아하고 탐내며 남보다는 많이 가졌으면서도 만족할 줄 모른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자로 살고 있는 사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옛말에, 아흔 아홉(99)석 부자는 한(1) 석을 더해 백(100) 석을 채우고 싶어 한다고 하듯이, 돈을 좋아하고 또 필요로 하는 인간적인 공통점으로 누구를 막론하고 꼭 같다는 것입니다. 근래에도 심심찮게 지상(紙上)을 장식하는 고위공직자의 수뢰혐의나, 재벌기업주들의 편법 상속으로 적발되는 사람들 모두도 한결 같이 돈을 좋아하기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인간 모두가 가진 욕심 때문이기도 할 것이며, 자신이나 가족들이 먹고살기 위해서는 훗날의 대비까지는 아니더라도, 반듯이 돈을 좋아하고 또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며 하물며, 사형확정 판결을 받은 사형수라고 그리고 임종을 눈앞에 둔 말기환자라고 돈을 박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비록 사형수나 임종을 눈앞에 둔 말기환자인 그들이 사형 또는 임종 전에 그 돈을 한 푼도 쓸 기회가 없을 경우라도 돈을 싫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고려 말, 최영(崔瑩: 1316년~1388년)장군은 왜구 토벌, 홍건적 격퇴 등의 공을 세운 명장이었다. 옛 고구려 땅 회복의 큰 뜻을 품고 요동 정벌에 나섰으나,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실패하였다. 충청도에서 농사를 붙이며 살아가든 부친의 가르침 중에,

  “너는 앞으로 관리가 되어도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고, 황금보기를 돌 같이하라!(見金如石)”

는 말을 평생동안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다.

  당시에는 바둑이 성행하여 대신들이 서로 돌아가며 초대하는 바둑모임이 열렸는데, 집주인이 성대한 잔치를 열어 초대 손님들을 접대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다 한번은 최고 권력자인 최영 장군의 집에서 바둑모임이 있었는데 점심때가 지나도 음식이 나오지 않아 모두 시장함을 느꼈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기다리던 음식상이 나왔으나, 진수성찬은커녕 거친 잡곡밥에 반찬은 나물 몇 가지뿐이었다. 바둑모임에 참석한 대신들은 어이가 없었지만 하루 종일 굶었기 때문에 모두들 맛있게 음식을 다 먹었다. 식사가 끝나자 장군은 웃으며,

  “거친 잡곡밥에 반찬도 없지만 배가 고플 때 먹으니 맛있지 않습니까?”

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또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도,

  “내가 살아오면서 한번이라도 사리사욕을 챙겼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요, 오직 나라와 겨레를 위해서만 일해 왔다면 내 무덤에 풀이 단 한 포기도 나지 않을 것”

이라고 유언같이 말한 뒤 장군의 무덤에는 정작 풀 한 포기도 나지 않자, 후세에 이르러 홍분(紅墳: 붉은 무덤)이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평생을 청렴결백하게 살았던 최영 장군다운 이야기라고 하겠다.

 

    (2) 돈! 그 개체 각각의 여정(旅程)

  다시 말해서 돈! 그 자체는 일생동안 돌아다녀야(流通)할 과정과 단계와 길(路)이 있는데, 이 과정과 단계와 길(路)을 어구 내고(지름길로) 내 손에 들어오면 반드시 마(惡魔)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돈! 그들의 공통점은 각 개체 하나 하나에게는 나름 되로 유통되어야 할 여정(여행경로)이 따로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은행에서 발행된 일련번호 개개의 돈은, 구체적이지는 않더라도 그 자신의 유통경로가 따로 있을 것입니다. 즉 한국은행의 정상적인 창구를 통해 시중으로 유통이 시작된 만원 권 지폐 (특정 일련번호) 2매 중,

  1매는, 어느 대기업 회장의 월 급여라는 유통과정을 거쳐, 대기업 회장의 지갑 속에 자리잡고 있다가 용돈 달라는 자식의 지갑으로 이동하고, 그 자식은 친구들과 약속된 파티에 참석하려고 아무데나 주차 시켜 두었다가, 단속권자에게 단속무마용으로 유통되었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나, 그 운전자는 내일쯤에는 몇 일 전에 받은 딱지 값(통고처분 과태료)를 내려고 생각하고 있든 중이었습니다.

  나머지 1매는, 시중은행의 금고 속에서 마침 명절을 맞아 고향의 부모님 용돈(신권)으로 교환되어, 어느 직장인의 지갑 속에서 부모님의 지갑으로 이동하고, 또 그 부모님은 자식 반찬거리 장만으로 시장 부근의 노점 생선장수에게 이동하여 대기하는데, 느닷없이 무슨 법 무슨 법을 들먹이며 나타난 단속권자에게 단속무마용으로 유통되었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나, 그 생선장수는 내일아침 어판장에 나가서 내일 팔아야 할 생선 값으로 지출하려고 생각하고 있든 중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경우 즉, 과태료나 생선 값으로 지불되어야 할(특정 일련번호의)돈! 그 자체는 일생동안 돌아다녀야 할 유통의 주체와 여행경로인 여정의 길을 어구 내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단속권자에게, 단속무마용으로 유통되어 지름길로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돈! 그 자신의 여정에는 흠(瑕疵)이 생겼으며 그 결과는 반드시 마(魔)가 따라 붙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태료나 생선 값으로 지불되었어야 할(특정 일련번호의)돈! 그 자체는 운전자나 생선장수 (네)돈이지 무마용으로 유통되어 단속권자의 손에 들어왔다고 단속권자(내)돈은 아닌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돈이 아닌 네 돈’을 탐내서는 안되며,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내 돈이나 잘 챙겨 알뜰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네 돈이냐?’ 혹은 ‘내 돈이냐?’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의 경우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도 가끔씩 지하철 개찰구에서 요금을 내지 않으려는 중년의 남자 또는 여자가, 개찰 봉 위를 훌쩍 뛰어 넘어가거나 또는 개찰 봉 밑을 기어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곤 하는데, 그때마다 저런 사람들이 시내버스를 이용할 때 동전 600원을 제대로 넣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또 한편 어떤 사람이 마을버스를 이용하면서 현금승차를 한다고 가정 해 봅시다. 천 원 권 지폐 한 장을 지불하면 운전자는 거스름돈을 700원을 주어야 하는데도 어떨 때는 800원을 주기도 할 경우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 자리에서 확인하는 경우가 없이 그냥 받아 주머니에 넣었는데, 어떤 경우 즉 동전 300원이 모자라(100원이나 200원이 있어)서 천 원 권 지폐를 넣었다가, 역시 언제나 처럼 거스름돈을 받았는데 나중에 우연히 알게되겠지요.

  이때 700원을 받아야 하는데 800원을 받았으니 나머지 100원은 (운전자)네 돈이냐? (승객)내 돈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100원을 더 거슬러준 운전자는 착오에 의한 것이므로 (승객)내 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돈은 되돌려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 돈을, ‘어쨌거나 내 손에 들어왔으니 내 돈이다’라고 생각하여 되돌려주지 않고 소비해 버린다면, 언젠가는 그 승객도 자신의 착오에 의하든 타인의 기망에 의하든 그 값어치 또는 그 이상의 금전적 피해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100원 권 동전이야기를 하였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천 원 권 또는 만원 권도 그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이러한 부당한 이익이 누적되었을 때 당하는 피해는 더욱 크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설사, 그 승객이 매사에 주도면밀하고 침착하여 자신의 착오나 타인의 기망을 당하지 않는다면, 밤거리 외진 곳에서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등 더 큰 화근이 될 수도 있지는 않을까요? 그렇다고 길거리에서 100원 짜리 동전이나 만원 권 지폐 하나를 줍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일 것입니다.

 

    (3) 돈이 주는 교훈.

  돈은 피(血)와 땀을 흘린 대가(代價)로 얻어져야하고, 또한 쓸(消費․支出)줄 알아야하며 반면에 무서운 줄도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이면 누구나 체험하고 체득해야 할 공통점으로, 돈은 가장 정상적인 방법에 의하여 얻어져야 하고 합리적으로 소비 할 줄도 알아야하며, 또한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교훈의 설명은, 필자의 자전적 이야기를 간단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가) 배곯은 설음.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첫 이레가 되기 전에 젖이 말라 만죽(물에 불린 쌀을 아버님이나 어머님이 씹어 양은그릇에 뱉고 그 생쌀 죽을 화로 불에 끊인 죽)과 밥물로 영유아(嬰乳兒)기를 연명해 온 가엾은 녀석, 또래들에 비해 체구는 적고 몸도 허약했지만 7살이 되든 1953년 04월 국민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당시에는 젖 대용식이라 할 만한 아무것도, 심지어는 우유도 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누구나 할 것 없이, 만죽과 밥물로 대신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인류를 포함하여, 이 세상의 모든 포유류 동물들은 반드시 초유(初乳: 생후 7일 이내에 나오는 젖)를 먹어야, 면역력이 생겨 일생 동안 웬만한 잔병치레도 안 한다는 것이 작금의 관련 학자들의 주장인데, 가엾게도 필자는 그 초유도 제대로 먹지 못했든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린 시절에는, 두부백선 그리고 피풍이라 일컬어지든 피부병과 함께 잔병치레도 많았으며, 비위가 약해 비린 냄새나는 생선도 못 먹었을 뿐 아니라, 조금만 색다른 음식(명절과 제사 때 떡)을 먹어도 체하거나 소화가 잘 안되어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주로 부산 등 객지에서 목수 일을 하시는 아버님과, 철마다 밭에서 가꾼 채소를 십리 밖 읍네 저자에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든 어머님 슬하에, 저희 3(5년 위의 형님과, 3년 아래의 누이동생)남매는 자랐습니다. 당시 기억으로, 대지 60여 평, 뒷간과 잿간이 붙은 헛간, 그리고 세 칸짜리 초가집, 밭 200여 평, 논 140여 평이 전 재산이었습니다.

  1959(13)년 03월 국민학교를 졸업한 필자 나이 또래는 누구나 다 그랬었겠지만 어린 시절은, 보리 고개가 맹위를 떨치든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국민학교를 졸업했으면, 곧이어 중학교에 진학했어야 하겠지만 몸이 너무 허약하다는 이유로 1년을 집에서 쉬고 말았습니다. 국민학교 졸업과 함께 남새밭에 거름(人糞) 주는 일은 시작되었고 아마, 3․15 선거(1960년 3월15일 제4대 정․부통령선거)때까지는 3칸짜리 초가집에서 살았으나, 화폐개혁(제3차 긴급통화조치: 1962년 6월 화폐단위를 환에서 원으로 개칭하며, 환가 비율을 10분의 1로 절하)이 있은 얼마 후에 기억으로는 대지 150여 평, 뒷간과 잿간이 붙은 헛간, 세칸짜리 아래채, 그리고 4칸짜리 윗채로 구성된 초가집으로 이사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아버님의 수입도 당시로서는 대단했든 것 같으며, 어머님의 주업인 농사수입도 한 몫을 담당했을 것입니다.

  말은 몸이 허약해 한해를 쉬었다지만, 실상은 꼬마 머슴이었던 1년이 지나고 더디어, 1960(14)년 04월 국민학교 1년 후배인 친구 2명과 함께 중학교에 입학(♩♭♬♩…검은 모자 흰 테두리 똑 달아 붙이고 ○○중학 다닌다고 꼬테 말아라…♩♭♬♩)하면서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중학교 3년 동안은 그야말로 꼬마 머슴이었습니다. 매주 일요일과 여름 겨울방학 때는 형님과 함께 망운산과 삼봉산 일대를 누비면서 땔감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수시로 남새밭에 거름 주는 일도 계속되었습니다. 원래 농사지을 땅이 얼마 안 되다 보니, 4식구의 양식과 해마다 초가집 이엉이나 땔감은 거의 아버님의 수입으로 구입해서 해결하였는데, 우리형제들의 성장과 함께 비록 많지는 않았어도 땔감을 조금씩이라도 자체조달 할 수 있었지요. 또한 남새밭의 거름 주는 일도 우리형제가 도맡았기 때문에 계절에 따라 채소를 재배해서 판매한 어머니의 농사수입으로는, 가용과 학비를 해결하다보니 조금씩의 여유도 생겼을 것입니다.

  그렇게 빈곤한 살림 속에서도 많이 굶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보리와 밀가루 그리고 고구마가 거의 주식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지금은 헐벗고 굶주려도, 훗날을 생각해서 우선은 배워야한다는 부모님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쥐뿔도 없는 주제에 학교는 무슨 학교냐?’는 비아냥거림을 받으면서도, 우리 3남매 모두는 고등학교를 졸업 할 수 있었으며 우리 이웃(近洞)에서는, 이 정도의 재산으로 고등학교는커녕 중학교도 보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 계속된 학창생활의 즐거웠든 추억이라 할 만한 기억은 거의 없이, 망운산과 삼봉산 일대를 누비면서 땔감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토요일은 남새밭에 거름 주는 일에 매달렸든 생활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연속이었습니다. 농사일은 완전히 어머님의 전업이었고, 농토가 얼마 되지 않아 주로 밭에서 채소를 가꾸어 거의 매일같이, 십리밖에 있는 읍(군청 소재지)네 아침 저자에 한 짐을 머리에 이고 내다 팔아봐야, 그게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우리 형제들의 성장과 때 마쳐, 내다 팔 채소가 많을 때는 새벽에 채소 한 짐 지고 저자에 내려놓고 집에 와서, 아침밥 먹고 다시 읍네 학교까지 다니는 생활이 6년 간 수시로 이어졌든 학창시절은, 이렇게 노동의 연속이었지만 불평한 기억은 별로 없었으며, ‘돈을 번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것인가?’ 하면서 한 푼이라도 헛된 곳에 쓴 기억도 없습니다.

세월은 시시각각 흘러 중학교 3학년이 되자 고등학교 진학여부가 대두되었는데, 그때 어머님의 결론으로는,

  “★★이는 장남이니까 고등학교까지는 나와야하고, ☆☆는 딸이고 막내니까 고등학교는 나와야 시집이라도 잘 가게 될 것 아니냐? 그러니 너까지 고등학교에 갈 형편은 아니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어머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어린 마음에도 가정형편에 비추어 고등학교 진학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고 생각되어, 고등학교진학은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요즘은 고등학교진학의 경우 추첨형식으로 배정하여 입학하지만, 당시에는 입학시험을 치르고 그 성적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진학할 학생은 일과 후 학교에 남아 과외공부도 하고 있었으나,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이상 남의 일일뿐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부모님은 수시로 틈만 나면(주로 저녁시간대) 공부할 것을 종용하곤 했지만, ‘고등학교도 안 보내 준다면서 공부는 해서 무엇 하겠느냐?’고 생각하며, 공부하는 것보다는 노는 시간이 많았고 가사도 열심히 도왔으며, 따라서 공부할 생각도 관심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1963년 1월(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중인 어느 날, 같은 동네 중학교 친구 2명이 집에 와서, 고등학교 ‘입학원서 넣으려 간다’며 고교진학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을 밖에서 들은 어머님은, 아마도 아버님과 의논을 한 것 같았습니다. 저녁식사를 마친 얼마 후, 부모님은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보니 서운한 마음이 있었든지)입학시험이나 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입학시험 날자가 며칠이나 남았다고 이제 와서 시험이나 보라니, 말이나 될 법 한 일입니까? 필자 또한 완강하게 거절했지만, 부모님의 줄기찬 성화에 두 손 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늦었지만 끝까지 열심히 준비하자는 마음으로 그때부터, 모든 일거리는 제쳐놓고 동아전과와 동아수련장을 구입하여 오직 입학시험 준비에만 몰두하다 결국 시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고등학교는 실업계인 농업고등학교였는데 축산과에는 남학생 60명, 농업과에는 남학생 30명과 여학생 30명 등, 계 120명을 선발하지만 필자는 축산과에 원서를 접수시키고 며칠 여 동안 열심히 공부했고, 시험은 자알 보았습니다. 예? ‘시험이 쉽더냐?’고요. 필자는 문제 각각의 글씨가 잘 보였고 문장의 글자도 모르는 자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안경 없이 신문도 볼 수 있으니 시력이야 좋지 않았겠습니까?

  필자는 1980년대 초반부터 시력이 좋지 않아, 피로감을 느끼는 등 노안(老眼)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수돗물에 눈을 씻기 시작하면서부터 나아지기 시작하더니 지금까지, 안경 없이 신문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일어주는 되로 세수할 때마다, 그리고 수시로 생각날 때마다 양손에 물을 받아 각각 두 눈에 대고 깜빡거리면, 때로는 이물감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안구를 찌르는 듯한 감각을 느끼기도 하는데, 약 20여 년을 실천한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당시로서는 다른 대안이 없었으니 믿고 따랐을 뿐입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 지금부터라도 수돗물에 눈을 씻어 보십시오. 밑져야 본전 아닙니까? 다만 눈을 씻을 때, 마음속으로(하느님 또는 부처님 그리고 조상신 등 자신이 믿든 안 믿든 호감 가는 神에게) 기원하면서 정성껏 하루 3번 이상 씻어보십시오. 반드시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험 잘 보았다는 것은, 시각적으로 문제지의 글 한자 한자는 잘 보이더라는 말입니다. 남의 사정이야 알 바 아니라는 듯, 무심하고 무정한 운명의 시간은 흘러 당사자의 심정과는 상관없이 합격자 발표 일이 다가왔는데, 함께 시험을 치른 친구 녀석의 성화에 못 이겨 억지로 따라 나섰지만, 결과는 낙방이었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시험에 떨어지고 보니 참으로 죽을 맛이었습니다. 특히 담임선생님은 남의 사정도 모르면서,

  “○○○이 너 이놈! 그렇게도 고등학교 가기가 싫었어?”

하면서, 꿀밤까지 주는 데는 창피하기도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정말로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엄감생심, 마치 요행이라도 바라듯 ‘괜히 시험을 봤다’고 자책만 할 뿐이었습니다. 얼마간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나서 그야말로 이제부터는 큰 머슴이 될 각오로, 양(兩) 산을 누비며 나무(땔감)하는데 온 정열을 쏟았습니다.

  963년 3월초 어느 날 저녁때, 고등학교입학시험에 합격한 친구 녀석이 필자와는 안부이야기만 하고 어머님과 몇 마디 속삭이듯 하는 것을 보았지만,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고 또한 나와 어떤 상관이 있을 것인지, 없을 것인지 신경 쓰이지도 않았습니다. 그 날 밤 부모님은 또 필자를 불러 앉혀놓고 문제의 속삭이듯 한 내용을 이야기하며 이제는 꼭! 고등학교를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입학시험에 낙방한 주제에, 창피하게 학교는 어떻게 가겠습니까?”

라며 예전보다 더욱 완강하게 거절하고,

  “동생이나 꼭 고등학교에 보내 주시다!”

하면서 거부하였지만 아버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일은 때(時)가 있는 법인데, 너는 지금 이 때(시기)를 놓치면 앞으로는 영원히 그 때가 안 올지도 모른다”

그러고는 계속해서,

  “말을 모는 마부가 말에게 물을 먹이려고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말이 스스로 먹지 않는 한, 억지로 마부가 말에게 물을 먹일 수는 없다”

는 말씀과 함께, 당신께서도 배우지 못해 간판(卒業狀)이 없기 때문에 설계도 되로 건축물을 지을 수는 있지만, 능력을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 한이 되어, 너희들에게는 좀 더 고생스럽더라도 고등학교 간판(卒業狀)만이라도 따게 해주고 싶다는 애절한 말씀에 자의반! 타의반! 아니, ‘울며 겨자 먹기’라고 했든가? 결국 1963(17)년 3월 그 농업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입학?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보궐입학이었지요.

 

     (나) 나도 죽어야 할 텐데.

  “… … ”

필자에게 있어 국민학교입학을 전후한 시기부터 적어도 이때까지는 공포분위기에 휩싸여 삶 자체가 무서웠습니다. 어렸을 적, 이런 분위기였다면 누군들 별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참 어렵고 힘들 땐, ‘아버지 어머니가 다 돌아가시면, 나도 죽어야지’하는 생각만으로 하루하루 생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나도 죽어야지’하는 것은 ‘꼭 죽어버리겠다’는 것 이라기보다는, ‘나도 아버지 어머니 따라, 죽어야 할 텐데…’ 라는 의미였습니다.

  또한 고등학생이 되었다고 일상은 별반 달라질 것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간판(卒業狀)만 하나 따면 될 일이기 때문에, 여느 때와 같이 가사노동의 연속이었으며 공부할 시간이 별도로 주어지는 것은 없었습니다. 필자 또한 특별한 공부욕심도 없었지만, 한때는 입학시험 낙방의 불명예를 씻고 싶어 중학교 때와는 달리 틈틈이 예습과 복습으로 따라잡고자 했지만, 그것도 혼자만의 욕심일 뿐 성적이 크게 향상되지는 않고 거의 중간에서 맴돌고 있었습니다.

  공부 못하는 놈이 꼭 시간타령이고 무슨 무슨 탓들을 하기도 한다지요?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 1966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고, 더디어 공부는 남의 일 인양 책과도 담을 쌓아 영영 이별할 일만 남았는데, 정작 이제부터가 문제였습니다. 농사를 짓자니 농토(田畓 약 500여坪)는 얼마 안 되고, 그렇다고 가업이라 할 것도 없어 무얼 해서 먹고사나 궁리해보았지만, 언제나처럼 뾰족한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와서 생각해보면 아버님께서도 목수 일을 배워보라는 말씀은 단 한 차례도 없었든 것으로 기억됩니다. 아마 간판(건축관련 자격증) 없이는 고생만 할 필요 없다고 느꼈든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졸업전후부터는 어딘가 모르게 가정형편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할 일없이 빈둥거리며 놀 생각도 아니었고 놀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놀지 않고 무슨 일이든 일을 해서, 군 입대이후 내가 집에 없어도 부모님의 생활이 조금이라도 윤택해지고, 여유 있는 삶이 될 수 있다면 한창 젊은 내가, 좀 더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럴 때 마침 마을 앞 갯가에서는 간척사업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 간척사업장에 나가 일을 하게 되었지요. 그때의 품삯은 7일을 꼬박 일해야 밀가루(小麥粉) 한 포였습니다. 앞에서도 언급이 있었지만, 우리 가정의 주식은 보리(麥) 밀(小麥) 고구마였는데 보리는 논 300평에 고구마는 밭 일부에 재배하고 있었으나, 밀(小麥)은 수확량이 너무 적어 전혀 재배하지 않아 돈을 주고 팔아(購入)야 했기 때문에 밀가루 음식은 언제나 우리에겐 별미였습니다. 그런 밀가루를 돈 한 푼 안주고 거저 받아올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이고 좋았는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때서야 국수 수제비 부침 속칭 개떡도 마음 되로 요리해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간척사업장을 계속해서 나가면서도 장래문제 때문에 고민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단 국방의무라도 마치자는 마음의 결정을 하고 1967(21)년 06월 01일 공군사병으로 지원입대를 하게 되었지요. 군 복무기간 동안이라고 특별히 좋은 일이 생길 여지가 있었겠습니까? ‘♪♬♭대전서 유성간에♩♭♬’ 있었든 항공병학교에서 8주간의 신병교육과 8주간의 헌병교육을 받고 더디어 1967년 9월 하순 제10전투비행단으로 배속되어 헌병대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공군비행장(제10 전투비행단)에서의 군 생활은 일생 동안에 있어 제일 힘든 생활이었는데, 고향에서는 1년 내내 눈이 4~ 5차례 내려도 다음날이면 다 녹아 없어지고, 아무리 추운 날씨라도 영하 6~ 8도 이상으로 비교적 따뜻한 지방에서 생활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북위 약 2.5도 가량 북상한 지역에서 그것도 군대 졸병 생활 중의 추위가 필자에게 느껴지는 체감온도는, 실로 난생 처음으로 이겨내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온 천지에 쌓인 눈(雪)은 꽁꽁 얼어붙어, 살을 외는 듯 한 서릿발 같은 찬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며, 동지섣달 기나긴 밤 비행장 외곽보초를 서는 시간이면 수은주는 어디까지 내려갔는지도 모르고, 북풍한설이 몰아치면 체감온도는 그보다 훨씬 더 떨어져,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고통을 필설로는 다 형용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시골에서는 농사(노동)일만 해도 배는 곪지 않았는데, 입대 이후부터 부대에서 급여되는 하루 3끼 식사로는 밤 12시경부터 배가 고파서 견디기 힘들었으니 첫 번째 고통이요,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것이 위 눈꺼풀이라는 것도 그제야 알게 되었으니 두 번째 고통이요, 군화에 반피 장갑 그리고 누비옷에 누비모자만으로 밤새 덜덜 떨리는 추위가 그 세 번째 고통이었는데, 특히 야간근무인 밤 12시부터 교대시간인 아침 9시까지 이 3가지 고통과 싸워야 했습니다. 1967년 겨울 초병으로서의 생활 중 추위와 싸우며 그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군화 속에서도 발이시려 제자리에서 토끼뜀을 하듯 뜀뛰기와 함께, 발가락을 오므렸다 폈다하기를 근무시간동안 계속해야, 그나마도 견딜 만 하였고 발가락의 감각도 느낄 수 있었으니…

  이렇게 뛰기를 계속하다보니 그렇지 않아도 고픈 배는 더욱 허기지고, 졸음은 왜 그렇게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지 소위 졸병 시절이어서 그랬든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3중고를 겪으면서도 매 근무시간마다 내가 (추위를)이기나, 네가 (나를)이기나 또한 내가 언제까지 참아낼 수 있는지 한번 겨뤄보자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했으며 점점 자신감도 생기게 되면서 결국은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군복무를 마친 대한민국의 모든 남성들이 하는 말 중에는 군 생활 때 자신이 제일 고생했다고 하면서 또, 추위정도를 이야기할 때면 밖에서 소변을 보면 그 소변은 곧바로 고드름이 되어 얼음 덩어리가 떨어지더라고 하는데, 필자의 경험으로는 비행장 외곽보초시간에 아스팔트 바닥에 소변을 보고 아랫도리를 추스르면서 곧이어 군화발로 바닥을 긁으면, 곧바로 얼어붙은 소변이 얼음으로 걷히는 것은 당시로서는 한강 이남에서도 흔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1967년도 겨울에 몸으로 겪으며 체험했든 그 고생들이, 지금도 어렵고 힘들고 고달플 때는 하나의 초석의 역할을 단단히 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젊었을 때 고생스런 경험도 겪어보아야 한다는 말이 곧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군 생활도 시간의 흐름이라는 진리에 순응하여, 국방부 시계도 고장 없이 ‘똑딱 똑딱’ 거리더니 그렇게도 멀게만 느껴지든 전역의 날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입대 당시 공군사병의 복무연한은 36개월이었는데, 1968년 01월 21일 북한 제124군부대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사건으로 인하여, 복무기간은 4개월 연장되어 40개월을 근무하고 전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더디어 1970(24)년 09월 30일 만기 전역한 당일 서울로 상경하였습니다. 당시 불광동 뚝밭골에서 자취생활을 하든 4촌 형님이, 세를 얻어 사용하고 있든 ‘방을 사용하라!’고 하여, 자취생활을 하면서 용산구 원효로 소재, ○○냉난방기술학원에서 냉동기술을 배우게 되었지요. 당시 그 학원을 부속으로 하는 회사에서는 시내 고층건물에 냉동기 설치공사를 수주 받아 공사가 진행 중이었는데, 그 학원출신 선배들이 설비를 하고 완공 후 그 건물의 기관실에 취직을 시켜주는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마지막 휴가 때 기술을 배우면서 무슨 일이든 하여 식대 정도는 자체 해결 할 예정이니, 학원비만 도와달라고 부모님과 상의하였으므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세상물정도 제대로 모르면서 거기다가 숫기도 없고, 내성적인 성격의 필자에겐 세상만사가 뜻대로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말이 쉬워 ‘식대는 자체 해결’이지 마땅한 일거리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차일피일 하고 있는데, 학원강사가 공사현장에 나가 견습과 실습을 동시에 하면 좀 더 정확하게 빨리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하여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지요. 거기다가 설상가상으로 부모님과 약속했든 학원비가 제때 오지 않는 등 심상치 않아, 아버님 마음을 상하게 한 적도 있었습니다.

 

    (다) 갈등이 부른 마음고생.

  그런 학원생활도 4개월여 만에 수료와 동시에 끝내고, 구정전인 이듬해 2월 중순경 고향집으로 내려갔더니 부모님은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학원생활 동안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고생만 했으니, 아마 부모님 눈에는 거의 반쪽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갑론을박과 우여곡절 끝에 결국 재 상경과 기관실 취직을 포기하고, 새로운 장래일거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부모님과의 결론은 어떤 직이든지 공무원이 될 수 있게 시험 준비를 하자는 것이었지요. 때마침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던 4촌 형님이 경찰공무원(순경)모집요강을 보내 주어, 책과 이별한지 5년 여 만에 시험 준비에 매진하게 되었는데, 직업이 학생이었든 12년 동안의 의지와는 완연히 다르게 마음가짐부터 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험에 또 떨어지게 되면, 고등학교입학시험낙방에 이어 공무원취직시험낙방으로 이어질 것이고 결국 별명이, ‘낙방쟁이’로 될 것 같은 자격지심에 그야말로 ‘죽느냐 사느냐’하는 마음으로 공부 하면서도, ‘나 같은 성격에 과연 경찰을 할 수 있을 것인가’가 또 다른 고민이었습니다. 만약에 책가방과 함께했든 12년 동안 이렇게 공부했다면 아마도 전교 수석은 따 놓은 당상이었을 것입니다.

  1971(25)년 04월중순경 경찰공무원 공개경쟁채용시험에 응시하고 신임교육이 연기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1여 년 후인 1972년 04월 27일 순경임용과 동시에 보통사회인으로서의 사람, 즉 활동기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현직에 들어온 이후 부조리가 한창 심했을 당시, 내 손에 들어온 이 떳떳하지 못한 돈이 피땀 흘려 모은 그들에게는, ‘얼마나 아깝고 가슴 아프며 소중한 돈이었을까?’라는 생각이 단 한순간도 잊혀지지 않았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혼자만 별나게 행동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어떤 직장사회에서도 너, 나 할 것 없이 거의가 다 ‘그렇고 그런 것이 현실’이었으니까요.

  필자의 성장기인 중․고등학교학창생활 6년간의 고생했던 기억들이, 가슴을 떠나질 않아 마음고생도 많았으며, 심한 갈등을 겪으면서도 또 다시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야한다는 부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공직생활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중매로 만난 아내와 결혼생활도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마음고생 속에서도, 속을 삯이며 직장생활이 계속되었든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닌, 가장(家長)이라는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든 것도 하나의 이유이기는 하겠지만, 필자의 공직생활 30여 년 동안의 경제적 궁핍함은 자신은 말할 것도 없이, 가족들 또한 참으로 참기 어려운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1953년 휴전이후부터, 인구증가세가 폭발적이어서 1970년대 들어 정부에서는 가족계획을 홍보라기보다는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가족계획 구호가 ‘산아제한’ 그리고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였는데, 요즘 와서 생각해보면 필자도 가족계획은 제대로 못 했다는 결론입니다. 앞의 어느 부분에서도 가족계획에 잠깐 언급했듯이 가족계획이라면 ‘어떻게 낳아서 어떻게 기르자!’는 것이어야 했을 것인데, 그와 같은 계획대신 구호만 요란스러워 무분별한 낙태수술만 성행했지요. 거기다가 아내의 태몽은 2남 1여로, 형제 밑에 딸이 하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내의 태몽대로라면, 필자와 똑 같은 구조이기 때문에 막내인 딸은 낳지 말자고 결사적으로 반대하며 우겨댄 결과, 형제만 두게 되었는데 지금은 후회막급이고 도끼로 발등을 찧고 싶은 심정일 뿐입니다. 이렇게 후회되는 지금의 현실을 왜? 그때는, 짐작도 못하고 상상도 못하고 예상도 못했을까 절절히 후회하면서, 항상 가슴 밑바닥 한쪽에 응어리로 남아 지워지지 않는 멍에입니다. 그래서 신경을 많이 쓰긴 했지만 슬하의 두 형제는, 내가 알고 있는 주변의 어느 집 형제들과 달리 독특한 형제애가 기특하여, 빚더미에서 허덕이던 1999년 12월 말 무렵, 17일간의 유럽 배낭여행으로 격려하고 당부도 했답니다.

  한편으로 아내는 가끔 ‘딸을 낳지 말자’고 말린 것을 원망하고 있으며, 또한 주변이나 이웃에서 하는 딸 자랑을 제일 듣기 싫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필자 또한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딸을 꼭 키웠어야 할 ‘운명을 거스른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집요하게도 따라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래저래 결국은, 입양문제까지 꺼내보았지만 아내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정부의 가족계획 구호대로라면 둘만 낳았으니 이제는 잘 길렀어야 하는데, 필자의 무능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사연으로, 이들의 뒷바라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1970년대의 서울 변두리지역 서민들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살이였습니다. 그 당시 판자촌의 서민들은 국수나 수제비도 못 먹고 대신 밀가루로 죽을 쑤어먹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모으지 못하고 또한 돈을 벌이지도 못한 책임은 그들에게도 있었겠지만, 마땅한 일자리 또한 없었든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지난날 고생스러웠든 일들이 주마등같이 오가며 마음이 괴로웠지만,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 형편도 못되어 가끔씩, 밀가루 1포대 어떨 때는 라면 1상자 또, 약간의 여유가 있을 때면 정부미 1포대씩을 가게주인에게 전해주도록 하고, 그 대금을 치른 적도 헤아리기 어려우나 오른손이 한일을 왼손도 모르게 하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가게주인만 알고 있었을 뿐 그 물품을 전해 받은 사람들조차도 누가 주는 것인지, 결국은 몰랐을 것입니다. 그때만 해도 셋방살이 살림이었으니 그나마도 가능했으나, 내 집을 마련한 이후부터는 어림도 없는 일이 되고 말았었지요.

  필자는 1980년 11월 19일 경사로 승진하면서부터 단 1년을 제외한 전 기간동안 파출소장 또는 최하단위의 지휘감독자의 위치에서 근무했습니다. 물론 초임시절부터 부조리한 일들도 많았으나, 그때마다 돈에 관한 평소의 소신 3가지를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결코, 아까워서 주기 싫고 가슴아파 못 주겠고 억울해서 주고 싶지 않은 봉투들은 받지 않으려고, 매번(마다) 생각하고 판단하곤 하였지만 얼마나 그 3가지 소신과 부합하였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기는 합니다.

 

     (라) 배꼽이 되어버린 내 집.

  1980년 봄에 조그마한 내 집을 갖게 되었는데 그 첫 번째가 강남구 역삼동 소재 ○○아파트였습니다. 대한주택공사에서 시공한 13평으로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당시 어머님께서, 고향의 전 재산을 정리한 금액 중에서 당시로서는 제법 거금을 받았습니다. 그때 아파트 값이 얼마였는지 기억은 없으며, 그 동안의 저축금과 함께 사채도 제법 얻었든 것으로 기억됩니다.

  1985년 4월에는 노원구 ○○○동(납대울)소재 2층(반 지하) 단독주택을 매입하게 되었는데, 그 때라고 그만한 돈이 있었든 것도 아니었어요. 복덕방업자의 부추김과 매도자의 선심 같은 집요한 성화에, 마치 무엇인가에 홀린 듯 그야말로 장만했다기보다 억지로 떠맡았다는 것이 정확할 것 같군요. 집값은 4500만원이었는데, 당연히 ○○아파트는 1300여 만 원에 매도하고, 500만원은 6개월 후에 지불하는 조건으로 계약은 했었습니다. 나머지는 전세금과 대출금을 포함하고 그 동안의 저축금, 사채도 꼭 따라 붙었지요. 6개월 후에 나머지 500만원은 재형저축부금으로 해결하게 되므로 서, 매도자의 고리사채는 면할 수 있었습니다.

  1986년 10월에는 현 주소지의 단층주택(․垈地: 170㎡: 51.4坪, ․建物: 82.6㎡: 25坪)을 4880만원에 매입하면서, 전(2층 단독)주택을 5200만원에 매도하고 전 주인으로부터 인수한 대출금 1800만원을 포함해, 평생 동안 기거할 양으로 다른 때보다는 좀 더 무리를 했으니, 부채부담도 당연히 높았습니다. 또한 농협에서 담보대출을 더 받을 수 있어 사채는 최대한으로 줄일 수 있었습니다.

  신혼생활시작부터, 내 집 마련이라는 꿈이 있었기에 경제적으로 쪼들린 생활을 계속해오든 아내는, 필자의 벌이만으로는 도저히 못살겠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더라’며, 팔을 걷어붙이고 부업전선에 뛰어든 때가 이 무렵이었지요. 그 결과 당연히 여유는 생겼고 아내의 수입과 필자의 수입으로 그렇게 무겁게만 느껴지든 대출금도 완전 변제한 것은 1988년 중반 무렵이었을 것입니다. 평생 처음(결혼이후) 부채로부터 더디어 해방이 된 것이었습니다.

  1990년도 우리나라 경제사정은 경제전문가가 아닌 보통사람들의 눈에도, 돈의 값어치는 점점 떨어지고 부동산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라가며, 특히 건축허가를 얻어 신축공사만 시작되면 그 설계도에 의해 전세계약은 체결되고, 전세금으로 건축비를 충당하고도 남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남미제국의 경제사정 또한 극심한 인플레이션 현상으로, 국민들의 소요가 계속되는 상황이었고 더디어 우리나라경제도, 남미경제를 닮아 가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에 안절부절못하고 있든 1991년 02월쯤에, 아내는 돈이 조금 모였는데 어떻게(어디 마땅한 곳에 투자라도) 하면 좋겠느냐(?)는 것이었는데 당연히, 필자의 급여통장에도 조금은 쌓였었지요. 모두 계산해보니 1800만 원 쯤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돈 1800만원을 어떻게 굴려야(?)할까 궁리에 골몰하다가, 관내에서 부동산 소개소를 경영하는 ○○○과 상의한 끝에, 건축업자인 ○○○가 과거에도 다른 사람들을 여차여차하게 편의를 봐준 사례가 있었다면서, 평소 일면식이 있는 ○○○에게 부탁하면 좋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당시 건축업자인 ○○○는 나지(裸地)나 헌 가옥을 사서 다세대주택으로 지어 수요자에게 팔고 경비를 제하면, 남은 이익금을 투자비율에 따라 나누는 방식이었어요.

  더디어 3인이 마주앉아 본격적인 의사타진 끝에 1800만원가지고 투자해 봐야 그게 ‘얼마나 이익이 남겼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땅 짚고 헤엄치기’이고 투자기간도 4~5개월인데,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많이 투자해야 이익도 많을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백번 아니 천 번도 더 지당한 말씀이었지요! 적어도 그때까지의 사정으로는 …

  1991년 03월초에 아내와 상의하여 1200만원은 이웃에서 사채로 빌리고, 3000만원은 당시 국민은행과 상업은행에서 각각 1500만원씩 담보대출을 받아, 도합 6000만원을 준비하여 투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택 신축공사가 진행 중인 1991년 5~ 6월경부터 이상 징후들이 돌출 하는데, 어쩐지 심상치 않아 보였습니다. 3월초에 시작한 건축공사가 10월쯤에야 마무리되고, 10월 하순경에 200만원과 이듬해인 1992년 01월 하순쯤에 500만 원 등, 도합 700만원은 원금에서 회수하였으니 이제 5300만원이 남았습니다.

  보직의 순환기간도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투자에 대한 결산도 없었든 1991년 12월초에, 타부서로 전출이 되면서 공간적으로 멀어지게 되고 보니, 건축업자와는 당연히 대면회수도 줄어들고 시간도 짧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그 신축주택(다세대 3층)은 매매되지 않아, 전체 약 9800여 만 원의 전세금을 받았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게 되었으며, 아울러 필자의 투자비율은 약 4분의 1정도였으니, 그 주택의 전세금 중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2500여 만 원 정도는 받았어야 하는데, 단 한 푼은커녕 결산통보도 없는 상태로 지나게 된 것은, 계약서도 없는 상태에서 사람을 너무 믿어버린 순진한 바보였기 때문이라 생각하며, 건축업자 또한 신의성실의 원칙에 의한 고지의식도 결여된 것으로, 한번쯤 더 굴려서 큰돈으로 만들어 주려고 마음먹었다는 변명만 늘어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어 1996년 12월까지 약 6년 동안 5300만원에 대하여 단 한 푼도 주지 않았고, 다만 필자의 주택을 근린생활시설로 건축하게 되면 잘 지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필자의 주택은 모과나무 능금나무 단감나무 호두나무 석류나무 등, 과실나무만 6종류와 갖가지 화초들로 제법 잘 가꾸어져있는 상태였으며, 양(兩)은행에서 담보대출 받은 3000만원에 대한 원금과 이자를 완전변제 하였으나, 또 다른 대출금 1500만원도 남아있어 여유도 없었고, 사채 중 500만원은 그때까지 미해결 상태이기 때문에 전혀 주택을 신축할 상황이 아니었으나, 투자금액을 회수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결론짓고, 긍정적으로 아내와 상의하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1995년 중반부터 그 동안의 신체 혹사로 건강이 좋지 않아 부업전선에서 물러난 상태였고, 당시 현금이라고는 이웃주부들과 함께 시작하여 얼마 전에 수령한 계금(契金) 1000만원과, 또 얼마 후에 수령할 계금 1000만 원 등 도합 2000만원이 고작이었으나 ‘울며 겨자 먹기’로 건축을 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또한 1991년 03월초에 투자한 신축주택이 그때까지 매매되지 않았으므로, 그 동안의 부동산가격 하락 등의 사유로 일부인 800만원을 공제하고, 나머지 4500만원만 계산하기로 합의하였으니, 도합 6500만원으로 필자의 주택 신축공사는 시작되었습니다.

  더디어 1997년 3월초부터 신축공사는 시작되고, 1997년 7월 31일 건축물(지상 4층, 지하 1층, 총면적 443.04㎡: 134.18坪)사용 승인을 얻었습니다. 한해 전만 같아도, 신축공사 도중에 전세 및 월세계약이 성사되고 따라서 자금난이 줄어들 수 있었을 것인데, 사용승인이 떨어진 이후에도 ‘계약하자’는 이야기가 별로 없었고, 어쩌다가 수요자가 찾아와도 터무니없는 가격이었습니다. 그렇게도 짓누르고 무서웠든 부채로부터 해방감에 도취되어 미쳐 깨어나기도 전에, 주변의 은행들로부터 담보 및 신용대출금액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설상가상이라든가, IMF 구제금융이 들여오면서 국내 금융질서는 혼란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모든 국내 경기가 침체되자 필자의 경제사정도 점점 꼬여 수렁으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1997년 재산변동사항 신고에 필요한 연말결산에 의하면, 전세 및 보증금 1억1300만원, 대출금(8개 은행 12계좌) 1억4716만원, 미 지급금 1500(추가로 요구한 공사비 800만원 포함)만원, 보유하고 있었든 현금 등 6.500만원, 도합 3억4016만 원짜리 공사를 한 결과, 부채비율은 500%가 넘는 겁 없는 짓을 저질렀고, 또한 변제해야할 부채총액은 대출금 과 미 변제금 및 기존 사채 500만 원 등, 도합 1억6716만원이라는 크나큰 멍에를 뒤집어쓰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퇴직 전까지 모든 부채의 변제를 목표로 우리가족들의 악전고투가 계속 중이든 1998년 여름에는, 군 복무중인 작은 아이가 휴가를 얻어 집에 왔을 때 수박 한 통 이외는, 그 해 내내 과일구경을 접고 살아야 했었습니다. 덕분에 웬만한 가정에서도 다 가진 흔하디흔한 자가용 승용차는 물론이고, 우리부부는 휴대폰 구경도 못하고 살았습니다. 2000년 3월초 1층 가게 하나를 회수하여 분식가게를 시작한 아내에게 이웃에서는, 감춰둔 재산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고생(SHOW)한다’는 사람도 있더라는, 아내의 전언에 미쳐 위로의 말도 찾지 못하고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가는데, 그런 것도 못하는 자신이 한없이 한심스럽고 부끄럽기까지 하였습니다. 어떤 유행가의 가사처럼 ‘난 참 바보처럼’ 살았기 때문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납니다. 안평대군의 꿈이야기를 듣고 안견이 그린 그림(무릉도원) 오른쪽에는 ‘夢遊挑源圖’라는 다섯 글자의 제목이, 그 옆에는 “世間何處夢挑源 이 세상 어느 곳을 도원으로 꿈꾸었나”로 시작하는 안평대군의 찬시(讚詩), 그림의 왼쪽에는 안평대군이 쓴, 발문(跋文: 자신이 꿈을 꾸고, 안견이 그림을 그리게 된 과정을 설명하는 글) 중에 이런 글귀가 있다는 군요.

  (중략) … 오호라, 큰 도회지는 실로 번화하여 이름난 벼슬아치들이 노니는 곳이요, 절벽 깎아지른 깊숙한 골짜기는 조용히 숨어사는 자가 거처하는 곳이다. 이런 까닭에, 오색찬란한 의복을 몸에 걸친 자의 발걸음은 산속 숲에 이르지 못하고, 바위 위로 흐르는 물 보며 마음 닦아나가는 자는 꿈에도, 솟을대문 고대광실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서로 길을 달리하는 까닭이니 필연적인 이치이기도 한 것이다. … (중략)

  결국 활동기 시점(任用時)부터는, 내 집 마련을 위한 저축생활로 인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이 계속되었고, 1980년부터 부채와의 싸움이 시작되어 결국은 일생동안 이어지는 악순환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싸움은 필자의 계획대로라면 퇴직 무렵에는 승산(全額辨濟)있다고 판단했는데, 예상치 못한 돌발적인 상황의 발생으로 이 싸움에서는 영영 이겨내지 못하고, 패자의 쓴맛을 봐야할지도 모를 처지에 놓였습니다.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3차원(인간)세계에 올 때는, 빈손으로 두 주먹 불끈 쥐고 왔다가 바보처럼 살면서 부채나 잔뜩 움켜쥐고, 간대서야 될 법이나 한 일이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또다시 더 큰 업보로 이어져 다음 생에서도, 그 부채를 변제해야할 부담을 덜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 설상가상이 된 우환과 손재수(損財數)

  1988년 중반 무렵 부채로부터의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호사다마라 할 우환이 찾아오고 있었으니 그것은 필자의 와병이었는데, 제24회 서울올림픽(1988. 9.17~10. 2)이 끝난 11월, 요추(腰椎) 추간판탈출증(椎間板脫出症: 허리디스크)이 발병하고, 12월 중순부터 자리보전을 하게 되면서 1989년은 병(病) 수발을 하느라고, 아내도 쉬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요추(腰椎) 추간판탈출증(椎間板脫出症)의 증상은 요추가 ‘S’ 字로 휘어지고 꼽추처럼 돌출(突出: 凹凸)하였으니 당연히 신장도 줄어들었고, 이웃사람들도 영영 병신으로 살게 될 지도 모르겠다고 걱정들을 하였으니, 가족들의 마음고생 또한 필설로는 제대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요추 추간판탈출증의 요양은, 외과적 수술을 않고 완치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한방 침과 한약으로 치료하므로 서, 요양기간 또한 길었습니다. 알로에의 효능(소염 진통 효과)도 그때 알게 되었으며, 강원도와 경기도 일원인 중부지방을 헤집고 다니며, 좋다는 약재를 구해오는 것은 모두 아내의 몫이었습니다. 아내의 지극 정성과 가족들의 한결같은 뒷바라지에 힘입어 1989년 7월쯤에야, 직립단독보행(直立單獨步行)이 가능했으며 회복기간 또한 길어 그로 인한 불편은 1992년경까지 겪었습니다. 1989년 7월부터 아내는 다시 부업전선에 복귀하였고 필자 또한 후유증으로 인한 불편을 겪으면서도 정상적인 근무는 할 수 있었습니다.

  또 다른 와병은, 전술한 2000년 10월 12일 시술한 위 절제수술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도 필자에게는 채권(債權)이, 2건(件)에 1.000만 원 정도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1995년 05월 15일 고향선배 ○○○에게 빌려준 경우도 참으로 구구절절 한 사연들이 있었습니다. 필자에게 감춰진 돈이 있는 것으로 보였는지 아니면, 여기저기서 빌려 쓰고 변제 못해 신용상태가 나빠져서 이제 더 이상 빌려 쓸데가 없으니, 필자 같은 사람에게나 빌리자는 생각이었는지 집으로 사무실로 계속 전화가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자 걱정은 하지 말고 이웃에서라도 빌려주면 반드시 이자는 제때에 주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들 나름 되로도 사회생활을 했음에도 돈 부탁 할 데가 그렇게도 없을까? 또 남의 돈 얻어 쓰는 것이 오죽이나 어렵고 힘들면 나에게까지 이렇게 매달리다 싶히 할까? 하는 생각에 아내와 상의하고, 이웃에서 빌려 두 차례에 걸쳐 1000만원을 빌려주었는데 나중에 300만원을 더 주었습니다.

  당연히 2~ 3개월 이자는 제때에 주어 욕심이 발동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은행에서 3000만원을 담보대출로 받아, 이웃에서 빌린 1300만원을 갚고 이제부터는 사채이자 받아 대출이자 제하고 나면 남는 게 조금 즉, 떨어지는 떡 고물이 있었습니다. 그나마 천만다행으로 은행에서 3000만원을 받았지만, 더 이상 주지 않은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그 동안 500만원은 1998년에 억지로 변제 받아 추가된 건축비로 지불하고 나머지, 800만원은 변제의 능력이 있으면서도 딴 소리만 하는 데는, 수만 가지 상념이 쌓일 뿐입니다.

  내 돈 빌려주고도 못 받는 등신이라는 비하로 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필자의 직업과 관련하여 그들은 ‘그저나 마찬가지로 생긴 돈 나에게도 좀 나누어 달라’는,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편 같은 ‘그놈의 돈은 누구든지 먼저 본 놈이 임자’라는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지돈 빌려주고도 제대로 받지 못할 반편이 같은 놈’이라는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알 수 없습니다. 더디어 2002년 10월 31일 포기 선언을 하고 말았는데, 아내는 끝까지 받아내고 말겠다며 쫓아다니고 있답니다(결국, 2003년 중반쯤에 500만원 회수하고 나머지 300만원은 아내도 역시 포기했습니다)

  ․1997년 04월 07일 ○○학교 동기동창 ○○○에게 빌려준 200만원도, 그 얼마 후 역시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 해 2월초부터 집으로 사무실로 계속 전화가 오더니, 더디어는 집으로 사무실로 찾아와서까지 돈 좀 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공사 중인 재료를 구입해야 하는데 대충 3개월 후면 갚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유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주택신축 중이어서 빌려 준 돈이 있다 하더라도 거둬들여야 할 판인데, 3개월만 쓰고 주겠다는 말에 오죽하면 나 같은 놈한테까지 이럴까? 하는 생각에, 그것도 남한테 빌려서 주었습니다.

  약속기간인 3개월 지나도 소식이 없어 전화를 했더니 ‘좀 더 기다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부터는 전화를 해도 내 번호임을 확인하고 전화도 받지 않아 하는 수 없이 가을쯤에 집으로 찾아갔더니, 그때 친구부인으로부터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또다시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돈 200만원은 경제주체의 경제규모에 따라 큰돈인지 적은 돈인지 구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200만원은 상여금이 없는 한 달 급여보다 많은 돈이었고, 금융기관에 납부하는 한 달 이자보다는 적은 돈이었습니다.

  ‘빚을 많이 지면 나중에는 빚을 준 사람이, 빚을 진 사람에게 와서 무릎을 꿇는 법이다’ 또는 ‘빚은 앉아서 주고 서서 받는다’는 옛말이 있다지만, 무릎을 꿇듯이 또는 찾아가서 사정을 해도 주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거나 이혼을 했다는 데는 전혀 갚을 의사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필자는 직업관계상 수많은 계층의 사람들을 헤아릴 수없이 많이 만나기도 하였고 대화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빌려준 돈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정도는 모르지는 않습니다. 다만 ‘양반이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치지 않는다’는 옛 말 같이 악담 같은 것은 않기로 하였으며, 모든 것이 ‘전생 또는 현세의 어떤 업보(業報: 過去世에 쌓은業이 今生에 影響, 八正道 六波羅蜜 實踐 八字改善)에 의한 결과는 아닌가?’하는, 생각들이 더욱 간절한 것은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바) 회상의 뒤 끝에서.

  그러면서도 비록 채무변제를 받지 못했다고 악담은 하지 않았는데, 얼마 후 친구는 이혼했다는 친구부인의 말을 듣게 되었고, 선배 또한 모든 계획에 대한 청사진은 어렵지 않고 쉬이 이루어 질 것 같은데, 마지막 성사단계에 이르면 언제나처럼 물거품이 되고 마는 안타가운 실패의 연속은 어쩐 일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간절한 소망이 있다면, 일생동안 주변사람들로부터 은혜를 입었거나, 또는 신세를 지거나 폐를 끼친 적도 많았었는데, 이렇게 보이지 않는 빚은 차지하고서라도, 눈에 보이는 경제적인 부채만큼은 완전변제를 해야 할 것인데, 앞으로 얼마의 생이 허용될 것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채무변제가 급선무라는 것만은 틀림없는 과제이기도 합니다. 앞(생․노․병․사)에서도 언급했듯 2000년 10월 위암진단을 받고 위 절제수술을 한지, 어언 3년여가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도 이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갈망하는 건강장수와 같은 삶에 대한 애착이라기보다는, 오로지 부채변제라는 목표하나를 바라고 살아왔으며, 마치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네델란드. 1632. 11. 24~1677. 02. 21)의 말처럼, ‘내일 당장 죽음이 닥친다 해도 나는 오늘 부채를 완전 변제하겠다’는 심정일 뿐입니다.

  이와 같은 모든 사항들 또한 인간적인 욕심으로 인한 결과로서, 누구를 탓 할 수도 또는 누구를 원망 할 수도 없는 것은 물론이며, 한갓 자서전으로 알아서도 안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이제 와서 되돌아갈 수도 없을 뿐 아니라, 한 생의 연습도 아니었으니 ‘인생은 단 한번밖에 없다’는 누군가의 말대로라면, 멋모르고 왔다가 죽을 때까지 빚에 허덕이며 남들처럼은커녕, 흉내도 못내 보고 가게 되었으니 … 부디, 필자와 같은 삶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부끄러운 부분이지만 들추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필자의 양심에 비추어 평소에 가지게 된 돈(金錢 貨幣)에 대한 3가지 소신 즉,

  첫째. 돈에 대한 만인의 공통점은 누구나 좋아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돈(金錢)을 좋아하고, 또 생명이 유지되는 한 돈(金錢)은 꼭 필요하며, 동시에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흡족할 줄 모른다!

  둘째. 돈! 그 개체 각각의 여정은 제각기 다르다.

돈(貨幣)! 그 자체는 일생동안 돌아다녀야(流通)할 과정과 단계와 길(路)이 있는데, 이 과정과 단계와 길(路)을 어구 내고(지름길로) 내 손에 들어오면 반드시 마(魔)가 따른다.

  셋째. 돈에 대한 교훈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돈(金錢)은 피(血)와 땀을 흘린 대가(代價)로 얻어져야하고, 또한 쓸(消費․支出)줄 알아야하며 반면에 무서운 줄도 알아야한다는 것을 설명하고자 하였는데, 조금이라도 이해가 되었는지 아니면 전혀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결코 자서전쯤으로 읽혀져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따라서 돈이라는 요물에 의해, 흥하기도 망하기도 또는 패가망신도 할 수 있다는 또 하나 예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금융감독원 통계자료에 의하면, 2002년 10월말 현재 개인 신용불량자 등록 총수는 2.812.000명이며, 이중 카드로 인한 개인 신용 불량자수는 90%이상(20대까지 신용불량자수는 420.000여명)으로 집계되었다고 합니다. 돈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아울러 작금의 모든 강력 사건의 대부분은 카드 대출금 및 연체로 인한 동기에 의하여 발생된다는 사실, 또한 거의 매일 보도되고 있는 실정임은 별개로 하더라도 돈은 수많은 사람을, 착하게도 하고 악하게도 하는 그야말로 요물이 아닙니까? 그래서 돈(貨幣 金錢)의 수입행위와 지출행위 등은 수많은 행동 중에서도 수 만가지 악행의 원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나. 제(己) 잘난 맛에 사는 게 인생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제 자신이 아주 훌륭하며 잘났다는 대단한 착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똑 같은 능력과 재능을 가진 사람은 없을 터이기에, 내가 못하는 것을 너는 할 수 있을 경우 역시 너는 나보다 훌륭하고, 반면에 너가 못하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다면 역시 나는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통사람 누구나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그 공과를 재어본다면 특별히 훌륭하다거나 또는 훨씬 모자란다고 할 만한 경우가 없이 거의가 대동소위 즉, 도토리 키 재기요! 오십 보 백 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의 대다수가 해당하는 이러한 삶을 ‘제(己) 잘난 맛에 사는 게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인간에게 어떤 인격적인 계층이 있을까(?) 만은, 실제로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수많은 계층이 존재하며 누구도 그 수많은 계층중의 한 계층에 속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진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다양하고 폭넓은 계층 속에서도, 자신보다 높거나 낮은 계층은 가급적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속한다고 여겨지는 현재의 계층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것도 대단히 훌륭한 삶이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보통적인 삶도 ‘제(己) 잘난 맛에 사는 게 인생’이라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의 경우, 자신의 처지는 간과하고 계속해서 위의 계층만 바라보며 한숨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아래 계층을 생각하며 현실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울러 후자에게도 ‘제(己) 잘난 맛에 사는 게 인생’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제(己) 잘난 맛에 사는 게 인생이다’와 관련하여 ‘너 자신을 알라!’(고대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神殿 현관 기둥에 새겨졌다는 유명한 말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이것을 그리스 7賢人의 한 사람인 탈레스가 쓴 것이라고 하였지만, 같은 7賢人의 한 사람인 스파르타의 킬론이 한 말이라고도 하고, 다른 賢者의 말이라고도 하여 일정하지 않다)는 말이 떠올려지게 되는데 이 말은, 자신의 현재 심성(良心)를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데도 자신을 알기는커녕, 평범한 군상들은 제 잘난 맛에 사는 게 인생이라는 즉, 자신만이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인생살이인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고대 그리스 BC 469~BC 399)는 인간의 지혜가 신에 비하면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는 입장에서, 무엇보다 먼저 자기의 무지(無知)를 아는 엄격한 철학적 반성이 중요하다고 하여 이 격언을 자신의 철학적 출발점에 두었다. ‘사람에게 어려운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탈레스는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어려운 일이며, 쉬운 일이라면 남을 충고하는 일이라고 대답하였다 한다. 이와는 반대로 희극작가 메난드로스는 오히려 ‘남을 알라’고 하는 쪽이 더 유익하다고 비판하였다. 키케로는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외적인 신체가 아닌 자기의 마음을 아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따라서,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평균적으로 가지게 되는 심성을 정확히 알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사기꾼인 부동산 개발업자 등 평소에도 거짓과 속임수로 행세하는 자가, 초면인 수요자에게 명암을 내밀며 미사여구로 자신만이 가장 양심적이고 자신만이 가장 선량한 사람인척 웃고 있는 양두구육에 대한, 자기 성찰을 촉구하는 경고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 자신을 알라!’와 관련하여 필자는,

  “나(己)를 그 어느 누구보다 가장 정확하고 확실하게 아(知)는 사람은 오직 나(己)자신 뿐이다”

라고 거침없이 말하곤 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과거 허물이나 과거의 나빴든 행동이나 과거에 품었든 나쁜 생각들이나 또는, 현재의 허물이나 현재의 나쁜 행동이나 현재 품고 있는 나쁜 생각들 모두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만은 정확하고 확실하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너 자신을 알라’하는 명언도 의미 있겠으나, ‘나 자신은 내(己)가 가장 정확하고 확실하게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희극작가 메난드로스의 말처럼 ‘남을 알라’고 하는 것도, 꼭 필요하고 유익하며 중요할 것이라고는 생각됩니다.

  어떤 유행가의 가사처럼,【♬♩내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하는 것은, 내 자신의 참 마음도 정확히 모르면서 남의 마음 즉 탐욕으로 가득 찬 너를 어떻게 알겠느냐는 것이지만 환골탈태하는 마음과 노력으로 자신의 참모습을 보려고 하면 자신의 실체를 알 수 있고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필자의 과거사를 되돌아보면 참으로 한심하고 변명의 여지조차도 없는 불쌍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1973년 초 결혼 후 30여 년 세월 속에서도 휴가라고 할 만한 하계휴가는 딱 2번으로 만족해야 했으며,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경제적 궁핍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이어지고 있고, 이로 인해 주부들이면 누구나 장만하고픈 가정용품들도 태부족이며, 성격 또한 활달하지 못했으니 누구보다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된 아내에게는 남편노릇도 제대로 못했고,

  그나마 당․비번 근무로 집에 들어가든 근무형태가 1980년 후반기부터는, 몇일씩 집에도 못 들어가는 근무형태로 변경되면서 본의 아니게 가정과는 공간적인 거리가 생기게 되어, 두 아이의 유년기 때 필요한 아비로서의 역할을 못한 것은 물론이고 무서운 아버지 상(像)이 뇌리에 박혀 접근조차 없어지고, 다정하고 친구 같은 아비와는 담을 쌓게 되었으니 아비 노릇 제대로 못했으며,

  이 직(職)도 벼슬이라고 자주 찾아뵙지 못한 주제에, 적어도 ‘내(己) 문제는 나 스스로 해결 하겠다’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보다는 신경을 덜 쓴 양가(兩家)부모님께 한(恨)만 남겼으니 남의 자식노릇도 제대로 못했고,

  신체발부수지부모, 불감훼상효지시야(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孝之始也: 몸과 머리털 그리고 피부 이들은 모두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다, 그래서 감히 몸에 상처를 내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라고 하였는데, 제 몸 하나 제대로 관리 못해 칼까지 대었으니 ‘원수를 사랑하라’든 그 원수는커녕, 자신도 사랑하지 못한 주제에 무엇 하나 제대로 된 일이 있었을까? 이렇게도 모자라고 반쪽도 안 되는 주제에 그래도 지(己)가 잘났다고 으스대며, 살 때에는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나 정작 갈(去) 때가 다가오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고 깨닫게 되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그때는 정말 제 잘난 줄 알고 살았으니 ‘지(己) 잘난 맛에 사는 게 인생이다’라는 것입니다.

 

    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

  手足便 口亦便(수족편 구역편: 손발이 편하면, 입도 역시 편할 것이요)

  臂脚便 身亦病(비각편 신역병: 팔다리가 편하면, 몸에는 병이 덮친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반드시 고생(苦生: 努力)이라는 것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빈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이고 또 학교 운동회에서 달리기를 시작할 때처럼, 두 주먹 불끈 쥐고 힘차게 살겠다는 각오가 본능적으로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은 부모를 잘 만나 적게 고생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배우자를 잘 만나 적게 고생하는 경우 등도 있겠으나, 이것은 그 사람에게 그만한 복(五福: 동양 儒學의 경전인 書經 周書 洪範편에는 수(壽: 장수하는 것) 부(富: 부유한 삶을 영위하는 것) 강녕(康寧: 우환이 없이 편안한 것) 유호덕(攸好德: 덕을 좋아하며 즐겨 덕을 행하려고 하는 것) 고종명(考終命: 天命을 다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복을, 적게 타고나거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생에 쌓은 업보로 인한 경우일 수도 있을 것이나, 그런 되로 복이 많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상의 복을 나눔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며, 부모나 배우자로부터 복을 나눔 받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옛날부터 전해오기를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3대에 걸쳐 남에게 가슴 아픈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도 있듯이, 그 복도 많이 받기 위해서는 공덕을 쌓았어야 할 것이고 또한 받고 싶은 복만큼 베푸는 나눔도 있었어야 할 것이며, 병들고 노약한 사람들에겐 그 수족이 되어주는 봉사 또한 있었어야 할 것입니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저 공짜로 살다 갈 수는 없을 것이며,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고생(苦生 努力)이 필요한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빈손으로 왔기 때문입니다. 마치 고향에서, 일가친척 이웃사촌을 비롯해 친구들과 어울려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객지에서 생활하게 되었을 경우, 그 객지에 들어가서 이웃사람들로부터 ‘좋은 사람!’이다 또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등의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소위, 그들에게는 믿음을 줘야 할 것이고 아울러 신뢰를 얻어야 할 것이며, 세상만사에 경우도 밝아야 그 객지사람들과 동화될 수 있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즉 현지인과 동화되기 위해서는, 여건과 경우에 따라서 피나는 노력을 해야 더디어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옛말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 때부터 흔하게 하는 말 중에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속에 이때의 고생은 주로, 부(富)와 관련하여 가난과 싸우는 고생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나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세상사중에는 우리인간이 겪고 싸우는 고생 중에서도 경제적으로 갖게되는 ‘가난의 고생’을, 비롯해 정신적으로 겪는 ‘마음의 고생’ 온갖 질병으로 인한 ‘육체적 고생’등, 모두를 통 털어서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망설여지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어쩌면 마음고생이나 육체적 고생은 운명이나 업보에 의한 것 일수도 있겠으나, 부(富)와 관련된 가난의 고생은 어느 정도 노력여하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큰 부자는 하늘에서 내고, 작은 부자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누구의 말같이, 젊어 고생이라는 것이 반드시는 아닐지라도 가난의 고생을 일컫는 것이 옳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렇다면 여러 가지 고생 중에서 운명 또는 업보와 관련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전제하에 있는, 마음의 고생과 육체의 고생은 인간개개인의 노력과는 별개로 한다 하더라도, 가난의 굴레에서 헤어나기 위한 고생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극복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생동안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고생살이라면, 그 고생이라는 고비는 일생 중 어느 시기 때쯤에 오게 되는지, 아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개개인의 운명이 제각각 틀리듯이, 똑 같은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고생은 일생 중 어느 시기에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이것만큼은 여러분 스스로가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나 생각하면서도 약간 망설여지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젊었을 때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고생스런 생활을 하며 사는 것을 우리들은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고생들 다 제켜두고,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고생만이라도 언제부터 노력해야 할 것인 가도 생각해 봅시다. 역시 생각해 보나마나 젊고 힘 있을 때 노력해서 어느 정도 기반이 안정되어야, 노후에는 고생을 덜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불문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또 문제는 있습니다. 좀 전에 언급하였듯, 젊었을 때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고생스런 생활을 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이 말 자체가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불난 집에 부채질하느냐?’고 항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목청껏 반박하고 대들기까지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경우는 또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들 말하면서도, 정작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보다 못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직업문제를 논할 때, 위로와 아울러 아(知)는 척 한다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일생동안 계속해서 고생스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우리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개개인의 종교관 인생관 내세관 가치관등에 따라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으나 지금까지 전개한 논리에 의하여, 내세에서 복(福)을 받기 위해서는 현세에서 덕(德)을 쌓아두어야 하는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따라서 이런 범주 즉, 젊었을 때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고생스런 생활을 하며 사는 경우에 해당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여러분! 결코 용기를 잃지 말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옳은 일 바른 일 누군가를 돕는 일 각각에 최선을 다해 공덕을 쌓아 두기 바랍니다. 여러분 당대(當代)에 안 받으면 반드시 후대(後代)에 그에 상응한 복을 받게 될 것이며, 그도 아니면 반드시 내세에서 그에 합당한 복을 받게 될 것이고, 그것도 아니면 그나마도 (고생이나 노력을)하지 않으면 할 일이 없어져 이내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개똥밭에 뒹굴어도 이승이 낫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젊고 힘 있고 패기 있고 용기 있고 혈기왕성 할 때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고생 즉,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가 아닐는지요. 결국은 젊었을 때 물불 안 가리고 열심히 일해야 늙어 막에 옛날이야기 해가며 조금은 나은 생활이 될 것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께서는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격려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있었어야할 그 복(福)이 왜! 누구에게는 많이 있고, 또 누구에게는 적게 있으며 심지어는 복이라고 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복 근처에도, 못 가본 것 같은 소위 ‘문칠네 복만도 못’한 사람들도 왜(?) 이렇게 많이 있을까요? 필자 또한 문칠네 만도 못한 복을 타고났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 부모님이나 이웃어른들께서는, ‘복도복도 문칠네 복(福)만도 못하다’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게 되었고 어떤 경우에 쓰는 말인 줄은 알기는 했지만, 정확한 의미도 모른 채 우리부부도 자주 쓰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젠가 무슨 이야기 끝에, 비록 정확한 의미는 아닐지라도 그에 걸맞은 의미라고 생각되는 그 무엇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부부간의 성생활에 있어 나올 수 있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예컨데, 남성이나 여성이나 나이가 들게 되면 점점 성욕도 떨어지고, 따라서 내외간에 성기의 기능도 젊었을 때와는 같지 않을 것은 누구에게나 자연적인 현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20대’라고 하든가? 어디 마음만 가지고 부부간에 성생활이 가능이나 한 일입니까? 아무리 마음이 20대 아니라 혈기 왕성한 젊은이라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 성생활은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마음만 가지고 몸이 따라주지 않는 상태에서 악전고투해 보지만, 결국은 실패로 끝난 경험이 쌓이고 쌓여 한이 맺힌 분들이 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즉, ‘문(門)에 칠(漆)이라도 하는 사람은 자신들보다는 낫다’ 또는 문(門)에 칠(漆)이라도 하는 사람이 부러워서 하는 의미의 말이었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복도복도 문칠(門漆)네 복(福)만도 못한 사람들은 이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라. 후회하지 않을 삶.

  ‘후회하지 않을 오늘을 살자!’ 이 말은, 우리 집 가훈으로 정하고 아이들에게 설명(說明)하기도 하고, 생활의 신조로 여기며 하루하루 보람 있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우리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지난날의 공과나 실수 그리고 할 일 없이 헛되게 허송세월한 시기에 대하여 반성하고 후회도 하고 있지요. 가깝게는 어제의 일에서부터 멀게는 수십 년 전의 일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크든 작든 진심으로 후회하는 때가 있었을 것이고 또한 앞으로도 후회하는 일들은 많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후회하지 않을’은 앞으로 다가오게 되는 ‘훗날’을 의미하는 동시에, 지금 이 순간 직후부터 임종을 앞둔 순간까지라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오늘을 살자’에서 ‘오늘’은, 지금 이 순간을 의미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고의 또는 실수로 인한 나의 잘못된 언행으로 인하여, 상대방의 신심에 고통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임종을 앞두고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1980년대 초, 어떤 사고를 당하여 응급처치를 받으면서 실로 끔찍한 경험을 한바 있었습니다. 요즘 들어 아니 그 당시였더라도, 조금만 정신을 가다듬고 침착했더라면 그런 오해가 있을 수 없었겠지만, 출혈이 낭자한 가운데 겁먹고 흥분된 상태여서인지 냉정을 갖지 못하고 참으로 바보처럼 굴고 말았습니다. 거두절미하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위, 죽을 준비를 했었다는 것입니다. 죽을 준비? 죽을 준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요점은, 이번 사고로 인하여 ‘내가 죽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고, 이어 ‘내가 왜 벌써 죽어?’라는 반항단계에서 한동안 발버둥 치다가 용서해주고 용서받을 수 있는 타협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이때부터 나에게 심신(心身)의 고통을 준 상대방을 용서하게 되고, 아울러 나로 인하여 고통 받은 상대방(나와 인간관계를 가졌든 모든 사람 그리고 각종 동물과 식물)들에게 용서도 빌었습니다. 다음은 ‘그래! 그렇다면 죽어주자’는 수용단계에서는, 가족들에게 ‘무슨 말을 남길 것인가?’하는 소위, 유언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일연의 전 과정(過程)을 섭렵(涉獵: 물을 건너 찾아다닌다는 뜻으로, 많은 책을 널리 읽거나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경험함을 으르는 말)하므로 서, 완벽하게 죽을 준비를 다 하였든 것입니다.

  그런데 나에게 심신의 고통을 준 상대방을 용서하는 것 즉, ‘그래, 모두들 다 용서하고 편한 마음으로 가자’는 마음을 가지기는 쉬웠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고통 받은 상대방들에게 용서를 빌기는 했었지만, 마음 어느 한 구석에도 ‘용서 받았다’는 편한 감정은 생기지는 않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당사자들로부터 ‘용서 한다’는 명백한 의사표시를 직접 듣지 못하였으니, 그들로부터 용서받았다는 편안한 마음이 가져질리 없었겠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수차 강조된 말이지만 이때의 용서도 두뇌활동이 가능한 3차원세계에서 피해자의 명백한 의사 표시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엿 장사 마음 되로 혼자서 북치고 장구 쳐봐야 제대로 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자, 나의 잘못된 언행으로 인하여 심신의 고통을 받은 상대방의 용서를 받지 못한 모든 과오는, 그야말로 ‘업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과 함께, 몇 배의 고통도 감내해야 할 것이라는 각오도 생겼습니다.

  여러분! 이런 경험을 유독 필자만 가지게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느님의 강조하신 사랑하는 마음과 부처님이 강조하신 자비심은 이 세상을 지배해온 유일한 마음이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태어날 때 가졌든 양심과 똑 같은 가치를 가진 마음이었기에, 아무리 악한 사람이나 또는 흉악한 죄를 범한 사람일지라도 그 마음(양심)의 기저에는, 욕심이 생기기 이전의 하느님의 마음과 부처님의 자비심으로 응축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임종이 임박했음을 직감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위의 각 단계를 거치면서, 상대방에게 고통을 안긴 자신의 잘못된 언행에 대한 후회막급의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며, 그것은 소로시 자신의 업으로 쌓여갈 것입니다.

이 글을 읽을 기회를 가진 여러분! 지금부터라도 ‘후회하지 않을 오늘을 살자’는 의미에서 남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잘못된 언행을 삼가하고 또한, 어차피 ‘혼자 살다가 혼자서 죽어간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외로운 임종의 문턱에서 안절부절 하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은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마치 우리들의 지난날들이 다시 되돌아올 수 없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인간에게 주어진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며, 이 순간에 ‘무엇을 어떻게 하며 보내느냐?’에 따라 우리들의 장래도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지금 이 순간’을 보람 있고 알차게 보내자는 것인데,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가 문제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미 전부터 생각하고 있는 장래목표와 희망까지는 아니더라도 당장 하고 싶었든 일들을 성취하기 위해, 그 목표를 향하여 증진하는 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나중(後)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오늘(今日)의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고 열심히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먼 훗날 아니 십 수 년 후에, ‘아! 십 수 년 전 그때 할 일없이 빈둥거리며 노닥거리지 말고 이러이러한 것을 좀 해 두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후회를 하지 않도록, 지금 이 순간에 할 일들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 즉, ‘후회하지 않을 오늘을 살자’를 가훈으로 삼았다는 우리가정도, 결국 지난날들을 되돌아보면 후회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며, 아울러 필자의 일신상에도 후회하고 있는 일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답니다. 그렇다면 어차피 지키지도 못할 것을 ‘왜 가훈으로까지 정했느냐?’는 공박도 있을 수 있겠으나, 할 일 없이 허송세월 한 것 말고는 거의가 소위 막차에 올랐거나, 무지 또는 착오로 인한 결과였습니다. 한치 앞도 모르는 것이 인간이라 하지 않습니까? 소위 막차에 올랐다는 경우는 욕심을 부린 결과인 것을 부정할 생각도 없습니다만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장하는 ‘후회하지 않을 오늘을 살자’는 것은, 욕심 무지 착오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할 일없이 ‘허송세월’한 부분을 뜻하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도 훗날 언젠가 후회하지 않으려면, 오늘 당장 그 동안 미뤄왔든 일, 하고 싶었든 일에 매달려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분명히 후회하지 않을 오늘을 살았다는 자긍심에 만족해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도 저도 아닌 즉, 막차이론을 비롯해서 무지 또는 착오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지금도 크게 후회하고 있는 부분은, 셋째(女息)를 포기 한 사실과 자식노릇 제대로 못한 것이 가장 마음 아픈 일입니다. 비록 어렸을 때부터 장남은 아니었어도 부모님과 함께 살고 싶었는데, 그놈의 웬수같은 돈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부모님 모시는데 무슨 돈타령이냐 구요? 하지만 그것은 모르는 말입니다. 간혹 젊은이들이 눈에 콩깍지가 끼어 ‘죽자! 살자!’하며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을 때, 사랑만 있으면 그까짓 돈과 상관없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장담하지만, 이 세상에 돈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더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늦은 후일 것입니다.

  따라서 효심 하나만 가지고 부모님 잘 모실 것 같은 생각이지만, 지지리도 궁상맞은 모습을 보는 부모님 마음은 편하지 않을 것이며, 부모님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그것은 곧 효(孝)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필자는 수많은 장르의 드라마 중에서도, 여러 대(代)가 어울려 재미있게 살아가는 내용이나 계층 간의 갈등문제를 소제로 다룬, 가정드라마를 즐겨보는 편이며 그 드라마 속에 푸우욱 빠져들기도 한답니다. 마치, 그 드라마의 주인공이나 되는 것 같은 착각 속에서 말입니다.

 

    마. 신용(信用)사회에의 적응(適應)

  세상사에서 무엇이든 한번 잃고 나면 다시 얻거나 원상회복하기란 거의가 불가능한 일들도 많을 것입니다. 한 인간에 있어 가장 소중하다고 하는 건강도 한번 잃으면, 의학적으로는 완치가 가능할지 몰라도 생리학적으로는 원상회복이 전혀 불가능 할 것이고, 명예와 신용 또한 한번 잃으면 영원히 회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명예와 신용은 건강과는 달리 자신의 뼈를 깎는 노력여하에 따라, 회복될 수도 있을 것이고 또한 반드시 회복되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고대 그리스: BC 384~BC 322,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이 개인으로서 존재하고 있어도 그 개인이 유일적(唯一的)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타인과의 관계 하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 즉, 인간은 사회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의 말처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고의나 과실을 불문하고 아무리 신용을 잃었더라도 그 신용불량자가 죽기 전까지는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써 사회생활은 계속되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명예와 신용을 어떻게 다시 얻을 수 있으며 원상회복 할 수 있을까? 이 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은 현재 우리시대에도 수백만 명이 된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찌 보면 1997년까지는 금융기관에서 신용대출시 신청자의 신용은 크게 문제시하지 않고,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는 보증인의 서명으로 신용대출이 이루어졌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금융기관 입장에서는 ‘돌다리도 두들겨서 건넌다’는 심정으로, 또는 이중삼중 안전판을 마련하고자 제 3자의 신용까지도 담보로 하고 싶었겠지요?.

  그러나 1997년 IMF의 구제금융이 도입되면서부터는, 국내경제의 지각변동으로 ‘네 노라!’하는 굴지의 대기업은 물론이고, 중소기업을 포함한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함께, 갑자기 부도에 시달리면서부터 원(元)대출자는 물론이고, 그 보증인자신도 모르는 사이 신용불량자로 전락하게 되었고, 본능적인 소비욕구를 이성으로 자제하지 못한 몰지각한 개인 신용 불량자들은, 신용카드를 무차별적으로 발급 받아 마치 곶감 빼어먹듯이, 현금지급기에서 경쟁적으로 뽑은 돈을 사치와 낭비로 탕진하다보니, 결국은 빚더미를 짊어지게 되는 경우도 우리들 주변에서 흔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누구나 안분지족(安分知足: 자기 분수에 만족하여 다른 데 마음을 두지 아니함)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경제생활 즉 수입과 지출이 알맞게 조절되어야 하는데, 누구에게나 쓰기(支出)보다는 벌어 들이(收入)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자신도, ‘신용불량자’라는 사실에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랐을 것입니다. 역시 돈이란 쓰기는 쉬워도 벌어들이기는 어려운 것이 인생사의 경험이었는데, 이들은 거꾸로 또는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다보니 졸지에 신용불량자라는 선고를 받고, 허급지급 돈을 벌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어디 마음 되로 쉽게 되는 일입니까?

  무자식(無子息)이 상팔자(上八字)라든가, 혼자 이궁리 저궁리하며 고민해 보았지만 자신들의 경제사정으로는 합당한 대안을 찾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딱! 한탕만 해서 빚 갚고 깨끗하게 손 씻자’고 온갖 나쁜 짓들을 시도해 보았지만, 미쳐 손을 씻기도 전에 덜미를 잡힌 자 또한 수없이 많지 않습니까? 또 한편으로는 스스로 책임지지 않을 곳(4차원세계)으로 도피하기도하고, 더러는 부모에게 이실직고하여 자식 잘못 기른 죄로 대신, 그 부채를 갚아 주었을 것이며 이런 숫자는 알려지지 않았으니,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자! 그렇다면 카드대출금이나 기타 부채로 부모형제나 친구 또는 이웃으로부터 명예와 신용을 잃은 여러분! 여러분이 잃어버린 그 명예와 신용을 어떻게 원상회복 시키렵니까? 물론 생각같이 쉬운 일이 아니긴 하나, 나름 되로는 연구 중이거나 생각해둔 방법들이 있겠지요. 그럼 하루 빨리 그 원상회복을 시도해야합니다. 시간은 마냥 여러분의 입장에서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그럼 이런 방법은 어떻습니까? 물론 상황에 따라 또는 경우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을 수 있을 것이나, 여기서는 부모자식(또는 가족)간에 잃어버린 명예와 신용을 어떻게 원상회복 시키려느냐? 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겠으며, 아울러 이 방법이 최선이고 모범답안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선 여러분의 힘으로는 완전변제를 할 수 없다고 결론지은 부채에 대하여, 여러분의 가족(부모 배우자 형제)에게 고백하여 용서와 양해를 구하고, 앞으로 ‘언제까지는 완전히 변제 하겠다’는 약속 하에 차용증서를 교부하고, 해당금액으로 금융기관의 부채를 완전변제 하여야 합니다. 그 후부터는 상황에 따라 또는 경우에 따라, 자신의 수입과 지출의 내용을 채권당사자에게 숨김없이 공개해야 합니다. 물론 채권자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숨김이 없어야 할 것이며, 그때부터라도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하며, 최단기간 내에 갚겠다는 의지를 보여줘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의 성의와 노력을 직접 판단하게 될 상대방으로부터는, 시너지(乘數)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만에 하나 여러분의 지금까지의 과정에 한 점 의혹이 남거나 또는 의혹의 소지가 있다면, 그 노력은 연극으로 폄하될 것이고 인격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이후부터는 용서나 구제를 다시는 받을 수 없을 것임을 명심해야합니다. 그 상대방이 비록 여러분과 피를 나눈 형제라 할지라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며, 부모자식 간 또는 형제간일수록 자존심보다는 신뢰관계가 더욱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존심이 허락운운하며 회복 노력을 포기하거나 지금부터만 잘하면 되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으로 회복하지 않으면서 타인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을 생각은 위험천만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모든 것(신용회복을 위한 노력)을 포기하는 한, 어느 누구도 여러분의 명예회복을 위해 힘써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뿐 아니라, 또한 스스로가 아니면 불가능하고 반드시 여러분이 해결해야 할 몫이며 또, 언젠가는 누군가로부터 되돌려 받거나 아니면 업(業)으로라도 되돌려 받을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앞으로 더욱 확실하고 분명해질 신용사회에 적응해 나가지 않겠습니까?

 

  

by 다사치 | 2009/07/08 07:20 | 애기(愛己) | 트랙백 | 덧글(0)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넷. 활동기(活動期: 수신제가치국평천하)

1. 애기(愛己): 수신(修身)

  가. 돈! 만악지 원인.

    (1) 돈에 대한 만인의 공통점.

    (2) 돈, 그 개체 각각의 여정.

    (3) 돈이 주는 교훈.

       (가) 배곯은 설음.

       (나) 나도 죽어야 할 텐데.

       (다) 갈등 부른 마음고생.

       (라) 배꼽이 되어버린 내 집.

       (마) 설상가상이 된 우환과 손재수.

       (사) 회상의 뒤끝에서

  나. 제(諸) 잘난 맛에 산다.

  다. 젊어 고생.

  라. 후회하지 않는 삶.

  마. 신용사회의 적응.

2. 애가(愛家): 제가(齊家)

  가. 부부는 동급(同級)이고 평등(平等)하다.

  나. 부모를 이기는 자식들.

  다. 인간사랑과 동물사랑.

3. 애국(愛國): 치국(治國)

  가. 성실한 직무수행.

    (1) 최고의 가치 창출.

    (2) 천직 의식.

    (3) 기본근무의 이중성.

  나. 당신께 고함.

  다. 서생 지몽(書生 之夢)

  라. 지도자들의 독선과 아집.

  마. 7천만 동포에게 고함.

    (1) 북한의 불변전략.

    (2) 남한의 혼돈 상황.

    (3) 2003년 6월의 현실.

    (4) 대북 정책의 전환필요성.

4. 애천하(愛天下): 평천하(세계평화)

  가. 전쟁과 테러의 중지.

  나. 대량살상무기의 폐기.

  다. 국가간의 존중.

    (1) 8․15는 반쪽 해방인가?

    (2) 부끄러운 줄은 알고있나?

    (3) 이것도 업보인가?

  라. 전 인류의 기아로부터 해방.

  마. 인간 존엄성의 실현.

 

  우리라는 인간이 태어나서, 그 동안 가정과 학교 그리고 사회에서 보고 듣고 배우고 탐구해서 얻은 지식들을 활용하여, 사회생활에서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이웃과 직장을 위해 피와 땀을 흘리며, 책임 있는 업무에 종사하는 기간으로 독립적으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시기 즉, 활동기를 맞이하였습니다. 결국 성장기는 사회인으로서의 기본적인 양식의 준비하는 단계이며, 활동기는 기본적인 양식을 기초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운 되로 실천하며 활동(행동)하는 단계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결국, 사람의 일생동안에 있어 필요한 도덕심은 유치원생쯤의 시절에 거의 다 배우고, 사회생활에 필요한 윤리와 사회의 규범은 초등학교시절에 배우고 다 알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성장기에는, 사회 공동체의 일원인 더불어 사는 사회인으로서의 기본은 다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뜻이라면, 활동기에는 지식과 지혜를 동원하고 자신의 능력과 개성을 유효적절하게 응용하여 직장에서는 상하간, 사회에서는 선후배간의 대인관계에서 덕(德)으로 대하며,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눈앞에 닥친 난관을 개척하면서, 변화무쌍한 사회현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지혜와 용기로 도전한다면, 그것은 곧 성공을 예약한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여 활동기는,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가게 되는 기간을 말하며, 최종학교의 학력은 불문이며 사회인의 일원으로 직업을 갖고 직장에 첫 출근하는 그 때부터, 산전수전 온갖 풍상을 다 겪고 최후로 직장에서 정년퇴직 하는 시기까지로 정하겠다고 한 바도 있었습니다. 활동기 역시 성장기의 경우에서와 같이, 개개인의 사정에 의하여 어떤 사람은 일찍 명예 퇴직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정년퇴직을 하고도 다른 직장이나, 유사기관에 재취업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것이므로, 어떤 직업에서든 직장인으로서 정년퇴직하는 시기까지를 활동기라고 말하고자하는 것입니다. 그때(정년퇴직)쯤이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슬하의 자식들도 결혼하고 각자 제자리를 찾았을 것이며, 소위 가장으로서나 부모로서도 해야 할 일들도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간동안에 있어, 자신의 능력으로 양가 부모님에게는 효(孝)를 실천하는 훌륭한 자식으로서, 또한 다정하고 친구 같은 남편, 그리고 지식과 소양을 두루 갖춘 자상한 아비로서의 책임완수를 위하여 최선을 다 하여야하며,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아이들의 본보기에도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소위 직장에 입사해서 정년퇴직 할 때까지는 한 직장인으로서 조직생활에서도 열의와 성의를 다하여 그 조직의 공동목적을 달성하는데도 분골쇄신(粉骨碎身: 뼈가 가루가 되고 몸이 부서진다는 뜻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노력함)한다는, 마음가짐과 함께 많은 사람들의 수범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하는 시기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성장기’에서와 마찬가지로 문제는 또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생활(활동)은 어떻게 해야 모범적이고, 후회하지 않으며 후세의 본보기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이렇게 터무니없는 질문에도,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어 아쉬움이 남습니다. 또 활동기에서 개개인이 맞이하게 되는 구체적인 사건이나 사안을 하나하나 적시할 수 없는 것 또한 마찬가지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사회활동의 형태도 개개인의 취미와 개성에 따라 천차만별이듯이, 각각 상이하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 또한, 천차만별 중의 하나에 해당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장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열거되는 몇 가지의 경우만이라도, 여러 사람들의 지혜를 모아 슬기롭게 대처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옳다고 판단되는 방향으로 살아가면 어떻겠느냐?’는 것입니다.

 

  필자는 1984년 후반(84. 08. 20~84. 11. 10)에 ○○과정 교육당시 ○○○강사의 강의내용의 일부를 소개 하고자 합니다. 당시에는 제24회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준비와, 동․서 양 진영의 이념대립이 한창이든 시절이었는데, 사회주의보다는 민주주의를 채택한 국가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세계 4대 종교(기독교․이슬람교․힌두교․불교)중에서도 기독교를 신봉하는 국가가 경제적으로 부유하며, 기독교 중에서도 구교보다는 신교를 신봉하는 국가가 경제적으로 부유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세계 4대 종교 각각의 교리들이, 경제발전의 장애가 되는 요인과 인간의 사회생활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는 면에서, 장단점의 지적도 있었으나 세계 4대 종교 중에서도 인류의 삶을, 가장 윤택하게 할 수 있는 교리가 바로 신교(新敎)인 기독교 교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외래 종교(세계 4대 종교)가 일찍부터 전래되어 포교활동이 전개되었지만, 외래 종교보다 토착신앙으로 자리잡아온 조상신을 신봉하면서도, 짧은 기간 내에 경제대국으로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시간적으로 오래된 신(魂․靈․神)과 공간적으로 먼 거리에 있는 신(魂․靈․神)보다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조상신을 섬기는 것이 외래종교를 신봉하는 것보다 ‘복을 더 많이 받은 것이 아니었겠는가?’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러한 강의내용이,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강의내용이 사리와 이치에 맞는 즉, 소위 진리라 할 수 있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로서는 맞는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이치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단언하건대 남의 조상을 숭배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조상을 숭배하는 것이 세상사의 도리라고 생각하며 또한 확신합니다.

  이즈음에서 필자는 생․노․병․사 편의 신체(神體)이야기를 인용하겠습니다. 거기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육체(肉體)에서 신체(神體: 本靈)가 이탈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신체(本靈)가 자신의 육체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에게 있어 가장 가까운 신체(神體)는 나의 몸속에 자리하고 있는 자신의 신체(本靈)가 바로 그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가장 사랑해야 할 것은, 자신의 몸속에 자리하고 있는 자신의 혼령(本靈)을 섬기는 동시에 자신의 육체를 아끼고 가꾸는 것이며, 이러한 사랑이야말로 우리 인간사의 수많은 사랑의 대상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요, 가장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by 다사치 | 2009/07/06 06:46 | ◎ 애기애가애국애천하 | 트랙백 | 덧글(0)

술은 음식이다

                 5. 술(酒)은 음식이다.

가. 술(酒)에 관한 학습.

나. 술(酒)도 배워야한다.

다. 음주자(飮酒者)의 계층(階層)

라. 일배일배 부 일배(復 一杯)

마. 우리나라의 술 예절.

 

  술의 본래 말은 ‘수블’이었다. 조선시대 문헌에는‘수울’로 기록되어 있어, 이 수블은 ‘수블­수울­수을­술’로 변해왔음을 알 수 있다.

  술은 우리인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어느 문헌에 의하면, 우리 인류가 목축과 농경을 영위하기 이전인 수렵 채취시대에는, 과일주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가장 최초로 술을 응용한 생명체는 사람이 아닌 원숭이로 알려져 있는데, 원숭이가 나뭇가지의 갈라진 틈이나 바위의 움푹 패인 곳에 저장해둔 과일이, 우연히 발효된 것을 인간이 먹어보고 맛이 좋아 계속 만들어 먹게 되었으며 주종의 변천사도, 수렵 채취시대의 술은 과일 주였고 유목시대에는 가축의 젖으로 젖술(乳酒)이 만들어 졌다. 그러다가 한참 후, 곡물을 원료로 하는 곡주는 농경시대에 들어와서야 만들어졌으며, 청주나 맥주 같은 곡류 양조주는 정착 농경이 시작되면서 녹말을 당화(糖化)시키는 기법이 개발된 후에야 가능했고, 소주나 위스키 같은 증류주는 가장 후대에 와서야 제조된 술이라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하(夏)나라의 시조 우왕 때 의적(儀狄)이 처음으로 곡류로 술을 빚어 왕에게 헌상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 후 의적(儀狄)은 주신(酒神)으로 숭배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진(晉)나라의 강통(江統)은 ‘주고(酒誥)’라는 책에서, ‘술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기는 상황(上皇: 천지개벽과 함께 태어난 사람)때부터이고 제녀(帝女)때 성숙되었다’라고 적어, 인류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술이 만들어졌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중국에서 처음 술을 빚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6000년경인 황하문명 때부터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이 시기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주기(酒器)가 당시 발굴한 용기의 26%나 되었을 정도로 술은 이 시기에 일상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든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술을 언제부터 만들어 먹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삼국지 부여전에는, 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큰 행사가 있었으니 이를 영고(迎鼓)라 하였다. 이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먹고 노래 부르고 춤추었다고 전한다. 또 한전(韓傳)에는 마한에서는 5월에 씨앗을 뿌리고는 큰 모임이 있어 춤과 노래와 술로서 즐기었고, 10월에 추수가 끝나면 역시 이러한 모임이 있었다고 한다. 고구려도 역시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동맹(東盟)이라는 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상고시대에 이미 농업의 기틀이 마련되었으므로, 우리나라에서 빚기 시작한 술도 역시 곡류를 이용한 즉 막걸리와 비슷한 곡주였으리라 짐작된다.

 

    가. 술(酒)에 관한 학습.

  주도란?

  술이 들어오면 자리에서 일어나 주기(酒器)가 놓인 곳으로 가서 절하고 술을 받아야 한다. 감히 제자리에 않은 채로 어른에게서 술을 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른이 이를 만류하면 비로소 제자리에 돌아와서 마신다. 어른이 술잔을 들어서 아직도 마시지 않으면 젊은이는 감히 마시지 못한다. 어른이 마시고 난 후에 마시는 것이 예의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른을 모시고 술을 마실 때면 특히 행동을 삼가 하는데, 먼저 어른에게 술잔을 올리고 어른이 술잔을 주시면 반드시 두 손으로 받는다. 또 어른이 마신 뒤에야 비로소 잔을 비우며, 어른 앞에서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이므로 돌아앉거나 상체를 뒤로 돌려 마시기도 한다.

  술잔을 어른께 드리고 술을 따를 때 도포의 도련이 음식물에 닿을까 보아 왼손으로 옷을 쥐고 오른손으로 따르는 풍속이 생겼다. 이런 예법은 현대에 이르러 소매가 넓지 않은 옷을 입고 살면서도 왼손으로 오른팔 아래 대고 술을 따르는 풍습으로 지금껏 남아 있다. 주도라는 것이 다소 까다롭고 어려워 보이지만 술을 한잔 먹을 때도 어른에 대한 예의를 중시했던 우리 조상의 아름다운 정신이 깃 들어있다 하겠다.

  그 사람의 주정을 보고 인품과 직업은 물론 그 사람의 주력을 당장 알아낼 수 있다. 주정도 교양이다. 많이 안다고 해서 다 교양이 높은 것이 아니듯이 많이 마시고 많이 떠드는 것만으로 주격은 높아지지 않는다. 즉 술을 마신 연륜, 같이 술을 마신 친구, 술을 마신 기회, 술을 마신 동기, 술버릇 이런 것들을 종합해 보면 그 주격의 높이가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주도는 술기운이 올라 감흥을 발산하는 방법.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는 것이 좋다. 우리 선조들은 풍류라고 하여, 시조를 지어 읊조리고 고상한 감회를 서술하여 뜻 깊은 모임을 기록으로 남겼다. 대체로 우리 전통의 음주문화는, 주도를 숭상하여 혼자 즐기는 것보다는 다같이 즐기는 것을 아름답게 여겼으므로, 독창이나 독무(獨舞)와 같이 혼자 설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제창(齊唱)이나 군무(群舞)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으니, 오로지 합창(合唱)과 만무(萬舞)를 지극한 것으로 선호했다. 합창이나 만무는 남녀노소 귀천이 없이 모두 각각 자기의 노래로 자기의 춤을 춤에, 그것이 협화음이 되고 한마당 어우러져서 사람뿐만 아니라, 천지신명과 금수곤충까지도 즐거워하는 잔치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가장 높은 주도는, 술자리가 파함과 동시에 모두 깨끗이 잊어버리고 평상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술자리의 기쁨도 슬픔도 섭섭함도 마음속에 남기지 말아야 뒷소리가 없는 것이다

 

  주법(酒法)은?

  대저 술의 법도는, 그 엄하기가 궁중의 법도와도 같으나 그 속에는 모두 사람을 사랑하는 뜻이 있고, 힘을 합한다는 뜻이 있다. 주법(酒法)의 광대함은 일언(一言)으로 다 말할 수 없으나 대체로 취한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을 으뜸으로 삼고 그 법도를 다음으로 여긴다. 성인이 술 마시는 법을 만들 때 천지자연의 법칙에 준거하여 만든 까닭에 군자가 이 법도에 따라 술을 마심으로써 덕을 크게 성취 할 수 있다. 술에는 대체로 세 가지 큰 덕이 있는데, 그

  하나는 일으키는 것이고,

  둘은 새롭게 하는 것이고,

  셋은 통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군자가 널리 학문을 깨쳤어도 주도를 통하여서만 문화와 큰 덕을 비로소 완성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학인(學人)이 처음으로 주법을 배울 때는 반드시 그 마음 일어나는 것을 경계하고 오만한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한다. 또한 학인(學人)이 술을 마시는 법을 배울 때 먼저 그 엄한 격을 몸에 익히도록 해야 하며 조용한 상태에서 술을 마셔야 한다. 술을 마심에 있어 처음부터 선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온갖 마심(魔心)이 일어난다. 그렇게 되면 술에서 마음을 상하게 되고 큰 덕을 잃게 되는 것이다. 속인의 마음에 일어나는 취마(醉魔)에는,

  첫째는 화나는 것이오,

  둘째는 슬퍼지는 것이요,

  셋째는 생각에 조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우선, 세 가지 마심이 없다면 더불어 술을 마셔도 좋다.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술자리에는 먼저 귀인이 상석에 앉는데, 우선 편안한 자리를 상석으로 하고 장소가 평등할 때는 서쪽을 상석으로 한다. 귀인이 동면하고 자리에 앉으면, 작인은 좌우와 정면에 앉고, 모두 앉았으면 즉시 상석에 있는 술잔에 먼저 채우고 차례로 나머지 잔을 채운다. 이때 안주가 아직 차려지지 않았어도 술을 마실 수 있다. 술을 따르는 사람은 안주를 먹고 있어서는 안되고, 술잔을 받는 사람은 말을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술을 받을 때나 따를 때는 술잔을 보고 있어야 한다. 술잔을 부딪치는 것은 친근의 표시이나 군자는 이 일을 자주 하지 않는다.

  또한 술을 따르고 받을 때 두 손으로 받드는 것은 공경하는 뜻이 있는 것이니 군자의 태도이다. 술을 마실 때 남의 빈 잔을 먼저 채우는 것은 인(仁)이고, 내가 먼저 잔을 받고 상대가 따른 후에 병을 상에 놓기 전에 바로 잡아서 상대에게 따르는 것은 인을 행함이 민첩(敏捷)한 것으로 지극히 아름다운 것이다(極美也) 따라진 술을 마실 때 먼저 잔을 들어 상대방에게 향하는 것은 술을 권하는 뜻도 있고 공손한 뜻도 있다. 잔을 들어 술을 다 마셨을 때 잔을 앞으로 기울여 잔의 내면(內面)을 상대에게 보여 주는 것은 마음을 내보인다는 친근한 뜻이 있다. 술을 오른손으로 따르고 두 손으로 받고 두 손으로 따르는 것은 모든 사람을 존경하고 술을 귀히 여긴다는 뜻이다. 또 두 손으로 마시는 것은 술을 따라 준 사람을 귀히 여긴다는 뜻과 술은 중히 여긴다는 뜻이 있다.

  대저, 술자리가 이미 시작되었으면 술병은 천(天)이요, 술잔은 지(地)다. 술은 천이며 안주는 지다. 그러므로 술병으로 술을 따른 후에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고는 다시 잔을 채운 후에 안주를 먹는다. 술잔에 술이 반드시 채워진 연후에 안주를 먹을 수 있는 것도 천이 먼저 존재한 후 만물이 운행한다는 뜻이 있다. 그리고 작인은 충기(沖氣)의 뜻이 있으므로 천도되고 지도된다. 그러므로 작인이 술을 따를 때는 천이요, 받을 때는 지고, 술을 마실 때는 천이요, 안주를 먹을 때는 지다. 천(天)과 지(地)란 선후의 뜻이 있고 또한 주종(主從)의 뜻이 있으므로 술자리에서 술을 따르는 일은 백사(百事)에 우선하는 것이고 안주를 먹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또한 술은 남편에 비유되고 술잔은 부인에 해당되므로 술잔은 남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장부의 자리에서 한 번 잔을 돌리는 것은 소중한 물건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줄 수 있다는 뜻이 있으므로 비난할 수는 없다. 단지 그 일을 자주 한다는 것은 정이 과하여 음절(陰節)이 요동하는 것이라 군자는 이를 삼간다. 그리고 안주를 먹는 일에 있어서도 첫 잔에 안주를 안 먹는 것은 양기(陽氣)가 아직 숙성하지 않은 까닭에 어린 남자가 여자를 취하지 않는다는 뜻이 있으므로 아름다운 일이라 할 수 있고, 또한 남에게 먼저 안주를 권하는 것도 흥미(興味)를 양보한다는 뜻이 있으므로 또한 아름다운 일이다. 술이란 마음을 순일(純一)하게 하면서도 만물의 정에 다 통하게 한다. 그런 까닭에 고선(古仙)이 말하기를 ‘산중에 있어도 술로써 벗한 즉 천하를 안다’고 하였으며 엄정한 성인도 술만은 마음껏 마셨던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비록 학문을 크게 성취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술을 바르게 마실 수 있다면 나는 이 사람을 군자라 말할 것이다.

  대저, 술이란 마음이 바르지 못한 즉 잘 마실 수 없는 것이고, 술을 잘 마시지 못한 즉 정이 편협(偏狹)하다. 정이 편협한 사람은 남을 즐겁게 하지 않고 남을 크게 용납(容納)하지도 못한다. 술이란 많이 마실수록 변화가 많고 즐거움도 많지만 그 어려움 또한 극이 없다. 혹자(或者)는 말하기를 ‘술은 인간에 이(利)롭지 않다. 정신을 흐리게 하고 몸을 상하게 한다’고 ...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술을 마심으로써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은 그 속에 맑음이 있는 것이고 몸이 피곤해지는 것은 그 속에 굳건함이 있는 것이다. 술 마시는 일은 지극히 어려우나 차차 익혀 나가면 마침내 성취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인간의 몸은 그 기(氣)가 약(弱)할 때 주(酒)를 적게 받아들이고 기가 다한 즉 술 마시는 일은 불가하다. 또한 인간의 마음은 흥(興)이 약한즉 술을 적게 받아들이고 흥이 다한 즉 술 마시는 일은 불가하다. 기와 흥이 다한 즉 어찌 살 수 있을 것인가? 속인(俗人)은 술로써 흥(興)을 기르고 군자(君子)는 기(氣)를 기른다. 도인(道人)은 이 둘을 함께 기른다. 그런 까닭에 속인(俗人)의 술은 몸을 상하기 쉽고, 군자의 술은 마음을 상(傷)할 수 있다. 도인(道人)의 술만이 몸과 마음을 이익케 한다.

 

  주색우학(酒色友學). 천하에 인간이 하는 일이 많건만,

술 마시는 일이 가장 어렵다. 그 다음에 어려운 일은,

여색을 접하는 일이요, 그 다음이,

벗을 사귀는 일이요, 그 다음이

학문하는 일이다.

  이 네 가지는 군자가 힘써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군자가 널리 여행을 할 때도 그 지방에 도착(到着)해서는 그 지방의 술부터 음미(吟味)하는 것이다. 만일, 경치만 구경하고 술을 들지 않는다면 어찌 그 지방에 있었다 하리요. 한평생을 살면서 술을 들지 않는다면 어찌 이 세상에 있었다 하리요.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말 안 할 사람과 말을 하는 것은 말을 잃어버리는 것이요, 말할 사람과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잃는 것이다’라고… 술 또한 이와 같다. 술을 권하지 않을 사람에게 술을 권하는 것은 술을 잃어버리는 것이요, 술을 권할 사람에게 권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군자는 술을 권함에 있어 먼저   그 사람됨을 살피는 것이다. 작인이 술을 받아,

한 잔을 마시는 것은 견(見)이라 말하고 이는 예(禮)로서 가하다.

두 잔을 마시는 것은 상(想)이라 말하고 정(情)으로서 가하다.

세 잔을 마시는 것을 좌(坐)라고 말하고 이는 교(交)로서 가하다.

  군자가 서로 마주 앉아 세 잔의 술을 마시면 이는 사귐이 성립된다. 사람과 사람이 사귐에 있어 천하에 술 만 한 것이 있을까? 술이란 그것을 마셔서 몸에 그 기운이 퍼지는 것을 마치 사계절(四季節)이 변화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 처음부터 갑작스레 마셔서는 안되고, 이미 마신 술의 기운이 마음에까지 와 닿을 때 다음 잔을 마시는 것이고 서서히 취해 가는 것이 좋다. 사계절의 운행은 쉬지 않고 점차 흘러가는 것이고 술자리는 그 흐름이 음악과 같아서 그 곡이 끊어지지 않고 바르게 흐르면 몸의 기운이 상하지 않고 흥을 높여서 술을 오래 마실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술이란 어떻게 대(對)하여만 하는 것일까?

  도인(道人)이 말하기를, ‘취기의 운행은 여인의 마음과도 같아서 그 진퇴를 알 수가 없다’고… 또 선인(仙人)이 말하기를, ‘취기의 운행은 미리 정해진 것이 없다. 작인의 마음먹기에 따라 그 공격이 오묘하다’고… 대저, 취기의 운행은 그 정해진 방향이 없다.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 이것은 노자(老子)의 천하모(天下母: 道)와 같다. 이런 까닭에 군자가 주도를 귀히 여기는 것이다.

  혹자(或者)는 말한다. ‘술을 마시기 전에 음식을 많이 먹어 두어야 한다’고… 이 또한 어리석다. 술의 기운(氣運)이 음식에 숨어 있은 즉 그 흐름을 더욱 예측하기 어렵다. 천도(天道)는 빈곳으로 흐른다. 물도 빈곳으로 흘러 낮은 곳에서 안정한다. 술의 기운도 빈곳으로 가서 안정(安定)한다. 술을 마시기 전에 음식을 먹어서 술의 기운을 지연(遲延)시키면 그 힘은 더욱 축적되고, 술의 성품이 천(天)의 성품이므로 차 있는 것을 파(破)하고 비어 있는 곳을 이롭게 한다. 술을 마시기 전에 음식은 술을 거부하게 되고, 취기의 흐름을 부자연스럽게 하므로 이는 크게 위험(危險)하다. 예로부터 군자가 첫 잔에 안주를 들지 않는 것도 술의 성품을 빈곳에서 드러나게 하자는 뜻이 있는 것이다. 음식으로 이를 숨겨 주는 것은 술의 폭성을 도와주는 것이 되고 반드시 몸을 상한다.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는 것은 몸을 보(補)하는 것이므로 이는 가하다. 비고 차는 도리에 능통하면 주도에도 능통할 수 있다. 음식은 반드시 술에 뒤따르는 것이다. 비어 있는 것은 참으로 위대하다. 이곳에서 모든 것이 계획된다. 술잔도 비어 있는 곳에서 큰 뜻이 시작(始作)된다. 따라진 술을 마심으로써 지난 일의 결말이 되고, 비어진 잔은 새로운 일의 시작이 된다. 음식을 먹지 않고 술자리에 임해서 먹는 음식은 몸에 크게 이롭고 마음도 즐겁다. 몸을 비우고 술과 가까이 친하는 것은 술의 성품을 접하는 좋은 방법이 된다. 이는 또한 몸을 크게 활동하게 하여 백병(百病)을 치료한다. 만물의 이치는 차 있는 곳에서는 쉬고자 하고, 비어 있는 곳에서 크게 일어나려고 한다. 음식을 많이 먹고 술자리에 임하는 것은 쉬고자 하는 뜻이다. 술자리는 쉬는 곳이 아니고, 빈곳에서 크게 일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묻건대,

  "술을 마시기 전에 색을 접하는 것은 어떤가?"

답하되,

  "이는 가하다"

  방사(房事)는 대체로 정기를 소모하는 것이므로 몸은 비게 된다. 빈 몸, 이것은 술을 마셔도 가하다. 술을 마신 후에는 술의 기운을 지켜야 하므로, 방사(房事)는 극히 해롭다.

대저, 만물의 유전(流轉)은 빈곳은 채워지고, 찬 곳은 흩어진다. 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아서 빈 마음은 채우고자 하고 채워진 마음은 변화를 일으킨다. 술을 마심에 있어서도 빈 잔은 채우고, 찬 잔은 마셔서 그것을 비운다. 빈 잔에는 훌륭한 술을 채우면 좋을 것이다. 인간의 빈 마음에는 무엇을 채울 것인가? 만물의 빈곳에는 무엇이 채워질 것인가?

  술잔의 차고 빔, 오! 술의 덕됨이여!

 

     나. 술(酒)도 배워야 한다.

  이렇게 우리인간의 생활과 밀접한 술이 많은 사람과 어울려 마실 수 있는 하나의 음식인 동시에, 특히 인간 개개인의 친분을 돈독히 하는 매체역할을 한다는 것도 잘 아는 사실일 것입니다. 이러한 술을 마시는데도 반드시 주도와 주법을 따라야 할 것이나, 현대생활에 맞게 이를 알고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필자 역시 주도와 주법에 대하여는 잘 모르지만 그저 상식적으로 대처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들 주변에서는 술로 인하여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행위에서부터 인륜을 저버리는 행위까지 인간답지 못한 주정뱅이들을 흔하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술 때문(탓)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조금만, 그 주정뱅이의 성장과정과 가정환경을 살펴보면 그것은 모두 그들 부모의 책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술로 인하여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주정뱅이(酒邪: 술 마신 뒤에 버릇으로 하는 못된 언행)들은 대체로, 어떤 통제를 벗어난 조심성 없는 나쁜 친구들과 같이 술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물론 친구라고 다 똑 같은 친구는 아니지요. 친구들 중에는 위아래를 제대로 구분하는 친구와 그렇지 못한 친구, 부모님을 하늘 같이 섬기는 친구와 그렇지 못한 친구,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은 친구와 그렇지 못한 친구, 이웃의 어른들을 존경할 줄 아는 친구와 그렇지 못한 친구 등을 비롯해, 여러분의 자녀들이 사귀는 친구들도 천차만별입니다.

  그런데 친구들끼리도 부모님의 뜻과 같지 않게, 같은 의식의 수준끼리 모이고 같은 지식의 계층끼리 놀고, 같은 행동거지의 부류끼리 사귄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위아래를 제대로 구분하는 친구, 부모님을 하늘같이 섬기는 친구,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은 친구 이웃의 어른들을 존경할 줄 아는 친구들끼리, 술을 배워도 그것은 크게 문제 될 것 없겠으나, 그렇지 못한 친구들끼리 모여 술을 배우는 경우에는 문제가 심각해질 수도 있을 것이며, 일상생활에서 행하는 그들의 언행도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즉 위아래를 제대로 구분할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술을 먹고 주기(酒氣)가 들게 되면 우선 언행이 거칠어질 것이고, 부모님을 우습게 생각하는 상태에서 술을 먹고 주기가 들게 되면 폭언이 난무할 것이고,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술을 먹고 주기가 들게 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질 것이고, 이웃의 어른들을 존경할 줄 모르는 상태에서 술을 먹고 주기가 들게 되면 안하무인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위아래 사람을 모르고 자신의 신분적 지위를 모르고 자신의 주변적 환경을 모르는 나쁜 친구들끼리, 술을 마시고 배우는 습관이 들게 되면 결국 주사(酒邪)로 이어져, 그런 술자리가 반복 될 때마다, 자기감정의 통제 불능으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현 상황과 사회적으로 뒤떨어진 자신의 처지를, 나라 탓 사회 탓 더디어 조상 탓에까지 이르게 되고 ‘왜? 나만 취직이 안되고, 왜? 나만 이렇게 비참해지나?’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면, 다음부터는 부모형제 탓으로 돌아 더디어 감정이 폭발하게 되며 온갖 욕설과 고성이 난무하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평소 불만이 있는 사람에게는 화풀이성 행패가 이어지면서, 알콜(술) 중독자에서 인륜까지 저버리는 일생을 살아가게 될 알콜 중독자의 대부분은 이와 비슷한 단계를 밟아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술을 제대로 배우게 될까요? 술을 제대로 배우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모님이 계신 자리에서, 또는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자신보다 윗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술을 배우게 해야 합니다. 예컨대, 우리 같은 평범한 보통사람의 경우에는, 조상님들의 기제사를 지내거나 설날과 추석 같은 명절 때마다 차례(茶禮)를 지내게 되는데, 이 기회를 헛되이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조상님들의 제사나 명절의 차례를 지내고 나면 조상님께 올렸든 술을 제사나 차례에 참석했든, 모든 가족들이 술을 나누어 마시는 즉 음복(飮福)의 절차가 따르게 되는데, 이때가 되면 아무리 나이가 어린 초등학교 학생이라도 음복을 하게 해야 하며, 그럴 때마다 술에 대한 예의범절과 상식들을 들려주고 특히 술을 잘못 배운 사람들의 행실의 예(例)도 들려주며, 또한 술도 음식이므로 과음하지 않게 해야 하고 만약 주기가 돌아 ‘힘들어하거나 어색해’하면, 반드시 자기 방에 들어가서 조용히 쉬도록 습관화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님과 함께 술을 배운 자녀들은 밖에서 친구들과 같이 술을 먹어도, 조심스런 언행으로 행할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술 마시는 취향이 다르거나 주사를 부리는 친구와는, 어울리기를 꺼려하게 될 것이고 결국 고약한 술버릇으로부터 해방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술을 배운 후부터는, 술만 마시고 나면 집 생각을 하게 되고 부모님을 생각하게 되며 어른들을 피하면서, 조용히 집으로 들어가 부모님께도 들키지 않으려고 까치발을 해가며, 자신의 방으로 귀신도 모르게 들어가 잠을 청하게 될 것입니다.

 

     다. 음주자(飮酒者)의 계층(階層)

  필자는 위암(胃癌)진단을 받은 후, 위 절제수술을 하고는 술을 마시지 않으나, 그 이전에는 제법 술을 마셨습니다. 어쩌다가 동료들과 술을 마실 기회가 있을 때면, 삼겹살에 소주 2병(4合)정도는 마셨으니 결코 적은 양은 아니었지요. 그런데 한창 젊고 혈기 왕성할 때는 이보다 더 마신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럴 즈음 난생 처음 대단한 미식가(美食家) 한 분을 만나게 되면서, 술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그 경험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때는 1984년 초에 필자가, 그분(당시 약 50대 중반)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부임을 하면서 몇 차례 술자리를 가진 후였는데, 그분의 판단으로 필자의 주도와 주법, 주석에서의 예의범절 등 술 마신 후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든지 알 수 없었지만, 어느 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술을 마시는 사람은 대체로 3가지 계층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으뜸으로는 주선(酒仙)이 있고 그 다음으로는 주당(酒黨)이 있으며, 끝으로 주졸(酒卒)이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최 상급계층으로 주선(酒仙)을 꼽는다고 하였습니다. 주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아니하며 술에 취하기보다는 주향(酒香)과 함께 음식의 맛과 향을 즐기고, 아무리 처음 가는 요정(술집)이라도 외상술을 마실 수 있을 정도로 신뢰감을 풍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요정주인 스스로가, 술을 마시는 신선 같은 분이 우리 집을 찾아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을 만큼 분위기가 풍겨져야 하고, 또한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매력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사업상이든 업무상이든 막론하고 접대 받을 사람이 선호(지정)하는 즉, 가고 싶어 하는 요정(술집)으로 가서 접대해야 한다고 합니다. 요즘 들어서는, 주로 술을 사(접대 하)는 사람(자신)이 잘 알고 있는 요정(술집)으로 안내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은데, 이렇게 해서는 주선의 경지에 오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왕지사 술을 사(접대 하)게 되었으며 헛말으로라도 ‘어디 잘 알고 있는 요정(술집)이 있으면 그 집으로 모시겠습니다’라는 정도는 할 수 있어야 술 접대의 첫 순서라고 할 것입니다. 접대 받는 사람이 왜(?) 그 요정(술집)에 계속 가고 싶어 하는지는 불문이어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이에 필자는,

  “○○○께서 바로 현대의 주선서열에 가장 가까운 분이십니다”

하였더니 결코 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구분하는 주선의 경지에는 결코 도달하지는 못했다하더라도 필자의 판단에는 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 주선의 반열에 가장 가까운 분이라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또한 주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술 접대로 끝나고 그 후의 어떤 접대도 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요정의 주인이나 종업원과의 하루 밤 정분을 나누고 만리장성을 쌓는 추억을 갖는 일까지는 주선(周旋)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주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고 자신의 몸을 지키는 주도와 주법에 익숙하고, 또한 예의범절이 생활화되어 있으니 타인에게 실수하는 일은 물론이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일도 결코 없을 것입니다. 결국 술은 음식의 일종인 기호 식으로, 너도 마시고 나도 마시는 음식이므로 그로 인한 주기를 이기지 못하여, 인간성을 의심받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할 것이며, 주도와 주법을 찾아 익히고 실천하는 노력 없이는 절대로 주선(酒仙)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음은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중급계층에 해당하는 사람을 주당(酒黨)이라고 합니다. 주당에 해당하는 사람은 위에서 논한 주선까지는 못 가고, 또 다음에 논하게 될 주졸을 면(免)한 사람들을 일컫는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청탁(淸濁: 맑은 종류의 술이든 탁한 종류의 술이든)불명 또 주량불문이며, 앞부분의 ‘효(孝)’편에서 논한바와 같이 성격형성기에 가정교육은 어느 정도 이상은 받은 자들로서, 폭주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폭탄주까지 사양하는 법이 없고 주기가 오르기 시작하면, 자신의 기분에 도취되어 다소 소란스러운 면도 있을 것입니다.

  주당들이 말하는 소위 기억이 없(필름이 끊겼)다고 하는 사람도 여기에 해당하며, 비록 기억이 없는 만취상태에서도 타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 않는 정도의 행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술을 마시고 타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상태로, 혼자서 중얼거리거나 흥얼거리는 정도의 소란스러움은 주당이며, 노래를 하는 경우에도 평소와 같은 옥타브와 음정 박자라면 역시 주당이 되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겨우 주당이 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따라서 주당에 해당하는지 주졸에 해당하는지의 척도는,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음식의 일종인 술을 마시고 다른 사람의 기분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달려있다고 판단하면 될 것입니다.

  ․끝으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최 하급계층에 해당하는 사람을 주졸(酒卒)이라 합니다. 술의 첫 잔은 목구멍이 마시고, 둘째 잔은 술이 술을 마시고 셋째 잔부터는 술이 사람을 마신다는 어떤 이의 말과, 술은 향정신성 의약품이라는 어느 의사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마신 술의 량이 한계를 넘어서면 제정신이 아닌(정신이상자와 같아지는)사람 모두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주졸은 우리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우로 술을 마시고 조금이라도, 타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람에서부터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행동을 하거나 주사를 부리는 사람 모두가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주졸의 범위는 넓고도 넓어 생각보다는 많은 편이라고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술을 마시고 주기에 의하여 고성방가 또는 노상 방뇨를 하거나, 괜히 타인에게 시비를 걸어 행패를 부리거나 옆 사람의 말꼬투리를 잡고 시비하거나, 공중도덕과 기초질서를 문란케 하거나 남녀노소의 변별력이 떨어지거나, 안하무인의 지경이 되거나 그 류형은 일일이 다 열거하지 못할 정도로 많을 것이나, 예시되지 않은 형태라도 타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정도면, 모두가 주졸 이라는 것입니다.

 

     라. 일배일배 부일배(一杯一杯 復一杯)

  일배일배 부일배(一杯一杯 復一杯: 한잔 한잔 또 한잔)라는 말은, 대작(對酌: 2명 이상에서 십 수명이 한 좌석에 마주 또는 둘러앉아)또는 권꺼니 잣꺼니하는 상황으로, 옛 시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술은, 우리인류의 역사와 거의 동시에 시작된 것으로 적어도 우리 동양에서는, 서로 권하면서 마시고 권하기에 마시고 또 모두가 권해서 더불어 마시는 독특한 음주문화로, 결국은 모두가 거나하게 취해야만 그 술자리가 즐거웠고 친목을 다지며, 특히 즐거운 술자리였다고들 칭송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술잔을 돌리는 문화가 보편화 된 습성으로 자리 잡아 오다가, 최근 서양문화의 영향으로 특히 젊은 층에서부터 약간씩 자제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술잔을 돌리는 문화는 계승되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와 같이, 학연 지연 혈연 등 특수한 인맥구성으로 세를 과시하는 술자리에서는 더욱 성행하고 있는데 이렇게 술잔을 돌리는 경우에, 자신이 사용하든 술잔을 가정적이든 사회적이든 윗사람에게 권하는 경우, 술잔을 손이나 수건으로 닦아서 권하는 경우를 비롯해 물에 씻어 권하는 경우 등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일행 중에는 어떤 질병에 해당하는 원인 균의 보균자도 있을 수 있고 혹은, 어떤 질병에 해당하는 원인 균에 의한 잠복기간 중에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 조금씩은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어떤 ‘전염성 질병이 있는 사람 있느냐?’며 소위 인맥구성의 동질성을 깨(찬물을 끼 얹)는 분위기를 연출하려는 사람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런 난제들을 어떻게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예! 이렇게 하면 됩니다"

우선 어떤 모임에서든 그 일행은 술상을 중심으로 둘러앉게 되겠지요. 그러면 주인은 인원수에 따라 술잔을 내오게 될 것이고 주문도 받을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주인을 조용히 불러 지금 내어온 술잔과는 확연히 다른 술잔 몇 개(7~ 8명당 1개씩)를 더 달라고 부탁하십시오. 주인은 틀림없이 다른 술잔 몇 개를 더 가지고 와서 여러분에게 맡길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좌중의 시선을 집중시켜놓고 설명하십시오. 각자 개인 앞에 놓인 술잔은 직접 입을 대고 ‘마시는 잔’이며, 방금 주인이 갖고 온 다른 몇 개의 잔을 쳐들고 여기 있는 잔은 ‘돌리는 잔’이라고 알려주고, 돌리는 잔의 술은 누구든지 입에 대고 마시지 말 것이며 따라서, 돌리는 잔 이외의 잔(즉 자신들의 앞에 놓여있는 잔)은 절대로 남에게 권하지 말고 ‘돌리는 잔’에만 술을 채워 남에게 권하라고 일러주면서, 술이 채워진 돌리는 잔이 자신에게 돌아오면 자신이 마시든 잔이 비워있을 때는 그 ‘마시는 잔’에 붓고, 만약 자신이 마시든 잔에 술이 남아 있을 때는 마시는 잔의 술을 먼저 마시고 그 빈 잔에, 돌리는 잔의 술을 붓고 그 ‘돌리는 잔’을 다시 옆 사람에게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돌리는 잔’의 돌리는 방향도 왼(오른)쪽으로 라고 지정해 주는 것도 물론입니다. 이렇게 하여 모든 일행은 여러분이 일러준 규칙을 지키게 되면, 윗사람이나 선배에게 술잔을 권할 때도 잔을 닦거나 물에 씻지 않아도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므로 서, 서로가 눈치 볼 것도 꺼림칙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위생상 깨끗한 술자리가 될 것이며, 아울러 기분 또한 개운해 질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앞으로는 여러분이 이런 규칙을 선도하고 아울러 전도사역할까지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 우리나라의 음주예절.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술의 문화가 대단히 고상하여, 근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속을 이루어 왔다. 술을 음식 가운데 가장 고귀한 음식물로 인정한 우리 민족은, 술 자체를 숭상할 뿐만 아니라 술에 따른 그릇까지도 중시하여 특별하게 제작하였다. 또한 전통적으로 소학에서 술에 임하는 예법을 익힘으로써 누구나 술을 마시는 범절이 깎듯 하여 술로 인한 추태나 분쟁이 거의 없는 풍속의 고장, 예의의 나라가 되었던 것이다. 가는 곳마다 요기(療飢)를 위하여 술집은 있었으나 몰려다니며 먹는 습속이 없었고, 술을 먹는 모임에는 모름지기 노래와 춤 및 시조를 곁들이므로 써, 운치를 돋구어 우아하고 고결한 풍류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술집에 노래와 춤을 추는 기생은 있었지만 옆에 나란히 앉아 같이 마시는 작부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고대 제천의식에 군무(群舞) 놀이가 있었다는 것을 보면, 옛날부터 술을 하늘에 바치고 기분을 돋구는 음식으로 활용하여 왔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삼국시대에는 이미 술에 대한 금법(禁法)이 발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술의 역사가 이와 같이 장구한 까닭에, 술에 대한 인식이나 술을 먹는 자세가 잘 가다듬어졌던 것이다. 옛사람은 일찍이 하늘과 땅 그리고 조상 및 신령에게 제사할 때에는 술을 바쳤지만, 도깨비나 마귀에게는 술을 준 일이 없으며, 20세가 되어 관례(冠禮)를 한 성인에게는 술을 권하였지만 미성년자에게는 절대로 술을 먹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자제력이 있는 사람이나 체력이 강건한 사람만이 술을 먹을 자격이 있는 것임을 뜻한다.

  술은 마시는 사람에게 두 가지 작용을 하게 된다. 적당히 먹으면 기분을 돋구어 힘을 내게 하지만, 지나치게 먹으면 이성을 마비시켜 자제력을 잃게 한다. 따라서 술을 마실 때는 반드시 상대의 주량에 한계가 있음을 먼저 명심하여야 한다. 따라서 체력이 나약한 미성년과 지각이 흐린 정신박약자에게 술을 주는 것은, 아주 부도덕한 행위로 규정하여 사회적 규탄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음주 전통이 곧 술을 대단히 고귀한 음식으로 승격시킨 것이다. 남으로부터 술을 대접받음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성숙한 인격자임을 뜻하게 되어 마침내 한 몸의 영광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 조상들의 음주예절은 두 가지가 있다. 그 첫째가,

향음주례(鄕飮酒禮)요, 두 번째가,

군음(群飮)이다.

  향음주례는 주(周)나라 주공(周公)이 제정한 최고의 음주예절로, 세종대왕이 각 향교나 서원에서 학생들에게 교과 과목으로 가르치게 했던 6(冠, 婚, 喪, 祭, 相見, 鄕飮酒)禮 가운데 하나로, 특정인에게만 술자리를 마련하여 대접하는, 향례(饗禮 또는 享禮)와 참석자 전원이 함께 마시는 연례(燕禮 또는 宴會)로 나눈다. 향례(饗禮)에서는 술이나 음식을 먹는 의미보다는, 어른에게 음식을 공양하는 예의절차를 밝히면서 존경과 찬양의 뜻이 크기 때문에, 술 한 잔 먹는 예법에 절이 백 번이고, 연례(燕禮)에서도 음식은 고루 나누어 먹어야 되고,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는 모임의 가치를 찾기 위하여 종일 마셔도 취하지 않도록, 활쏘기와 투호 놀이를 곁들여 술자리를 교제의 자리로 승화시켰다.

  옛사람이 향음주례를 거행함에 매우 경건하고도 신중하였던 까닭이, 바로 이와 같은 예절의 엄숙성으로 인하여 자기의 모든 인격이 술자리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향음주례의 일관된 정신은

  첫째, 의복을 단정하게 입고 끝까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말 것.

  둘째, 음식을 정갈하게 요리하고 그릇을 깨끗이 할 것.

  셋째, 행동이 분명하여 활발하게 걷고 의젓하게 서고 분명하게 말하고 조용히 침묵하는 절도가 있을 것.

  넷째, 존경하거나 사양하거나 감사할 때마다 즉시 행동으로 표현하여 절을 하거나 말을 할 것 등이다.

  사람에게 귀중한 것은 오직 예법을 항상 지키는 것이니, 예법은 절을 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절을 함으로서 끝난다. 가는 데마다 절하고 일할 때마다 절하고 줄 때마다 절하고 받을 때마다 절하며, 끝날 때마다 절하는 것이니 이것은 지극한 존경과 감사함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예법이 무너지는 것은 절하지 않음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하였다.

  향음주례의 전통으로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는 우리의 음주예절은, 술과 음식을 너무 질펀하게 하지 아니하며 안주는 자기의 접시에다 덜어다가 먹었던 것이며, 술잔은 돌리되 반드시 깨끗한 물에 잔을 씻어서 술을 채워다가 권하여, 존경심과 친밀감이 전달되도록 한다. 술좌석에서 잔이 한 바퀴 도는 것을 한 순배라고 하는데, 술이란 대개 석 잔은 훈훈하고 다섯 잔은 기분 좋고 일곱 잔은 흡족하고, 아홉 잔은 지나치므로 7잔 이상은 절대로 권하여 돌리지 아니하였다. 예절이란 가면 오고 또한 주면 받는 것이므로, 술을 대접받았을 때 뒤에 다시 갚아야 하지만 적당한 시간적 여유를 두어, 그 두터운 뜻을 길이 간직하고자 하였다. 오늘날 사람은 가끔 즉시에 즉흥적으로 갚아버리기 위하여, 2차니 3차니 하면서 몰려다니지만 오히려 경박한 세태의 풍조라고 하겠다.

  우리 조상들은 술좌석을 반드시 공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이나 제자들을 동행하여 술심부름을 들게 함과 동시에 술 먹는 법도를 익히게 하였으니, 술자리를 고상하게 승화시켜 일컬은바 풍류(風流)라고 하였다. 풍류란 덕풍의 유행이니 모든 사람이 그 덕성스러운 행실에 감동하여 본받는다는 이야기이다. 음식 앞에 귀하고 천함이나 늙고 젊음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나누어 먹는 자세와 존경하고 사양하고 감사하는 태도를 갖추었고, 가끔 기생을 불러서 음악과 춤과 시조로 흥취를 돋구되, 반드시 그 자리를 따로 하여 난잡함이 없게 하였다. 더욱이 술자리의 뒤끝이 아주 깨끗하여, 좌중의 가장 나이 많은 이가 일어나면 모두 다 같이 술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주인에게 감사한 뜻을 표하는 것은 그 다음날 하는 것이요, 술자리를 파하는 순간에 답례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술자리에서 대접을 받는 손님은 즐겁고 흡족하게 마시어 주인의 자리를 빛내주는 것이 도리였고, 주인은 손님이 흥겹게 취하여 약간의 실언이나 실수를 하여도 어여쁘게 보아 거두어 주는 것이 도량이었다.

  또한 술자리에 아는 사람이 오면 반드시 한잔 술을 권하였고, 술을 혼자 마시는 것을 수치로 알았다. 이웃사람이라도 불러서 함께 마시었는데, 심지어 계원끼리 먹는 술이라도 아는 사람이 지나가면 불러서 술을 주는 경우까지도 있었다. 끝으로 술에 임하는 가장 높은 경지는, 술자리에서의 즐거움도 섭섭함도 영예도 실수도 모두 한 번의 웃음 속으로 흘러 보내버리는 것이다. 이렇듯 가슴속에 미련을 남겨두지 아니할 줄 알았던 한겨레의 독특한 음주문화는, 지극히 합리적이라고 할 것이다.

  대체로 이러한 향음주례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늦가을이나 겨울철에 개최하였던 것이니, 한 해의 농사일을 끝내고 그 동안 소원했던 사람에게 한 해가 가기 전에, 따뜻한 자리를 만들어 정을 나누는 성의를 표하고자 함이었다. 이러한 행사는 대체로 학교나 관청 및 마을에서 거행했는데, 반드시 공개된 광장에서 거행하여 모든 사람이 보고 배울 수 있게 하였다. 그리하여 주최측이 주인이 되고 초청 받은 사람이 손님이 되어서, 서로 공경하고 사양하고 감사하는 예절이 넘치게 하였으니 향례(饗禮)에서, 맨 처음에 주인이 큰손님에게 첫 술잔을 드리는 것을 헌(獻)이라 하고, 다음에 손님이 그 술을 마시고 잔을 씻어서 주인에게 드리는 것을 작(酢)이라고 하며, 연례(燕禮)에서 주인이 먼저 마시고 여러 손님에게 술을 권하는 것을 수(酬)라고 한다.

 

  이에 반해, 군음(群飮)은 오직 떼지어 모여서 술과 음식을 부지런히 마시고 먹는 행위이며, 멋대로 취하여 노래하고 즐기기 위한 술 마심이다. 따라서 군음에는 일정한 형식도 의식절차도 없이 누구든지 자유롭게 거리낌 없이 즐기는 것이니, 애당초 그 예절을 논할 것이 없는 것이다. 경주의 포석정이나 부여의 낙화암 같은 곳이 군음의 유적지라고 할 것이다.

  술자리에서 가장 경계할 일은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많이 마시고 실수를 하는 것인즉, 말이 많아 떠들고 다투거나 몸을 가누지 못하여 비틀비틀 술자리를 어지럽히는 행위이다. 이러한 화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우리나라는 조선왕조시대에, 향음주례를 보급하여 떼지어 마시는 군음(群飮)의 습속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오늘날 우리들의 음주예절을 반성하고 우리 조상의 음주풍속을 되살려, 술 앞에 최소한의 예절이 무엇인 줄을 깨달아 보람 있는 자리를 만들 지혜를 갖추어야 될 것이다. 술 앞에 체신을 지킬 능력도 없고 술을 이겨낼 체력도 없으며, 또한 술자리에서 정분을 나눌 줄도 모르면서 오로지 술로 자기의 근심이나 잊으려 하거나, 술기운으로 문제를 결단 내려 하는 사람은 참으로 술을 먹을 자격이 없다고 할 것이다.

 

  술은 흡수가 빠른 음식이기 때문에 독한 술부터 마시면 안 되고, 가급적 순한 술부터 마셔야 몸을 지탱할 수 있다. 반드시 전통적으로 내려온 주법에 따라 빚은 술을 선택하여야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것이므로, 비법이니 비방이니 하여 처음 보는 술은 삼가고 시험해야 한다. 우리 조상들이 즐겨 마셨던 술은 일반적으로 다섯 가지가 있는데,

  술을 담아 하룻밤 익힌 단술 곧 예(醴)와,

  막걸리나 탁주라고 하는 요와,

  세 번 거듭 빚은 술이나 소주를 일컫는 주(酎)와,

  밑술로 모주나 박주(薄酒)라고 일컫는 이와,

  위에서 뜬 좋은 술로 지주(旨酒)라고 하는 서가 있고,

또한 걸러 놓은 술 위에 뜬 삭은 지에밥의 밥알인 술구더기의 색상에 따라 다섯 가지의 명주(名酒)가 있으니,

  첫째 술구더기가 모두 표면에 동동 뜬것은 범제(泛齊)이고,

  둘째, 단술에 뜬것은 예제(醴齊)이며,

  셋째 흰 술에 뜬것은 앙제요,

  넷째, 빛이 붉은 술에 뜬것은 제제(醍齊)이며

  다섯째 술구더기가 아래로 가라앉은 것은 침제(沈齊)인데 우리가 말하는 동동주이다.

맑고 맛이 좋은 술은, 위로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내고 쇠약한 사람과 늙은 노인의 원기를 회복시키는 약물로 쓰기 때문에, 대단히 정결하게 만들고 소중하게 간직하며 더욱이 성년식이나 결혼식 그리고 장례식과 제사 및, 손님을 대접하는 연회에 여러 사람이 먹는 음식이므로 정성을 다해서 만들었다.

  근세에 있어서 음주예절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웠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술자리에 들어 갈 때로부터 좌석에 앉을 때까지 어른이 맨 앞에 서고, 다음 차례로 줄을 서서 질서정연하게 입장해야 하며 좌석에 앉을 때에도, 어른이 먼저 앉은 다음에 차례로 제자리에 앉아야 한다. 그 차례를 정함에는 일반사회에서는 나이순을 기준으로 하고, 관청에서는 관작(官爵)을 기준으로 삼았으며, 학교에서는 인격 순으로 한다.

  이 원칙은 끝까지 지켜야 하는데 술과 음식도 어른이 먼저 먹어야 차례로 따라 먹으며, 어른이 다 마시거나 먹지 않으면 아래 사람들도 그대로 따라서, 먼저 다 마시고 다 먹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른이 술잔을 내리면 비록 술을 마시지 못해도 받아서 마시는 태도를 보일 것이요, 거부하여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도록 분위기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옛날에는, 임금이나 아버지나 스승을 모시고 술을 마실 때에는 3잔까지만 마시고 더 이상은 마시지 아니 했으니, 만일 3잔 이상을 마시면 불경으로 다스려 엄중히 지탄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러한 음주예절을 알지 못하여 취할 때까지 마시는 사람이 있고, 또 같이 앉아 대작(對酌)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무례이다. 같이 마주 앉아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은, 평교(平交)간의 예절이지 군신 부자 사제간의 음주예절이 아니다. 신하와 아들과 제자는 받아서 마시기만 하고 잔을 돌리는 법이 아니며, 만약 어른이 술자리를 파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가면 모두 따라 나와서 돌아가야 한다.

  이에 아버지나 스승이 아들이나 제자들에게 술을 더 마시고 즐겁게 놀도록 배려할 때에는, 아버지나 스승이 먼저 자리를 뜨면서 남은 술을 더 마시고 놀라는 명령을 하는 것이니, 그 때까지 참고 단정한 모습으로 있어야 한다. 발은 무겁게 손은 공손하게 눈은 단정하게 입은 다물고, 소리는 고요하고 머리는 반듯하고 기상은 엄숙하며 풍채는 덕성스러우며, 안색은 씩씩해야 술자리가 성대한 것이니 사람들이 보고 흠모할 뿐만 아니라, 그 인격을 칭송하는 것이다.

 

   

by 다사치 | 2009/07/04 07:07 | 술은 음식이다 | 트랙백 | 덧글(0)

한민족의 자존심

                4. 한민족의 자존심.

가. 장점.

  (1) 평화애호민족.

  (2) 동방예의지국.

  (3) 두뇌 우수.

나. 단점.

  (1) 파당성.

  (2) 사대성.

다. 대표적 사상.

  (1) 배달민족사상.

  (2) 군주와 관리의 애민사상.

  (3) 백성의 군사부일체사상.

라. 당당한 자존심.

  (1) 음력(陰曆)의 창시.

  (2) 최치원.

  (3) 금속활자의 주조.

  (4) 세종대왕.

  (5) 한글의 창제

  (6) 이이.

  (7) 거북선의 조선.

  (8) 정약용.

  (9) 학문과 기술의 중시.

  (10) 급속한 경제발전.

마. 세계문명의 서류와 지도국 부상.

   

  이 부분은, 1984년 후반(84. 08. 20~84. 11. 10) ○○과정 교육당시 관련학자이신 ○○○님께서, 위(한민족의 자존심) 제목으로 2시간 동안의 강의내용을 재구성하면서, 첨삭가감 하였음을 밝혀 둡니다. 따라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지 그 누구(외국인)에게라도 당당하게 우리 선조들의 업적들을,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자랑해도 조금도 손색없을 대단한 자존심인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열거하지 않은 선조들의 업적이나 사상, 그리고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최 첨단제품이라 할 수 있는 각종의 기기나 제품들도 수없이 많을 것이며, 그것은 여러분들의 연구결과에 따른 여러분의 몫으로 남겨두고자 합니다. 지금쯤에 와서는, 국내외적 문제로 인한 세대 간 지역 간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지고 있으나, 이런 때일수록 단일민족으로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 인정되고 개인의 개성과 창의성이 존중되는 사회에서, 선조들의 발자취를 거울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 장점.

   (1) 평화애호(平和愛護)민족

  한반도는 세계열강의 각축장으로, 한때는 동․서 양 진영의 격전장인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부딪치는 전략요충지이어서 인지, 신라개국(BC 57년)이후 약 1900여 년 간 921회의 전란에도 불구하고 5000년의 역사를 유지해온 우리민족의 영지이다. 평화란 국내․외적으로 사회가 전쟁이나 무력충돌 없이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말하며,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면서 적으로부터 자기민족을 지켜낼 수 있도록 해주는 적극적인 의미도 지닌다.

  이러한 평화를 무엇보다 사랑하는 민족이 우리 한민족이다. 우리민족은 총과 칼로 일어서는 것을 아주 싫어하여 유구한 역사 속에서도 항상 평화를 원하였는데. 그 이유는 우리 민족이 전쟁을 무서워하는 용기 없는 백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함께 잘 살 수 있는 것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우리민족은 평화를 사랑하는 만큼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끊임없는 국난을 극복해야만 했다. 특히 일제 침략기에는 평화를 지키기 위한 끝없는 저항 정신을 보여 주었다.

  그 중에서도 안중근 의사의 예는, 평화와 질서를 중시하는 우리민족의 성격이 나타난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일제가 한국 침략을 발판으로 중국을 겨냥하여 대륙 침략을 시도하던 20세기 초 일본의 팽창주의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였고, 당당하게 체포에 응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그의 행위를 일본의 대륙침략에 대한 응징을 위한 거사라고 당당히 말하였으며, 그의 거사가 단지 우리민족의 침탈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일본과 중국 그리고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정당한 근거를 들어 설명하였다.

이처럼 우리민족은 널리 모든 인류를 위하여 큰 뜻을 품고, 세계 평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민족임을 알 수 있으며, 3․1 운동은 우리 민족이 강압적인 일제에 대항한 무저항 불복종의 평화적인 독립 운동으로, 온 백성들이 서로의 손에 태극기를 들고 독립과 평화를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한 3․1운동은 곧,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무저항 운동 등에도 영향을 미친 평화 운동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

   옛날부터 한국을 ‘동쪽에 있는 예의의 나라’라 했다. BC 310년경, 공자(孔子)의 7대손 공빈(孔斌)이 고대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모아서 쓴 동이열전(東夷列傳)에 의하면,

  “먼 옛날부터 동쪽에 나라가 있었는데 이를 동이(東夷)라 한다. 그 나라에 단군(檀君)이라는 훌륭한 사람이 태어나니 아홉 개 부족(九夷)이 그를 받들어 임금으로 모셨다. 일찍이 그 나라에 자부선인(紫府仙人)이라는 도에 통한 학자가 있었는데, 중국의 황제(黃帝; 중국인의 시조)가 글을 배우고 내황문(內皇文)을 받아 가지고 돌아와 염제(炎帝) 대신 임금이 되어 백성들에게 생활방법을 가르쳤다.

  그 나라는 비록 크지만 남의 나라를 업신여기지 않았고, 그 나라의 군대는 비록 강했지만 남의 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다. 풍속이 순후(淳厚)해서 길을 가는 이들이 서로 양보하고 음식을 먹는 이들이 먹는 것을 서로 미루며, 남자와 여자가 따로 거처해 섞이지 않으니 이 나라야말로 동쪽에 있는 예의바른 군자의 나라(東方禮儀君子之國)가 아니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나의 할아버지 공자(孔子)께서 ‘그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시면서 ‘누추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선조들이 이렇게 ‘예의지국’으로 존경받았듯이, 대한민국의 우리국민도 ‘예의지국의 후예’다운 예의생활을 실천함으로써, 긍지를 되살려야 할 것입니다.

 

      (3) 두뇌우수(頭腦優秀)

  조선(朝鮮)중기 때 향교(鄕校: 고려․조선시대에, 지방에 두었던 문묘(文廟)와 그에 딸린 관립학교)와 서원(書院: 조선시대에, 선비들이 모여 명현(明賢)을 제사하고 학문을 강론하며 인재를 키우던 사설기관)이 전국에 500여 개소가 있었는데 글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특히 일본의 관련 학자(명 불상)에 의한 인간의 두뇌 용적(容積)에 관한 연구결과를 발표한 논문에 의하면, 세계 인류의 두뇌용적 평균치가 남자는 1475.5㎤ 여자는 1375.5㎤인데 반하여, 한국인의 두뇌 용적의 평균은 남녀 공히 15.8㎤가 크다는 사실을 공개하였다.

  두뇌 용적(부피)이 크다는 사실은 다른 민족보다는 뇌의 활동범위와 뇌 활용의 응용범위가 보다 크고 넓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나. 단점.

  (1) 파당성(派黨性)

  태조 이성계는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정하고 이를 1393년 2월 15일부터 사용하면서, 1394년 1월 농업생산력이 높고 교통과 군사의 요지인 한양을 조선의 도읍으로 정하였다. 이때에는 건국에 협조한 개국공신이 실권을 장악하고 제도정비를 주도하였는데, 특히 조준은 전제개혁을 주관하여 새 왕조의 경제안정에 기여하였고, 정도전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경제문감(經濟文鑑)을 편찬하여 통치이념의 방향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

  훈구세력에 의하여 지배되던 조선왕조는, 15세기말부터 지방의 사림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함으로써 정치적 갈등을 보였는데,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사림세력은 더욱 커지고 마침내 양자의 대립은 표면화되었다. 중종은 사림을 다시 중용하고 조광조로 하여금 현량과를 실시하여 사림세력의 대거등용을 꾀하였고, 향약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여 성리학적 윤리와 향촌자치제를 강화하려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사림의 정치적 사회적 지위를 높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여망에도 어느 정도 부합되는 것이었다.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훈구파와 대립하였던 사림들은 몇 차례에 걸친 사화로 말미암아 많은 타격을 입고 향촌으로 물러나기도 하였으나, 서원과 향약을 바탕으로 향촌에 뿌리를 깊이 내리면서 그 세력을 확장하더니, 명종 때에는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정권을 잡은 후에는 이들 사림들 사이에서 정권다툼이 일어나니, 이를 당쟁이라 한다.

  선조 때에 동인과 서인의 분파가 당쟁의 시작이다. 지배층의 대립으로 그 때마다 옥사가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화를 입게 되고, 정권이 자주 바뀌면서 왕권은 약화되고 정치질서는 동요되어 사회는 혼란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조광조, 이이(李珥: 栗谷)로 대표되는 16세기의 사림정치는 성리학적 이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국방강화와 대외정책에 있어 효과적인 정책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결국 한민족의 파당성은 조선시대로부터 이어져 현재까지도 버리지 못하여 정치 경제 사회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2) 사대성(事大性)

  사대라 함은, 맹자 양혜왕(梁惠王)편의 ‘小를 가지고 大에 봉사하는 자는 하늘을 두려워하는 자이라’를 어원으로 한다. 오늘날 사대사상이라고 하면, 한국 북한 일본에서도 소국이 대국에 아첨하는 듯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띠는 어휘로 쓰여지고 있지만 조선왕조시대(1392~1910)의 지식인 즉, 유학자의 사대사상은 적어도 그와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중국(明國)과 조선의 현실적인 힘 관계와는 다른 정신적인 개념이며, 생활권과는 달리 조선을 중화문명이라는 문화권의 일부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사대사상은 17세기에 이르러 이른바 소(小) 중화사상이라는 새로운 전개를 보인다. 조선민족이 오랑캐(야만인)라고 모멸하던 여진족이 세운 청(淸)에게 명(明)이 패하여 멸망하는(1644년) 것을 계기로, 조선은 스스로를 중화문명의 정통한 계승자로 간주하게끔 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조선민족은 이후 몸을 굽혀 청국에 조공을 맹세하게 되었지만 그들의 정신세계는 이것과는 전혀 다르게 발전한다. 특히 이를 전후로 해서 정학(正學)인 주자학의 계승자라는 자부심이 생겨 난 것이 중화로서의 자각을 한층 더 공고히 하게 됐다. 특히 조선(朝鮮)시대의 국책인 억불중유(抑佛重儒)주의가 그 대표적 사례이다. 그러나 오늘날 현실세계에서 많은 부분 즉, 언어 등의 면을 살펴보면 사대주의를 버리지 못했다고 학자들이 판단하는 것 같다.

 

     다. 대표적 사상(思想)

  (1) 배달민족(倍達民族)사상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배달’이란 말의 어원은(밝달= 밝땅) 곧, 밝은 땅이다. 박달나무 단(檀)자의 훈(訓)을 빌어 밝달을 표시했으니, 바로 단군(檀君)으로써 국조의 이름을 삼은 까닭이 이것이다. 우리들의 할아버지 피의 아버지들이 비로소 문명의 씨를 뿌리고 세상을 열어 두루 밝히었던 땅은 한반도 좁은 땅덩어리가 아니라 시베리아 벌판에서 양쯔강에 이르는 광대한 대륙이었음을 증언하는 역사의 목소리에 옷깃을 여미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동서 4대 문명권은 본래 약 1만 년 전의 환국(桓國)으로부터 분기해 나간 것이다. 환국(桓國)의 문명은 세계 각 지역의 고대 문화 생성과 그들의 뿌리 문화와 깊은 상호 연관성이 있음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환국(桓國) 말경에 환인(환국의 통치자)은 서자부(庶子部)의 수장(首長)인 환웅에게 인간을 널리 구제하라는 명(命)을 내리시어 동방의 태백산(백두산: 三神山)으로 파견하였다.

  원시의 미개생활을 하던 동방 땅의 인간을 널리 구제하고 싶은 간절한 꿈을 간직하고 있었던 환웅은, 환인께서 종통계승의 신권(神權)의 상징으로 내려 주신 천부인 3개와 동방문명 개척단 3천 명을 이끌고, 동방의 태백산에 정착하였다. 그리하여 제1대 배달 환웅은 원주민인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을 통합하여, 3천명의 문명개척단과 함께 수도를 신시(神市)에 정하고 나라 이름을 배달(倍達)이라 하여 새 나라를 건설하셨다(곰과 호랑이는 동물이 아닌 토템 사상에 의해 족호(族號)를 나타낸 것임) 이때 환웅 천황은 신교신앙을 기반으로 신시에서 배달나라를 일으키고, 백성에게 천경신고(天經神誥: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가르치고 삼신상제(三神上帝)의 진리로 백성을 교화하였다.

 

   (2) 군주와 관리의 애민(愛民)사상.

  조선후기 정조 때의 문신 학자 정약용(茶山 朝鮮 1762~1836)이 집필한 목민심서는, 백성에 대한 애민사상이 가장 잘 표현된 대표적인 종합서로 고금의 여러 책에서, 지방장관의 사적을 가려 뽑아 치민에 대한 도리를 논술한 책이다. 경세유표(經世遺表)가 정부기구의 제도적 개혁론을 편 것이라면, 이 책은 지방 관헌의 윤리적 각성과 농민경제의 정상화 문제를 다룬 것이다.

  목민이란 백성을 기른다는 뜻이며, 목민관이란 백성을 가장 가까이 에서 다스리는 고을의 수령을 뜻한다. 또한 심서란 귀양살이를 하고 있기 때문에 목민할 마음만 있을 뿐 몸소 실행할 수 없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한국의 사회․경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내용은 12편(篇)으로, 각 편을 6조(條)로 나누어 모두 72조로 엮었다.

  1. 부임(赴任: 목민관으로 발령을 받고 고을로 부임할 때 유의사항)⇒ 목민관은 임금의 뜻에 따라 백성들을 보살펴야 하는 직책인 동시에,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어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여러 벼슬 중에서 가장, 어렵고 책임이 무거운 직책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목민관은 부임할 때부터 검소한 복장을 해야 하며,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나라에서 주는 비용 외에는 한 푼도 백성의 돈을 받아서는 안 되며, 일을 처리할 때는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또한 아랫사람들이 자신 모르게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단속해야 한다.

  2. 율기(律己: 목민관이 지켜야 할 생활 원칙)⇒ 목민관은 몸가짐을 절도 있게 해서 위엄을 갖추어야 한다. 위엄이란 아랫사람이나 백성들을 너그럽게 대하는 동시에 원칙을 지키는 것을 통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가짐은 언제나 청렴결백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청탁을 받아서는 안 되며, 생활은 언제나 검소하게 해야 한다. 집안을 잘 다스리는 것도 목민관의 중요한 덕목이다. 지방에 부임할 때는 가족을 데리고 가지 말아야 하며, 형제나 친척이 방문했을 때는 오래 머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는 쓸데없는 청탁이 오가고 물자가 낭비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이다. 모든 것을 절약하고 아껴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 또한 목민관이 지켜야 할 원칙이다.

  3. 봉공(奉公: 위로는 임금을 섬기고 아래로는 백성을 섬기는 방법)⇒ 목민관 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임금의 뜻을 백성에게 잘 알리는 일이다. 당시에는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교문(敎文)이나 사문(赦文)과 같은 공문서를 각 고을로 내려 보냈다. 하지만 글이 너무 어려워 일반 백성들이 그 뜻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목민관은 이것을 쉽게 풀어써서 백성들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

  목민관은 법을 잘 지키는 한편 지방에서 내려오는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는 데 힘써야 한다. 공문서는 정해진 기간 내에 완벽하게 처리해야 한다. 또한 공납과 같은 세금을 공정하게 징수해서 아전들이 부정을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단속해야 한다. 외국 선박이 표류해 들어온 경우에는 예의를 갖춰 잘 보살펴 주어야 하며, 그들에 관한 모든 것(배의 모양, 크기, 문자 등)을 빠짐없이 기록해 상부에 보고해야 한다. 이 때 그들의 좋은 점은 보고 배워야 하며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4. 애민(愛民: 백성을 사랑하는 방법)⇒ 목민관은 노인을 공경하고 불쌍한 백 성을 보살펴야 할 의무가 있다.

  특히 4궁(窮: 홀아비와 과부, 고아, 늙어서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을 구제하는 데 힘써야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목민관이 합독(合獨)이라 하여 홀아비와 과부를 재혼시키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말한 점이다. 집안에 초상이 난 사람에게는 요역(水役)을 면제해 주고, 환자에게는 정역(征役)을 면제해 주어야 한다. 자연 재해가 나지 않도록 항상 대비해야 하며, 재해가 생겼을 때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구호하는 데 힘써야 한다.

  5. 이전(吏典: 아전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목민관 스스로 자기 몸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 조선시대의 지방 행정 조직은 수령 아래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육방의 업무를 총괄하는 책임자이므로, 마땅히 모든 업무를 빈틈없이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목민관은 아랫사람을 은혜로 대하고 법으로 단속해야 한다. 아무리 학문이 뛰어나더라도 아전을 단속할 줄 모르면 백성을 다스릴 수 없다. 그리고 백성을 잘 다스리려면 무엇보다도 인재를 등용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할 줄 알아야 한다. 관리를 뽑을 때는 충성과 신의를 첫째 기준으로 삼아야 하며, 재주나 지혜는 그 다음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관리가 한 일은 반드시 공적을 따져 상벌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백성들로 하여금 믿고 따르게 할 수 있다.

6. 호전(戶典: 세금을 거두는 일)⇒ 목민관은 원활한 조세 업무를 위해서 호적 을 정비하고 부정 방지에 힘써야 한다.

또한 국민 경제의 근본인 농업을 장려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 농사를 권장하는 핵심은 세금을 덜어주고 부역을 적게 하여 토지 개척을 장려하는 것이다. 권농 정책에는 벼농사 장려뿐만 아니라 목축과 양잠의 장려, 소의 도축을 막는 일 등이 모두 포함된다.

7. 예전(禮典: 제사와 손님 접대, 교육, 신분 제도 등에 대해 설명)⇒ 목민관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정성을 다해 제(祭)를 지내는 일이다.

미풍양속을 해치는 미신적인 제사가 있다면, 사람들을 계몽하여 없애 버려야 한다. 또한 교육을 장려하고 과거 공부를 권장하여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문란해진 신분제도를 바로잡는 일도 목민관이 해야 할 일이다.

  8. 병전(兵典: 군대를 키우고 잘 훈련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야 한다는 점) ⇒ 목민관은 병역 의무자가 군대에 가는 대신 옷감을 내고 면제를 받는 제도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부정이 많으므로 이러한 부정을 가려내어 가난한 백성들이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또한 병기들을 수리하고 보충하여 늘 비상사태에 대비해야 하며,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는 목숨을 걸고 지방을 지켜야 한다.

  9. 형전(刑典: 재판과 죄인을 다스리는 방법)⇒ 목민관은 재판을 할 때 사건의 전말을 모두 파악한 뒤 신중하게 판결해야 하며, 특히 옥에 가두거나 형벌을 내릴 때 잘못이 없도록 해야 한다.

  또한 거짓으로 남을 고발한 사람은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예로부터 어진 목민관은 형벌을 약하게 했으니 지나친 형벌은 피하는 것이 좋다. 옥에 갇힌 죄수에게는 집과 식량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폭력을 일삼은 흉악한 자들은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10. 공전(工典: 산림과 수리 시설, 환경 미화 등)⇒ 목민관은 산림을 울창하게 가꾸고 농사의 기본이 되는 수리시설을 관리할 책임이 있다.

수리시설의 경우, 지방 토호들이 제멋대로 저수지를 파서 자기 논에만 물을 대는 행동을 막아야 한다. 도로를 닦고 건전한 공업을 육성하는 것 또한 목민관의 책임이다.

  11. 진황(賑荒: 재해가 났을 때를 대비해 준비해야 할 사항)⇒ 목민관은 흉년이 들 때를 대비해서 평소에 곡식을 저축하고, 창고 안에 있는 식량의 양을 늘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철저한 대책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 또 흉년이 들어 위급한 때는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말고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주어야 한다.

  백성을 구제하는 데는 두 가지 관점이 있는데, 첫째는 시기에 맞추는 것이며, 둘째는 원칙을 세우는 것이다. 이는 정확한 실태 파악을 바탕으로 구휼에 나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목민관은 집을 잃은 백성들에게 쉴 곳을 마련해 주고, 재해에 대한 구제가 끝나면 백성들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어야 한다.

12. 해관(解官: 관직에서 물러난다는 뜻)⇒ 목민관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날 때와 그 이후의 일에 관해 말하고 있다.

   벼슬에 연연하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며, 떠날 때 많은 재물을 가지고 가는 것 또한 선비가 할 일이 아니다. 백성들이 목민관이 떠나가는 것을 슬퍼하고 길을 막아선다면 훌륭한 목민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오랜 병으로 눕게 되면 거처를 옮겨서 공무에 지장이 없도록 해야 한다. 또 죽은 뒤에라도 백성들이 내는 돈을 받지 않도록 미리 유언으로 명령해 두어야 한다. 송덕비나 선정비는 죽은 이후에 세워야 하는 것으로 있을 때 세우는 것은 예가 아니다.

 

      (3) 백성의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사상

  조선은 유교(주자학)를 정교(正敎)로 해 중국이상으로 이를 숭상하고, 전국 방방곡곡에 이의 실천을 장려하므로 써, 사회의 유교 일색화를 꾀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유신(儒臣)및 주자학도의 왕조권력과 힘을 합친 탄압 앞에서 일찌기 고려시대에는 그렇게도 번영을 구가했던 불교는 그림자도 없이 쇠미해져 승려는 서울을 쫓겨나고 절은 산간으로 피해 유생의 독서실로 화하고 말았다.

  조선조 500년의 유교 일색화 역사는 당연히 조선민족의 정신구조의 기저를 이루게 되었고 오늘날의 한국인도 이 역사적 개성을 피할 수가 없다. 남자단계종족(男子單系宗族)사회는 이 유교를 이데올로기로 해서 형성되어 남자출생을 기대해 조상조사를 끊기지 않게 하며, 부모를 공경해서 효자 효녀이기를 논한다. 또한 가정에서 부부는 분담범위의 구별을 넘는 일이 없으며, 사회에 나가서는 장유(長幼)의 서(序)를 지키고, 친구는 비록 수배중이더라도 의로써 이를 숨기며 파벌의 장(長)에게는 충(忠)을 다하고, 선생에게는 절대적으로 따를 것이 기대된다.

  한국에서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군주와 스승과 아버지는 같이 공경해야 할 대상이다)라 해서 목하 이 윤리가 붕괴될 조짐은 보이지 않으며, 또한 이 사상은 유교로부터 온 것으로 풀이되고 있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윤리의 강고함은 조선시대의 학벌에 있어서의 사제관계의 공고함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풀 수가 없다. 결국 군사부일체사상이야말로, 공경과 은혜의 높고 낮음이 같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정신세계에서의 갈등을 예방하고 정신의 풍요와도 관계되리라 생각합니다.

 

    라. 당당한 자존심(自尊心)

  (1) 음력(陰曆)의 창시.

  음력은 우리나라 의자 화상이 BC 2200여 년경 만들었고, 중국 한 나라 6대 소강왕 2(BC 2117)년에 ‘4대 태강왕때 조선에서 전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후 단 한 번의 수정도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달의 삭망주기(朔望週期)를 한 달(30일)의 기준으로 하는 역(曆). 일반적으로는 태음태양력(太陰太陽曆)을 지적한다. 순태음력에서는 윤달을 전혀 두지 않으므로 역일과 계절이 점차 달라져서 5~ 6월에 눈이 오기도 하고 정월과 2월에 혹서가 되기도 하지만, 태음태양력에서는 간간이 윤달을 둠으로써 역일과 계절이 많이 어긋나지 않게 하였다.

음력의 기준은,

① 태양과 달과의 진황경(眞黃經)이 같은 시각을 삭(朔: 定朔)으로 한다.

② 태양의 진황경이 0°, 30°, 60°,…인 때를 중기(中氣)로 한다.

③ 한국에서의 매 역일(每曆日)의 시작은 한국표준시의 밤 0시부터 시작된다.

④ 합삭이 들은 날은 음력 매월 초하루로 정한다.

⑤ 중기(中氣)를 가지지 않는 달을 윤달로 한다.

과거 한국에서는 음력만 써오다가 고종의 조칙에 의하여 1896년 1월 1일부터 태양력을 쓰게 되었고, 현재 공식적으로는 음력, 즉 태음태양력이 쓰이지 않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양력과 아울러 음력이 쓰이고 있다.

 

      (2) 최치원(孤雲 崔致遠: 신라 857~908 ?)의 문장력.

  조국인 신라에서보다 당나라에서 그의 문력(文力)을 널리 인정받았다. 신라 말기 3최(崔承祐 崔彦휘)의 한 사람인 동시에, 3대 문장가(薛聰 强首)의 한 사람이며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만한 많은 학자를 배출한 최씨 가문 출신으로서 6두품 출신의 지식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최치원이 868(경문왕 8)년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 견일은 그에게,

  “10년 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라고 격려하였을 때,

  "인백기천(人百己千: 모두들 백만큼 노력할 때, 자신은 천만큼의 노력을 더 할 것)"

으로 금의환향을 약속했다.

  당나라에 유학한 지 7년만인 874년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郎) 배찬(裵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문명(文名)을 천하에 떨치게 된 것은 879년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이를 칠 때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서기의 책임을 맡으면서부터였다.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공사간에 지은 글이 1만 여수에 달하였는데, 귀국 후 정선하여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을 이루게 되었다. 이 가운데 특히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 …不唯 天下之人皆思顯戮抑亦 地下之鬼己議陰誅…: …천하의 사람이 다 너를 죽일 것을 생각할 뿐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도 너를 죽이기를 의논했노라…)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

885년(29세)에 귀국하고, 다음해 헌강왕명으로 대숭복사비문(大崇福寺碑文)등의 명문을 남겼고, 당나라에서 지은 저작들을 정리하여 국왕에게 진헌 하였다. 귀국할 때까지 17년 동안 고운(顧雲), 나은(羅隱)등 당나라의 여러 문인들과 사귀어 그의 글재주는 더욱 빛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에도 그의 저서명이 수록되게 되었는데,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 권22 잡문(雜文)의〈당서에 최치원전을 세우지 않은데 대한 논의(唐書不立崔致遠傳議)에서 당서 열전(列傳)에 최치원의 전기가 들어 있지 않은 것은 중국인들이 그의 글재주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한편 최치원이 살던 시대는, 사회적 전환기일 뿐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정신계의 변화도 활발하게 전개되는 과정이었으며, 유교에 있어서의 선구적 업적은 뒷날 최승로(崔承老)로 이어져 고려국가의 정치이념으로 확립을 보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사회적 현실과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의 사이에서 빚어지는 심각한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해인사에 들어가 은퇴의 길을 택했다.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길이 없으나, 그가 지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에 의하면 908(효공왕 12)년 말까지 생존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3) 금속활자(金屬活字)의 주조(鑄造)

  독일의 쿠텐베르그 보다 120년 앞선 문화로서 주자(鑄字: 놋쇠 납 무쇠 등을 녹여 부어만든 활자)를 말하며, 고려와 조선시대의 금속활자는 구리 철 납 등 여러 가지 금속이 사용되었으나, 현대의 금속활자는 납을 주로 하는 합금(合金)이다. 금속활자의 발명과 사용에 있어서 역사상 고려가 가장 앞섰다는 것은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12세기경 고려에서 놋쇠로 금속활자를 만들어 썼다는 사실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복(財)’자 활자로 증명되고 있다. 이 ‘財’ 자(字)는, 개성(開城) 근처의 고려 왕릉에서 발견되어 1913년 일본인 골동품상이 구 왕궁박물관에 팔아넘긴 것으로, 그 크기는 1.1×1.0 cm 정도이며, 불균형하나 등면(背面)에 구슬 모양으로 찍은 자국이 나 있다.

  문헌상 금속활자로 간행된 최초의 책으로 밝혀진 것으로는 지금까지 전해지는 고려의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이다. 이 책은 발문에 책을 찍게 된 사연을 밝히고 있는데, 몽골의 병화(兵禍)로 국도를 강화도로 옮긴 1232년(고종 19) 이전에 주자본(鑄字本)으로 찍었던 것을 1239년 강화도에서 책을 뒤집어 이것으로 목판(木板)을 새긴 다음 다시 찍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려의 금속활자가 세계최초의 것임이 세계적으로 공인된 계기가 된 것은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말의 사주본(寺鑄本)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 공개되고서이다.

  이 책은 1377(우왕 3)년 충청도 청주(淸州) 밖의 흥덕사(興德寺)에서 주자(鑄字)한 금속활자로 찍은 것임을 발문에서 밝히고 있다. 당시 고려에는 서적점(書籍店: 書籍院)이라는 중앙관서가 있어 주자(鑄字) 인서(印書) 등을 관장하였는데, 중앙관서가 아닌 한 지방의 사찰에서 이런 금속활자를 만들어 인쇄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서적점에서는 이미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술이 상당히 발달하여, 지방의 사찰에까지 그 기술이 파급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독일의 구텐베르크도 놋쇠에 글자마다 거푸집을 새겨서 활자를 부어 만들었고, 인쇄에 있어서도 기계로 눌러 찍는 법이 고안되고, 금속합금(金屬合金)에서도 주석과 납을 섞은 활자 쇠가 만들어져 인쇄술을 더욱 발전시키게 된 것이다.

 

    (4) 만백성의 어버이 이도(元正 朝鮮 世宗大王: 1397-1450)의 태평성세.

 그야말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이념을 실천한 한민족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이었다. 태종의 셋째 아들로서, 원래 왕세자는 장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이었으나, 개와 매(鷹)에 관계된 사건을 비롯한 세자의 일련의 행동과 일들이 태종의 마음을 동요시켜, 1412년 충녕대군에 진봉(進封)되었으며 1418년 6월에 태종은,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민하고 또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도 잘 안다”

하여, 그를 왕세자에 책봉하고, 두 달 뒤인 1418년 8월 10일 태종의 내선(內禪)을 받아 세자 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랐으니, 이 사람이 곧 세종이다. 세종 대(代)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유교정치의 찬란한 문화가 이룩된 시대로,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은 시기였다.

  세종 전반기에, 집현전을 통하여 많은 학자가 양성되어 유교적 의례․제도의 정리와 수많은 편찬사업이 이룩되어 유교정치기반이 진전되었고 세종 18년에 육조직계제에서 의정부서사제로의 이행도 유교정치의 진전으로 볼 수 있다.

  세종 후반기에, 왕의 건강이 극히 악화되기는 하였으나 의정부서사제 아래에서 군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가운데 성세를 구가한 시대였다. 황희(黃喜)를 비롯, 최윤덕(崔潤德)․신개(申#개16)․하연(河演)등 의정부 대신들은 중후하고 온건한 자세로 왕을 보좌하였고, 관료들의 정치기강도 그 전후에 비하여 건전하였으며, 언관의 언론도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구현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집현전은 세종과 세종대를 운위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기관으로, 조선시대의 집현전이라고 하면 세종 2년 3월에 설치한 것을 의미한다. 집현전은, 조선이 표방한 유교정치와 대명(對明)사대관계를 원만히 수행하는데 필요한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진흥에 있었으며, 세종대의 찬란한 문화와 유교정치의 발전을 이루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이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세종이 남긴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빛나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은 물론 세계 인류의 문화유산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것임에 틀림없다. 세종은 집현전을 통하여 길러낸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이선로(李善老) 이개(李塏)등 소장 학자들의 협력을 받아 우리 민족의 문자를 창제하였던 것이니, 이 시대의 문화의식과 그 수준이 어떠하였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물시계로는 자격루(自擊漏)와 옥루(玉漏)가 있다, 자동시보장치가 붙은 물시계인 자격루는 세종이 크게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장영실을 특별히 등용하여 이의 제작에 전념하게 하여 세종 16년에 완성하였는데, 그것은 경복궁 남쪽의 보루각(報漏閣)에 설치되어 조선시대의 표준시계로 이용하였다.

  세계 최초(最初)인 측우기의 발명도 이 시기 과학기술의 발달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업적이다. 농업국가인 조선시대에 있어서 강우량의 과학적 측정은 매우 큰 뜻을 가진다고 하겠다. 측우기는 세종 23(1441)년 8월에 발명되어 강우량을 측정함으로써 농업기상학의 괄목할만한 진전을 이룩한 것이다.

  세종 대(代)에 이르러 우리 민족의 역사상 빛나는 시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안정 기반 위에 그를 보필한 훌륭한 신하와 학자가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나, 이들의 보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의 사람됨이 그 바탕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유교와 유교정치에 대한 소양, 넓고 깊은 학문적 성취,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판단력, 중국문화에 경도(傾倒)되지 않은 주체성과 독창성, 의지를 관철하는 신념과 고집, 노비에게까지 미칠 수 있었던 인정 등 세종 개인의 사람됨이 당시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인적 모든 여건과 조화됨으로써 빛나는 민족문화를 건설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5) 세계 으뜸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創製)

  1446(朝鮮 世宗 28)년 창제된 훈민정음예의본(訓民正音例義本)과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이 그것이다.

훈민정음예의본(訓民正音例義本)은 닫소리 18자와 홑소리 10자(字) 그리고,

  “나라말씀이 중국과 달라 한자(漢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백성이 말 하고자하는 것이 있어도 제 뜻을 잘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내 이를 안타깝게 여겨 새로 서물 여듧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쉽게 배워 날마다 편하게 쓸 일이다”

라고 하여 세종실록과 월인석보(月印釋譜) 첫 권에 같은 내용이 실려 있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은 글자를 지은 뜻과 사용법 등을 풀이한 것으로, 1940년 발견될 때까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한글의 형체에 대하여 고대글자 모방설, 고전(古篆)기원설, 범자(梵字)기원설, 몽골문자기원설, 심지어는 창살 모양의 기원설까지 나올 정도로 구구한 억설이 있었으나, 이 책의 출현으로 모두 일소되고 발음기관 상형설(象形說)이 제자원리(制字原理)였음이 밝혀졌다.

  특히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은 예의(例義) 해례(解例) 정인지의 서문 등 3부분 33장으로 되었는데, 예의는 세종이 직접 지었고, 해례는 정인지(鄭麟趾)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최항(崔恒) 강희안(姜希顔) 이개(李塏) 이선로(李善老)등 집현전(集賢殿) 학사가 집필하였다. 정인지가 대표로 쓴 서문에는 1446년 9월 상순으로 발간 일을 명시하고 있어, 후일 한글날 제정의 바탕이 되었다.

  1940년까지 경상북도 안동군 와룡면(臥龍面) 주하동(周下洞) 이한걸가(李漢杰家)에 소장되었던 해례본은 그의 선조 이천(李狀)이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세종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었다. 이 책이 발견되어 간송미술관에 소장되기까지에는 김태준(金台俊)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발견 당시 예의본의 앞부분 두 장이 낙장되어 있었던 것을 이한걸의 셋째 아들 용준(容準)의 글씨로 보완하였다.

낙장된 이유는 연산군의 언문책을 가진 자를 처벌하는 언문정책 때문에 부득이 앞의 두 장을 찢어내고 보관하였다고 하며, 이를 입수한 전형필은 6․25전쟁 때 이 한 권만을 오동상자에 넣고 피란을 떠났으며, 잘 때에도 베개삼아 베고 잤다는 일화가 전한다. 현재는 닫소리 14자 홋소리 10자로 세계 각국의 기본글자 중에서 가장 적은 24자를 사용하고 있다.

 

        (6) 율곡 이이(栗谷 李珥 朝鮮 1536~1584)의 이기설.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웠고, 8세 때에 파주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에 올라 시를 지었다. 1548(명종 3)년 13세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23세가 되던 봄에 예안(禮安)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고, 겨울에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였다. 전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48세에 시무육조(時務六條)를 계진하고 십만 양병을 주청하므로서 임진왜란을 예언 대비하게 하였다. 1565년부터 1592년(선조 26)까지의 약 30년간은 국정을 쇄신하여 민생과 국력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며, 이이와 같은 인물이 조정에 나와 있었던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이이는 만언봉사에서,

  “시의(時宜)라는 것은 때에 따라 변통(變通)하여 법을 만들어 백성을 구하는 것”

이라거나

  “정치는 시세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일에는 실지의 일을 힘쓰는 것이 중요한 것이니, 정치를 하면서 시의(時宜)를 알지 못하고 일에 당하여 실공을 힘쓰지 않는다면, 비록 성현이 서로 만난다 하더라도 치효(治效)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라 하였다.

그는 조선의 역사에 있어서도,

 “우리 태조가 창업하였고, 세종이 수성(守成)하여 경제육전(經濟六典)을 비로소 제정하였으며, 세조가 그 일을 계승하여 ‘경국대전’을 제정하였으니, 이것은 다 ‘인시이제의(因時而制宜)’한 것이요, 조종(祖宗)의 법도를 변란(變亂)함이 아니었다”

라 하였다. 성현의 도는 ‘시의와 실공’을 떠나서 있지 않으므로 현실을 파악하고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요(堯)․순(舜)․공(孔)․맹(孟)이 있더라도 시폐(時弊)를 고침이 없이는 도리가 없는 것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이이(李珥)에 있어서 진리란 현실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며,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여기에 이(理)와 기(氣)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율곡 성리설의 특징을 보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 율곡의 이기설(理氣說 1559년)

  이(理)란, 어떤 것이 그것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치요, 본래 성이며, 형이상자(形而上者)요 태극(太極)이며 무형 무위(無形 無爲)하여 동정(動靜)에 존재하는 것이고, 형이상(形而上)은 자연의 이(理)이고, 무형 무위(無形 無爲)의 형이상(形而上)적 존재(存在)로서 순선(純善)한 것이며,

  기(氣)란 어떤 것의 이치가 실현될 수 있는 재료이자 실현될 힘이다. 형이하자(形而下者)요 음양(陰陽)이며 유형 유위(有形 有爲)하여 동정(動靜)이 있는 것이고, 형이하(形而下)는 자연의 기(氣)이다. 유형 유위(有形 有爲)의 형이하(形而下)적 실재(實在)로서 청탁수박(淸濁粹駁)이 같지 않아 선악(善惡)이 공존하는 세계라며 우주와 인생에 대해 두루 적용이 가능한 이기(理氣)의 포괄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율곡은 공맹(孔孟)이나 정주(程朱)의 학설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거나 전적으로 모방하지 아니하고, 객관적인 판단아래 종합적인 이해를 추구하였다. 따라서 이 세계의 모든 존재는 이(理)와 기(氣)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理)와 기(氣)는 전혀 다른 것이지만, 이 세계 만사만물이 있기 위해서는 이 양자가 반드시 하나로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이(理)와 기(氣)는, 그 존재적 역할과 기능에 있어 대등하고 상호의존적이며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다.

 

․․․이기지묘(理氣之妙)․․․

  ‘천하에 이(理) 밖의 기(氣)가 있겠는가? 이기지묘는 보기도 어렵고 말하기도 어렵다’라고 하면서, 이(理)와 기(氣)는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이다. 이(理)와 기(氣)는 혼연하여 사이가 없어서 원래 떨어지지 않은 까닭에 두 가지 물건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이(理)와 기(氣)는 서로 떠나지 않는(不相離) 관계와 서로 섞이지 않는(不相離) 관계를 지속한다. 이것이 이른바 이기의 묘합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논리 체계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인 까닭에 율곡이 ‘이기지묘(理氣之妙)’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언적, 퇴계 이황은 이(理)를 중시하는 관점에 있었고, 화담 서경덕은 기(氣)를 중시하는 반면에 율곡은 이(理)와 기(氣)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묘합(妙合)의 논리를 주장한다. 중국유학에서는 기(氣)를 이(理)의 하위개념으로 보아 종속시킨 반면에, 율곡은 이(理)와 기(氣)를 똑같이 대등하게 두어서, 이 둘은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지도 않고 서로 분리되지도 않도록 한다. 그것을 묘합(妙合)이라 한다. 합이라 하면 분리됨이 없이 붙어있는 관계, 그러니까 다(多)가 없는 하나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묘합(妙合)이라고 말하는 원인은 구별(distinction)은 되어도 분리(separation)가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기발이승(氣發理乘)․․․

  율곡은 이(理)와 기(氣)가 묘합(妙合)의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각기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는가?

  “대저 발(發)하는 것은 기(氣)요, 발(發)하는 까닭이 이(理)이다. 기(氣)가 아니면 발할 수 없고, 이(理)가 아니면 발(發)할 까닭이 없다”

그는 이기(理氣)의 기능에 대해,

기는 발동(發動)하는 기능을 갖고 있고,

  이는 기(氣)가 발동하는 원인 내지 원리로서 존재한다고 인식하였다. 그것을 기발이승(氣發理乘)이라고 간단명료하게 규정하여, 그 역할과 기능이 구별되는 까닭을 이렇게 말한다.

  “이(理)는 작위(作爲)가 없고 기(氣)는 작위(作爲)가 있기 때문에 기(氣)는 발동(發動)하고 이(理)는 타는 것이다”

   율곡은 자연세계나 인간세계를 막론하고 일체 존재의 존재구조를 기발이승(氣發理乘)으로 일관되게 설명한다. 기가 발(發)함에 이가 탄다고 할 때 기발(氣發)과 이승(理乘)은 동시적인 것이다. 또 공간적으로도 이합(離合)이 없는 것이다. 본래부터 하나로 있는 묘합(妙合) 구조를 기발이승(氣發理乘)이란 말로 표현한 것이다.

 

․․․이통기국(理通氣局)․․․

율곡은 이(理)의 차원에서는 하나인데, 기(氣)의 세계에서는 나누어지게 되는 것은 이기(理氣)의 속성(屬性)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理)는 형체(形體)가 없고 기(氣)는 형체(形體)가 있기 때문에 이는 공통되고 기는 국한(局限)된다”

즉,

이(理)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 보편성을 가졌다는 말이고,

기(氣)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는 국한성을 가졌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理)는 언제 어디서나 두루 통하고, 기(氣)는 언제 어디서든지 한계 지워지고 국한(局限)된다는 의미이다. 그의 이통기국(理通氣局)은,

이일분수(理一分殊) 즉, 이기지묘(理氣之妙)하에서 이(理)를 중심으로 본체와 현상을 아울러 본 것이며,

기일분수(氣一分殊) 즉, 이기지묘(理氣之妙)하에서 기(氣)를 중심으로 본체와 현상을 아울러 본 것의 사고를 거쳐 창출된 이론이다.

  따라서 이기(理氣)중 어느 한 면으로 치우쳐보는 관점을 지양하고, 이기지묘(理氣之妙)의 관점에서 이일(理一)과 기일(氣一), 이분수(理分殊)와 기분수(氣分殊)를 아울러 본 것이 이통기국(理通氣局)이다. 율곡은,

  “인생(人生)이 물성(物性)이 아닌 것, 이것이 기국(氣局)이고, 사람의 이(理)가 곧 물(物)의 이(理)인 것, 이것이 이통(理通)이다”

라고 한다. 또한 모나고 둥근 그릇이 같지 아니하나 그릇 가운데의 물은 마찬가지이며, 크고 작은 병이 같지 아니하나 병 속의 공기는 마찬가지라 비유한다.

  따라서 기(氣)가 만가지로 다른데도 근본(根本)이 하나일 수 있는 것은 이(理)의 통함(通) 때문이며, 이(理)가 하나인데도 만가지로 다를 수 있는 것은 기(氣)의 국한됨(局) 때문이다. 율곡의 이통기국은 이(理)만도 아니고 기(氣)만도 아니며, 이(理)의 통함(通)과 기(氣)의 국한됨(局)이 하나로 묘융된 이기지묘(理氣之妙)의 세계, 이기지묘(理氣之妙)의 가치를 표현한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통기국이란, 이는 조금도 구애됨이 없이 통하여 어디에서나 관통하는 것이지만(理通), 기는 바름과 치우침, 맑고 흐림의 차별상을 이루어 구애됨이 많다(氣局)는 것이다.

 

     (7) 거북선(龜船)의 조선(造船)

  원균이 대패하자 놀란 조정에서 다시 충무공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삼았다. 그 사령장에는 '앞서 경의 직책을 갈고 죄를 씌운 것은 사람의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며, 그로 말미암아 오늘날 패전의 욕을 당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으랴, 무슨 할 말이 있으랴'라는 사과문이 있다

      충무공(1643: 인조 21년에 내린 시호), 이순신(汝諧 李舜臣 朝鮮提督 1545. 3. 8~1598. 11. 19)은 어려서부터 무인의 용력(勇力)과 문인의 재지를 겸비하여 문학을 공부하다가 22세 때 무예를 연마하고 32세에 무과에 등제 하셨다.

각 국의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세계 4대 해전(世界四大海戰)을 가르치고 있는데,

  ․BC 480년 그리스의 데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제독의 살라미스(Salamis) 해전

  ․1588년 영국 하워드(Howard) 제독의 칼레(Calais) 해전

  ․1592년 거북선을 앞세워 승리를 거둔 이순신(李舜臣) 제독의 한산대첩(閑山 大捷)

  ․1805년 영국 넬슨(Nelson)제독의 트라팔가(Trapalgar) 해전,

등으로 이순신 제독의 승리를 가장 값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따라서 1907년 막강한 러시아 극동함대(露西亞 極東艦隊)와 싸워 이김으로써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일본의 야마토제독(大和提督)은 이순신 제독과 같은 위인이라고 칭송하자,

  “나의 공로를 영국의 넬슨 제독에 비교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으나, 이순신 제독의 업적에는 따라갈 수 없다”

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우리의 수군(水軍)은 서기 372년경에는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등이 다투어 해상무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9세기 중엽에는 신라 장보고(張保皐)장군이 중국(中國)의 신라방(新羅坊)을 중심으로 대규모 교역과 동남아 지역의 해적을 소탕하였는가 하면,

  고려 조(1011년)에는 배 양측에 창을 꽂아 적의 접근을 막는 검선(劍船)이 출현하였고, 1150년에는 화약(火藥)과 화포(火砲)로 전투장비를 갖춘 전선(戰船)이 사용되었다.

1377년에는 최무선(崔茂宣)이 대포와 화약을 제조하는 화통도감(火 都監)을 만들어 18종의 화포류를 생산하였고, 1383년에는 화살 끝에 화약을 단 불화살(火箭)을 만들어 배를 불살라 침몰시키는 전술이 완성되었으며,

  조선 조(1555년)에는 전투 중에 노군(櫓軍)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판으로 배를 덮은 판옥선(板屋船)이 새로운 군선(軍船)으로 개발되었다.

결국 거북선은 신라의 조선기술(造船技術), 뱃전에 창칼을 꽂아 적의 접근을 막았던 고려의 검선(劍船), 고려 때 발달한 화포기술(火砲技術)과, 조선 때 새로이 개발된 판옥선(板屋船)등을 종합하여 새로 창조된 바다의 탱크라 할 수 있다.

  옛날의 해전은 전함을 상대 배에 근접시켜 수군이 뱃전에 뛰어올라 검술로 배를 장악하였으나, 거북선은 뱃전이 완전히 덮여 있었고 그 위에 송곳 같은 칼침이 촘촘히 꽂혀 있어 가까이 다가가더라도 상대방의 수군들은 거북선으로 뛰어오를 수가 없었다.

  거북선은 두께가 12cm이상의 튼튼한 소나무로 만들어졌고, 소나무의 비중(比重)도 0.73으로 당시 배의 건조에 사용된 다른 목재(0.41~0.47)보다 강도가 매우 높았다. 또한 바닷물 속에서도 녹이 슬지 않는 나무못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충격에 강한 구조를 지녔다.

거북선의 노는 양쪽에 8개씩 도합 16쌍이 있었으며 80명의 노군(櫓軍)이 이를 담당하고, 각 노에는 1명의 조장(組長)과 4명의 노군이 배속되어 있었으며, 전투시에는 노 양쪽에 2명씩 4명 전원이 전력을 다하여 노를 저었다. 조장은 전투상황에 따라 전후좌우로 노 젓는 방법을 수시로 바꿀 수 있었고, 격렬한 전투 중에도 전진(前進 )과 후진(後進), 선회(旋回)와 정지(停止), 가속(加速)과 감속(減速)이 자유자재로 조절될 수 있어 전투 중에 기동성이 뛰어났다.

  거북선의 전투요원(戰鬪要員)은 화약(火藥)과 포탄(砲彈)을 장전하는 화포장(火砲匠), 포를 발사하는 포수(砲手), 화전(火箭)과 대장군전(大將軍箭) 활을 쏘는 사수(射手)등 45명이 타고, 전투원들은 화포와 함께 화살 끝에 화약을 달아 놓은 화전(火箭)을 쏘았다. 그러므로 거북선 안에서 쉴 사이 없이 쏘아 대는 포탄과 불화살로 공격을 받은 배는 불타서 침몰되고, 전투원들은 거북선의 이동방향(移動方向), 상대방의 위치에 따라 사방에 설치된 포문으로 공격하였다.

  거북선은, 파괴력이 크고 사정거리가 긴 천(天) 지(地) 현(玄) 황(黃)포 등으로 무장되었다.

천자포(天字砲)는 직경 11.7cm의 둥근 철환(鐵丸)을 발사하는 대포였는데, 사정거리(射程距離)는 1300보(步)로서 500m가 넘는 장거리(長距離)용이고,

지자포(地字砲)의 사정거리도 350m가 넘는 장거리였다. 거북선은 상대방의 사정거리 밖에서 천자포와 지자포를 이용하여 마음 놓고 포탄 공격을 할 수 있었으며 대장군전 화전등을 쏘았던,

현자포(玄字砲), 황자포 (黃字砲)의 사정거리도 약 300m였고, 가까운 거리에서 접전을 할 때에는 화약이 달린 화살을 쏘는 승자포(勝字砲)를 사용하였다. 무게가 가벼워 이동이 자유로웠던 승자포도 사정거리는 200m가 넘는 장거리를 자랑하였다. 천(天字砲) 지(地字砲) 현(玄字砲) 황(黃字砲) 등으로 공격을 받은 배는 대파 또는 불길에 휩싸여 침몰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8) 정약용(茶山 丁若鏞 朝鮮 1762~1836)의 애민정신(愛民情神)

조선후기 정조 때 문신 학자 정약용(茶山 朝鮮 1762~1836)이 집필한 목민심서는, 한국의 사회․경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그의 일생은 대체로 3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 1기(벼슬살이하던 득의의 시절)는 22세 때 경의진사(經義進士)가 되어 줄곧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시절로서 암행어사․참의․좌우부승지 등을 거쳤으나, 한때 금정찰방․곡산부사 등 외직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정조의 지극한 총애는 도리어 화를 자초하기도 하였는데 정조의 죽음과 때를 같이 하여 야기된 신유교옥에 연좌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유학경전에 관한 연구로는 내강중용강의(內降中庸講義) 내강모시강의(內降毛詩講義) 희정당대학강의(熙政堂大學講義)등이 있으며, 기술적 업적으로는 1789년 배다리(舟橋)의 준공과 1793년 수원성의 설계를 손꼽는다.

  1795년 주문모(周文謨)신부의 변복잠입사건이 터지자, 정조는 수세에 몰린 다산을 일시 피신시키기 위하여 병조참의에서 금정찰방으로 강등 좌천시켰다. 불과 반년도 채 못되는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천주교에 깊이 젖은 금정역 주민들을 회유하여 개종시킨 허물 때문에 후일 배교자로 낙인을 찍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연한 세정이 가라앉지 않고 더욱 거세지자 정조는 다시금 그를 1797년에 황해도 곡산부사로 내보내 1799년까지 약 2년간 봉직하게 하였다. 내직으로 다시 돌아 온지 채 1년도 못되어 1800년 6월에 정조가 죽자, 그를 둘러싼 화기(禍機)가 무르익어 1801년 2월 책롱사건(冊籠事件)으로 체포 투옥되니, 이로써 그의 득의시절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제 2기(귀향살이 하던 환난시절)는 1801년 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경상북도 포항 장기(長기96)로 유배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해 11월에 전라남도 강진에 도착하자 첫발을 디딘 곳이 동문 밖 주가이다. 이곳에서는 1805년 겨울까지 약 4년 간 거처하였고, 자기가 묵던 협실을 사의재(四宜齋)라 명명하기도 하였다. 이로부터 다산초당은 11년 간에 걸쳐서 다산학의 산실이 되었다.

  ․제 3기(향리로 돌아와 유유자적하던 시절)는 귀양에서 풀린 그의 회갑 때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저술하여 자서전적 기록으로 정리하였다.

 

  다산 정약용의 방대한 저서량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총 500여권을 헤아리는 그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는 대체로 6경4서 1표2서 시문 잡저 등 3부로 분류할 수 있다.

먼저 6경4서의 대강을 살펴보면

  첫째, 시경(詩經: 1810)에는 모시강의 12권외에 시경강의보(詩經講義補)3권. 시는 풍림(諷林)이라 하여 권선징악의 윤리적 기능을 중요시한다.

  둘째, 서경(書經)에는 매씨상서평(梅氏尙書平) 9권, 상서고훈(尙書古訓) 6권,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7권. ‘매씨상서’는 위서(僞書)로서 양한서(兩漢書)등의 기록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셋째, 예경(禮經)에는 상례사전 50권, 상례외편 12권, 사례가식(四禮家式) 9권. 관혼상제등 사례 중에서도 상례에 치중한 까닭은, 천주교와의 상대적 입장에서 유교의 본령을 밝히려는 깊은 뜻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넷째, 악경(樂經: 1816)에는 악서고존(樂書孤存) 3권. 5성(聲) 6률(律)은 본래 같은 것이 아니다. 6률로써 제악(制樂)하므로 악가의 선천이요 5성으로써 분조(分調)하므로 악가의 후천이 되기 때문이다.

  다섯째, 역경(易經)에는 주역사전(周易四箋) 24권, 역학서언(易學緖言) 12권. 여섯째, 춘추(1812)에는 춘추고징(春秋考徵) 12권. 좌씨(左氏)의 책서(策書)는 춘추의 전이 아니요 그의 경의(經義)의 해석도 한나라 학자들이 저지른 지나친 잘못이다.

일곱째, 논어(1813)에는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 40권. ‘논어’는 다른 경전에 비하여 이의(異義)가 너무나도 많다. 총 520여장 중 170여장의 이의를 하나로 묶어서 원의총괄(原義總括)이라 하였다.

  여듧째, 맹자(1814)에는 맹자요의(孟子要義) 9권. 성(性)이란 기호(嗜好)인데 형구(形軀)의 기호와 영지(靈知)의 기호가 있다고 한다.

  아홉째, 중용(1814)에는 중용자잠(中庸自箴) 3권,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 6권. 용(庸)이란 항상 끊임없이 오래감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요 들리지 않는 것은 내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이니 그것은 곧 하늘의 모습이요 하늘의 소리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열째, 대학(1814)에는 대학공의(大學公議) 3권, 희정답대학강의 1권, 소학보전(小學補箋) 1권, 심경밀험(心經密驗) 1권이 있다.

  다음으로 1표2서의 대강을 살펴보면,

  첫째, 경세유표(經世遺表: 1816) 48권이 있으나 미완 본이다. 관제 군현제도 전제(田制) 부역 공시(貢市) 창저(倉儲) 군제 과제 해세(海稅) 마정(馬政) 선법(船法)등 국가경영을 위한 제도론으로서 현실적 실용여부는 불구하고 기강의 대경대법을 서술하여 구방(舊邦)을 유신하고자 하였다.

  둘째, 목민심서(牧民心書: 1818) 48권. 현재의 법도로 인민을 다스리고자 한 것이니 율기 봉공 애민을 3기(紀)로 삼았고 거기에다가 이 호 예 병 형 공을 6전(典)으로 삼았으며 진황(賑荒)을 끝으로 하였다. 부정행위를 적발하여 목민관을 깨우치게 함으로써 그 혜택이 백성들에게 돌아가도록 하였다.

  셋째, 흠흠신서(欽欽新書) 30권. 인명에 관한 옥사를 다스리는 책이 적었기 때문에 경사(經史)에 근본하였거나 공안(公案)에 증거가 있는 것들을